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인조(1595-1649)는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이다.

자는 화백(和伯)이고, 호는 송창(松窓)이며 휘는 종(倧)이다.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이고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왕이고 15대 왕은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조선의 제16대 왕이 되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그 후에도 병란을 겪었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고 형제의 의(義)를 맺었다. 바로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는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는데,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곧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시대의 양대 전란이다. 임진왜란은 선조 때에 병자호란은 인조 때에 겪은 국난이다. 역대로 사가들이 선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인조 또한 평이 좋지 않다.

애초에 반정을 도모하던 세력들은 광해군을 대신할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봉건왕조에서 반정의 최종적인 성공은 반정 후에 추대된 왕에 달렸기 때문이다. 반정 세력을 옹호하면서도 국론을 한데로 모을 수 있는 적임자.

 

반정을 의논할 적에 반정으로 모실 왕을 논하는 이야기들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신경진(申景禛)이 승평군(昇平君, 김류)과 반정을 의논하면서 먼저 추대할 분을 정하려 할 때에 공이 인조대왕을 두고 말하기를, ‘신성문무(神聖文武)가 실로 천명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하였다.”

“처음에 여러 사람이 의거(義擧)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용의 걸음과 범의 걸음 같으며,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으니 신인(神人)의 주인이 됨직하다.’ 하였다.”

“신경진이 평소 김류와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하루는 조용히 글 배우기를 청하고는 바로 사략(史略)을 내어놓았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내치다. [伊尹放太甲 ]’는 대목에 이르러서 책을 덮으며 탄식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일이 옳은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태갑이 탕(湯)의 법도를 뒤엎었으니 내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하였다. 경진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경진이 울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나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그것이 내 뜻이다.’ 하였다. 이내 묻기를, ‘마음 가는 데가 어디 있는가?’ 하니, 경진이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 하여 마침내 의논이 결정되었다.”

 

이 기록들은 반정이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주상 인조에 대한 평임을 감안하더라도 인조의 풍모를 가늠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왕으로 추대될 만한 인물로서의 인조의 모습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외에도 인조의 풍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록들이 다수 나온다.

“임금은 성품이 매우 공손하고 검소하여 항상 사치를 경계하고 음악과 여색, 진기한 오락을 아예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사치와 화려함은 말류의 폐습이니, 이 어찌 다스려진 세상에서 숭상할 일이겠는가. 우리 조종 때부터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여 윗사람이 표본이 됨으로써 뭇백성이 감화되었으니, 순박한 풍속이 수백 년 동안 흘러 내려왔다. 그동안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어지러운 조정의 군신들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화려함을 숭상하여 의복과 거마와 궁실 등을 사치스럽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염치(廉恥)가 이로 인하여 무너져 없어지고 백성이 이로 인하여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대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먼저 이러한 풍습을 없애려고 생각하였으나, 물들어 더러워진 지 이미 오래이므로 갑자기 개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부터 백성을 바꾸어 다스리는 법은 없으며, 위에서 좋아하는 것은 아래서 반드시 더 좋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치한 풍습이 변하지 않는 것은 위에서 모범을 보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무릇 우리 종실과 공, 경, 대부들은 모두 나의 뜻을 체득하여 혼인 잔치와 손님 대접하는 것이나 거마, 의복의 제도에 검소와 절약을 힘써서 나쁜 풍습을 크게 고쳐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인조가 검소한 덕이 있다는 설명은 선조가 검소한 덕이 있었다고 밝힌 <연려실기술> 선조 조목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두 임금이 공히 존귀한 왕좌에 있었음에도 검약한 생활을 했다는 점은 대서특필할 만하다. 이는 두 임금이 천성으로 검약한 덕을 숭상한 바도 있었겠지만 국란을 겪은 후 산업과 물자가 궁핍한 시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더욱 검소한 덕을 실천했을 수도 있겠다.

“임금이 상벌을 삼가고 벼슬을 아꼈으며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이형익(李馨益)과 박군(朴頵)은 의술로 사랑을 받았으나 박군은 육품(六品)에 지나지 않았고, 형익은 삼품산질(三品散秩)이었다.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하였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였고, 임금의 한 마디 칭찬과 꾸짖음이 곧 평생의 판정이 되었다. 궁중에서 쓰는 상(床)과 자리는 아예 붉은 칠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검소한 덕이 이와 같았다.”

“임금은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나 아예 한 구의 시도 짓지 않았고, 비답하는 문자도 또한 내시(內侍)에게 베껴서 쓰게 하고, 손수 초(草)한 것은 물 항아리에 담가 찢어버렸으므로 종친과 왕자의 집에는 몇 줄의 필적도 없었다.”

 

인조가 말이 무겁고 감정 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 인조의 행위를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성으로 ‘신성문무(神聖文武)’ 하거나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기도 하겠지만 신하들이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도록 하고, 몇 줄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데에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고심이 배여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임금의 체모가 준엄하고 무거우며 덕량이 깊고 넓어 몸가짐 하나하나가 규범에 어긋나지 않았다. 보위에 있은 지 27년 동안에 효를 다하고 윤리를 돈독히 하며, 학문을 닦고 어진 이를 가까이 두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며, 교화를 두텁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궁중을 엄하게 다스리고 벼슬을 아끼며, 절약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간언을 용납하며, 형옥을 보살피고 나쁜 당파를 없애는 것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와 조금도 중단이 없었다.”

 

위의 글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인조 지문(誌文)의 일부이다. 이는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이 인조에 대한 총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조선의 왕으로 국부의 체통을 가지고 있다는 평이다. 물론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