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김류(金瑬, 1571-1648)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이귀(李貴, 1557-1633),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과 풍악을 벌여 놀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이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항복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논한 이야기가 여러 번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항복이 귀양 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곧 김류) 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ㆍ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항복이 김류를 광해군의 폐정을 끝장낼 인물로 점찍은 것처럼 이귀 또한 김류를 높이 평가하여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귀가 김류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할 때의 대장은 나처럼 노쇄한 자는 안 될 것이오. 영감은 원래 장수의 물망이 있는 사람이니,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오. 영감을 대장으로 삼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본래 김류는 문과 급제한 인물이지만 무장의 능력이 있었다. 이귀가 김류에게 장수의 물망이 있다는 말이 그런 의미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박세채가 구체적으로 밝혔다.

“김류는 천성이 비범하고 기국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또한 문장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일찍이 대궐 뜰에서 책문 시험을 볼 때에 병무(兵務)에 대해 매우 잘 논했으므로 사람들이 장상의 재목이 된다고 여겼는데, 이 때문에 광해주 때에도 자주 원수(元帥)의 물망에 올랐다. 계해년 정사(靖社)에 모든 사람이 추대하여 영수(領袖)로 삼은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금이 반정하기 전에 세 번 그 집에 찾아가서 큰일을 도모하였다.”

김류가 반정군의 대장이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거사 당일 김류가 늦게 합류하여 잠시나마 혼란이 발생한다. 혁명의 성패는 일초일각을 다투는 법인데 대장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회합 장소에 모인 이들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족히 가늠하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김류가 늦게 합류한 사연을 적어두었다.

“이때 김류가 고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앉아서 잡히기를 기다려 주저하며 나가지 못하였는데, 심기원이 원두표와 함께 그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 움직이지 않소?’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날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뿐이오.’ 하였다. 기원이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고스란히 잡혀간단 말이오? 이 마지막 지경에 이르러서 잡으러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금부도사가 어찌 두려울 것이오.’ 하였다. 김류가 옳게 여겨 그 아들 경징(慶徵)을 불러서 전통(箭筒)과 마구(馬具)와 군복을 재촉하여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기원의 군사가 이미 와서 정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이 대장좌(大將座)를 설치하여 김류를 부축하여 자리에 올리고,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ㆍ박유명(朴惟明) 등과 함께 절하여 꿇어앉고는 항오(行伍)를 정돈하여 사현(沙峴)을 넘어갔다. 김류가 늦게 온 것은 실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밤이 되자, 이괄이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먼저 갔는데 고요하기만 하고 사람의 형적이 없었다. 근심하고 낭패할 즈음에 홀연히 한 점의 불빛이 서북 산 아래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기다리니,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송영중(宋英重)ㆍ한교(韓嶠) 등이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조금 뒤에 장유(張維)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을 하여 벌써 국청을 개설하고 사방으로 나가 체포하는데,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곽(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왔다.’고 하였다. 이때 미리 약속하였던 모든 군사가 태반도 오지 않았고 장단(長湍)의 군사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만 대오(隊伍)도 되지 않던 수백 명 오합지졸만이 이 소식을 듣고는 겁을 내고 무너져 흩어지려 할 판이었다.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다 입을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류가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이쯤 되었으니, 반드시 그대가 대장이 되어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평일에 본래 군사 일에 등한하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힘을 얻기 어렵소.’ 하였다. 드디어 이괄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말하기를, ‘나(이귀 자신)부터 누구든지 규율을 어기면 목을 베시오.’ 하고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줄지어 이괄에게 전하게 하니 이괄이 기꺼이 따랐다. 곧이어 군관들을 불러 써두었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꺼내어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니, 모두 옷 뒤에 달아 표적을 삼았다. 이시백(李時白)이 말하기를, ‘군에 계통이 서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빨리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괄이 곧 그 말대로 하여 엄하게 부서를 단속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심기원과 원두표가 찾아가 김류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반정이 어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다급해진 이귀가 김류를 대신하여 이괄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만약 이대로 반정을 거행하여 성공했다면 이괄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바로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 이괄의 심사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미 이괄의 난은 싹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설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