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주장한 최명길


원칙과 현실의 조화를 주장한 최명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지천(遲川), 창랑(滄浪)이다.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최명길은 이항복 문하의 제자로 이시백, 장유와 동문수학한 관례로라도 반정의 주역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는 있었지만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처음에는 반정에 적극 가담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점차 반정의 중책을 맡고 반정이 성공한 후에 계해정사 1등공신에 책봉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전에 벌써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 등과 약속을 하였고 최명길(崔鳴吉)도 모의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매우 두려운 마음에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는데, 이귀의 집을 찾아감에, 이귀가 안석에 기대어 계집종을 시켜 머리를 빗으며 태연히 말하고 웃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귀가 심기원을 청하여 평산에 함께 있으면서 평산을 모의하는 장소로 삼는 한편 최명길과 김자점은 서울에 머물러 모든 일을 주선하였다.”

“거사할 모의가 이미 정하여졌으나 여러 사람이 안팎으로 흩어져 있었으므로 힘을 합하지 못하여 일이 자못 어긋났다. 최명길이 이것을 걱정하여 계해년 봄에 서울 교외에서 성중으로 들어와서 여러 사람에게 통고함으로써 드디어 계획이 정하여졌다. 명길이 일찍이 유청전(劉靑田)의 영기점법(靈棋占法)에 통달하여 점을 쳐서 좋은 날을 받아 군사를 일으킬 시기를 정하였는데, 공훈을 정할 때에 명길이 일등공신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영기점법에 통달하여 점을 쳐서 거사일을 정했다는 일화와 함께 <연려실기술>에 최명길의 신묘한 경험을 기록해 두었다.

“공이 정승 자리에 있을 때, 구오(具鏊)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구오는 능천(綾川)부원군인후의 아들이다. 그때 그는 나이 젊고 이름난 무사(武士)였다. 구오가 수원으로 부임하면서 공에게 들러 인사하고 공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한 뒤에 절하고 물러갔다. 그가 겨우 대청을 내려가자, 공이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며 천천히 완릉공(完陵公 공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괴이한 일이다. 구오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다.’ 하였다. 완릉공이, ‘어찌된 말씀입니까.’ 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그 사람이 대청을 내려 걸어 나갈 때 보니, 정신이 벌써 흩어져 마치 인형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 하였는데, 며칠이 안 되어 구오가 병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최명길은 당대의 경세지사로 이름이 높았는데, 현실을 직시하여 강화론을 주장한 것이 제일 유명하다. 그러나 강화론이 야합이 아닌 이상 어찌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없겠는가. <연려실기술>에 원칙을 중시한 최명길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양파(陽坡 정태화(鄭泰和))에게 고모의 사위 아무개가 있었는데 음사로 한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였다. 이때 공이 이조 판서로 있었는데, 양파가 고모의 청에 못 이겨 가서 청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전후에 벼슬을 제수한 것이 어찌 모두 다 적당한 사람을 얻었다고야 말할 수 있겠는가만 능히 내 양심에는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 이 사람은 능히 그 직책을 감당할 만한가.’ 하고는 끝까지 추천하지 않았다. 양파가 이 말을 가지고 자제들에게 매양 말하기를, ‘최 정승이 내 말에는 일찍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서는 분명하기가 이와 같다.’고 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일찍이 말하기를, ‘반정 훈신 중에 인망 있는 이가 많았으나 그 후의 처신과 마음가짐을 보면, 당초에 털끝만큼도 부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순전히 종묘사직을 위하는 마음으로 거사를 한 사람은 또한 몇 사람에 불과하니, 지천(遲川, 최명길), 계곡(谿谷, 장유), 함릉(咸陵, 李澥) 몇 사람이 그러한 이들이다.’ 하였다.”

“계해년에 조정에서 훈신들에게 집을 내려주었는데 적몰(籍沒)한 여러 죄인들의 집이었다. 공은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끝내 거기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준 전답을 받자 또 말하기를, ‘권세 있던 사람들이 백성의 전지를 강탈한 것이 무수하였기 때문에, 내가 받은 전답 가운데에도 반드시 백성의 전지가 많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도로 찾아 가기를 허락한다고 큰 거리에 방을 붙였다. 그 후에 와서 호소하는 자가 있으면, 공이 하나하나 문서를 만들어 돌려주었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성리학적 토양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책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소신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명길이 명체달용(明體達用, 본체를 밝히고 쓰임을 두루한다)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유는 멸사봉공의 원칙을 확고히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