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동궁과의 의리를 지킨 윤지경


폐동궁과의 의리를 지킨 윤지경

 

윤지경(尹知敬, 1584-1634)은 자는 유일(幼一)이며 호는 창주(滄洲)이다. 청요직을 지낼 무렵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일어나자 정형복(鄭亨復)으로 하여금 폐모론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게 하고, 폐모론에 반대한 정홍익(鄭弘翼)이 유배당하자 도성 문밖까지 전송하는 등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였다.

1623년 겸보덕으로 궐내에 입직하던 중 인조반정이 일어나 반정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이귀(李貴)의 만류로 화를 면하고, 반정에 호응해 전한이 되었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윤지경이 폐모론을 적극 반대하기는 했지만 반정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은 다른 말로 하면 역모이기 때문이다.

“보덕 윤지경(尹知敬)이 분주히 내전으로 들어가 광해를 찾았으나 보지 못하고, 불빛 속에서 중궁 유씨(柳氏)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 청하기를, ‘원컨대 세자를 따라 빠져나가서 일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일설에는 문이 닫혀 안에서도 모두 숨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창졸간에 무사에게 끌려가게 되었는데 무사가 칼을 들어 치려 하는 것을 이귀가 보고 급히 말렸다. 이끌고 인조를 뵙게 하니, 꼿꼿이 서서 절하지 않고 말하기를, ‘밤중에 군사를 일으킨 사람이 누구이기에 내가 가벼이 무릎을 꿇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능양군이 부득이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일을 일으킨 것이오.’ 하니, ‘그러면 어찌하여 궁실을 태웠소?’ 하였다. 김류가 말하기를, ‘군사가 실화하여 탄 것이지, 일부러 불을 놓은 것은 아니오.’ 하였다. 또 묻기를, ‘전 임금은 어떻게 처우할 것이오?’ 하니 ‘죽이지 않는 것으로 대우할 것이오.’ 하니 지경이 바로 내려서서 절하였다.”

윤지경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적에 이귀가 그의 생명줄을 잡아준 것으로 나온다. 이 와중에서도 시비곡직을 가리고 사태를 파악하여 처신하는 윤지경의 모습이 이채롭다.

“반정하는 날 모든 사람이 도망쳐 숨어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輔德) 윤지경은 처음에 절하지 않고 땅에다 손을 짚고 버티어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윤지경이) 드디어 동쪽 행랑에 가서 (본인을) 가두어주기를 청하므로 최명길 형제가 그의 손을 잡고 내력을 상세히 말하였다. 지경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두운 조정에서 자주 중요한 관직을 지내면서 망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보고 한 마디도 바르게 구하는 말이 없었던 것이 첫째 죄입니다. 반정하는 군사가 들어올 때 먼저 기미를 알아 명에 응하지 못하고, 감히 집사와 다툰 것이 둘째 죄입니다. 폐동궁(廢東宮)에게 특별한 사랑을 입었는데, 그가 망명할 때에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지 못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신이 무슨 낯으로 의거한 여러 사람을 보며 새 조정을 다시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경은 이로써 세상에 명망이 중해졌다.”

 

이 외에도 윤지경의 재질과 행실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공이 어렸을 때, 모습이 시원스럽고 명랑하여 보는 사람마다 모두 말하기를, ‘윤씨 집에 대대로 사람이 있다.’ 하였다. 필주(泌州) 박이서(朴彛叙)가 보고 말하기를, ‘이 집에 이 아이가 있으니, 가르쳐 성취시켜야겠다.’ 하고, 드디어 사위로 삼았다.”

“이첨이 정권을 잡아 시사가 크게 변하니 드디어 병을 핑계로 문을 닫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하루는 친한 손이 바로 방에 들어와, 한참을 쳐다보고는 말하기를, ‘공이 병으로 혼자 물러나 있다더니 얼굴은 아무렇지도 않네.’ 하였다.”

“정형복(鄭亨復)이 폐모론을 배척하는 소를 올릴 때에, 공이 실제로 도왔었는데 이 일에 연루되어 폐고되었다. 후일 정공(鄭公) 홍익(弘翼)이 폐모에 반대하다가 귀양 가자, 공이 술을 가지고 새문[新門]밖에 가서 이별하고, 옷을 벗어서 선사하였다. 물러와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이 폐모론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정이(靜而)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하였는데, 정이는 정형복의 자다.”

“공이 충청 감사에 임명되어 임금에게 하직하는 날에 임금이 인견하고 술을 내렸는데, 공이 신은 신발이 매우 낡은 것을 보고, 곧 어화(御靴)를 벗어 내시를 시켜 전문(殿門) 밖에서 뒤따라 나와 주게 하였으니 은혜와 사랑이 이러하였다.”

반정이 끝난 후에 광해군과 폐동궁에 대한 처분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유리안치하고 목숨을 보전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는데, 후에 폐동궁이 강화도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쳤다가 붙잡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은 폐동궁에게 자진하라는 처분이 내려지는데, 이런 논란의 와중에 이경진은 이에 참여하지 않아 비판을 받게 된다.

“삼사에서 폐동궁(廢東宮)이 도망쳐 나간 죄를 논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여러 신하와 다르다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하지 않으니, 시배(時輩)들이 장차 중상하려 하였다. 친구들이 와서 참론(參論)하기를 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형복도 와서 굳이 권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의(義)가 있는 바에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한다.’ 하고,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일찍 폐동궁에게 두터운 사랑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이경진의 인품을 재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국난에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져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정묘년 난리에 여러 진지가 모두 무너지니,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어찌 수천 리의 큰 나라를 가지고 적병의 소문만 듣고 먼저 무너진단 말인가.’ 하였다. 밤에 일어나 크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하인에게 촛불을 잡게 하고 스스로 소를 지어 썼는데 말이 매우 강개하였다. 임금이 편전에 불러서 보니, 공이 울며 말하고 또 말하며 울었는데, 충성된 계책이 환하였다. 임금이 얼굴을 고치고 그 말을 모두 쓰기로 하고, 즉시 독검어사(督檢御史)로 삼았다. 달려서 임진강에 이르니 적병이 벌써 황주에 들어와 있었다. 공이 여러 번 군사를 청하므로, 호서 충청도 군사 수천을 배속시켰더니, 군사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적병이 강화하고 물러갔다. 임금이 강화에서 돌아와, 공을, ‘나라가 위태함을 보고는 몸을 잊는 사람이다.’ 하고, 특히 형조 참의로 올려 주고, 해동 남자라 부르며 비단을 내려 상을 주니, 나라 사람이 모두 공을 찬양하고 말하기를, ‘만일 여러 신하들이 능히 이 대부와 같이 나라만 알고 몸을 잊는다면 어찌 강한 오랑캐를 근심할 것인가.’ 하였다.

윤지경은 청나라와의 척화를 강력히 주장해 윤황(尹煌), 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되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