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광해를 살펴주소서


이덕형, 광해를 살펴주소서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자는 원백(遠伯)이며 호는 죽천(竹泉)이다. 관찰사 이언식(李彦湜)의 증손이다. 기발한 장난과 우정이 얽힌 ‘오성과 한음’ 설화의 주인공 중 한명인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다른 인물이다. 한음은 남인이었지만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됐다. 이산해의 숙부인 토정 이지함이 한음의 인물 됨됨이를 알아보고 사윗감으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이산해 집안에 한음과 동명이인의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죽천 이덕형이다.

이덕형은 광해군 때에 응교·동부승지·승지·대사간·좌부승지·부제학·이조참의·우승지·병조참판·도승지 등의 경관직(京官職)과 나주목사·전라감사·황해감사 등의 외관직을 지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킬 때에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 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있을 때 세태가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죽이지 말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본 능양군(綾陽君: 인조)이 충신이라고 판단해, 반정 후 인목대비를 맞이하는 의식에서 이덕형을 앞세워 반정을 보고했고,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게 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덕형은 광해의 폐정을 반대하면서 반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반정 후의 처신을 보건대 애초에 광해의 폐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고, 심정적으로 반정의 명분에 동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반정이 일어날 때 직책이 도승지로서 광해군의 총임을 받는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정파들의 칼날을 맞지 않고 인조 시대에도 여전히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지조 있는 행실이 옳게 평가받은 것처럼 보인다.

“반정하는 날 모든 사람이 도망쳐 숨어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도승지 이덕형과 보덕(輔德) 윤지경은 처음에 절하지 않고 땅에다 손을 짚고 버티어 지조를 잃지 않았으니 존경할 만하다.”

목숨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상황에서도 의연한 모습이 엿보인다.

이덕형은 광해가 반정으로 폐주가 되었지만 광해조의 녹을 먹은 신하로서 광해에 대한 충의를 접지 않았다. 이는 인조가 가상히 여긴 바이고, 반정의 주역들로부터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 이는 이덕형의 평소 몸가짐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인조가 돈화문 안에 앉은 후, 군사를 나누어 서궁에 가서 문안을 드리었다. 대궐에 입직한 신하들 병조 판서 권진(權縉) 이하가 모두 허둥지둥하며 절하여 축하드리고 땅에 엎드려 명을 듣는데, 유독 도승지 이덕형(李德泂)만은 절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덕형을 에워싸니 덕형이 땅에 버티고 소리쳐 말하기를, ‘신하로서 어찌 된 영문도 모르고서 갑자기 절할 것이냐?’ 하였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능양군이 대비를 받들어 반정하셨다.’ 하니 덕형이 눈물을 흘려 사례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임금께서는 전(前) 임금을 보전하여 주소서.’ 하였다. 여러 장수 가운데 칼질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인조가 중지시켰다.”

“이때 덕형이 도승지로서 대궐 안에 있었는데,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연이어 인조에게 청하여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전 임금을 살려주소서.’ 하니 눈물이 쏟아져 흐르고 흐느낌이 심하여 말소리조차 이룰 수가 없었다. 후에 또 스스로 청하기를, ‘전 임금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한 죄를 지닌 채 그 전 벼슬에 그대로 있는 것은 맑은 조정에 큰 누가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은 반정하던 날에 내가 이미 알았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뒷날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덕형의 충의는 내가 반정하던 날 알았노라.’ 하였다.”

광해에 대한 충의의 도리를 다했지만 사태를 파악한 이덕형이 반정을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담당해서 반정이 성공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반정 후에 인조 시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사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저서로 <죽창한화>와 <송도기이>가 있다. 수필집 <죽창한화>는 이덕형이 겪은 다양한 풍습과 제도, 인물 등을 서술하였다. 그중 연산군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덕형은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난리를 피해 전라도 진안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97세 한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7세 때부터 군역이 부과돼 서울에서 향군(鄕軍)으로 근무하면서 연산군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노인은 조금도 떠듬거리지 않고 연산군의 인상을 얘기했으며 당시 상황도 정확히 떠올렸다.

“연산의 얼굴을 쳐다보니 빛은 희고 수염은 드물고 키가 크며 눈에는 붉은 기운에 있었다. 연산이 전교(서울 중랑천 살곶이다리)에 거동할 때 역군으로 따라갔다. 화양정(성동구 살곶이목장 내에 있던 정자)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 읍에 예치했던 암말 수백 마리를 가둔 다음 연산이 정자에 자리를 잡으니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했고 신하들은 물리쳤다. 마관(馬官)이 수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으로 몰아넣어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했다. 그해 가을 반정(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에서 반정으로 물러난 왕이 앞으로는 연산군이요 뒤로는 광해군인데, 이덕형은 광해군의 반정을 목도하였다. 그리고 <죽창한화>에 실린 연산군 이야기는 행간에 황음무도한 연산군의 폐정을 들추어내고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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