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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개혁정책과 후세를 위한 저술

 

(12)율곡의 개혁정책과 후세를 위한 저술

강민우: 율곡 선생님이 벼슬길에 나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의 명종(明宗) 말기와 선조(宣祖) 때는 이미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화(士禍: 士林의 禍)와 임금의 외척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끝나고 사림(士林)이 정치의 중심세력이었던 사림정치시대였습니다. 이때는 훈구(勳舊)․외척(外戚)이 집권하는 동안 누적된 현실의 폐단을 해결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당시 정치를 담당한 사림들의 당면과제였습니다.

율곡: 저는 당시의 당면과제로 경장(更張)을 주장하면서, 성리학이 추상적 관념체계에 안주하거나 예법의 형식적 절차에 집착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저의 경장론(更張論)은 성리학의 가치질서에 근거하여 사회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 현실정치입니다.

강민우: 이념과 현실의 일관적 인식이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던 동력이었다는 말씀이십니다. 선생님의 경장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율곡: 경장론은 정치․사회적 폐단이 누적되었을 때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일신해야 한다는 개혁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의 경장론은 현실의 당면과제로서 법과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언제나 임금(君)과 백성(民)을 근본으로 하는 개혁을 전제합니다.

강민우: 제도개혁의 효율성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을 중시하는 정책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저는 현실의 폐단에 눈을 뜰수록 그 해결의 근본에 해당하는 기강을 정립하고 공론을 확장시켜나갈 것을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을 근본으로 삼는 관점과 실무를 긴급한 과제로 인식하는 관점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기 보다는 양자의 통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강민우: 당시 유학자들은 예학을 정립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의리론(義理論)을 강화하여 이념적 통합을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성리학의 기본원리인 도덕적 내지 정신적 근본을 튼튼히 하는 사회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곡: 사회현실의 모순이 갈수록 심화되고 성리학 이념의 대응논리가 한계를 드러내었을 때, 비록 소수이지만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일부는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관심을 돌려 사회제도의 새로운 질서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들이 이른바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을 형성하였던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학자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나 16세기를 살았던 선생님의 학문과 사상은 한국사상사의 한 장을 장식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소중한 교훈과 의미를 남겨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선생님의 학문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세계에 독자적이고 명석한 통찰을 발휘한 것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율곡: 저는 결코 성리설의 분석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 심성의 근원과 현상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인격형성의 방법과 인격의 이상형을 찾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인격적 역량을 확보하고, 나아가 사회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당면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와 방법에 주목했습니다.

강민우: 이 점에서 선생님의 학문은 관념적 성리학이 아니라 ‘실학적 성리학’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율곡: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을 중시하면서, 무엇보다도 인격의 모범형(또는 이상형)으로 선비의 이념을 실현하는 ‘참된 선비(眞儒)’를 추구했습니다. ‘참된 선비’란 “세상에 나아가면 한 시대에 도를 행할 수 있고, 물러나면 만세에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東湖問答」) 인격을 말합니다.

강민우: 스스로 성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학문에 진력하고, 이 학문의 기반 위에서 당시의 조선사회를 도가 실현되는 이상사회로까지 끌어올려보겠다는 율곡선생님의 포부였다고 생각합니다.

율곡: 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경연강의나 상소문을 올려 명종 임금과 선조 임금에게 이상사회에 대한 신념을 불어넣으려고 하였으며, 현실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 대책을 모색하였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그 시대에서 ‘참된 선비’의 인격이 지닌 의미를 밝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로 ‘찬된 선비’의 한 모범을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율곡: 혼란과 부패에 빠져있는 나라의 기강을 세워야 한다는 근본과제를 위해, 무엇보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기반의 확보가 절실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추상적 원칙론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폐단이나 시급한 개혁과제(時務)를 제시하며, 동시에 법률과 제도의 수정이나 보완의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 개혁을 추구하는 ‘경장’의 논리를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이러한 개혁의 과제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실증하고 경전의 이념을 통해 확인해나갔던 것입니다. ‘계승’과 ‘개혁’이라는 두 가지 과제는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서나 요구되는 주제이지만,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와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명확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바로 율곡정신의 빛나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율곡: 저는 앞선 시대에 사회개혁을 통해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시도하다 좌절당한 조광조(趙光祖)를 ‘참된 선비’의 모범으로 삼고, 선비들이 정치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사림(士林)정치시대에서 다시 한번 정치개혁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관습에 안주하려는 임금과 신하들의 대세에 밀려 저 또한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자신의 시대에 도를 행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물러나 후학을 가르쳐 교육을 통해 만세에 가르침을 펴고자 하여, 해주(海州) 석담(石潭)을 중심으로 강학활동을 벌이셨던 것이군요.

율곡: 그때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학활동만 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42세(1577) 때 해주에서 강학을 하면서, 한편으로 「해주향약」을 제정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하는 계몽활동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여 교육의 이념을 밝히고 학교제도의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학문이 아니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른바 학문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을 모르고 망령되이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자포자기하니, 얼마나 가엾은 일인가.”(「擊蒙要訣序」) 학문이란 일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강민우: 격몽요결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담겨있습니까.

율곡: 격몽요결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제1장의 ①뜻을 세우는 입지(立志)입니다. “처음 배우는 이는 먼저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聖人)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별 볼일 없게 여겨 그만두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뜻을 세우는 것과 밝게 아는 것과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모두 나 자신에게 달려있으니,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는가.”

강민우: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학문의 출발점으로서 성인이 되겠다는 자기 목표를 정립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이어서 ②‘옛 습관을 바꿀 것(革舊習)’, ③‘자신을 지킬 것(持身)’, ④독서(讀書), ⑤‘부모를 섬김(事親)’, ⑥‘상례제도(喪制)’, ⑦‘제사의례(祭禮)’, ⑧‘가정생활(居家)’, ⑨‘사람을 접대함(接人)’, ⑩‘벼슬살이(處世)’의 10장에 걸쳐 배우는 사람이 실천해야할 조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강민우: 격몽요결은 후세에 초학자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권시경(權是經)이 외숙인 조목(趙穆)에게 격몽요결을 드렸더니, 조목이 이를 읽고서 “이 책은 천하 만세에 행해질 만한 것이지, 어찌 동방에만 행해지고 말 책인가.”(趙穆, 「遺事」)라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격몽요결이 퇴계학파 안에서도 매우 중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곡: 저의 책이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강민우: 특히 선생님의 제자인 조헌(趙憲)은 격몽요결을 중시하여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길을 가다가 만나는 선비들에게 격몽요결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닦고 일에 대응하는 요령이 잘 갖추어져 있으니 선비로서 반드시 읽어야 한다”라고 하거나, 또한 밤을 새워 베껴서 책으로 전해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重峯行狀」) 후에 1788년 정조임금은 강릉에 보존되어 있던 선생님의 친필본 격몽요결을 보고 감동하여 친히 서문을 지은 일화도 전합니다. “이문성(李文成: 율곡)은 내가 존중하고 사모하는 분이다. 그 분의 전서(全書)를 읽고서 그 인품을 상상할 수 있었다. 요즈음 강릉에 그분이 손수 쓴 격몽요결과 남긴 벼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른 가져다가 보았다. 점(點)과 획(畫)이 새롭고 시작과 끝이 한결같아 뛰어난 자품과 시원한 기상이 책을 펼쳐보는 순간 감지되어 이문성과 2백여 년의 시대차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御製栗谷手草本擊蒙要訣序」) 이러한 사실은 격몽요결이 초학교육에 중요함을 정조임금에 의해 크게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 선생의 학문과 덕망을 사모하여 황해도 지역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습니다. ①소현서원(紹賢書院)은 율곡선생이 해주 석담에 건립했던 강학처인 은병정사(隱屛精舍)를 모태로, 율곡선생 사후 2년 뒤(1586)에 김장생․박여룡 등의 문인들에 의해 세워진 서원입니다. 율곡선생을 배양한 최초의 서원이며, 지역의 이름을 따서 석담서원(石潭書院)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은병정사는 광해군 2년(1610)에 ‘소현서원’으로 사액되면서 율곡학파의 중심 서원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황해도 지역의 서원들은 소현서원을 모범으로 삼은 것이 많으며, 율곡선생을 모신 서원으로는 소현서원 이외에도 ②연안부(延安府)의 비봉서원(飛鳳書院), ③배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 ④황주(黃州)의 백록서원(白鹿書院), ⑤안악(安岳)의 취봉서원(鷲峯書院), ⑥재령(載寧)의 경현서원(景賢書院), ⑦장연(長淵)의 용암서원(龍巖書院), ⑧송화(松禾)의 도동서원(道東書院), ⑨은율(殷栗)의 봉암서원(鳳巖書院), ⑩봉산(鳳山)의 문정서원(文井書院), ⑪문화(文化)의 봉강서원(鳳岡書院), ⑫서흥(瑞興)의 화곡서원(花谷書院), ⑬신천(信川)의 정원서원(正院書院) 등 13곳이 있습니다.
그밖에 경기도에는 ①파주의 율곡 묘소 아래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자운서원(紫雲書院)과 ②풍덕(豐德)에 숙종 원년(1675)에 창건된 귀암서원(龜巖書院) 두 곳이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①강릉에 인조 14년(1636)에 창건된 송담서원(松潭書院)이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①황산(黃山)에 문인 김장생이 주도하여 세운 죽림서원(竹林書院)과 ②청주(淸州)에 선조 3년(1570)에 창건된 신항서원(莘巷書院) 두 곳이 있으며, 경상도에는 ①청송(靑松)에 숙종 24년(1678)에 창건하여 율곡을 주향으로 모시고 김장생을 배향한 병암서원(屛巖書院)이 있습니다. 또한 평안도에는 ①선천(宣川)의 문공서원(文公書院)과 ②숙천(肅川)의 덕수서원(德水書院) 두 곳이 있으며, 함경도에는 ①함흥(咸興)의 운전서원(雲田書院)이 있습니다. 전국에 모두 22곳 서원에서 주향이나 배향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院享錄」)

율곡: 저를 기리는 서원이 전국에 이렇게 많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비록 4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학자요, 정치가요, 외교가요, 교육자요, 행정가로서 한 시대를 이끌어가며 시대정신을 밝히신 분입니다. 저는 이제야 선생님께서 5천원권 지폐에 들어간 이유가 짐작됩니다. 지금까지 저의 두서없는 질문에 많은 가르침을 주신 율곡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질문은 여기까지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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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세계-천지․만물․인간

 

(11)학문세계-천지․만물․인간

강민우: 율곡선생은 성을 기질 속에서 이해하니, 이것은 기(또는 기질)를 중시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기가 있어야 비로소 성이 기 속에 내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율곡선생을 주기론(主氣論)으로 평가하셨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은 기(또는 기질)를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율곡: 기질에는 바르고 치우친 차이(正偏), 통하고 막힌 차이(通塞), 맑고 탁한 차이(淸濁),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粹駁) 등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질이 지닌 성질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은 천지입니다. 치우치고 막힌 기질을 얻은 것은 사물입니다. 또한 바르고 통하는 기질을 얻었으나, 동시에 맑고 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정도에서 무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강민우: 인간이 바르고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은 천지의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과 비교하면, 수준의 차이가 보입니다. 인간의 수준이 천지의 지극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율곡: 천지(하늘)와 인간 사이에 기질의 바르고 통하는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질이 바르다(正)는 온전성에서 하늘과 일치하며, 통한다(通)는 소통성에서 하늘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인간이 소통하고 일치함을 기질에서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만물의 치우치고 막힌 기질은 인간의 바르고 통하는 기질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강민우: 만약 ‘성이 기질과 분리될 수 없다’는 율곡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 사이에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성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기질이 맑으면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도 기질에 가려지지 않고 잘 드러날 것이고, 기질이 탁하면 탁한 기질에 가려져서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도 잘 드러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곡: 저는 기질의 차이와 더불어 그 성이 지닌 성격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천지는 기질이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므로 성도 정해져서 변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기질이 지극히 치우치고 지극히 막혔으므로 역시 성이 정해져서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바르고 통한 기질을 얻었으므로, 지극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지극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가변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인간의 기질에는 맑고 탁하거나 순수하고 잡박한 정도에 다양한 차이가 있으므로 기질이 변할 수 있다.”(「答成浩原」)는 뜻입니다.

강민우: 결국 인간의 기질이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性: 성품)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은 기질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지닌 기질 속의 성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악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설명이기도 하겠습니다.

율곡: 인간이 기질의 다양한 차이에 따라 성이 변할 수 있다면, 인간 사이에도 여러 차별상이 있게 됩니다. 저는 기질 속의 성이 지닌 차이에 따르는 인간의 차등에 주목합니다. 기질을 그릇에 비유하고 성을 물에 비유할 때, 성인은 깨끗한 그릇 속에다 물을 담은 경우이고, 중인(衆人: 일반인)은 그릇 속에 모래와 진흙이 있는 경우이며, 하등인은 진흙 속에 물이 있는 경우라 하겠습니다.(「論心性情」)

강민우: 율곡선생은 감정이 절도에 맞는지 여부도 성인․군자․상인(常人: 보통사람)이라는 인격의 차등을 구분하기도 하셨지요.

율곡: 성인은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군자는 감정이 간혹 절도에 맞지 않으나 의식은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상인(보통사람)은 혹은 감정이 절도에 맞으나 의식이 맞지 않기도 하고 혹은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으나 의식이 절도에 맞기도 합니다. 제가 인격의 차등을 강조하는 것은 신분적 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질의 자기변혁을 통한 인격의 향상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짐승(禽獸)의 성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죠.

율곡: 물과 그릇의 비유에서 볼 때, 짐승의 성은 물과 결합된 진흙 덩어리로서 끝내 맑게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물에 비유된 짐승의 성은 이미 물기가 말라버린 진흙 덩어리이므로 맑게 할 수 없지만, 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속에 물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성은 마치 물기가 진흙으로 막혀있는 것처럼 기질에 막혀있지만, 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論心性情」)

강민우: 선생님은 짐승의 성이 부분적으로 통하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처럼 기질과 그 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보셨습니다.

율곡: 만물 가운데서 초목은 완전히 막혀있는데 비해, 짐승은 혹 한 가지 길에 통하기도 합니다. “범이나 이리에는 부모․자식의 친애함이 있고, 벌이나 개미에는 임금․신하의 관계가 있으며, 기러기에는 형제의 차례가 있고, 비둘기에는 부부의 구별이 있으며, 벌레는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지만, 모두 변하고 통할 수가 없습니다.”(「答成浩原」)

강민우: 18세기 초에 기호학파 안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변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보면, 율곡선생의 기질 속에서의 성에 대한 이해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이론(異論)의 입장을 취하는 듯합니다.

율곡: 동론이든 이론이든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신의 기질과 성을 변화시키는 수양의 실천과정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천지나 만물과 달리, 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성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텅 비고 영명하며 환하게 밝아서(虛靈不昧)’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탁한 기질을 맑게 하고 잡박한 기질을 순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은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기질의 차이에 따라 인간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기질의 변화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군요. 그 내용을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율곡: “‘기질이 맑고 형질이 순수한 자(氣淸而質粹者)’는 알고 행함을 힘쓰지 않고도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기질이 맑고 형질이 잡박한 자(氣淸而質駁者)’는 알 수는 있지만 행할 수가 없으니, 몸소 행하는데 힘쓰기를 독실하게 하면 실천을 이루어 약한 자도 강하게 될 것입니다. ‘형질이 순수하나 기질이 혼탁한 자(質粹而氣濁者)’는 할 수는 있으나 알 수가 없으니, 학문에 힘쓰기를 반드시 정밀하게 하면 지식에 통달하여 어리석은 자도 밝아질 것입니다.”(聖學輯要)

강민우: 선생님은 인간의 기질을 세 가지로 구분하십니다. 첫째는 ‘기질이 맑고 형질이 순수한 자’로서 힘쓰지 않고도 알고 행할 수 있으니, 성인의 경지입니다. 다음으로 보통 사람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하나, ‘기질은 맑으나 형질이 잡박한 자’는 지성이 뛰어나 알 수 있지만 의지가 약하여 실천할 수 없는 경우로서, 이때 행하는데 힘쓰면 실천을 이루어 유약한 의지도 강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형질은 순수하나 기질이 혼탁한 자’는 의지가 강하여 실천할 수 있지만 지성이 약하여 알 수 없는 경우로서, 이때 배우는데 힘쓰면 지식이 성취되어 어리석은 자도 지혜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곡선생은 불완전한 기질을 변화시켜 나가는 방법을 다각도로 제시하셨습니다.

율곡: 비록 인간이 선을 지향하지만, 탁하고 잡박한 기질이 마음을 속박하고 물욕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성을 보존하고 기질을 교정하여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수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이러한 수양행위를 통해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양육하는(位天地育萬物)’ 이상적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강민우: 수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주로 누구를 표준으로 삼습니까.

율곡: 성인은 하늘(天地)을 준칙으로 삼고, 중인(衆人: 보통 사람)은 성인을 준칙으로 삼습니다.(「答成浩原」) 중인의 수양방법은 성인이 이미 성취한 법도를 증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이 인격적 모범이 가야할 발자국을 남겨주었으므로, 중인은 하늘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 자신보다 먼저 성취한 성인을 모범으로 삼고 이를 따라가는 실천이 요구됩니다.

강민우: 지금까지 율곡선생의 매우 독특한 개성과 선명한 인식을 보이는 심성론의 성격을 알아봤습니다. 그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해주셨으면 합니다.

율곡: 저의 심성론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입니다. 리․기와 같은 추상적 관념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합니다. 인심도심론이나 사단칠정론과 같은 것도 공허한 논쟁을 일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하나의 통합된 인간의 주체로서 심성론을 이해합니다. 인간의 심성이 사단-칠정, 인심-도심, 본연지성-기질지성 등 이원론의 형식으로 갈라지는 것에 반대하고, 일원론의 통합적인 사유를 강조합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이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발과 기발로 해석하는 즉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발 하나만을 인정하는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하셨군요.

율곡: 사단과 칠정이 구분되는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 아니라, 하나의 정이라는 것입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지목하여 사단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강민우: 이러한 심성론은 그대로 수양론의 근거와 방법으로 연결되는 것이겠죠.

율곡: 저는 자신의 기질과 성품의 변화를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성인(聖人)에 주목합니다. 수양론은 인간의 심성과 도덕 실천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특히 의(意: 의식)는 대학의 성의(誠意)와 같은 수양론의 체계와 연결되며, 그 작업이 성학집요의 편찬체계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강민우: 조선시대의 국시인 유교는 성리학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며, 이 성리학은 16세기 중엽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을 통하여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성리학을 중세적 관념철학의 한 양상으로 규정하고 사회현실의 문제와 유리된 것으로 파악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율곡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율곡: 한 시대의 사회이념으로 규정되었던 철학이 그 사회적 관심과 연결될 수 없다면, 올바른 해석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기도 억제해가기도 하며, 그 시대의 사회의식을 형성했던 중추로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사회에서 성리학은 단순히 송대(宋代) 이기(理氣)철학을 되새김질한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 속에서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과 퇴계선생은 성리설에서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여서 율곡학파(기호학파)와 퇴계학파(영남학파)라는 두 봉우리를 이루었지만, 그 성격은 시대현실 속에서 두 분의 고뇌와 사색을 통하여 발견했던 해답이라 할 수 있겠군요.

율곡: 퇴계선생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즉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한 것도 거듭된 사화(士禍)를 거치는 시대 속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립된 사회현실을 인식한 사실과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퇴계선생의 성리설에는 현실 속에 악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음에도, 악에 매몰되지 않는 순수한 선의 근원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퇴계선생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 것 역시 명종(明宗) 말기와 선조(宣祖) 초기에 훈구(勳舊)세력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찾는 시대적 분위기와 연관시킬 수 있겠습니다.

율곡: “선비가 뜻을 펼 수 없을 때는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고(獨善其身), 뜻을 펼 수 있을 때는 아울러 천하를 착하게 한다(兼善天下).”(맹자「진심상(盡心上)」)라는 맹자의 말처럼, 그 시대의 사회상황에 따라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강민우: 여기서 퇴계선생의 이원론적 입장이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에 속한다면, 율곡선생의 일원론적 입장은 ‘아울러 천하를 착하게 하는 것’에 속한다고 대조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계절에 비유하면, 퇴계선생은 겨울에 해당하고 율곡선생은 봄에 해당할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바깥 추위가 맹위를 떨치므로 더욱 단단히 생명을 감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봄이 와도 씨앗의 껍질만 지키고 있다면, 생명은 위축되고 소멸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껍질을 깨고 바깥세계에로 뻗어나가야 합니다. 바깥세계는 이미 생명의 적이 아니라, 자기실현의 무대인 것입니다. 이 바깥에서 햇볕과 물기와 영양소를 섭취해야 생명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설이 이원론이거나 일원론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적 전개과정에서 이원론일 수도 일원론일 수도 있는 것이겠군요.

율곡: 사회현실이나 시대상황이 철학적 입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결정을 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시대가 그 철학을 결정지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신이 현실을 파악하고, 이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철학(성리설)을 제기하였던 것입니다. ‘기발이승일도설’은 현실의 기가 리에 선행하는 것이라거나 기만이 작용하고 리는 무력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의 현실을 떠나서는 리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며, 모든 기의 작용 속에는 그 근거로서 리가 내재함으로써 리를 벗어나지 않는 기의 현실을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강민우: 18세기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은 “퇴계의 성리설이 인성론적이라면, 율곡의 성리설은 우주론적이다.”(與猶堂全書, 「理發氣發辨」)라고 하여, 두 입장을 대조시키기도 하였군요.

율곡: 퇴계선생의 이원론이 ‘현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저의 일원론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대조시키는 것이, 시대적 맥락에서 양자의 입장을 보다 연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일원론은 이기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규정이기도 하지만, 사회현실의 당위적 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율곡: “리는 작용이 없고(無爲) 기는 작용이 있다(有爲)”는 관점에서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 것은 다양한 현상 속에 리(理: 이치)라는 근원성을 내재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현실의 세찬 물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신념의 철학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사회현실의 격류를 벗어나 강 언덕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그 격류 속으로 뛰어들어 물길을 바로잡음으로써 ‘리가 타고 있다’는 이승(理乘)의 과제를 실현하였던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학문세계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어서 개혁정책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율곡의 학문세계: 인심도심론과 사단칠정론

 

(10)율곡의 학문세계: 인심도심론과 사단칠정론

강민우: 이제부터는 율곡선생의 학문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율곡선생의 학문적 중심을 이루는 이론이 심성론(心性論)입니까.

율곡: 그렇습니다. ‘심성론’은 주자학의 기본 개념인 태극(太極)-음양오행(陰陽五行) 또는 리(理)-기(氣)의 사유구조에 근거하여, 심(心: 마음)․성(性: 성품 또는 본성)․정(情: 감정)을 해석하는 이론입니다.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은 심성론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정밀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을 학문의 핵심과제로 삼았습니다. 심․성․정의 개념을 리와 기에 분속시켜 해석하면서 주리설(主理說) 또는 주기설(主氣說)의 입장을 취하는 관념적 논쟁을 전개했습니다.

강민우: ‘주리설’과 ‘주기설’은 무슨 뜻입니까.

율곡: 성리학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리와 기의 구조로 설명합니다. 이때 리는 원리․이치 등에 해당하고, 기는 기질․형체 등에 해당합니다. 주리설(主理說)은 말 그대로 리를 중심으로 하여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리와 기가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가운데 리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론’ 역시 마찬가지이니, 리와 기가 함께 있는 가운데 기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리가 주가 되면 어떻고 기가 주가 되면 어떻습니까.

율곡: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심성론은 도덕적 주체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합니다.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적 근거를 인식하고,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과 방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와 같은 인식방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강민우: 결국 심성론은 ‘인간의 도덕실현을 위한 실천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먼저 마음이란 무엇이며, 마음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율곡: 마음은 성(性: 성품)․정(情: 감정)․의(意: 의식)로 이루어진 하나의 통합적 주체입니다. 성․정․의가 모두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마음을 구성하는 하나의 양상입니다.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를 ‘성’이라 하고, 이미 발동한 상태를 ‘정’이라 하며, 발동하여 헤아리는 것을 ‘의’라 한다.”(「答成浩原」) 마음은 성․정․의의 주체이므로 아직 발동하지 않거나 이미 발동하거나 헤아리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강민우: 성․정․의는 마음의 다양한 전개과정에서 드러나는 양상(모습)을 가리키는 말이겠군요. 마치 한 사람이 집에서는 가장이요, 직장에 가면 기능공이요, 상점에 가면 손님이 되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까요.

율곡: 물론 성․정․의 사이에는 아직 발동하지 않는 것(未發)과 이미 발동한 것(已發)이라는 차이가 있고, 성에서 정․의로 발동하여 나오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정․의는 모두 마음이 드러내는 양상에 불과합니다.

강민우: 또한 율곡선생은 마음을 “성과 기질이 합하여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다”(「人心道心圖說」)라고 정의하여, 마음과 몸의 관계를 이해하기도 하셨습니다.

율곡: 이때 ‘마음이 몸을 주재하고 몸이 마음의 주재를 받는다’는 인식은 마치 임금과 신하의 관계처럼 구별이 엄격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과 몸을 엄격하게 이원적으로 분리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실제로 몸(身)은 신체라는 부분적 의미와 함께 몸과 마음을 합친 전체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 때문에 ‘주리’라고 하여 리(성)만을 중시하는 것에 반대한 것입니다.

강민우: 몸과 마음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구조로 인간존재를 이해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율곡: 그렇습니다. 이러한 일체성(또는 통합성)의 중시는 저의 성리설을 관통하는 관점입니다. 저는 리․기의 관계에서도 “리와 기는 본래 합치된 것이요, 처음 합하는 때가 있지 않다. 리와 기를 둘로 보려는 것은 모두 도(道)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答成浩原․理氣詠呈牛溪道兄」)”라고 했습니다.

강민우: 이것은 바로 리․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마음(心)․몸(身)이 서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며, 성․정․의가 독립된 존재가 아님을 강조하는 일원론의 입장이라는 말씀이군요.

율곡: 임심(人心)․도심(道心) 역시 마음의 작용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른 차이이지, 인심과 도심이 두 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민우: 그렇지만 주자는 “마음은 하나인데,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하기도 하고,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기도 한다.”(「中庸章句序」)라고 하여, 인심과 도심의 관계에서 성명과 형기, 올바름(正)과 사사로움(私)이라는 대립된 구도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율곡: 마음이 발동할 때에 도덕적 가치를 위하여 발동하는 것을 ‘도심’이라 하고, 신체적 욕구를 위하여 발동하는 것을 ‘인심’이라 하여, 대립적 가치의식을 내포합니다. 그럼에도 인심과 도심은 “처음부터 두 마음이 아니요, 다만 발동하는 자리에 두 단서가 있을 뿐입니다.”(「人心道心圖說」) 다시 말하면, 인심과 도심은 마음의 독립된 두 존재양상이 아니라, 두 가지 상반된 가치에로 지향하는 것일 뿐입니다.

강민우: 인심과 도심은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이 바뀌는데 따라 언제든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인심이었다가 도심이 될 수 있고, 도심이었다가 인심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율곡: 이것이 바로 ‘인심과 도심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된다’는 인심도심상위종시설(人心道心相爲終始說)의 내용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곧바로 나왔으나 혹 따르지 못하고 사사로운 생각이 사이에 끼어들면, 이것은 도심으로 시작하였다가 인심으로 끝맺는 것이다. 형기(形氣)에서 나왔으나 그릇됨을 알고 욕심을 쫓지 않으면, 이것은 인심에서 시작하였다가 도심으로 끝맺는 것이다.”(「答成浩原」) 인심이 도심으로 바뀌거나 도심이 인심으로 바뀔 수 있는 근거는 의식(意)을 통해 헤아리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민우: 그래서 율곡선생께서 “인심과 도심은 정․의를 포함하여 말한 것이다.”(「答成浩原」)라고 하여, 심․성․정 외에 ‘의’를 강조하셨군요.

율곡: ‘의(의식)’의 기능인 헤아림이 인심과 도심을 자각하고 서로 변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형기의 사사로움을 지향하는 ‘인심’도 성명의 올바름을 지향하는 ‘도심’에 상반되지 않도록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다스리는 과제입니다.(「人心道心圖說」).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는 도심은 지켜야 하며 확충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에 빠지기 쉬운 위태로운 인심은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이때 정밀하게 살피는 것이 바로 의(意)의 작용입니다. 정밀하게 살피는지 여부에 따라 인심․도심의 상태는 상반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음이 형기의 작용을 지각하고 자세히 살펴서 올바른 이치를 따르게 하면,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는’ 결과를 낳고,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고 마음이 지향하는 데로 맡겨두면 ‘인심은 더욱 위태롭고 도심은 더욱 미약하게 되는(人心愈危, 道心愈微)’ 결과를 낳습니다.

강민우: 인간은 대상적 가치가 다른 만큼 마음의 지향이 인심과 도심으로 갈라져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은 인간의 주체이므로 자신의 마음을 대상에 지배되도록 맡겨두어 악(惡)에 빠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심성론에서 인심도심설의 출발점과 귀결점은 바로 올바른 가치를 지향하고 사사로운 데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도심으로 절제하여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듣는 조건’에서는 인심과 도심이 하나로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강민우: 인심․도심은 그 정도로 하고 사단칠정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율곡: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발동하면 정(情: 감정)이 되는데, 이것은 아직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인 성(性: 성품)이 발동하여 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나무에서 땅 속의 뿌리와 땅위의 가지 사이의 관계처럼, 한 마음에서 성이 발동한 것이 정이요, 모든 정은 성에 근본을 두는 일체입니다. 또한 이때의 정에는 맹자「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말한 ‘측은․수오․사양․시비의 사단(四端)’과 같은 도덕적 감정이 있고, 예기「예운(禮運)」에서 말한 ‘희․로․애․락․애․오․욕의 칠정(七情)’과 같이 일반적 감정이 있으나, 모두 성에 뿌리를 둡니다.

강민우: 사단이 선한 정을 가리키는데 비해, 칠정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는 정을 모두 가리키니, 결국 둘은 도덕적 가치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말씀이군요. 사단과 칠정은 무엇을 말하는지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 궁금합니다.

율곡: 측은(惻隱)은 불쌍히 여기는 정이고, 수오(羞惡)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정이며, 사양(辭讓)은 말 그대로 양보하거나 사양하는 정이고, 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아는 정을 말합니다. 또한 희(喜)는 기쁨, 노(怒)는 분노, 애(哀)는 슬픔, 구(懼)는 두려움, 애(愛)는 사랑, 오(惡)는 미움, 욕(欲)은 욕심을 말합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율곡: 저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를 두 방향으로 갈라져 나간 대립적 감정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서 선한 감정만을 가리켜서 ‘사단’이라 하는 하나의 정으로 파악합니다. 실재하는 감정은 칠정 하나이니, 사단과 칠정은 모두 하나의 근원인 성(性: 성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이 발동하여 정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절도에 맞느냐 절도에 맞지 않느냐’에 따라 선악의 차이를 드러낼 뿐입니다.

강민우: 이것이 퇴계선생의 사단칠정론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곳이겠군요.

율곡: 사단․칠정의 정을 이기론(理氣論: 리와 기의 형식)으로 설명할 때, 퇴계선생은 사단을 ‘리가 발동하고 기가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라 하고, 칠정을 ‘기가 발동하고 리가 타고 있는 것(氣發而理乘之)’이라 하여 사단=이발, 칠정=기발이라는 대립관계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칠대사(七對四)라고도 부릅니다. 이와 달리, 저는 사단․칠정이 모두 ‘기가 발동하고 리가 타고 있는 것(氣發理乘一途)’이라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괄하는 포섭관계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칠포사(七包四)라고도 부릅니다.(「答成浩原」)

강민우: 율곡선생은 인간 감정의 통합성에 주목하여 인간의 감정이 둘로 갈라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겠요. 이러한 통합적 사고는 리와 기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율곡: 리와 기의 성격을 규정하여 “발동하는 것은 기이고, 발동하게 하는 것은 리이다”(「答成浩原」)”라고 하여, 비록 리와 기가 개념적으로 서로 구별되지만 실제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임을 강조합니다. 다만 선악의 문제에서 보면, 리는 순수한 선(理本純善)으로 도덕적 기준이 되지만, 기는 맑거나 탁한 차이가 있으니(氣有淸濁), 리의 순수한 선을 그대로 실현시키기 어렵습니다. 리를 깨끗한 물에 비유하면, 기는 깨끗하거나 더러운 물그릇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또는 기질)는 리를 담는 그릇이다.”(「人心道心說」)

강민우: 선과 악이 갈라지는 원인은 기가 발동할 때에 기의 맑고 탁함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때 맑은 기가 발동하면 선이 되고, 탁한 기가 발동하면 악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여기에서 선악의 조건으로 기의 맑음과 탁함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율곡: 저는 선악의 도덕성은 인간의 판단과 선택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기질의 조건에 주목합니다. 예를 들어 사물의 경우는 막히고 치우친 기질이 고정되어 있어서 변화시킬 수 없으나, 오직 사람만은 마음이 ‘텅 비고 영명하며 밝아서(虛靈不昧)’ 기질의 맑거나 탁함 또는 순수하거나 잡박함(淸濁粹駁) 따른 차이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강민우: 여기에서 율곡선생은 수양의 방법으로서 ‘기질을 교정하여 바로잡는’ 교기질(矯氣質)의 이론을 제시하셨군요.

율곡: 저는 ‘교기질’의 방법을 마치 어린아이가 거문고를 익히는 것에 비유합니다. 처음 어린아이가 거문고를 탈 때는 그 소리를 듣기가 매우 괴롭겠지만, 쉬지 않고 노력하여 음률을 이루고 마침내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그 소리가 맑고 조화로워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됩니다.(聖學輯要)

강민우: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탁하고 잡박한 기질을 맑고 순수하게 바로잡으면, 선한 도덕성과 밝은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또한 인간의 존재는 기질로 형성되며, 성은 바로 하늘의 이치(理)가 인간의 기질 속에 부여된 것입니다. 기질에서 보면 심(心: 마음)․성(性: 성품)․정(情: 감정)이 모두 기질이지만, 이치에서 보면 어떤 기질에도 그 근거로써 이치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성에 대해서도 본연지성(本然之性: 본연한 성품)과 기질지성(氣質之性: 기질 속의 성품) 사이의 관계를 사단과 칠정의 관계와 같은 구조로 이해합니다. 실재하는 성품은 ‘기질지성’이며, 그 속에서 오로지 이치만을 가리킨 것(單指)이 바로 ‘본연지성’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기질 속에 성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는 기질 속에 성을 포괄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군요.

율곡: 저는 기질을 그릇에 비유하고, 성을 물에 비유합니다.(「論心性情」) 실재하는 인간의 성은 마치 그릇에 담긴 물처럼 기질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기질과 성의 통합된 모습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질의 변화를 통하여 선의 실현을 추구함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지는 주체적 인격성을 강조합니다.

율곡이 당대 인물을 평하다

 

(9)율곡이 당대 인물을 평하다

강민우: 선생님은 퇴계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스승으로 존경하기도 하면서 퇴계의 학문(성리설)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었던 만큼, 비판적 견해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저는 35세(1570) 때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성품은 온순하고 옥처럼 순수하였다.…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거나 받아들임의 절도에서는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대해서는 “의리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따랐고, 여러 학설에 두루 밝아 널리 통달함을 얻었다.”(경연일기)라고 하여, 그의 온화하고 겸허한 풍모와 의리에 어긋남이 없는 강직한 지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선조 임금 즉위 초에 이상정치(至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퇴계선생이 임금의 덕을 성취시켜야 한다는 것이 선비들의 중론이었고, 선조 임금도 퇴계선생을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에 대해 ‘실제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끌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지요.

율곡: 이때 저는 “퇴계는 스스로 재주와 지혜가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으며, 또한 쇠퇴한 시대에 선비가 일하기 어렵다고 여기고서 작록(爵祿: 벼슬과 녹봉)을 사양하고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마음을 다스려 보겠다는 정성이 부족하다.”(경연일기)라고 했습니다. 퇴계선생이 물러나기를 힘쓴 것은 겸양의 뜻이 아니라, 실제로 임금의 마음을 다스려보겠다는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민우: 그럼에도 선생님은 퇴계와 조광조를 크게 높이셨다지요.

율곡: 저는 43세(1578) 때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자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도학을 제창하고 요순(堯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사람으로는 정암(조광조)과 같은 이가 없으며, 주자문하의 이루어진 법도를 지키면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후생의 모범이 된 사람으로는 퇴계(이황) 같은 이가 없다.”(「연보」)라고 하여, 주자의 사당에 조광조와 퇴계를 배향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민우: 또한 조광조와 퇴계를 문묘(文廟: 공자의 신위를 받드는 사당)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셨고요.

율곡: 성균관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현인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을 때, 선조 임금은 경솔히 결정할 수 없다고 보류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고려왕조에서 종사할만한 사람으로는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다.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향(安珦)은 도학에 관계가 없으니, 이 세분은 다른 곳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옳지만 문묘에 배향함은 잘못이다.…오직 조광조는 도학(성리학)을 제창하여 후인들을 이끌었으며, 퇴계는 의리에 침잠하여 일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 두 분만 종사하고자 하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경연일기)라고 하여, 조광조와 퇴계를 이 시대 도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그러면서도 퇴계는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셨죠.

율곡: 퇴계선생은 성현의 말씀을 준수하고 실행한 자이지만, 그가 스스로 발견한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서경덕(徐敬德)은 자기의 견해는 있으나, 그 한 쪽만을 본 자입니다. 결국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서 조광조를 들 수 있으며, 퇴계는 학문적 규모를 갖추었지만 독창성이 결여되었고, 서경덕은 독창적이지만 부분에 한정되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조광조를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율곡: 퇴계선생은 이 시대 유가의 종주(宗主)로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퇴계의 재주와 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밀함을 다한 것에서는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경연일기)”

강민우: 재주와 역량에서는 조광조가 퇴계를 앞서지만, 의리와 정밀함에서는 퇴계가 조광조를 앞선다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저는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白仁傑)에게 “자품(資稟: 타고난 성품)을 논하면 조광조가 월등히 낫지만, 조예(造詣: 지식이 깊은 경지에 이름)로 말하면 퇴계가 낫다”(경연일기)”라고 하여, 조광조와 퇴계 사이에 도량과 학문에서 각각 장단점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명나라 때 대표적인 학자 나흠순(羅欽順)과 퇴계, 그리고 서경덕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를 하셨더군요.

율곡: 퇴계선생은 나흠순의 학설이 주자와 다르다고 비판하였지만, 저는 나흠순의 학설이 창의적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제가 친우 성혼(成渾)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사이 정암(나흠순)․퇴계(이황)․화담(서경석) 세 선생의 학설을 보니, 정암이 최고요, 퇴계가 다음이며, 화담이 그 다음이다. 그 중에 정암과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自得之味)’이 많고, 퇴계는 ‘본받는 맛(依樣之味)’이 많다.”(「答成浩原」)라고 하여, 학설의 우열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퇴계는 ‘본받는 맛’이 많으므로 그 말이 구애가 있고 조심하였으며,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이 많으므로 그 말이 즐겁고 호방하였다. 조심하였기 때문에 실수가 적고 호방하였기 때문에 실수가 많으니, 차라리 퇴계의 ‘본받음(依樣)’을 취할지언정 화담의 ‘스스로 깨달음(自得)’을 본받아서는 안된다.”(「答成浩原」)라고 하여, 이들의 학문적 특징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이러한 율곡선생의 평가에 대해, 조선 말기 율곡학파의 학자인 김평묵(金平默)은 “퇴계의 학문은 매우 순수하고 정대한데, 그 이유로는 정자․주자를 독실히 믿고서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 만약 중국에 있었다면 마땅히 이동(李侗: 주자의 스승)과 진덕수(陳德秀: 주자의 제자) 사이에 있을 것이니, 어찌 나흠순과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金平默, 「大谷問答」)라고 하여, 나흠순보다 퇴계가 월등하게 뛰어남을 강조하였습니다.

율곡: 이것은 주자의 이론체계와 일치할 것을 중시하는 김평묵의 입장과, 주자의 이론체계에 대해 창의적으로 해석할 것을 중시하는 저의 입장적 차이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조식(曺植, 1501~1572)에 대해서도 그 지조와 기상은 높지만, 학문이나 세상을 경륜할 역량은 부족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율곡: 저는 영남의 강우(江右)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에 대해서는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한 시대의 일민(逸民: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묻혀 지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저술을 보면 실제로 체득한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은 못된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능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종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하는 것은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또한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 대해서도 높은 기개는 인정하면서 자만에 빠져 남을 용납하는 덕이 없다고 비판하셨다지요.

율곡: 김계휘가 기대승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을 때, 저는 “기대승은 한 세상을 덮을 듯하니 역시 비상한 선비이다. 다만 자부함이 너무 지나쳐 겸허하게 남을 받아들이는 의사가 없어 반드시 사림(士林)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가.”(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기대승의 학풍에 대해서도 “널리 읽고 잘 기억하여 담론하면 온 좌중을 굴복시켰다.…그의 학문은 박식함에 힘쓸 뿐이고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는 없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으며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비와 화합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자가 많이 따랐다.”(경연일기)라고 하여, 독선이 강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때문에 백인걸(白仁傑) 역시 기대승에 대해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라고 평가했던 것이겠습니다. 기대승이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이 “사문(斯文: 유교)이 불행하여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라고 하자, 율곡선생은 “사문이 다행하여 기대승이 일찍 죽었다”라고까지 심하게 말씀하셨군요.

율곡: 한마디로 저는 기대승과 성리설에서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퇴계의 대표적 제자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에 대해서도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지만 공사(公私)의 분별이 확실하게 못하다고 비판하셨죠.

율곡: 저는 유성룡에 대해 “재주와 식견이 있으나, 다만 한 마음으로 공무를 받들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관계를 돌아보는 뜻이 있다.”(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언제가 저는 “유성룡이 재주와 기개는 참으로 아름답지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서 나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무리가 죽고 나면 반드시 그 재주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강민우: 유성룡은 율곡선생의 탁월한 식견에 시기심을 가져 살았을 때는 반대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는 것이군요.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에, 유성룡이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율곡선생의 선견지명과 재능을 칭찬했다지요. 이 말을 듣고 율곡의 친우 성혼(成渾)은 “유성룡은 본래 그러하다. 그가 어찌 율곡의 어짊을 몰랐겠는가. 다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해서 죽은 뒤에 인정하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연보초고」)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율곡: 이와 유사한 일을 남명(曺植)이 시로 읊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바른 선비 좋아하는 것이 人之好正士,
호랑이 가죽 좋아하듯 하네. 好虎皮相似.
살았을 때는 죽이려 들다가 生前欲殺之,
죽은 뒤에야 아름답다 일컫는구나. 死後方稱美.

강민우: 율곡선생은 당대의 인물에 대해 매우 폭넓은 평가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다보면,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한 평가가 상대방에게 너무 아프게 주어질 수도 있으며, 또한 객관적인 평가에 엄격할수록 온전한 사람이 남아 있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군왕에서부터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앞 시대의 인물과 당대의 인물에 대한 폭넓은 평가는 율곡선생의 업적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

황주 기생 유지(柳枝)를 사랑하다

 

(8) 황주 기생 유지(柳枝)를 사랑하다

강민우: 선생님은 밤낮으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였던 정치가요, 자신을 닦고 학문을 연마하였던 학자였지만, 또한 벗과 어울려 술과 유람을 즐기고 꽃과 자연을 사랑하였던 시인이기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저는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취하는 일은 없으나, 반가운 벗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는 운치를 즐깁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꽃에 대해서도 세심한 애정을 보이셨지요.

율곡: 진(晉)나라 때 유명한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사랑했던 국화꽃에 애정을 가졌으며, 술잔에 국화꽃잎을 띄우고 지었던 시가 있습니다.

서리 속의 국화를 사랑하기에 爲愛霜中菊,
노란 꽃잎 따서 술잔에 가득 띄웠네. 金英摘滿觴.
맑은 향기 술맛을 돋우고, 淸香添酒味,
수려한 빛깔 시인의 정취를 적셔주네. 秀色潤詩腸. (「泛菊」)

강민우: 서리 속에 핀 국화를 보면서 국화의 꽃잎을 술잔에 담아 함께 마시다가, 국화꽃의 맑은 향기에 도취되어 시적인 정취가 솟아난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저는 도연명이 국화 꽃잎을 따며 읊었던 시나, 굴원(屈原)이 국화꽃을 맛보았다는 시를 생각하면서, 국화와 정담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꽃은 아니지만 ‘말을 알아듣는 꽃(解語花)’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기생입니다. 율곡선생이 황해도 황주(黃州) 기생 유지(柳枝)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사실입니까.

율곡: 제가 39세 10월부터 40세 3월 사이에 황해도 관찰사로 있는 동안, 황주로 순찰을 나갔을 때 기생 유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유지는 선비의 서녀(庶女: 첩의 딸)로서 어머니가 기생이어서 기생이 되었는데, 당시 16세가 채 못되는 어린 기생이었습니다. 유지는 잠자리도 제공하는 방기(房妓)로 와서 저를 모셨는데, 참으로 자색이 고왔습니다.

강민우: 그 뒤로 율곡선생님이 원접사(遠接使)로 사신을 맞이하러 지나가는 길이나, 둘째누님을 뵙는 일로 황주를 왕래할 때면, 유지가 언제나 선생님을 모시고 싶어했다지요.

율곡: 제가 촛불을 밝히고 더 이상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유지사(柳枝詞)」를 지어주면서 은근하게 정(情)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후인들은 이러한 율곡선생의 태도에 대해 ‘사이좋게 어울리면서도 방탕하지 않았다’고 평하기도 합니다.(李有慶; 「遺事」) 유지에 대한 기록은 율곡문집에 실려 있지 않지만, 후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논의한 일이 있습니다. 박세채(朴世采)에 따르면, “율곡이 47세 때 원접사로 황주에 도착했을 때 황주 군수가 유지라는 재주와 자색이 뛰어난 기생을 침실로 보냈는데, 율곡은 유지에게 ‘너의 재주와 자색을 보니 매우 사랑스럽지만, 다만 한번 사사롭게 만나면 의리상 마땅히 데리고 살아야 하니,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내보냈다고 한다. 그 후에 율곡이 해주에 살 때 유지가 밤중에 멀리서 찾아왔는데, 율곡은 「유지사」 한편을 지어주고 물리쳤다”는 내용입니다.

율곡: 그런 소문이 있었군요. 사실 저는 40세의 중년으로 16세의 어린 유지를 처음 만났을 때 시를 지어주었고, 48세 때에도 24세의 성숙한 유지를 앞에 두고서 밤새 정담을 나누며 「유지사」와 3편의 시를 지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 수의 시를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타고난 자태 가냘퍼 선녀처럼 어여쁘고, 天姿綽約一仙娥,
십년을 알고지내니 정분도 깊어졌네. 十載相知意態多.
오(吳)땅 소년처럼 마음이 목석같아서가 아니라, 不是吳兒腸木石,
다만 병든 쇠약한 몸이라 향기로운 꽃 사양하네. 只緣衰病謝芬華. (「제목없음」)

강민우: 이 시를 보면 율곡선생이 유지를 깊이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시도 율곡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당시에 율곡선생의 친우들 사이에는 잘 알려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선생의 유지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이어서 율곡선생께서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내용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율곡의 화려한 관직생활

 

(7) 율곡의 화려한 관직생활

강민우: 율곡선생의 관직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율곡: 저는 29세 때 호조 좌랑(戶曹佐郎: 정6품)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선 이후, 48세 때 마지막 관직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대사간(大司諫: 정3품당상)과 대사헌(大司憲: 종2품)으로 언로(言路)를 담당하였으며, 정2품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지냈습니다. 또한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判書)에 다섯 차례에 임명되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종1품)에까지 올랐으니, 저의 화려한 관직생활을 보면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강민우: 정1품, 종1품과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곡: 이것은 조선시대 벼슬의 품계입니다. ‘정’과 ‘종’이 번갈아 나오는데, 정품과 종품 중에서 ‘정’이 높습니다. 품계는 9품까지 않으며,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번갈아 종9품까지 가니 모두 18품계입니다. 정1품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고, 종1품은 좌찬성․우찬성이며, 정2품은 6조(六曹: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판서나 홍문관 대제학이고, 종2품은 6조의 참판과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입니다. 또한 정3품부터는 당상관으로 고위 공직입니다.

강민우: 오늘날 공무원에 1급에서 9급까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날의 직급과 비교하면, 정1품은 국무총리급, 종1품은 부총리급, 정2품은 장관급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율곡: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관직생활의 초기인 34세 때부터 벼슬에 물러날 뜻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저는 개혁정치를 위해 임금에게 많은 진언을 하였으나 임금이 저의 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음을 알고는,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가지고 병을 핑계로 끊임없이 사직상조를 올려 물러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40대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기간이 더 길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민우: 그럼에도 선조임금은 율곡선생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잇달아 중책을 제수하며 붙잡으려 애를 썼던 것이죠.

율곡: 저는 관직에 있는 동안, 잠시도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던 적이 없습니다. 저의 관직생활은 국가제도의 폐단을 개혁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대책을 강구하여 잇달아 상소(疏, 箚, 啓)를 올리는 치열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올렸던 무수한 상소문 가운데 소(疏)․차(箚) 52건, 계(啓) 20건이 문집인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집니다. 소․차․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율곡: 소(疏)․차(箚)․계(啓)는 모두 상소문의 일종입니다. 상소는 임금에게 올리는 각종의 글을 총칭하는 말인데, 그 내용과 형식에 따라 소(疏)․차(箚)․계(啓)․의(議) 등으로 분류됩니다. 상소(上疏)는 글을 써서 간언하는 것으로, 보통의 상소문이며 봉사(封事)라고도 합니다. 차자(箚子)는 상소보다 간단한 형식으로 구체적 사실을 올리는 글로, 주자(奏箚)․차문(箚文)․차(箚)라고도 합니다. 계(啓)는 지방 장관 또는 관원이 임금이나 중앙관청에 올리는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성격의 글입니다. 의(議)는 정책에 대한 입안을 돕기 위하여 올리는 건의에 가까운 형식의 글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처음에 올렸던 상소는 어떤 것입니까.

율곡: 제가 처음 올렸던 상소는 30세(1565) 때 명종(明宗)의 생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던 문정(文定)왕후의 후원 아래, 불교중흥운동을 일으켰던 승려 보우(普雨)를 배척하는 상소였습니다. 저는 보우를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건의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단연코 죄가 없다고 하시고 끝내 보우를 내쫓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선비의 기상을 꺾어 국운이 손상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論妖僧普雨疏」)

강민우: 율곡선생은 ‘의리를 밝히고 정도(正道)를 회복해야 한다’는 선비들의 공론(公論)을 제시하는데 전면에 나섰던 것이군요.

율곡: 제가 사실상 관직에서 활동하던 마지막 해인 48세(1583) 때는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때에도 저는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해있음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만약 뛰어난 재능과 성현의 학문을 가진 사람이 출현하여 세상의 인심을 진정시키고 세상의 도리를 만회하지 않는다면, 비록 전하의 밝은 지혜로도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어지는 형세를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陳情乞退疏」)

강민우: 율곡선생이 제시한 개혁과제에 대해, 당시의 관료들은 관습에 안주하여 한결같이 반대하였던 것이겠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조세제도(貢案)를 변경하는 것은 불편하다 하고, 여러 고을에 정원 외의 군사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곡식을 바침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고, 서얼(庶孽: 첩이 나은 자식)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것은 불가하다 하며, 성과 보루를 다시 쌓는 것은 필요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의 개혁정책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오히려 비현실적인 정책으로 배척하셨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뒤에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안정시킬’ 대책을 강구할 때는 율곡선생이 제시한 이 다섯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서야 율곡선생이 얼마나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인지를 알았던 것이죠.(李命益, 陽川覆瓿稾)

율곡: 저는 병조판서로서, 당시 외적의 침략에 나라를 방어할 기반이 상실된 것을 지적하고, 선조 임금에게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군사와 식량이 모두 궁핍하여 작은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더라도 온 나라가 동요하는데, 만일 큰 오랑캐가 침입해 온다면 비록 지혜있는 사람이라도 이를 막을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 저는 당면한 시무(時務: 시급한 일)로서 ①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할 것, ②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③재정을 풍족히 할 것, ④변방을 견고히 할 것, ⑤군사용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⑥교화(敎化)를 밝힐 것을 제시했습니다.(「六條啓」)

강민우: 이때 율곡선생은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자’는 이른바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셨군요.

율곡: 저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10년이 못 가서 흙이 무너지듯이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도성(都城)에 2만 명을 배치하고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며, 그들에게 조세를 덜어주고 무예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서 위급할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일반 백성을 몰아서 전투하게 됩니다.”(「연보」)

강민우: 이때 율곡선생의 친우인 유성룡(柳成龍)도 태평시대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재앙의 단서를 기르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죠. 유성룡이 ‘태평시대에는 임금에게 성학(聖學)을 권면해야 할 것이지 군사의 일은 급선무가 아니다’고 나무라자, 율곡선생은 “속된 선비가 어찌 시무를 알겠는가”라고 하며 웃었다지요. 이때로부터 9년 뒤에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엄청난 시련을 겪고 난 다음에야, 율곡선생이 주장한 ‘십만양병설’이 얼마나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곡: 당시 조선사회의 여건에서 ‘십만양병설’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십만양병설’은 이 시기에 군사적 방어대책에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사망하시기 전인 48세(1583) 한해는 촛불이 다 타고나서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가장 밝게 타오르듯이, 관직생활에서 그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때였었죠.

율곡: 그해 1월부터 6월까지는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이미 1월에 저는 병이 심하여 병조판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퇴 상소를 올리면서도, 동시에 폐단을 개혁하고 군대를 양성할 계책을 강구했습니다. 이때 마침 북쪽 변경에 여진족이 침략해왔다는 급보가 있어서, 더 이상 사퇴하지 못하고 병조판서로 나가서 변경의 업무를 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북쪽의 여진족이 또다시 쳐들어와 2만여 군사로 종성(鍾城: 함경북도 동북부)을 포위하는 등 상황이 매우 급박했습니다.

강민우: 이때 임금의 승인도 받지 않고 권력을 멋대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배경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율곡: 저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밤낮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보급물자를 조달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이때 북쪽 변경으로 나가는 군사들이 타고 갈 군마(軍馬)를 마련하는 어려움에 처하자, 군마의 조달을 위해 3등 이하의 사수(射手)들에게 말을 바치면 동원을 면제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치는 자가 많았으며, 이에 군사들이 신속하게 변경으로 출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임금의 승인을 받기 전에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승인도 받지 않고 권력을 멋대로 행사였다는 비난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당시 분열하여 서로 배척하는데 급급했던 정치적 분위기를 보면서 물러날 뜻을 굳히고 시골로 돌아가셨던 것이군요.

율곡: 병조판서에서 물러나 배를 타고 해주로 내려가면서 읊었던 시가 한 수 생각납니다.

사방 멀리까지 먹구름 짙은데, 四遠雲俱黑,
중천에 태양만이 바르고 밝구나. 中天日正明.
외로운 신하의 한줌 눈물, 孤臣一掬淚,
한양성을 향해 뿌리누나. 灑向漢陽城. (「去國舟下海州」)

강민우: ‘사방의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여 있다’는 것은 당쟁에 빠져든 당시의 정국이 얼마나 암담한 상황이었는가를 말해줍니다. 시골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서도 고개는 서울(임금)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 율곡선생의 나라를 걱정하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율곡: 제가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를 그만두고 해주로 내려간 뒤에, 친우 성혼(成渾)은 탄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는 다시 저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太學生)들이 저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선조 임금도 저를 배척하던 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박근원(朴謹元) 등을 유배 보내면서 저의 무죄를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당쟁의 격류 속에서 정치적 대립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48세(1583)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군요.

율곡: 저는 그해 10월에 조정에서 나와 생애의 마지막 관직인 이조판서의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이조판서는 인재를 천거하여 등용시키는 책임이 있는데, 동인․서인의 대립이 격렬한 가운데 양쪽을 조정하고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 당파를 수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양편이 서로 배척하는데 나만 유독 입이 닳도록 변론하니, 진실로 선비의 무리가 화합하지 않으면 끝내 나라를 다스려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연보」) 저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동인․서인의 대립을 조정하는데 강한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율곡이 동인․서인의 화합을 위해 상소를 올리고 여러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동인․서인 양쪽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고, 뒤에는 ‘서인을 옹호한다’는 동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 사이에 당파적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율곡: 저는 사화(士禍)의 시기가 끝나고 선비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림들이 당파로 분열하여 당쟁(黨爭)을 벌이는 당쟁시대에 빠져들었습니다.

강민우: 당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율곡: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면서 시작됩니다. 먼저 김효원이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되자, 심의겸은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김효원은 결국 이조전랑이 됩니다. 그 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외척임을 들어 반대합니다. 이때부터 사림들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東人)으로 갈라져서 대립하였는데, 이로써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로써 사림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민우: 복잡한 국정의 일은 이것으로 마치고 선생님의 사랑(연애)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의 벗-성혼(成渾)

 

(6) 평생의 벗-성혼(成渾)

강민우: 선생님의 친우관계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누구랑 가장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율곡: 저는 당시 여러 인물들과 폭넓게 사귀었습니다. 저의 친우 가운데는 뛰어난 인물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가까웠던 인물을 꼽는다면 성혼(成渾)․정철(鄭澈)․송익필(宋翼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넷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교우관계가 매우 활발하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친구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 한명을 꼽으라면 누가 되겠습니까.

율곡: 성혼(成渾, 1535~1598)입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와 성혼은 모두 파주에 살아 거리가 멀지 않고, 또한 성혼의 아버지는 당시에 명망 높은 학자여서 자주 만날 기회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성혼은 율곡선생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데도, 처음 율곡선생을 만나보고 “그 학문의 탁월함에 감탄하여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율곡선생이 굳이 사양하여 친우가 되었고, 서로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였다”(「연보」)라고 들었습니다.

율곡: 제가 성혼과 저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학문의 경지를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지만, 품행의 독실함과 지조의 확고함은 내가 미치지 못합니다.”(成渾, 「牛溪年譜」)

강민우: 서로의 장점을 깊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교우였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의 학문(성리학) 토론은 주로 성혼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졌으니, 성혼은 율곡선생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동반자가 되겠군요.

율곡: 저는 과거에 급제하여 29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갔으나, 성혼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 집중했습니다. 제가 33세(1568) 때에 경기감사가 성혼을 추천하려고 하자, 제가 만류한 적이 있습니다. “성혼은 학자이니, 마땅히 그가 학문을 성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연보」) 저는 성혼이 벼슬길에 나와 출세하기 보다는 학문을 크게 성취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성혼에게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의 벗’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율곡: 저와 성혼은 우정이 깊어 만나면 밤을 새며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43세(1578) 세모(歲暮: 한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저는 문득 친우 성혼이 보고 싶어 소를 타고 눈길을 뚫고 찾아가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읊은 시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 해는 저물고 눈은 산에 가득한데, 歲云暮矣雪滿山,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 속으로 갈라졌네. 野逕細分喬林間.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나, 騎牛聳肩向何之,
우계 냇가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서라네. 我懷美人牛溪灣.

강민우: 율곡선생과 성혼 사이에 얽힌 일화도 많이 전해진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언젠가 둘이서 화석정(花石亭) 아래 임진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뱃놀이를 했는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 위험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제가 뱃머리에서 태연스럽게 시를 읊조리자, 성혼이 놀란 목소리로 “어찌 변고에 대처하려 들지 않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우리 두 사람이 어찌 물에 빠져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尹宣擧, 「魯西記聞」)

강민우: 성혼이 언제나 조심하고 근신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율곡선생은 천명(天命)에 대한 확신 속에 대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차이는 정철의 생일잔치 때도 보입니다. 성혼과 함께 정철의 생일잔치에 갔는데, 기생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성혼은 기생이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머뭇거리자, 율곡선생이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하나의 도리라네.”(「牛溪言行錄」)라고 하고, 태연하게 나아가 자리에 앉았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도 성혼의 조심하고 삼가는 자세와 율곡선생의 거리낌 없는 대범한 자세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율곡: 성혼은 저의 천재성이 독서 역량으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무릇 책을 볼 때에 남과 담소하면서 대강대강 마치 폭풍우처럼 빨리 보아 넘기지만, 이미 그 대의(大義)를 터득하여 그 뒤에 다시 차분히 살펴보더라도 새롭게 더 진취되는 것이 없다.”(成渾, 牛溪文集)라고 하며, 저의 타고난 민첩함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언젠가 율곡선생이 성혼에게 독서할 때에 몇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지요. 이때 성혼은 7-8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간다고 대답하자, 율곡선생은 “자신은 10여 줄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을 뿐이다.”(成渾, 牛溪言行錄)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한꺼번에 두 줄도 읽을 수 없는데, 7-8줄을 읽는 것도 대단하지만 10여 줄을 읽어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성혼이 율곡선생을 찾아갔는데 시경(詩經)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올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물었더니, 율곡선생은 사서(四書)를 각각 아홉 번씩 읽고, 시경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성혼이 이 말을 듣고 “나는 집수리 하느라, 집안 일하느라, 손님 접대 하느라, 1년 내내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성취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물러나면서 전진하기를 도모하는 격이다.”(成渾, 牛溪日記)라고 자신을 반성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율곡선생의 학문 역량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율곡: 그저 매일매일 성인이 되기 위해 성현의 글을 열심히 익혔을 뿐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성혼은 선생님과의 30년 우정을 돌아보며 “평소에는 율곡이 병 많은 나(성혼)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는데, 거꾸로 나는 살아남고 율곡이 먼저 죽었다”라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혼은 율곡선생과의 교유과정을 돌아보면서 “늘그막에 와서 마음이 서로 부합하고 정이 더욱 깊어졌으며, 만약 율곡이 없었다면 내가 자립하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成渾, 「祭文」)라며, 율곡선생이 자신의 학문적 성장과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진솔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성혼은 율곡선생을 벗으로서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속에 스승으로 모시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곡: 저 역시 성혼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혼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가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강민우: 성혼은 율곡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율곡선생이 자신을 깨우쳐주었던 스승임을 새삼 깨닫고, 뒤늦게 율곡선생의 기일(忌日)이 되면 먼저 죽은 벗을 위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성혼은 율곡선생의 서자 중의 첫째 아들인 이경임(李景臨)에게 “율곡은 참으로 5백년 사이에는 흔치 않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내가 젊어서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늙어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었다. 기일(忌日: 제삿날)에 소복을 입는 일을 예전에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작했다.”(「연보초고)라고 말했다 합니다. 성혼이 율곡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율곡: 제가 성혼과 벗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을 뵙게 되었는데, 25세(1560) 때 파주에서 68세의 그 분을 찾아뵙고 시를 지어 올렸던 일이 있습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은거하던 선비입니다. 저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아버님이기도 한 성수침을 몹시 존경했습니다. 제가 29세(1564) 때 성수침이 돌아가시자, 빈소에 찾아가 애도하는 마음으로 올린 시가 있습니다.

산악의 정기 길러낸 큰 인물 당당하여, 嶽精偏毓碩人頎,
이에 온 유림의 본보기 되셨네. 坐使儒林仰羽儀.
평생 장부의 눈물 다 쏟으니, 滴盡平生壯夫淚,
이 자리 아니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리. 非斯爲慟爲伊誰. (「哭聽松成先生」)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은 성수침을 위해 제문(祭文)을 짓고 또 뒤에 행장(行狀)을 지었던 것이군요.

율곡: 저는 행장에서 성수침의 학문에 대해 “자신을 반성하는데 힘썼고 일찍이 남에게 함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도(道)란 큰 길과 같고 성현의 가르침은 해나 별처럼 환하게 비추니,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말만 하는 학문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하였다.(「聽松成先生行狀」)”라고 하여, 그분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의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과거시험마다 장원하다

 

(5) 과거시험마다 장원하다

강민우: 율곡선생을 떠올리면 가정 먼저 생각나는 것이 구도장원(九度壯元)입니다. 율곡선생은 어떻게 시험을 볼 때마다 장원할 수 있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율곡: 저는 13세 때 소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21세 때(1556) 다시 소과 초시인 한성시(漢城試)에서 책문(策文)으로 시험을 보았을 때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진사시’는 조선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입니다. 이것을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부릅니다. ‘한성시’는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 선비들이 처음으로 응시하는 과거의 첫 관문입니다. ‘한성시’ 역시 ‘진사시’와 마찬가지로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강민우: 이때부터 선생님의 천재적 재능이 과거시험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군요.

율곡: 23세(1558) 때 예안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고 강릉 외가에 갔다가 돌아와,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또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별시’는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시험인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합니다. 이때 답안으로 제출했던 것이 「천도책(天道策)」입니다.

강민우: 이때 제출한 「천도책」에 관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鄭士龍)․양응정(梁應鼎) 등은 율곡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 “우리는 며칠 동안 고민해서 이러한 시험문제를 낼 수 있었는데, 율곡은 짧은 시간에 쓴 대책(對策: 어떤 일에 대처할 방책)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연보」)라고 감탄하였다죠.

율곡: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강민우: 「천도책」에 관한 또 다른 일화도 전해집니다. 뒷날 율곡선생이 47세(1582) 때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종1품)에 올랐으며, 그해 10월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의주(義州) 압록강변에서 황홍헌(黃洪憲)․왕경민(王敬民) 등의 사신을 맞이하였을 때, 명나라 사신이 율곡선생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인가”(「연보」)라고 물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과시험의 답안으로 작성한 율곡선생의 「천도책」이 명나라에도 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천도책」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율곡: 「천도책」에서는 자연현상으로서 해와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의 현상, 바람․구름․안개․우레․벼락․서리․이슬․비․우박의 현상 등을 물었습니다. 또한 세상사의 온갖 현상에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 어그러졌기 때문인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고, 별이 제자리를 잃지 않으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으며,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않고, 풍해와 수해가 없이 천지가 안정되어 만물이 생육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강민우: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을 물었던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이 책문에 대한 대책으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온갖 조화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 활동하는 것은 양이 되고, 고요한 것은 음이 됩니다. 한번 활동하고 한번 고요한 것은 기(氣)이고, 활동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리(理)입니다.”

강민우: 모든 자연현상을 음양의 기와 기를 주재하는 리의 작용으로 해석하셨군요. 이것은 결국 세상사의 온갖 현상을 리(이치)와 기(형체)의 두 범주로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기론에 따른 것이군요.

율곡: 결국 음양이 조화로우면 자연현상은 모두 절도를 잃지 않아 만물이 생육하지만,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면 자연현상이 절도를 잃어서 풍해․수해․우레․벼락과 같은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다”라고 하여, 자연의 운행질서에 인간의 도덕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때 자연의 질서를 천도(天道)라고 부르고, 인간의 도리(도덕성)를 인도(人道)라 부르기도 합니다.

강민우: 여기에서 인간 도덕성을 천도의 질서에 근거지어 설명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옛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면, “재앙과 변괴는 태평성대와 같은 치세(治世)에는 나타나지 않고, 일식과 월식의 이변은 다 말세(末世)의 쇠퇴한 정치에서 나왔습니다. 이로써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서로 합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임금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방을 바르게 하여야 하니,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바릅니다.”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는 것이 모두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덕을 닦는데 달려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민우: 임금이 덕을 닦아야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뿐만 아니라, 자연질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강민우: 소과(小科)에서 시험관이었던 유홍(俞泓)이 율곡선생을 장원으로 뽑으려 하자, 시험관 가운데 어떤 사람이 젊어서 불교의 선(禪)을 배운 것을 문제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율곡: 이때 유홍은 “학문에 처음 나아갔을 때의 과오는 정자(程子: 정호․정이)․주자(朱子: 주희)도 면치 못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미 바른 길로 돌아왔는데, 또 무엇을 허물하랴.”라고 하면서 저를 적극 변호하여 결국 장원으로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張維, 「谿谷集) 그해 8월에는 명경과(明經科) 곧 대과(大科)에도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郎: 정6품)의 벼슬을 제수받았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전후 과거시험에 모두 아홉 번 장원을 하셨죠.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에 거리에 놀던 아이들은 율곡선생이 타고 가는 말을 둘러싸고 ‘아홉 번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확실히 선생님의 천재성은 가장 먼저 과거시험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제가 대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자, 명종(明宗) 임금께서 저를 대궐로 불러서 「석갈등룡문(釋褐登龍門)」이라는 제목으로 30운(韻)의 시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시를 지어 올렸고, 임금은 크게 칭찬하고서 후하게 상을 내려주셨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의 뛰어난 재주의 명성이 임금에게까지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몇 구절 소개해주세요.

율곡: 원래 60행의 장시(長詩)인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록 구함이 어찌 잘 먹고 살자는 것이랴, 干祿豈懷求餔啜,
미약한 재주나마 임금님 보필하기 바람일세. 補天深願效埃涓.
깊은 계곡에 임한 듯 조심하고, 競競怳若臨深谷,
큰 냇물 건너듯 두려워해야지. 戰戰茫如涉大川.
(…) (…)
비와 이슬의 혜택 빈궁한 민가 널리 적시고, 雨露普霑圭蓽戶,
광명은 화려한 자리만 비추지는 말아야 하며, 光明莫照綺羅筵,
제왕의 사업 한없는 백성 사랑이 가장 중하고, 盈成最是無疆恤,
임금의 큰 덕 중단 없이 하늘을 따라야 하네. 廣運宜追不息乾.
(…) (…)
거리마다 임금님 덕 노래하길 원하노니, 願效康衢歌帝則,
태평성대 노래 소리 어찌 큰 문장 기다리랴. 頌聲奚待筆如椽. (「釋褐登龍門」)

강민우: 이 시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벼슬에 나아간 뜻이 자기 한 몸의 부귀영화에 있지 않고 임금을 보필하여 치도(治道)를 실현하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벼슬에 임하는 자세로서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를 보여줍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임금의 은택이 가난한 백성에까지 두루 미치고 고귀한 신분에만 비추지 않아야 하며, 또한 임금의 일은 백성들을 끝없이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면 거리마다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져 고묘한 문장으로 글을 짓는 일이 필요 없는, 즉 아름답게 꾸며내는 말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 시에서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신하의 도리와 임금의 도리, 특히 임금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일찍부터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가정은 매우 곤궁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선생이 부제학(副提學: 정3품)으로서 파평(坡平)에 물러나 쉬고 있을 때, 최황(崔滉)이 지나는 길에 그를 찾아뵙던 일이 있습니다. 밥상을 받았는데 반찬이 너무도 초라하여 최황은 젓가락을 대지 못하고서 “어떻게 이런 곤궁한 생활을 참아내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율곡선생은 “느지감치 먹으면 맛없는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崔濬, 「滄浪寓言」)

율곡: 저는 그저 제 분수에 맞는 생활했을 뿐입니다. 옛날 성인들은 한결같이 빈곤한 가운데서도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편안하게 도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 집안에 남아있는 재물이 없어 염습(斂襲: 시신을 씻기도 수의를 입히는 일)을 위한 의복은 친구들의 부조를 받아서 마련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서울에 머물 때에도 언제나 남의 집을 세내어 살았으므로 처자가 의탁할 곳이 없어 제자들과 친구들이 비용을 내어 집을 사서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연보」) 율곡선생이 평생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율곡선생은 가정생활이 매우 곤궁함에도 그 곤궁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야말로 ‘안빈낙도’의 생활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임금이 부의(賻儀: 조의금)를 특별히 후하게 내려주셨고,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발인하던 날에는 송별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그 곡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다고 합니다.(「연보」) 3월 20일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기슭 부모님 묘소 가까운 자리에 장사지냈습니다. 율곡선생 사후 40년이 되던 해(1623)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성(文成)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방에서 율곡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도록 청원해왔는데, 숙종 7년(1681)에 문묘배향이 허락되어 이듬해부터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문묘에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당쟁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숙종 15년(1689)에 율곡선생의 문묘 제향이 철회되었다가, 숙종 20년(1694)에 다시 문묘에 배향되는 변동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율곡: 저는 죽기 전인 48세 한 해 동안 병조판서로서 여진족의 변경침범을 막아내고 이조판서로서 당쟁을 조정하는 인사에 몰두했으나, 그 이듬해 49세(1584) 때 정월 초부터는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1월 14일 관북(關北) 순무어사(巡撫御史)의 명을 받고 나가는 친우 서익(徐益)을 위해 방책을 알려주고자 병이 위중하다고 자제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는 국가의 시급한 일이니,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다”라고 하고, 부축을 받고 앉아서 말하는 방책을 이우(李瑀)에게 받아 적게 했습니다. ①임금의 어진 덕을 선양할 것, ②복속한 오랑캐 부족을 안무할 것, ③우리 임금의 위엄을 펼칠 것, ④배반한 오랑캐를 제압할 것, ⑤사신들의 비용을 줄이어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것, ⑥장수들의 재주를 미리 살펴 위급한 일에 대비할 것 등 여섯 조목입니다.(「연보」)

강민우: 이것이 율곡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글이 됩니다. 그 이틀 뒤 1월 16일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종로구 仁寺洞, 寬勳洞 일대) 집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퇴계 이황을 만나다

 

(4) 퇴계 이황을 만나다

강민우: 선생님이 퇴계선생을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퇴계선생을 만나셨습니까.

율곡: 목적이 있어서 만난 건 아닙니다. 저는 22세 가을에 성주 목사인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이듬해 23세(1558) 봄에 장인을 찾아뵈러 성주(星州)로 갔다가, 다시 외할머니가 계시는 강릉 외가로 향했습니다. 성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는 안동이 있습니다. 저는 안동을 지나다가 퇴계선생을 뵈러 예안(禮安)을 찾았습니다. 저는 하룻밤 머물고 지나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부득이 이틀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강민우: 이렇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한 자리에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군요.

율곡: 이때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아직 낙성되지 않았을 때이니, 아마 계상서당(溪上書堂)으로 찾아갔을 것입니다. 퇴계선생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고서, 이듬해 46세(1546)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자신이 태어난 온계(溫溪) 인근에 단칸 서당을 짓고 학문도 하고 제자들도 가르쳤다. 이 온계의 다른 이름이 토계(兔溪)입니다. 이때부터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갈 퇴(退)로 고친 후 자신의 호로 삼습니다. 물러날 ‘퇴’와 시냇물 ‘계’, 즉 ‘시냇가로 물러난다’는 뜻의 ‘퇴계(退溪)’라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1551년(명종 6)에는 토계 건너편 산기슭에 계상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고, 계상서당도 좁아지자 1560년(명종 15)에는 지금의 위치에 도산서당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날 도산서원은 퇴계가 죽고 4년 뒤인 1574년(선조 7)에 퇴계가 세웠던 도산서당을 모체로 그 주변에 건립된 서원입니다.

강민우: 23세의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을 처음 찾아뵙을 때, 퇴계선생은 58세로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원로 석학이었으며, 율곡선생 역시 일찍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치던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을 일부러 찾아간 것이 아니고 지나가던 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는지 모르지만,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영민한 재주와 학식에 깊이 감탄하고 무척 반겼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율곡: 이때 퇴계선생은 수양론의 중심내용인 ‘하나에 전념하여 온갖 변화에 대응한다(主一無適, 酬酌萬變)’라는 구절의 뜻을 묻기도 하고,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 중용(中庸)의 도에 맞는지 여부를 묻기도 했습니다.(「연보초고」)

강민우: 수양은 자신을 닦는 것인데, 하나에 전념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율곡: 조선의 국시는 유교입니다. 조선의 유교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유교와 성리학은 동일한 의미로 쓰입니다. 유교라 하면 곧 성리학을 가리킵니다. 성리학은 자신을 닦아서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때 자신을 닦는 것을 ‘수양’이라 하고, 수양에 관한 이론을 ‘수양론’이라 말합니다. 성리학의 수양론이 대표하는 두 축이 바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입니다. ‘격물궁리’는 오늘날 교육에서처럼 외적인 대상을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거경함양’은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성품(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것입니다. 이때 ‘거경함양’을 이루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일무적’입니다. 생각을 하나로 모아 딴생각이 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데, 이것이 주경(主敬)공부입니다. ‘주경’하면 내 마음 속에 본성을 보존하게 되고, 이때 주경은 거경(居敬)이라고도 부릅니다.

강민우: 그래서 ‘주일무적’이 수양공부의 중심 개념이 되는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저는 퇴계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불교에 빠져 금강산에 입산했던 사실까지 솔직히 털어놓고, 지금은 지난날의 잘못에서 벗어나 유학의 가르침으로 돌아왔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퇴계선생에게 학문의 방향을 묻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이 율곡선생을 보고 너무 좋아하자, 곁에 있던 제자들이 시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어떤 제자가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에게 올렸던 시를 가리키며 “그 사람이 이 시보다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퇴계선생은 그 자리에서 “아니다, 그 시가 그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여, 율곡선생의 재주와 인물에 대해 깊은 사랑과 기대를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율곡이 찾아왔는데, 그 사람됨이 시원스럽고 지식이 많으며, 또 우리 학문(성리학)에 뜻이 있으니 ‘후배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는 옛 성인(공자)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구려.”라고 하여, 율곡선생의 명석하고 해박한 학식과 민첩한 문장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율곡: 퇴계선생께서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셨군요.

강민우: ‘후배가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율곡: 이 글은 논어「자한(子罕)」편에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젊은 후배들은 나이가 젊고 의지가 강하므로 학문을 계속 쌓고 덕을 닦으면, 선배들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먼저 태어나서 지식과 덕망이 나중에 태어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선생(先生)이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 즉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후생(後生)입니다. 그런데 이 ‘후생’은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 즉 뒤에 태어난 사람인 후배들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고 한 말입니다. 공자가 ‘후생가외’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중 특히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안회(顔回)의 훌륭함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훌륭함을 공자가 안회의 학문과 재주를 칭찬한 것에 비유하셨던 것이군요.

율곡: 과찬이십니다. 저는 강릉으로 돌아간 뒤 그 해에, 퇴계선생께 두 차례 편지를 보내면서 대학(大學)의 해석에 관해 질문했으며, 퇴계선생도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이때 제가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퇴계선생이 보낸 답장과 함께 두 편의 시가 전해집니다. 퇴계선생은 저의 재주를 무척이나 아끼고 큰 기대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강민우: 또한 율곡선생은 퇴계선생께 편지를 올려 자신의 출처(出處)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특히 퇴계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셨죠.

율곡: 성합십도는 1568년 68세의 퇴계선생이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성왕(聖王: 훌륭한 임금)이 되는 학문과 수양의 핵심과 요령을 간명하게 정리하여 올렸던 작은 책자입니다. 이 책자는 10개의 그림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①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근거한 「태극도(太極圖)」, ②장재의 「서명」에 근거한 「서명도(西銘圖)」, ③주희의 소학에 근거한 「소학도(小學圖)」, ④대학에 근거한 「대학도(大學圖)」, ⑤주희의 백록동서원의 규약에 근거한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⑥정복심(程復心)의 「심통성정도」를 수정․보완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⑦공자의 인에 근거한 「인설도(仁說圖)」, ⑧정복심의 심학도에 근거한 「심학도(心學圖)」, ⑨주희의 「경재잠」에 근거한 「경재잠도(敬齋箴圖)」, ⑩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에 근거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입니다. 퇴계선생은 원래 「심학도」 뒤에 「인설도」를 두었는데, 제가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지적하자, 저의 견해를 받아들여 성학십도의 배열 순서를 수정하였습니다.

강민우: 결국 율곡선생의 지적에 따라 지금의 성학십도의 배열순서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퇴계선생께서 저를 칭찬만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옛 유학자의 견해에 일일이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하자, 퇴계선생은 “그대가 전후에 논변하는 것을 보면, 번번이 옛 유학자의 이론을 파악할 때에 반드시 옳지 않은 점을 찾아서 배척하는데 힘쓰고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게 한 다음에 그친다.”(「答李叔獻」)라고 하면서 저의 주장이 비판에 치우쳐 있음을 꾸짖어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바로 이 점에서 저는 율곡선생과 퇴계선생의 학문방법과 태도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논리적 정당성을 찾아 끝까지 비판적 분석을 추구해가는 율곡선생의 합리적 학문자세와, 다각적으로 이해를 추구하여 진실한 의미를 찾아내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해가는 퇴계선생의 실천적 학문자세로 구별됩니다.

율곡: 퇴계선생이 보여준 학문적 관심의 초점이 수양론에 있다면, 저는 주로 경세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리설에서도 퇴계선생은 리(理: 이치)와 기(氣: 형체)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이원론(二元論)의 경향을 보인 반면, 율곡선생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일원론(一元論)의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 성리학 논쟁의 두 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퇴계선생이 선비들이 집권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화(士禍)시대를 살았다면, 율곡선생은 선비들이 정권을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시대를 살았던 시대배경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그 시대에 대응하는 논리가 달라질 수 있고, 바로 이 점에서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철학이 달라지는 차이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성리설이 보여주는 두 철학적 관점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당파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야로서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철학을 함께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듯합니다.

율곡: 퇴계선생은 저보다 35세 연상으로 한 세대나 차이가 납니다. 퇴계선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머무를 때마다, 저는 여러 번 퇴계선생을 찾아가 만났고, 또 자주 편지 왕래도 하면서 학문적이나 인간적으로 깊은 교류를 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퇴계선생의 제자들 명단을 수록한 도산계문록(陶山溪門錄)에는 율곡선생을 퇴계선생 제자의 한 사람으로 등록하고 있군요. 그러나 율곡선생을 퇴계선생의 제자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매우 애매합니다. 직접 책을 들고 가서 배운 일이 없으니, 집지(執贄)의 제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집지’는 예전에 제자가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에 선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던 일을 말합니다. 이때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부릅니다.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을 존경하여 만나거나 편지로 문답을 하였으니, 비록 제자라 보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율곡: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따르는 종유(從遊)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계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제문(祭文)을 짓기도 했습니다. “소자(율곡)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마치 사나운 말이 가시밭과 황무지로 마구 달리듯 했는데, 이때 수레를 돌리고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공(公: 퇴계)께서 인도해주신 덕분입니다.”(「祭退溪李先生文)」) 저는 퇴계선생에게 받은 학문적 은공을 잊을 수 없으며,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을 스승으로 따르고 존경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와 종유(從遊)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율곡: 저는 35세(1570) 12월에 퇴계선생의 부고(訃告: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를 받고, 스승을 위한 심상(心喪)을 행하고, 또한 동생 이우(李瑀)를 시켜 제문을 가지고 가서 문상하게 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挽詩)에서 간절한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하셨죠. ‘만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시를 말합니다. 어떤 내용이셨죠.

율곡: 기억나는 부분을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범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 일 변했건만 虎逝龍亡人事變,
물결 돌리고 길 열으신 저서가 새롭구나. 瀾回路闢簡編新.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南天渺渺幽明隔,
서해 물가에서 눈물 아르고 창자 끊어지네. 涙盡腸摧西海濱. (「哭退溪先生」)

스물다섯 해 동안, 二十五年間,
미혹의 꿈속에 빠져 취했었네. 沈迷夢中醉.
어제의 잘못 되돌아보니 追思昨者非,
놀랍고 두렵기만 하구나. 令人發驚悸.
나 이제 단호히 맹세하노니, 我今痛自誓,
하느님께서 응당 듣고 보시리라. 昊天應聽視. (「至夜書懷」)

강민우: 율곡선생께서 퇴계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줄을 몰랐습니다. 퇴계선생과의 만남은 이정도로 하고, 선생님의 과거시험 장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율곡의 천재성

 

(3) 율곡의 천재성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49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정확하게 계산해보면 47년하고 21일간의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밝은 빛은 오래가기 어려운 것처럼, 천재적 자질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선생님의 천재적 자질은 3살 때 말을 배우면서 곧바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 등 여러 일화가 전해집니다.

율곡: 저는 강릉 외가에서 태어난 이후, 여섯 살(1541)에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서울에서 생활하다 강릉에 내려가면, 외할머니께서 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3살 때 말을 배우면서 곧장 글을 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살 때 인근의 스승에게 나아가 간략하게 기술한 역사책인 사략(史略)을 배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스승을 찾아가 글을 배우기도 하였으나, 주로 어머니한테서 글을 배웠습니다.

강민우: 일찍부터 천재성이 드러나 별달리 애쓰지 않고도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7세 때는 유학의 기본 경전인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 등을 비롯한 여러 경전과 역사서 등에 통달했다죠.

율곡: 저는 어려서부터 책읽기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책 속에 들어있는 성현의 말씀이 저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선대의 고향인 파주 율곡촌 인근 임진강 강변 언덕 위에는 저의 5대조인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정자로 화석정(花石亭)이 있습니다. 저는 화석정의 풍경을 좋아하여 즐겨 찾았으며, 그때 제가 손수 심은 노송나무 아홉 그루가 있었는데, 뒷날 모두 베어졌다고 합니다.(金平默, 重菴集, ‘花石亭, 次栗谷先生韻)

강민우: 8세 때의 가을에 화석정에 올라 시를 한 수 짓기도 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율곡: 그때를 회상하며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은 어느 덧 저무는데, 林亭秋已晚,
시인의 상념은 끝없이 일어나누나. 騷客意無窮.
멀리 흐르는 물 하늘에 닿아 푸르고, 遠水連天碧,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 향해 붉었네. 霜楓向日紅.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山吐孤輪月,
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네. 江含萬里風.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가는지, 塞鴻何處去,
저무는 구름 속에서 울음소리 끊어지네. 聲斷暮雲中. (「花石亭」)

강민우: 제자인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선생의 「행장」에는 “일찍이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그 격조가 높아 시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능히 따를 수 없었다”라는 시평을 남겼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유명세를 탔는지 짐작이 갑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17세기에 활동한 이식(李植)이라는 학자도 율곡선생님의 학문과 문장에서 보인 천재적 조숙함에 대해 “나면서부터 신비롭게 큰 뜻을 가졌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7세에 이미 경서에 통하고 글을 지었으며, 문장이 성숙하여 일찍이 이름이 사방에 알려졌다.”(李植, 「澤堂雜槀」)라고 평가했습니다. 한 마디로, 선생님의 소년시절 행적에 대한 기록들은 모두 천재적 자질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무 일찍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것이 오히려 일찍 돌아가게 된 사실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율곡: 저는 19세에 금강산에서 나와 강릉 외가에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이듬해 21세(1556) 봄에 서울로 돌아와 소과(小科) 과거시험인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여 책문(策文)을 시험보았는데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면서 벼슬에 나아갈 뜻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보셨던 과거시험은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해당되는 듯합니다. 공무원은 주로 국가의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합니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선생님은 ‘책문’이라는 주제에서 최고의 답안을 작성하셨습니다. 책문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요. 오늘날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율곡: 조선시대의 과거는 임금이 국정운영을 위해 필요한 인재를 선발하는 중요한 시험입니다. 과거시험은 여러 단계로 진행되는데, 시험의 최종 단계인 전시(殿試)에서는 임금이 직접 등용될 인재들에게 당시의 현안들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묻는 시험을 치룹니다. 이때 제시된 현안은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이 시험에서 예비 선발자들은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책들을 글로 쓰는데, 이 글을 책문(策文)이라 합니다.

강민우: 책문은 임금에게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당시의 시대적 현안에 대한 소신과 포부를 마음껏 펼치는 토론의 장이 되겠군요. 책문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습니까.

율곡: 책문은 임금이 제시한 제목에 대답하는 글이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에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臣對)”라는 말로 시작하며, “보잘것없는 말들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말씀드립니다”와 같은 식의 겸사를 쓰며, “신이 삼가 대답합니다(臣謹對)”라는 예를 갖춘 말로 마무리합니다. 또한 책문을 작성할 때는 반드시 사서(四書)․오경(五經)과 같은 유교 경전과 역사서에 근거하여 대답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헌들을 인용하여 이상적인 사회는 어떠해야 하며, 임금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립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마치고, 당시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선생과의 만남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