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세계-천지․만물․인간

 

(11)학문세계-천지․만물․인간

강민우: 율곡선생은 성을 기질 속에서 이해하니, 이것은 기(또는 기질)를 중시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 것처럼 보입니다. 먼저 기가 있어야 비로소 성이 기 속에 내재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이러한 이유에서 율곡선생을 주기론(主氣論)으로 평가하셨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은 기(또는 기질)를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율곡: 기질에는 바르고 치우친 차이(正偏), 통하고 막힌 차이(通塞), 맑고 탁한 차이(淸濁), 순수하고 잡박한 차이(粹駁) 등 다양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질이 지닌 성질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은 천지입니다. 치우치고 막힌 기질을 얻은 것은 사물입니다. 또한 바르고 통하는 기질을 얻었으나, 동시에 맑고 탁하며 순수하고 잡박한 정도에서 무수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강민우: 인간이 바르고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은 천지의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는 기질을 얻은 것과 비교하면, 수준의 차이가 보입니다. 인간의 수준이 천지의 지극함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율곡: 천지(하늘)와 인간 사이에 기질의 바르고 통하는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기질이 바르다(正)는 온전성에서 하늘과 일치하며, 통한다(通)는 소통성에서 하늘과 일치합니다. 이것은 하늘과 인간이 소통하고 일치함을 기질에서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또한 만물의 치우치고 막힌 기질은 인간의 바르고 통하는 기질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강민우: 만약 ‘성이 기질과 분리될 수 없다’는 율곡선생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만물 사이에 기질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성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다. 기질이 맑으면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도 기질에 가려지지 않고 잘 드러날 것이고, 기질이 탁하면 탁한 기질에 가려져서 기질 속에 들어있는 성도 잘 드러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곡: 저는 기질의 차이와 더불어 그 성이 지닌 성격의 차이에 주목합니다. 천지는 기질이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통하므로 성도 정해져서 변하지 않습니다. 만물은 기질이 지극히 치우치고 지극히 막혔으므로 역시 성이 정해져서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인간은 바르고 통한 기질을 얻었으므로, 지극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지극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가변적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인간의 기질에는 맑고 탁하거나 순수하고 잡박한 정도에 다양한 차이가 있으므로 기질이 변할 수 있다.”(「答成浩原」)는 뜻입니다.

강민우: 결국 인간의 기질이 변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性: 성품)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은 기질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이 지닌 기질 속의 성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악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한 설명이기도 하겠습니다.

율곡: 인간이 기질의 다양한 차이에 따라 성이 변할 수 있다면, 인간 사이에도 여러 차별상이 있게 됩니다. 저는 기질 속의 성이 지닌 차이에 따르는 인간의 차등에 주목합니다. 기질을 그릇에 비유하고 성을 물에 비유할 때, 성인은 깨끗한 그릇 속에다 물을 담은 경우이고, 중인(衆人: 일반인)은 그릇 속에 모래와 진흙이 있는 경우이며, 하등인은 진흙 속에 물이 있는 경우라 하겠습니다.(「論心性情」)

강민우: 율곡선생은 감정이 절도에 맞는지 여부도 성인․군자․상인(常人: 보통사람)이라는 인격의 차등을 구분하기도 하셨지요.

율곡: 성인은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군자는 감정이 간혹 절도에 맞지 않으나 의식은 절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며, 상인(보통사람)은 혹은 감정이 절도에 맞으나 의식이 맞지 않기도 하고 혹은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으나 의식이 절도에 맞기도 합니다. 제가 인격의 차등을 강조하는 것은 신분적 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질의 자기변혁을 통한 인격의 향상을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짐승(禽獸)의 성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었죠.

율곡: 물과 그릇의 비유에서 볼 때, 짐승의 성은 물과 결합된 진흙 덩어리로서 끝내 맑게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물에 비유된 짐승의 성은 이미 물기가 말라버린 진흙 덩어리이므로 맑게 할 수 없지만, 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속에 물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의 성은 마치 물기가 진흙으로 막혀있는 것처럼 기질에 막혀있지만, 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論心性情」)

강민우: 선생님은 짐승의 성이 부분적으로 통하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처럼 기질과 그 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보셨습니다.

율곡: 만물 가운데서 초목은 완전히 막혀있는데 비해, 짐승은 혹 한 가지 길에 통하기도 합니다. “범이나 이리에는 부모․자식의 친애함이 있고, 벌이나 개미에는 임금․신하의 관계가 있으며, 기러기에는 형제의 차례가 있고, 비둘기에는 부부의 구별이 있으며, 벌레는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 있지만, 모두 변하고 통할 수가 없습니다.”(「答成浩原」)

강민우: 18세기 초에 기호학파 안에서 ‘사람의 성과 사물의 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변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 보면, 율곡선생의 기질 속에서의 성에 대한 이해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는 이론(異論)의 입장을 취하는 듯합니다.

율곡: 동론이든 이론이든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신의 기질과 성을 변화시키는 수양의 실천과정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천지나 만물과 달리, 성이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성을 변화시키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텅 비고 영명하며 환하게 밝아서(虛靈不昧)’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탁한 기질을 맑게 하고 잡박한 기질을 순수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은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기질의 차이에 따라 인간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기질의 변화방법을 제시하였던 것이군요. 그 내용을 간단히 말씀해주십시오.

율곡: “‘기질이 맑고 형질이 순수한 자(氣淸而質粹者)’는 알고 행함을 힘쓰지 않고도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습니다. ‘기질이 맑고 형질이 잡박한 자(氣淸而質駁者)’는 알 수는 있지만 행할 수가 없으니, 몸소 행하는데 힘쓰기를 독실하게 하면 실천을 이루어 약한 자도 강하게 될 것입니다. ‘형질이 순수하나 기질이 혼탁한 자(質粹而氣濁者)’는 할 수는 있으나 알 수가 없으니, 학문에 힘쓰기를 반드시 정밀하게 하면 지식에 통달하여 어리석은 자도 밝아질 것입니다.”(聖學輯要)

강민우: 선생님은 인간의 기질을 세 가지로 구분하십니다. 첫째는 ‘기질이 맑고 형질이 순수한 자’로서 힘쓰지 않고도 알고 행할 수 있으니, 성인의 경지입니다. 다음으로 보통 사람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습니다. 하나, ‘기질은 맑으나 형질이 잡박한 자’는 지성이 뛰어나 알 수 있지만 의지가 약하여 실천할 수 없는 경우로서, 이때 행하는데 힘쓰면 실천을 이루어 유약한 의지도 강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형질은 순수하나 기질이 혼탁한 자’는 의지가 강하여 실천할 수 있지만 지성이 약하여 알 수 없는 경우로서, 이때 배우는데 힘쓰면 지식이 성취되어 어리석은 자도 지혜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율곡선생은 불완전한 기질을 변화시켜 나가는 방법을 다각도로 제시하셨습니다.

율곡: 비록 인간이 선을 지향하지만, 탁하고 잡박한 기질이 마음을 속박하고 물욕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성을 보존하고 기질을 교정하여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수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인간은 이러한 수양행위를 통해 ‘천지를 자리잡게 하고 만물을 양육하는(位天地育萬物)’ 이상적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강민우: 수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주로 누구를 표준으로 삼습니까.

율곡: 성인은 하늘(天地)을 준칙으로 삼고, 중인(衆人: 보통 사람)은 성인을 준칙으로 삼습니다.(「答成浩原」) 중인의 수양방법은 성인이 이미 성취한 법도를 증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인이 인격적 모범이 가야할 발자국을 남겨주었으므로, 중인은 하늘을 직접 마주하기 전에 자신보다 먼저 성취한 성인을 모범으로 삼고 이를 따라가는 실천이 요구됩니다.

강민우: 지금까지 율곡선생의 매우 독특한 개성과 선명한 인식을 보이는 심성론의 성격을 알아봤습니다. 그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해주셨으면 합니다.

율곡: 저의 심성론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입니다. 리․기와 같은 추상적 관념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합니다. 인심도심론이나 사단칠정론과 같은 것도 공허한 논쟁을 일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하나의 통합된 인간의 주체로서 심성론을 이해합니다. 인간의 심성이 사단-칠정, 인심-도심, 본연지성-기질지성 등 이원론의 형식으로 갈라지는 것에 반대하고, 일원론의 통합적인 사유를 강조합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이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발과 기발로 해석하는 즉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에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발 하나만을 인정하는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하셨군요.

율곡: 사단과 칠정이 구분되는 서로 다른 별개의 정이 아니라, 하나의 정이라는 것입니다. 정은 칠정 하나이며 그 가운데 선한 부분만을 지목하여 사단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강민우: 이러한 심성론은 그대로 수양론의 근거와 방법으로 연결되는 것이겠죠.

율곡: 저는 자신의 기질과 성품의 변화를 통하여 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성인(聖人)에 주목합니다. 수양론은 인간의 심성과 도덕 실천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특히 의(意: 의식)는 대학의 성의(誠意)와 같은 수양론의 체계와 연결되며, 그 작업이 성학집요의 편찬체계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강민우: 조선시대의 국시인 유교는 성리학을 그 철학적 기반으로 하며, 이 성리학은 16세기 중엽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을 통하여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성리학을 중세적 관념철학의 한 양상으로 규정하고 사회현실의 문제와 유리된 것으로 파악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율곡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율곡: 한 시대의 사회이념으로 규정되었던 철학이 그 사회적 관심과 연결될 수 없다면, 올바른 해석의 태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기도 억제해가기도 하며, 그 시대의 사회의식을 형성했던 중추로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사회에서 성리학은 단순히 송대(宋代) 이기(理氣)철학을 되새김질한 것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요구 속에서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과 퇴계선생은 성리설에서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여서 율곡학파(기호학파)와 퇴계학파(영남학파)라는 두 봉우리를 이루었지만, 그 성격은 시대현실 속에서 두 분의 고뇌와 사색을 통하여 발견했던 해답이라 할 수 있겠군요.

율곡: 퇴계선생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즉 ‘이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와 ‘기발이이승지(氣發而理乘之)’를 주장한 것도 거듭된 사화(士禍)를 거치는 시대 속에서 정의와 불의가 대립된 사회현실을 인식한 사실과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퇴계선생의 성리설에는 현실 속에 악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음에도, 악에 매몰되지 않는 순수한 선의 근원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이 퇴계선생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 것 역시 명종(明宗) 말기와 선조(宣祖) 초기에 훈구(勳舊)세력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찾는 시대적 분위기와 연관시킬 수 있겠습니다.

율곡: “선비가 뜻을 펼 수 없을 때는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고(獨善其身), 뜻을 펼 수 있을 때는 아울러 천하를 착하게 한다(兼善天下).”(맹자「진심상(盡心上)」)라는 맹자의 말처럼, 그 시대의 사회상황에 따라 삶의 태도가 결정됩니다.

강민우: 여기서 퇴계선생의 이원론적 입장이 ‘홀로 자신을 착하게 하는 것’에 속한다면, 율곡선생의 일원론적 입장은 ‘아울러 천하를 착하게 하는 것’에 속한다고 대조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계절에 비유하면, 퇴계선생은 겨울에 해당하고 율곡선생은 봄에 해당할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바깥 추위가 맹위를 떨치므로 더욱 단단히 생명을 감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봄이 와도 씨앗의 껍질만 지키고 있다면, 생명은 위축되고 소멸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껍질을 깨고 바깥세계에로 뻗어나가야 합니다. 바깥세계는 이미 생명의 적이 아니라, 자기실현의 무대인 것입니다. 이 바깥에서 햇볕과 물기와 영양소를 섭취해야 생명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성리설이 이원론이거나 일원론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적 전개과정에서 이원론일 수도 일원론일 수도 있는 것이겠군요.

율곡: 사회현실이나 시대상황이 철학적 입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결정을 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시대가 그 철학을 결정지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신이 현실을 파악하고, 이 현실과 이상을 조화시키는 방법으로서 철학(성리설)을 제기하였던 것입니다. ‘기발이승일도설’은 현실의 기가 리에 선행하는 것이라거나 기만이 작용하고 리는 무력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의 현실을 떠나서는 리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며, 모든 기의 작용 속에는 그 근거로서 리가 내재함으로써 리를 벗어나지 않는 기의 현실을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강민우: 18세기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은 “퇴계의 성리설이 인성론적이라면, 율곡의 성리설은 우주론적이다.”(與猶堂全書, 「理發氣發辨」)라고 하여, 두 입장을 대조시키기도 하였군요.

율곡: 퇴계선생의 이원론이 ‘현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저의 일원론은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대조시키는 것이, 시대적 맥락에서 양자의 입장을 보다 연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일원론은 이기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규정이기도 하지만, 사회현실의 당위적 과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율곡: “리는 작용이 없고(無爲) 기는 작용이 있다(有爲)”는 관점에서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한 것은 다양한 현상 속에 리(理: 이치)라는 근원성을 내재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현실의 세찬 물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신념의 철학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사회현실의 격류를 벗어나 강 언덕에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그 격류 속으로 뛰어들어 물길을 바로잡음으로써 ‘리가 타고 있다’는 이승(理乘)의 과제를 실현하였던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의 학문세계는 이 정도로 마치고, 이어서 개혁정책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