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화려한 관직생활

 

(7) 율곡의 화려한 관직생활

강민우: 율곡선생의 관직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율곡: 저는 29세 때 호조 좌랑(戶曹佐郎: 정6품)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선 이후, 48세 때 마지막 관직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대사간(大司諫: 정3품당상)과 대사헌(大司憲: 종2품)으로 언로(言路)를 담당하였으며, 정2품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를 지냈습니다. 또한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判書)에 다섯 차례에 임명되었으며,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종1품)에까지 올랐으니, 저의 화려한 관직생활을 보면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강민우: 정1품, 종1품과 같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곡: 이것은 조선시대 벼슬의 품계입니다. ‘정’과 ‘종’이 번갈아 나오는데, 정품과 종품 중에서 ‘정’이 높습니다. 품계는 9품까지 않으며,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번갈아 종9품까지 가니 모두 18품계입니다. 정1품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고, 종1품은 좌찬성․우찬성이며, 정2품은 6조(六曹: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판서나 홍문관 대제학이고, 종2품은 6조의 참판과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입니다. 또한 정3품부터는 당상관으로 고위 공직입니다.

강민우: 오늘날 공무원에 1급에서 9급까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날의 직급과 비교하면, 정1품은 국무총리급, 종1품은 부총리급, 정2품은 장관급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율곡: 조금 무리가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관직생활의 초기인 34세 때부터 벼슬에 물러날 뜻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저는 개혁정치를 위해 임금에게 많은 진언을 하였으나 임금이 저의 뜻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음을 알고는,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가지고 병을 핑계로 끊임없이 사직상조를 올려 물러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40대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기간이 더 길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민우: 그럼에도 선조임금은 율곡선생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잇달아 중책을 제수하며 붙잡으려 애를 썼던 것이죠.

율곡: 저는 관직에 있는 동안, 잠시도 편안하게 세월을 보냈던 적이 없습니다. 저의 관직생활은 국가제도의 폐단을 개혁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대책을 강구하여 잇달아 상소(疏, 箚, 啓)를 올리는 치열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올렸던 무수한 상소문 가운데 소(疏)․차(箚) 52건, 계(啓) 20건이 문집인 율곡전서에 수록되어 전해집니다. 소․차․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율곡: 소(疏)․차(箚)․계(啓)는 모두 상소문의 일종입니다. 상소는 임금에게 올리는 각종의 글을 총칭하는 말인데, 그 내용과 형식에 따라 소(疏)․차(箚)․계(啓)․의(議) 등으로 분류됩니다. 상소(上疏)는 글을 써서 간언하는 것으로, 보통의 상소문이며 봉사(封事)라고도 합니다. 차자(箚子)는 상소보다 간단한 형식으로 구체적 사실을 올리는 글로, 주자(奏箚)․차문(箚文)․차(箚)라고도 합니다. 계(啓)는 지방 장관 또는 관원이 임금이나 중앙관청에 올리는 공식적이고 사무적인 성격의 글입니다. 의(議)는 정책에 대한 입안을 돕기 위하여 올리는 건의에 가까운 형식의 글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처음에 올렸던 상소는 어떤 것입니까.

율곡: 제가 처음 올렸던 상소는 30세(1565) 때 명종(明宗)의 생모로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던 문정(文定)왕후의 후원 아래, 불교중흥운동을 일으켰던 승려 보우(普雨)를 배척하는 상소였습니다. 저는 보우를 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건의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단연코 죄가 없다고 하시고 끝내 보우를 내쫓지 않으신다면, 이것은 선비의 기상을 꺾어 국운이 손상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論妖僧普雨疏」)

강민우: 율곡선생은 ‘의리를 밝히고 정도(正道)를 회복해야 한다’는 선비들의 공론(公論)을 제시하는데 전면에 나섰던 것이군요.

율곡: 제가 사실상 관직에서 활동하던 마지막 해인 48세(1583) 때는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의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때에도 저는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해있음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만약 뛰어난 재능과 성현의 학문을 가진 사람이 출현하여 세상의 인심을 진정시키고 세상의 도리를 만회하지 않는다면, 비록 전하의 밝은 지혜로도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어지는 형세를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陳情乞退疏」)

강민우: 율곡선생이 제시한 개혁과제에 대해, 당시의 관료들은 관습에 안주하여 한결같이 반대하였던 것이겠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조세제도(貢案)를 변경하는 것은 불편하다 하고, 여러 고을에 정원 외의 군사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곡식을 바침에 따라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고, 서얼(庶孽: 첩이 나은 자식)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것은 불가하다 하며, 성과 보루를 다시 쌓는 것은 필요 없다고 반대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의 개혁정책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오히려 비현실적인 정책으로 배척하셨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뒤에 조정에서 ‘적을 막고 백성을 안정시킬’ 대책을 강구할 때는 율곡선생이 제시한 이 다섯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서야 율곡선생이 얼마나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인지를 알았던 것이죠.(李命益, 陽川覆瓿稾)

율곡: 저는 병조판서로서, 당시 외적의 침략에 나라를 방어할 기반이 상실된 것을 지적하고, 선조 임금에게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군사와 식량이 모두 궁핍하여 작은 오랑캐가 변경을 침범하더라도 온 나라가 동요하는데, 만일 큰 오랑캐가 침입해 온다면 비록 지혜있는 사람이라도 이를 막을 계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때 저는 당면한 시무(時務: 시급한 일)로서 ①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임용할 것, ②군사와 백성을 양성할 것, ③재정을 풍족히 할 것, ④변방을 견고히 할 것, ⑤군사용 전마(戰馬)를 준비할 것, ⑥교화(敎化)를 밝힐 것을 제시했습니다.(「六條啓」)

강민우: 이때 율곡선생은 ‘군사 10만 명을 양성하자’는 이른바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셨군요.

율곡: 저는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10년이 못 가서 흙이 무너지듯이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도성(都城)에 2만 명을 배치하고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며, 그들에게 조세를 덜어주고 무예를 훈련시켜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서 위급할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일반 백성을 몰아서 전투하게 됩니다.”(「연보」)

강민우: 이때 율곡선생의 친우인 유성룡(柳成龍)도 태평시대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재앙의 단서를 기르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죠. 유성룡이 ‘태평시대에는 임금에게 성학(聖學)을 권면해야 할 것이지 군사의 일은 급선무가 아니다’고 나무라자, 율곡선생은 “속된 선비가 어찌 시무를 알겠는가”라고 하며 웃었다지요. 이때로부터 9년 뒤에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엄청난 시련을 겪고 난 다음에야, 율곡선생이 주장한 ‘십만양병설’이 얼마나 탁월한 선견지명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곡: 당시 조선사회의 여건에서 ‘십만양병설’은 너무 비현실적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십만양병설’은 이 시기에 군사적 방어대책에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사망하시기 전인 48세(1583) 한해는 촛불이 다 타고나서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가장 밝게 타오르듯이, 관직생활에서 그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때였었죠.

율곡: 그해 1월부터 6월까지는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이미 1월에 저는 병이 심하여 병조판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사퇴 상소를 올리면서도, 동시에 폐단을 개혁하고 군대를 양성할 계책을 강구했습니다. 이때 마침 북쪽 변경에 여진족이 침략해왔다는 급보가 있어서, 더 이상 사퇴하지 못하고 병조판서로 나가서 변경의 업무를 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북쪽의 여진족이 또다시 쳐들어와 2만여 군사로 종성(鍾城: 함경북도 동북부)을 포위하는 등 상황이 매우 급박했습니다.

강민우: 이때 임금의 승인도 받지 않고 권력을 멋대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배경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율곡: 저는 당시 병조판서로서 밤낮으로 군사를 동원하고 보급물자를 조달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이때 북쪽 변경으로 나가는 군사들이 타고 갈 군마(軍馬)를 마련하는 어려움에 처하자, 군마의 조달을 위해 3등 이하의 사수(射手)들에게 말을 바치면 동원을 면제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말을 바치는 자가 많았으며, 이에 군사들이 신속하게 변경으로 출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임금의 승인을 받기 전에 내려진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승인도 받지 않고 권력을 멋대로 행사였다는 비난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당시 분열하여 서로 배척하는데 급급했던 정치적 분위기를 보면서 물러날 뜻을 굳히고 시골로 돌아가셨던 것이군요.

율곡: 병조판서에서 물러나 배를 타고 해주로 내려가면서 읊었던 시가 한 수 생각납니다.

사방 멀리까지 먹구름 짙은데, 四遠雲俱黑,
중천에 태양만이 바르고 밝구나. 中天日正明.
외로운 신하의 한줌 눈물, 孤臣一掬淚,
한양성을 향해 뿌리누나. 灑向漢陽城. (「去國舟下海州」)

강민우: ‘사방의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여 있다’는 것은 당쟁에 빠져든 당시의 정국이 얼마나 암담한 상황이었는가를 말해줍니다. 시골로 내려가는 배를 타고서도 고개는 서울(임금)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 율곡선생의 나라를 걱정하는 심정이 느껴집니다.

율곡: 제가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를 그만두고 해주로 내려간 뒤에, 친우 성혼(成渾)은 탄핵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양사(兩司: 사헌부․사간원)는 다시 저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다시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太學生)들이 저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선조 임금도 저를 배척하던 송응개(宋應漑)․허봉(許篈)․박근원(朴謹元) 등을 유배 보내면서 저의 무죄를 옹호하기도 하였습니다만, 당쟁의 격류 속에서 정치적 대립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48세(1583) 9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군요.

율곡: 저는 그해 10월에 조정에서 나와 생애의 마지막 관직인 이조판서의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이조판서는 인재를 천거하여 등용시키는 책임이 있는데, 동인․서인의 대립이 격렬한 가운데 양쪽을 조정하고 포용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 당파를 수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양편이 서로 배척하는데 나만 유독 입이 닳도록 변론하니, 진실로 선비의 무리가 화합하지 않으면 끝내 나라를 다스려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연보」) 저는 생애의 마지막까지 동인․서인의 대립을 조정하는데 강한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율곡이 동인․서인의 화합을 위해 상소를 올리고 여러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은 내용을 보면, 한결같이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동인․서인 양쪽으로부터 비난이 쏟아졌고, 뒤에는 ‘서인을 옹호한다’는 동인의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당시 선비들 사이에 당파적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다.

율곡: 저는 사화(士禍)의 시기가 끝나고 선비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시대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림들이 당파로 분열하여 당쟁(黨爭)을 벌이는 당쟁시대에 빠져들었습니다.

강민우: 당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율곡: 당쟁의 발단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면서 시작됩니다. 먼저 김효원이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되자, 심의겸은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그러나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김효원은 결국 이조전랑이 됩니다. 그 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김효원은 외척임을 들어 반대합니다. 이때부터 사림들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서인(西人)과 김효원을 지지하는 동인(東人)으로 갈라져서 대립하였는데, 이로써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이라 불렀습니다. 이로써 사림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민우: 복잡한 국정의 일은 이것으로 마치고 선생님의 사랑(연애)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