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을 만나다

 

(4) 퇴계 이황을 만나다

강민우: 선생님이 퇴계선생을 찾아갔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무슨 이유로 퇴계선생을 만나셨습니까.

율곡: 목적이 있어서 만난 건 아닙니다. 저는 22세 가을에 성주 목사인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이듬해 23세(1558) 봄에 장인을 찾아뵈러 성주(星州)로 갔다가, 다시 외할머니가 계시는 강릉 외가로 향했습니다. 성주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는 안동이 있습니다. 저는 안동을 지나다가 퇴계선생을 뵈러 예안(禮安)을 찾았습니다. 저는 하룻밤 머물고 지나갈 예정이었는데, 마침 비가 와서 부득이 이틀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강민우: 이렇게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한 자리에 처음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군요.

율곡: 이때 도산서당(陶山書堂)은 아직 낙성되지 않았을 때이니, 아마 계상서당(溪上書堂)으로 찾아갔을 것입니다. 퇴계선생은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고서, 이듬해 46세(1546)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자신이 태어난 온계(溫溪) 인근에 단칸 서당을 짓고 학문도 하고 제자들도 가르쳤다. 이 온계의 다른 이름이 토계(兔溪)입니다. 이때부터 퇴계선생은 토계의 ‘토’를 물러갈 퇴(退)로 고친 후 자신의 호로 삼습니다. 물러날 ‘퇴’와 시냇물 ‘계’, 즉 ‘시냇가로 물러난다’는 뜻의 ‘퇴계(退溪)’라 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제자들이 많아지자 1551년(명종 6)에는 토계 건너편 산기슭에 계상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고, 계상서당도 좁아지자 1560년(명종 15)에는 지금의 위치에 도산서당을 세운 것입니다. 오늘날 도산서원은 퇴계가 죽고 4년 뒤인 1574년(선조 7)에 퇴계가 세웠던 도산서당을 모체로 그 주변에 건립된 서원입니다.

강민우: 23세의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을 처음 찾아뵙을 때, 퇴계선생은 58세로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원로 석학이었으며, 율곡선생 역시 일찍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치던 청년이었습니다. 물론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을 일부러 찾아간 것이 아니고 지나가던 길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는지 모르지만,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영민한 재주와 학식에 깊이 감탄하고 무척 반겼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율곡: 이때 퇴계선생은 수양론의 중심내용인 ‘하나에 전념하여 온갖 변화에 대응한다(主一無適, 酬酌萬變)’라는 구절의 뜻을 묻기도 하고,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이 중용(中庸)의 도에 맞는지 여부를 묻기도 했습니다.(「연보초고」)

강민우: 수양은 자신을 닦는 것인데, 하나에 전념하는 주일무적(主一無適)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율곡: 조선의 국시는 유교입니다. 조선의 유교는 성리학의 이론체계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유교와 성리학은 동일한 의미로 쓰입니다. 유교라 하면 곧 성리학을 가리킵니다. 성리학은 자신을 닦아서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때 자신을 닦는 것을 ‘수양’이라 하고, 수양에 관한 이론을 ‘수양론’이라 말합니다. 성리학의 수양론이 대표하는 두 축이 바로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居敬涵養)입니다. ‘격물궁리’는 오늘날 교육에서처럼 외적인 대상을 공부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거경함양’은 내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성품(본성)을 보존하고 기르는 것입니다. 이때 ‘거경함양’을 이루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주일무적’입니다. 생각을 하나로 모아 딴생각이 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데, 이것이 주경(主敬)공부입니다. ‘주경’하면 내 마음 속에 본성을 보존하게 되고, 이때 주경은 거경(居敬)이라고도 부릅니다.

강민우: 그래서 ‘주일무적’이 수양공부의 중심 개념이 되는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저는 퇴계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불교에 빠져 금강산에 입산했던 사실까지 솔직히 털어놓고, 지금은 지난날의 잘못에서 벗어나 유학의 가르침으로 돌아왔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당시 퇴계선생에게 학문의 방향을 묻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이 율곡선생을 보고 너무 좋아하자, 곁에 있던 제자들이 시샘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어떤 제자가 율곡선생이 퇴계선생에게 올렸던 시를 가리키며 “그 사람이 이 시보다 못합니다”라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퇴계선생은 그 자리에서 “아니다, 그 시가 그 사람만 못하다”라고 하여, 율곡선생의 재주와 인물에 대해 깊은 사랑과 기대를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이 떠난 뒤에,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율곡이 찾아왔는데, 그 사람됨이 시원스럽고 지식이 많으며, 또 우리 학문(성리학)에 뜻이 있으니 ‘후배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는 옛 성인(공자)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구려.”라고 하여, 율곡선생의 명석하고 해박한 학식과 민첩한 문장력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율곡: 퇴계선생께서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하셨군요.

강민우: ‘후배가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율곡: 이 글은 논어「자한(子罕)」편에서 공자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젊은 후배들은 나이가 젊고 의지가 강하므로 학문을 계속 쌓고 덕을 닦으면, 선배들을 능가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먼저 태어나서 지식과 덕망이 나중에 태어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선생(先生)이고, 자기보다 뒤에 태어난 사람, 즉 후배에 해당하는 사람이 후생(後生)입니다. 그런데 이 ‘후생’은 장래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히 두려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후생가외(後生可畏), 즉 뒤에 태어난 사람인 후배들에게 무한한 기대를 걸고 한 말입니다. 공자가 ‘후생가외’라고 한 것은 그의 제자 중 특히 재주와 덕을 갖추고 학문이 뛰어난 안회(顔回)의 훌륭함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강민우: 퇴계선생은 율곡선생의 훌륭함을 공자가 안회의 학문과 재주를 칭찬한 것에 비유하셨던 것이군요.

율곡: 과찬이십니다. 저는 강릉으로 돌아간 뒤 그 해에, 퇴계선생께 두 차례 편지를 보내면서 대학(大學)의 해석에 관해 질문했으며, 퇴계선생도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이때 제가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퇴계선생이 보낸 답장과 함께 두 편의 시가 전해집니다. 퇴계선생은 저의 재주를 무척이나 아끼고 큰 기대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강민우: 또한 율곡선생은 퇴계선생께 편지를 올려 자신의 출처(出處)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특히 퇴계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여 토론을 벌이기도 하셨죠.

율곡: 성합십도는 1568년 68세의 퇴계선생이 17세의 어린 임금 선조에게 성왕(聖王: 훌륭한 임금)이 되는 학문과 수양의 핵심과 요령을 간명하게 정리하여 올렸던 작은 책자입니다. 이 책자는 10개의 그림과 해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①주돈이의 「태극도설」에 근거한 「태극도(太極圖)」, ②장재의 「서명」에 근거한 「서명도(西銘圖)」, ③주희의 소학에 근거한 「소학도(小學圖)」, ④대학에 근거한 「대학도(大學圖)」, ⑤주희의 백록동서원의 규약에 근거한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⑥정복심(程復心)의 「심통성정도」를 수정․보완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⑦공자의 인에 근거한 「인설도(仁說圖)」, ⑧정복심의 심학도에 근거한 「심학도(心學圖)」, ⑨주희의 「경재잠」에 근거한 「경재잠도(敬齋箴圖)」, ⑩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에 근거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입니다. 퇴계선생은 원래 「심학도」 뒤에 「인설도」를 두었는데, 제가 그 순서가 바뀌었다고 지적하자, 저의 견해를 받아들여 성학십도의 배열 순서를 수정하였습니다.

강민우: 결국 율곡선생의 지적에 따라 지금의 성학십도의 배열순서가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퇴계선생께서 저를 칭찬만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옛 유학자의 견해에 일일이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하자, 퇴계선생은 “그대가 전후에 논변하는 것을 보면, 번번이 옛 유학자의 이론을 파악할 때에 반드시 옳지 않은 점을 찾아서 배척하는데 힘쓰고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게 한 다음에 그친다.”(「答李叔獻」)라고 하면서 저의 주장이 비판에 치우쳐 있음을 꾸짖어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바로 이 점에서 저는 율곡선생과 퇴계선생의 학문방법과 태도의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논리적 정당성을 찾아 끝까지 비판적 분석을 추구해가는 율곡선생의 합리적 학문자세와, 다각적으로 이해를 추구하여 진실한 의미를 찾아내고 인격적 실현을 추구해가는 퇴계선생의 실천적 학문자세로 구별됩니다.

율곡: 퇴계선생이 보여준 학문적 관심의 초점이 수양론에 있다면, 저는 주로 경세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성리설에서도 퇴계선생은 리(理: 이치)와 기(氣: 형체)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이원론(二元論)의 경향을 보인 반면, 율곡선생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는 일원론(一元論)의 경향을 보입니다.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 성리학 논쟁의 두 축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퇴계선생이 선비들이 집권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는 사화(士禍)시대를 살았다면, 율곡선생은 선비들이 정권을 주도하는 사림정치(士林政治)시대를 살았던 시대배경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그 시대에 대응하는 논리가 달라질 수 있고, 바로 이 점에서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철학이 달라지는 차이를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성리설이 보여주는 두 철학적 관점에서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당파적 관심에서 벗어나서,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야로서 퇴계선생과 율곡선생의 철학을 함께 받아들이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듯합니다.

율곡: 퇴계선생은 저보다 35세 연상으로 한 세대나 차이가 납니다. 퇴계선생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머무를 때마다, 저는 여러 번 퇴계선생을 찾아가 만났고, 또 자주 편지 왕래도 하면서 학문적이나 인간적으로 깊은 교류를 했습니다.

강민우: 그래서 퇴계선생의 제자들 명단을 수록한 도산계문록(陶山溪門錄)에는 율곡선생을 퇴계선생 제자의 한 사람으로 등록하고 있군요. 그러나 율곡선생을 퇴계선생의 제자로 볼 것인지 아닌지는 매우 애매합니다. 직접 책을 들고 가서 배운 일이 없으니, 집지(執贄)의 제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집지’는 예전에 제자가 스승을 처음 찾아뵐 때에 선물을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하던 일을 말합니다. 이때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부릅니다.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을 존경하여 만나거나 편지로 문답을 하였으니, 비록 제자라 보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율곡: 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따르는 종유(從遊)라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계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제문(祭文)을 짓기도 했습니다. “소자(율곡)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마치 사나운 말이 가시밭과 황무지로 마구 달리듯 했는데, 이때 수레를 돌리고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공(公: 퇴계)께서 인도해주신 덕분입니다.”(「祭退溪李先生文)」) 저는 퇴계선생에게 받은 학문적 은공을 잊을 수 없으며,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을 스승으로 따르고 존경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와 종유(從遊)의 중간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율곡: 저는 35세(1570) 12월에 퇴계선생의 부고(訃告: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글)를 받고, 스승을 위한 심상(心喪)을 행하고, 또한 동생 이우(李瑀)를 시켜 제문을 가지고 가서 문상하게 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挽詩)에서 간절한 그리움과 슬픔을 표현하셨죠. ‘만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시를 말합니다. 어떤 내용이셨죠.

율곡: 기억나는 부분을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범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 일 변했건만 虎逝龍亡人事變,
물결 돌리고 길 열으신 저서가 새롭구나. 瀾回路闢簡編新.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南天渺渺幽明隔,
서해 물가에서 눈물 아르고 창자 끊어지네. 涙盡腸摧西海濱. (「哭退溪先生」)

스물다섯 해 동안, 二十五年間,
미혹의 꿈속에 빠져 취했었네. 沈迷夢中醉.
어제의 잘못 되돌아보니 追思昨者非,
놀랍고 두렵기만 하구나. 令人發驚悸.
나 이제 단호히 맹세하노니, 我今痛自誓,
하느님께서 응당 듣고 보시리라. 昊天應聽視. (「至夜書懷」)

강민우: 율곡선생께서 퇴계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토록 간절한 줄을 몰랐습니다. 퇴계선생과의 만남은 이정도로 하고, 선생님의 과거시험 장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