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마다 장원하다

 

(5) 과거시험마다 장원하다

강민우: 율곡선생을 떠올리면 가정 먼저 생각나는 것이 구도장원(九度壯元)입니다. 율곡선생은 어떻게 시험을 볼 때마다 장원할 수 있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율곡: 저는 13세 때 소과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던 일이 있습니다. 21세 때(1556) 다시 소과 초시인 한성시(漢城試)에서 책문(策文)으로 시험을 보았을 때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진사시’는 조선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입니다. 이것을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부릅니다. ‘한성시’는 한성부(漢城府)에서 실시하는 시험으로, 선비들이 처음으로 응시하는 과거의 첫 관문입니다. ‘한성시’ 역시 ‘진사시’와 마찬가지로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강민우: 이때부터 선생님의 천재적 재능이 과거시험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군요.

율곡: 23세(1558) 때 예안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고 강릉 외가에 갔다가 돌아와,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또 장원으로 뽑혔습니다. ‘별시’는 정규 과거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시험인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의 등용이 필요한 경우에 실시합니다. 이때 답안으로 제출했던 것이 「천도책(天道策)」입니다.

강민우: 이때 제출한 「천도책」에 관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정사룡(鄭士龍)․양응정(梁應鼎) 등은 율곡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 “우리는 며칠 동안 고민해서 이러한 시험문제를 낼 수 있었는데, 율곡은 짧은 시간에 쓴 대책(對策: 어떤 일에 대처할 방책)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연보」)라고 감탄하였다죠.

율곡: 그런 일이 있었군요.

강민우: 「천도책」에 관한 또 다른 일화도 전해집니다. 뒷날 율곡선생이 47세(1582) 때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종1품)에 올랐으며, 그해 10월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의주(義州) 압록강변에서 황홍헌(黃洪憲)․왕경민(王敬民) 등의 사신을 맞이하였을 때, 명나라 사신이 율곡선생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인가”(「연보」)라고 물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과시험의 답안으로 작성한 율곡선생의 「천도책」이 명나라에도 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천도책」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율곡: 「천도책」에서는 자연현상으로서 해와 달의 운행, 일식과 월식의 현상, 바람․구름․안개․우레․벼락․서리․이슬․비․우박의 현상 등을 물었습니다. 또한 세상사의 온갖 현상에서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하늘의 기운이 어그러졌기 때문인지 사람의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인지를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고, 별이 제자리를 잃지 않으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않으며, 눈이 너무 많이 내리지 않고, 풍해와 수해가 없이 천지가 안정되어 만물이 생육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강민우: 홍수와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을 물었던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이 책문에 대한 대책으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온갖 조화의 근본은 오직 음양뿐입니다. 활동하는 것은 양이 되고, 고요한 것은 음이 됩니다. 한번 활동하고 한번 고요한 것은 기(氣)이고, 활동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리(理)입니다.”

강민우: 모든 자연현상을 음양의 기와 기를 주재하는 리의 작용으로 해석하셨군요. 이것은 결국 세상사의 온갖 현상을 리(이치)와 기(형체)의 두 범주로 설명하는 성리학의 이기론에 따른 것이군요.

율곡: 결국 음양이 조화로우면 자연현상은 모두 절도를 잃지 않아 만물이 생육하지만,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면 자연현상이 절도를 잃어서 풍해․수해․우레․벼락과 같은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저는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이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다”라고 하여, 자연의 운행질서에 인간의 도덕성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때 자연의 질서를 천도(天道)라고 부르고, 인간의 도리(도덕성)를 인도(人道)라 부르기도 합니다.

강민우: 여기에서 인간 도덕성을 천도의 질서에 근거지어 설명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론이 성립되는 것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옛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면, “재앙과 변괴는 태평성대와 같은 치세(治世)에는 나타나지 않고, 일식과 월식의 이변은 다 말세(末世)의 쇠퇴한 정치에서 나왔습니다. 이로써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서로 합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임금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방을 바르게 하여야 하니,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바릅니다.”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는 것이 모두 어찌 임금 한 사람이 덕을 닦는데 달려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강민우: 임금이 덕을 닦아야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뿐만 아니라, 자연질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강민우: 소과(小科)에서 시험관이었던 유홍(俞泓)이 율곡선생을 장원으로 뽑으려 하자, 시험관 가운데 어떤 사람이 젊어서 불교의 선(禪)을 배운 것을 문제 삼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율곡: 이때 유홍은 “학문에 처음 나아갔을 때의 과오는 정자(程子: 정호․정이)․주자(朱子: 주희)도 면치 못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미 바른 길로 돌아왔는데, 또 무엇을 허물하랴.”라고 하면서 저를 적극 변호하여 결국 장원으로 결정될 수 있었습니다.(張維, 「谿谷集) 그해 8월에는 명경과(明經科) 곧 대과(大科)에도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郎: 정6품)의 벼슬을 제수받았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전후 과거시험에 모두 아홉 번 장원을 하셨죠.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에 거리에 놀던 아이들은 율곡선생이 타고 가는 말을 둘러싸고 ‘아홉 번 장원한 분(九度壯元公)’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확실히 선생님의 천재성은 가장 먼저 과거시험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제가 대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자, 명종(明宗) 임금께서 저를 대궐로 불러서 「석갈등룡문(釋褐登龍門)」이라는 제목으로 30운(韻)의 시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시를 지어 올렸고, 임금은 크게 칭찬하고서 후하게 상을 내려주셨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의 뛰어난 재주의 명성이 임금에게까지 소문이 났던 것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몇 구절 소개해주세요.

율곡: 원래 60행의 장시(長詩)인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관록 구함이 어찌 잘 먹고 살자는 것이랴, 干祿豈懷求餔啜,
미약한 재주나마 임금님 보필하기 바람일세. 補天深願效埃涓.
깊은 계곡에 임한 듯 조심하고, 競競怳若臨深谷,
큰 냇물 건너듯 두려워해야지. 戰戰茫如涉大川.
(…) (…)
비와 이슬의 혜택 빈궁한 민가 널리 적시고, 雨露普霑圭蓽戶,
광명은 화려한 자리만 비추지는 말아야 하며, 光明莫照綺羅筵,
제왕의 사업 한없는 백성 사랑이 가장 중하고, 盈成最是無疆恤,
임금의 큰 덕 중단 없이 하늘을 따라야 하네. 廣運宜追不息乾.
(…) (…)
거리마다 임금님 덕 노래하길 원하노니, 願效康衢歌帝則,
태평성대 노래 소리 어찌 큰 문장 기다리랴. 頌聲奚待筆如椽. (「釋褐登龍門」)

강민우: 이 시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벼슬에 나아간 뜻이 자기 한 몸의 부귀영화에 있지 않고 임금을 보필하여 치도(治道)를 실현하는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벼슬에 임하는 자세로서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다짐하는 결의를 보여줍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임금의 은택이 가난한 백성에까지 두루 미치고 고귀한 신분에만 비추지 않아야 하며, 또한 임금의 일은 백성들을 끝없이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면 거리마다 임금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울려 퍼져 고묘한 문장으로 글을 짓는 일이 필요 없는, 즉 아름답게 꾸며내는 말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 시에서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 신하의 도리와 임금의 도리, 특히 임금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일찍부터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가정은 매우 곤궁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선생이 부제학(副提學: 정3품)으로서 파평(坡平)에 물러나 쉬고 있을 때, 최황(崔滉)이 지나는 길에 그를 찾아뵙던 일이 있습니다. 밥상을 받았는데 반찬이 너무도 초라하여 최황은 젓가락을 대지 못하고서 “어떻게 이런 곤궁한 생활을 참아내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율곡선생은 “느지감치 먹으면 맛없는 줄을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합니다.(崔濬, 「滄浪寓言」)

율곡: 저는 그저 제 분수에 맞는 생활했을 뿐입니다. 옛날 성인들은 한결같이 빈곤한 가운데서도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편안하게 도를 즐기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았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 집안에 남아있는 재물이 없어 염습(斂襲: 시신을 씻기도 수의를 입히는 일)을 위한 의복은 친구들의 부조를 받아서 마련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서울에 머물 때에도 언제나 남의 집을 세내어 살았으므로 처자가 의탁할 곳이 없어 제자들과 친구들이 비용을 내어 집을 사서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연보」) 율곡선생이 평생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율곡선생은 가정생활이 매우 곤궁함에도 그 곤궁함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그야말로 ‘안빈낙도’의 생활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임금이 부의(賻儀: 조의금)를 특별히 후하게 내려주셨고, 원근의 선비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발인하던 날에는 송별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그 곡소리가 하늘에 진동하였다고 합니다.(「연보」) 3월 20일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기슭 부모님 묘소 가까운 자리에 장사지냈습니다. 율곡선생 사후 40년이 되던 해(1623)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성(文成)의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사방에서 율곡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하도록 청원해왔는데, 숙종 7년(1681)에 문묘배향이 허락되어 이듬해부터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문묘에서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당쟁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숙종 15년(1689)에 율곡선생의 문묘 제향이 철회되었다가, 숙종 20년(1694)에 다시 문묘에 배향되는 변동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율곡: 저는 죽기 전인 48세 한 해 동안 병조판서로서 여진족의 변경침범을 막아내고 이조판서로서 당쟁을 조정하는 인사에 몰두했으나, 그 이듬해 49세(1584) 때 정월 초부터는 일어나지 못하고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1월 14일 관북(關北) 순무어사(巡撫御史)의 명을 받고 나가는 친우 서익(徐益)을 위해 방책을 알려주고자 병이 위중하다고 자제들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는 국가의 시급한 일이니, 이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다”라고 하고, 부축을 받고 앉아서 말하는 방책을 이우(李瑀)에게 받아 적게 했습니다. ①임금의 어진 덕을 선양할 것, ②복속한 오랑캐 부족을 안무할 것, ③우리 임금의 위엄을 펼칠 것, ④배반한 오랑캐를 제압할 것, ⑤사신들의 비용을 줄이어 백성들의 힘을 덜어줄 것, ⑥장수들의 재주를 미리 살펴 위급한 일에 대비할 것 등 여섯 조목입니다.(「연보」)

강민우: 이것이 율곡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글이 됩니다. 그 이틀 뒤 1월 16일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종로구 仁寺洞, 寬勳洞 일대) 집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