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벗-성혼(成渾)

 

(6) 평생의 벗-성혼(成渾)

강민우: 선생님의 친우관계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누구랑 가장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율곡: 저는 당시 여러 인물들과 폭넓게 사귀었습니다. 저의 친우 가운데는 뛰어난 인물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가까웠던 인물을 꼽는다면 성혼(成渾)․정철(鄭澈)․송익필(宋翼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넷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교우관계가 매우 활발하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친구들이 많습니다만, 그 중에 한명을 꼽으라면 누가 되겠습니까.

율곡: 성혼(成渾, 1535~1598)입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와 성혼은 모두 파주에 살아 거리가 멀지 않고, 또한 성혼의 아버지는 당시에 명망 높은 학자여서 자주 만날 기회를 얻었던 것 같습니다.

강민우: 성혼은 율곡선생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데도, 처음 율곡선생을 만나보고 “그 학문의 탁월함에 감탄하여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율곡선생이 굳이 사양하여 친우가 되었고, 서로 성인이 되기를 기약하였다”(「연보」)라고 들었습니다.

율곡: 제가 성혼과 저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학문의 경지를 논한다면 내가 다소 나은 점이 있지만, 품행의 독실함과 지조의 확고함은 내가 미치지 못합니다.”(成渾, 「牛溪年譜」)

강민우: 서로의 장점을 깊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교우였던 것 같습니다. 율곡선생의 학문(성리학) 토론은 주로 성혼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졌으니, 성혼은 율곡선생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동반자가 되겠군요.

율곡: 저는 과거에 급제하여 29세 때부터 벼슬길에 나갔으나, 성혼은 과거에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에 집중했습니다. 제가 33세(1568) 때에 경기감사가 성혼을 추천하려고 하자, 제가 만류한 적이 있습니다. “성혼은 학자이니, 마땅히 그가 학문을 성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연보」) 저는 성혼이 벼슬길에 나와 출세하기 보다는 학문을 크게 성취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성혼에게 자기를 알아주는 ‘지기(知己)의 벗’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율곡: 저와 성혼은 우정이 깊어 만나면 밤을 새며 이야기가 끝이 없습니다. 43세(1578) 세모(歲暮: 한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저는 문득 친우 성혼이 보고 싶어 소를 타고 눈길을 뚫고 찾아가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읊은 시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한 해는 저물고 눈은 산에 가득한데, 歲云暮矣雪滿山,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 속으로 갈라졌네. 野逕細分喬林間.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나, 騎牛聳肩向何之,
우계 냇가 아름다운 사람 그리워서라네. 我懷美人牛溪灣.

강민우: 율곡선생과 성혼 사이에 얽힌 일화도 많이 전해진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언젠가 둘이서 화석정(花石亭) 아래 임진강에서 작은 배를 타고 뱃놀이를 했는데,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 위험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제가 뱃머리에서 태연스럽게 시를 읊조리자, 성혼이 놀란 목소리로 “어찌 변고에 대처하려 들지 않느냐”라고 따졌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우리 두 사람이 어찌 물에 빠져 죽을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尹宣擧, 「魯西記聞」)

강민우: 성혼이 언제나 조심하고 근신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율곡선생은 천명(天命)에 대한 확신 속에 대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성격의 차이는 정철의 생일잔치 때도 보입니다. 성혼과 함께 정철의 생일잔치에 갔는데, 기생들이 그 자리에 와 있었습니다. 성혼은 기생이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머뭇거리자, 율곡선생이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이 하나의 도리라네.”(「牛溪言行錄」)라고 하고, 태연하게 나아가 자리에 앉았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도 성혼의 조심하고 삼가는 자세와 율곡선생의 거리낌 없는 대범한 자세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율곡: 성혼은 저의 천재성이 독서 역량으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무릇 책을 볼 때에 남과 담소하면서 대강대강 마치 폭풍우처럼 빨리 보아 넘기지만, 이미 그 대의(大義)를 터득하여 그 뒤에 다시 차분히 살펴보더라도 새롭게 더 진취되는 것이 없다.”(成渾, 牛溪文集)라고 하며, 저의 타고난 민첩함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언젠가 율곡선생이 성혼에게 독서할 때에 몇 줄을 한꺼번에 보아 내려가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지요. 이때 성혼은 7-8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간다고 대답하자, 율곡선생은 “자신은 10여 줄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을 뿐이다.”(成渾, 牛溪言行錄)라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한꺼번에 두 줄도 읽을 수 없는데, 7-8줄을 읽는 것도 대단하지만 10여 줄을 읽어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성혼이 율곡선생을 찾아갔는데 시경(詩經)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올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물었더니, 율곡선생은 사서(四書)를 각각 아홉 번씩 읽고, 시경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성혼이 이 말을 듣고 “나는 집수리 하느라, 집안 일하느라, 손님 접대 하느라, 1년 내내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데도 도리어 성취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물러나면서 전진하기를 도모하는 격이다.”(成渾, 牛溪日記)라고 자신을 반성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율곡선생의 학문 역량이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율곡: 그저 매일매일 성인이 되기 위해 성현의 글을 열심히 익혔을 뿐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성혼은 선생님과의 30년 우정을 돌아보며 “평소에는 율곡이 병 많은 나(성혼)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는데, 거꾸로 나는 살아남고 율곡이 먼저 죽었다”라며 애통해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혼은 율곡선생과의 교유과정을 돌아보면서 “늘그막에 와서 마음이 서로 부합하고 정이 더욱 깊어졌으며, 만약 율곡이 없었다면 내가 자립하지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成渾, 「祭文」)라며, 율곡선생이 자신의 학문적 성장과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진솔하게 밝혔다고 합니다. 성혼은 율곡선생을 벗으로서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가슴속에 스승으로 모시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율곡: 저 역시 성혼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혼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가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강민우: 성혼은 율곡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율곡선생이 자신을 깨우쳐주었던 스승임을 새삼 깨닫고, 뒤늦게 율곡선생의 기일(忌日)이 되면 먼저 죽은 벗을 위해 소복을 입는 예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성혼은 율곡선생의 서자 중의 첫째 아들인 이경임(李景臨)에게 “율곡은 참으로 5백년 사이에는 흔치 않는 걸출한 인물이었다. 내가 젊어서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늙어서 생각해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었다. 기일(忌日: 제삿날)에 소복을 입는 일을 예전에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 시작했다.”(「연보초고)라고 말했다 합니다. 성혼이 율곡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율곡: 제가 성혼과 벗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혼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을 뵙게 되었는데, 25세(1560) 때 파주에서 68세의 그 분을 찾아뵙고 시를 지어 올렸던 일이 있습니다. 성수침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은거하던 선비입니다. 저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아버님이기도 한 성수침을 몹시 존경했습니다. 제가 29세(1564) 때 성수침이 돌아가시자, 빈소에 찾아가 애도하는 마음으로 올린 시가 있습니다.

산악의 정기 길러낸 큰 인물 당당하여, 嶽精偏毓碩人頎,
이에 온 유림의 본보기 되셨네. 坐使儒林仰羽儀.
평생 장부의 눈물 다 쏟으니, 滴盡平生壯夫淚,
이 자리 아니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리. 非斯爲慟爲伊誰. (「哭聽松成先生」)

강민우: 그래서 선생님은 성수침을 위해 제문(祭文)을 짓고 또 뒤에 행장(行狀)을 지었던 것이군요.

율곡: 저는 행장에서 성수침의 학문에 대해 “자신을 반성하는데 힘썼고 일찍이 남에게 함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도(道)란 큰 길과 같고 성현의 가르침은 해나 별처럼 환하게 비추니,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말만 하는 학문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하였다.(「聽松成先生行狀」)”라고 하여, 그분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의 성격을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