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당대 인물을 평하다

 

(9)율곡이 당대 인물을 평하다

강민우: 선생님은 퇴계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스승으로 존경하기도 하면서 퇴계의 학문(성리설)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었던 만큼, 비판적 견해도 드러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율곡: 저는 35세(1570) 때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성품은 온순하고 옥처럼 순수하였다.…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거나 받아들임의 절도에서는 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학문에 대해서는 “의리가 정밀하여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가르침을 따랐고, 여러 학설에 두루 밝아 널리 통달함을 얻었다.”(경연일기)라고 하여, 그의 온화하고 겸허한 풍모와 의리에 어긋남이 없는 강직한 지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선조 임금 즉위 초에 이상정치(至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퇴계선생이 임금의 덕을 성취시켜야 한다는 것이 선비들의 중론이었고, 선조 임금도 퇴계선생을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율곡선생은 퇴계선생에 대해 ‘실제로 한 시대의 정치를 이끌어가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지요.

율곡: 이때 저는 “퇴계는 스스로 재주와 지혜가 큰 일을 감당할 수 없으며, 또한 쇠퇴한 시대에 선비가 일하기 어렵다고 여기고서 작록(爵祿: 벼슬과 녹봉)을 사양하고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임금의 마음을 다스려 보겠다는 정성이 부족하다.”(경연일기)라고 했습니다. 퇴계선생이 물러나기를 힘쓴 것은 겸양의 뜻이 아니라, 실제로 임금의 마음을 다스려보겠다는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민우: 그럼에도 선생님은 퇴계와 조광조를 크게 높이셨다지요.

율곡: 저는 43세(1578) 때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자의 사당을 세웠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도학을 제창하고 요순(堯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를 자신의 책임으로 삼은 사람으로는 정암(조광조)과 같은 이가 없으며, 주자문하의 이루어진 법도를 지키면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후생의 모범이 된 사람으로는 퇴계(이황) 같은 이가 없다.”(「연보」)라고 하여, 주자의 사당에 조광조와 퇴계를 배향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강민우: 또한 조광조와 퇴계를 문묘(文廟: 공자의 신위를 받드는 사당)에 종사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셨고요.

율곡: 성균관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현인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을 때, 선조 임금은 경솔히 결정할 수 없다고 보류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고려왕조에서 종사할만한 사람으로는 정몽주(鄭夢周) 한 사람뿐이다.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안향(安珦)은 도학에 관계가 없으니, 이 세분은 다른 곳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옳지만 문묘에 배향함은 잘못이다.…오직 조광조는 도학(성리학)을 제창하여 후인들을 이끌었으며, 퇴계는 의리에 침잠하여 일대의 모범이 되었으니, 이 두 분만 종사하고자 하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경연일기)라고 하여, 조광조와 퇴계를 이 시대 도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강조했습니다.

강민우: 그러면서도 퇴계는 독창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셨죠.

율곡: 퇴계선생은 성현의 말씀을 준수하고 실행한 자이지만, 그가 스스로 발견한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서경덕(徐敬德)은 자기의 견해는 있으나, 그 한 쪽만을 본 자입니다. 결국 우리나라 도학의 시조로서 조광조를 들 수 있으며, 퇴계는 학문적 규모를 갖추었지만 독창성이 결여되었고, 서경덕은 독창적이지만 부분에 한정되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조광조를 최고의 인물로 평가하시는 듯합니다.

율곡: 퇴계선생은 이 시대 유가의 종주(宗主)로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습니다. “퇴계의 재주와 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정밀함을 다한 것에서는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경연일기)”

강민우: 재주와 역량에서는 조광조가 퇴계를 앞서지만, 의리와 정밀함에서는 퇴계가 조광조를 앞선다는 말씀이시군요.

율곡: 저는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白仁傑)에게 “자품(資稟: 타고난 성품)을 논하면 조광조가 월등히 낫지만, 조예(造詣: 지식이 깊은 경지에 이름)로 말하면 퇴계가 낫다”(경연일기)”라고 하여, 조광조와 퇴계 사이에 도량과 학문에서 각각 장단점이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명나라 때 대표적인 학자 나흠순(羅欽順)과 퇴계, 그리고 서경덕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교를 하셨더군요.

율곡: 퇴계선생은 나흠순의 학설이 주자와 다르다고 비판하였지만, 저는 나흠순의 학설이 창의적이라고 좋아했습니다. 제가 친우 성혼(成渾)에게 보낸 편지에서 “요사이 정암(나흠순)․퇴계(이황)․화담(서경석) 세 선생의 학설을 보니, 정암이 최고요, 퇴계가 다음이며, 화담이 그 다음이다. 그 중에 정암과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自得之味)’이 많고, 퇴계는 ‘본받는 맛(依樣之味)’이 많다.”(「答成浩原」)라고 하여, 학설의 우열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퇴계는 ‘본받는 맛’이 많으므로 그 말이 구애가 있고 조심하였으며, 화담은 ‘스스로 깨달은 맛’이 많으므로 그 말이 즐겁고 호방하였다. 조심하였기 때문에 실수가 적고 호방하였기 때문에 실수가 많으니, 차라리 퇴계의 ‘본받음(依樣)’을 취할지언정 화담의 ‘스스로 깨달음(自得)’을 본받아서는 안된다.”(「答成浩原」)라고 하여, 이들의 학문적 특징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이러한 율곡선생의 평가에 대해, 조선 말기 율곡학파의 학자인 김평묵(金平默)은 “퇴계의 학문은 매우 순수하고 정대한데, 그 이유로는 정자․주자를 독실히 믿고서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 만약 중국에 있었다면 마땅히 이동(李侗: 주자의 스승)과 진덕수(陳德秀: 주자의 제자) 사이에 있을 것이니, 어찌 나흠순과 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金平默, 「大谷問答」)라고 하여, 나흠순보다 퇴계가 월등하게 뛰어남을 강조하였습니다.

율곡: 이것은 주자의 이론체계와 일치할 것을 중시하는 김평묵의 입장과, 주자의 이론체계에 대해 창의적으로 해석할 것을 중시하는 저의 입장적 차이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선생님은 조식(曺植, 1501~1572)에 대해서도 그 지조와 기상은 높지만, 학문이나 세상을 경륜할 역량은 부족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율곡: 저는 영남의 강우(江右)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에 대해서는 “조식은 세상을 피하여 홀로 서서 뜻과 행실이 높고 깨끗하니, 진실로 한 시대의 일민(逸民: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묻혀 지내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저술을 보면 실제로 체득한 견해가 없고, 상소한 것을 보아도 역시 세상을 경륜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은 못된다. 이로 보아 비록 그가 세상에 나왔다고 하더라도, 능히 나라를 다스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인들이 그를 추종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 하는 것은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또한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 대해서도 높은 기개는 인정하면서 자만에 빠져 남을 용납하는 덕이 없다고 비판하셨다지요.

율곡: 김계휘가 기대승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을 때, 저는 “기대승은 한 세상을 덮을 듯하니 역시 비상한 선비이다. 다만 자부함이 너무 지나쳐 겸허하게 남을 받아들이는 의사가 없어 반드시 사림(士林)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가.”(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기대승의 학풍에 대해서도 “널리 읽고 잘 기억하여 담론하면 온 좌중을 굴복시켰다.…그의 학문은 박식함에 힘쓸 뿐이고 마음을 다잡고 실천하는 공부는 없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병통이 있으며 자기에게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선비와 화합하지 못하고 아첨하는 자가 많이 따랐다.”(경연일기)라고 하여, 독선이 강한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강민우: 때문에 백인걸(白仁傑) 역시 기대승에 대해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라고 평가했던 것이겠습니다. 기대승이 죽었을 때 어떤 사람이 “사문(斯文: 유교)이 불행하여 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라고 하자, 율곡선생은 “사문이 다행하여 기대승이 일찍 죽었다”라고까지 심하게 말씀하셨군요.

율곡: 한마디로 저는 기대승과 성리설에서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상당히 거부감을 가졌습니다.

강민우: 퇴계의 대표적 제자인 유성룡(柳成龍, 1542~1607)에 대해서도 학식과 언변이 뛰어나지만 공사(公私)의 분별이 확실하게 못하다고 비판하셨죠.

율곡: 저는 유성룡에 대해 “재주와 식견이 있으나, 다만 한 마음으로 공무를 받들지 못하고 때로는 이해관계를 돌아보는 뜻이 있다.”(경연일기)”라고 평가했습니다. 언제가 저는 “유성룡이 재주와 기개는 참으로 아름답지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는 병통이 있어서 나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무리가 죽고 나면 반드시 그 재주를 인정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강민우: 유성룡은 율곡선생의 탁월한 식견에 시기심을 가져 살았을 때는 반대하다가 죽은 다음에야 율곡선생의 선견지명을 칭찬했다는 것이군요.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후에, 유성룡이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율곡선생의 선견지명과 재능을 칭찬했다지요. 이 말을 듣고 율곡의 친우 성혼(成渾)은 “유성룡은 본래 그러하다. 그가 어찌 율곡의 어짊을 몰랐겠는가. 다만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해서 죽은 뒤에 인정하는 것이니, 그것이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연보초고」)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율곡: 이와 유사한 일을 남명(曺植)이 시로 읊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바른 선비 좋아하는 것이 人之好正士,
호랑이 가죽 좋아하듯 하네. 好虎皮相似.
살았을 때는 죽이려 들다가 生前欲殺之,
죽은 뒤에야 아름답다 일컫는구나. 死後方稱美.

강민우: 율곡선생은 당대의 인물에 대해 매우 폭넓은 평가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평가하다보면,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한 평가가 상대방에게 너무 아프게 주어질 수도 있으며, 또한 객관적인 평가에 엄격할수록 온전한 사람이 남아 있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군왕에서부터 초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앞 시대의 인물과 당대의 인물에 대한 폭넓은 평가는 율곡선생의 업적 가운데 하나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