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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언(諫言)’듣기를 싫어한 선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14>

간언(諫言)’듣기를 싫어한 선조

 

 태종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간언(諫言)이란 군주나 웃어른에게 충고하는 것을 말한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 시세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 간언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충성스런 간언을 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언(諫言)’의 간(諫)자는 말씀 언(言)과 가릴 간(柬)자로 구성되어 있다. 가릴 간은 ‘분간하다’는 뜻도 있다. 즉 간언이란, 분간하는 말, 혹은 분간하고 가릴 수 있도록 하는 말을 뜻한다.

정관정요⌋의 ‘정관(貞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이며, ‘정요(政要)’란 ‘정치의 핵심’, 혹은 ’정치의 요체‘라는 뜻이다. ⌈정관정요⌋는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는데, 당 태종이 부하 관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이다.

정관정요⌋의 설명에 따르면 신하들의 간언이 없다면 거울 없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자신이 행하는 정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들이 간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정관정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군주는 신임하지 않는 자가 간언하면 비방한다고 생각하고 신임하는 사람이 간언하지 않으면 봉록만 훔치는 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성격이 연약한 사람은 속마음이 충직해도 말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이는 신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주가 먼저 신하를 믿고 간언을 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연제도와 함께 ‘간언’제도도 왕권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중시되었다. 율곡이 참여한 1575년 6월 24일의 경연에 율곡과 선조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고갔다.

 

율곡: 근래에 대간(臺諫,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이 말하는 것을 임금께서 따르지 않는 것이 많아 인심이 자못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선조: 이는 내가 불민한 탓이다. 그러나 요임금, 순임금 때에도 그 말이 틀리다고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어찌 항상 한갓 그렇다고 따르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율곡: 진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할 일은 속히 따르셔야 합니다.

 

율곡이 임금께서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선조는 항상 따르기만 해서는 되겠는가하고 묻는다.

같이 경연에 참석했던 김우옹이 율곡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기강은 오로지 대간에게 달려 있으므로 대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기강이 무너집니다. 반드시 대간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 사기(士氣)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선조임금은 간언을 자주 듣는 것이 싫었던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간의 말도 옳지 않은 것이 많다.”

임금의 고집스러운 발언에 율곡이 또 나서서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대간의 말에 잘못이 있으면 따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간의 말이 항상 그럴 것이라 하여 처음부터 듣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율곡은 대간을 대신해서 자신이 이렇게 간언을 하였다.

“지금 백성들이 초췌하여 지고 기름진 땅과 연못이 이미 다 말라버렸습니다. 조정에서 비록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나 은택(恩澤)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않아, 마을마다 원망하고 근심하는 소리가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조정이 깨끗하고 밝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백성이 이와 같으니 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인심이 바르지 않습니다.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법령은 행해지지 않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임금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시고 근본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선조 27년(1594년) 7월 9일의 왕조실록 기사에도 조정의 언로(言路)와 간언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나온다.

“십수년 이래 사대부들 사이에는 말을 하는 것을 기피하여,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는 어물어물 우유부단하여 구차스레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관원)에 있는 자는 시세에 따라 부침(浮沈)하여 좋은 벼슬을 보전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갈수록 심합니다.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는 허물을 들을 수 없게 되셨습니다. 전하께서 허물을 들을 수 없어 국사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신들은 저도 모르게 모발이 송연해집니다.

더구나 지금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이미 다 전복되었으니 이야말로 사람들이 스스로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알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임금에게 따지고 책망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전하께서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을 채용하여 시행하셨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할 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말을 하였으나 취할 것이 못 되어 그런 것입니까?”

율곡도 선조대왕이 훌륭한 인물들을 등용한 뒤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였으나, 이 상소문에도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1594년은 율곡이 사망한 뒤 10년이 지난 때인데, 이때도 선조는 신하들의 간언 듣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정관정요⌋의 문구에서 보았듯이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정관정요⌋는 “시세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는데 조선의 선조는 간언 듣기를 싫어하여 그러한 기회를 상실하고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여 국가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초래하였으니, 참으로 우둔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민본주의 제도 – ‘경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13

조선시대의 민본주의 제도 – ‘경연

 

늘날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삼권분립을 바탕으로 권력기관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군주제는 이와 달리 한명의 군주에게 모든 권한이 돌아간다. 그 권한을 제한하는 일이 없이 군주의 마음대로 모든 국가의 대사가 운영된다. 전통시대의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임금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군주제 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군주제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관이 왕의 일상사와 언행을 기록하는가 하면, 왕을 덕이 있는 군주가 되어 덕치정치를 하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임금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관리를 두어 임금의 잘잘못을 따지도록 하기도 하였다.

왕을 가르쳐 덕치 정치를 펴도록 하는 제도는 경연(經筵)이다. 오늘날도 가끔 형식적으로나마 대통령이 석학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직적으로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료까지 두면서 임금을 가르쳤다.

율곡과 관련된 역사기록을 보면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여 발언을 하는 기록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1575년 6월 24일(음력)에는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여 임금과 함께 ⌈상서⌋를 읽는 기록이 있다. 또 그 이전인 1569년 9월 25일 기록에도 경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날 율곡은 선조에게

“예로부터 큰일을 성취한 군주가 정치를 흥기시키려 했을 때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현자를 대하였습니다. 군신간의 주고받는 대화는 마치 메아리 울리듯 하였으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 아래가 서로 믿게 되어 정치가 잘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군자가 현자를 섬기고 군신(君臣) 간에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경연을 설명한 것이다.

율곡은 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신이 여러 차례 궁궐에 들어와 전하를 뵈었는데 항상 신하들의 말에 조금도 응수하여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한 집안의 부자(父子)와 부부가 아무리 지극히 친한 관계라 하더라도 만약 아비가 자식에게 답하지 않거나 지아비가 아내에게 답하지 않으면 그 정(情)도 막히게 됩니다. 하물며 그 이름과 위상이 현격히 다른 군신(君臣)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1569년은 율곡은 34세 되던 해로 궁궐에 들어와 선조를 가까이서 모신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29세 때 호조좌랑으로 처음, 관계에 진출한 뒤로 30세 때 예조좌랑, 31세 때 이조좌랑, 그리고 32세 때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선조는 임금이 되었다. 율곡은 임금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선조의 과묵한 모습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율곡은 경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신하가 임금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은 경연(經筵)뿐이기 때문에 입시하는 신하들이 미리 아뢸 내용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궁리하고 정리해 놓았다가도 임금님의 앞에만 오게 되면 그 위엄에 겁을 먹고는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못하여 10분의 2∼3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대왕께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응수를 해주신다 해도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뜻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입을 꼭 다물고 말씀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말을 막는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경연을 준비하는 신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리 유학 경전을 잘 읽는 신하라도 임금님 앞에서는 그 위엄에 눌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의 응대가 쌀쌀하니 그 신하들, 즉 선생님들은 더 주눅이 들어 입을 닫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율곡은 임금에게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급히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노력을 하셔야지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않고 있으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선조 대왕이 명종 대왕(明宗大王)으로부터 2백 년 조선의 우환을 받은 것이지 즐거운 세상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의 운명이 날로 위태로워지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해서 발분하지 않는 것인지 물었다.

이렇듯 경연제도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백성을 위하고 군주의 권한을 견제하는 제도였다.

경연의 방법은 대체로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시기에 정비되었다. 경연은 시간에 따라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 낮에 하는 주강(晝講), 저녁에 하는 석강(夕講)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차례, 혹은 두 차례의 경연을 하다가 차츰 성종 시기에 이르러, 하루에 3차례 경연을 하는 방식이 확립되었다. 경연에 참석하는 관리는 초기에는 6, 7명 정도였으나 차츰차츰 더 많은 관리들이 경연에 참가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의정부,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등의 고위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경연 자리가 자연스럽게 정부 부서 간의 정책 협의 기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율곡이 사망한 뒤의 1581년(선조 14년)에는 율곡의 친구이기도 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당시 관리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경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관료들에 제한되어 있었는데 처음으로 재야의 성혼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재야 학자들이 자주 초빙되었다.

경연에 사용된 교재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四書)와⌈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5경(五經), 그리고 역사서적인『자치통감(資治通鑑)』·『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등이었다. 말하자면 주로 유교 경전과 역사서적이다. 자치통감은 중국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역사서이며,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남송의 주희(朱憙), 주자가 쓴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임금의 경연에는 유교와 관련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주요 텍스트 외에도 『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심경(心經)』·『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國朝寶鑑)』등이 부교재로 사용되었다.

강의를 하는 방식은 먼저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읽고, 번역을 한 뒤에 설명을 한다. 그 다음 국왕이 잘 모르는 점에 대해 질문을 하면,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한다. 역사서는 통독(通讀)을 하고 사서와 오경의 경우에는 주석서를 읽어 그 뜻을 풀이하였다. 물론 당시 중요시된 주석서는 주자의 주석서로, 그 서적을 통해서 주자학, 즉 성리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배워나가는 것이었다.

 

선조 임금과 경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2>

선조 임금과 경연

 

1575년 6월 24일(음력)의 일이다. 이 해는 선조 8년으로 율곡은 40세가 되던 해였다. 이 해 3월 병 때문에 잠시 고향인 파주 율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임금의 유교 경전 공부인 경연(經筵)에 참가하였다.

당시 부제학의 자리에 있었던 율곡은 김우옹, 정언지 등과 함께 선조 임금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교과서는 상서(尙書) 강고편(康誥篇)이었다.

상서는 서경(書經)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유교의 다섯 경전(五經) 중 하나로 꼽힌다.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진 이 책은 요순시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 요순시대는 신화의 시대다. 실지로 중국 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전통시대에 지식인들은 요순시대가 실지로 존재했고 이상적인 통치자인 요임금과 순임금도 실재하였다고 믿었다.

은나라는 상나라라고도 불린다. 이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 1046년경에 존재한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로 불리는데, 은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한바 있다. 상나라는 중국 중원지방의 동쪽 지역에 근거하였는데, 서쪽지방에 주나라가 등장하여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를 물리친 뒤에 그 땅을 나누어 자기 친족과 부하들에게 분배하였다.

예를 들면 제나라 지역은 건국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강태공에게 주고, 노나라 지역은 주나라 천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 주었다. 이렇듯 점령지 땅의 일부를 떼어 부하나 친족에게 통치를 맡기는 제도를 분봉(分封)제도라고 한다. 그 땅은 봉토(封土)라고 하며, 그 땅을 통치하는 자를 제후(諸侯)라고 한다. ‘후’라는 글자가 임금을 뜻하므로 ‘제후(諸侯)’란 여러 임금, 혹은 임금들이라는 뜻이다. 봉토를 천자로부터 하사 받아 그 땅을 임금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통치하는 제도를 봉건제도(封建制度)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종법제도라는 혈연 기반의 제도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종법제도는 천하와 그 소속 국가들의 관계를 종갓집, 즉 큰집과 작은 집의 관계로 규정한다. 모든 나라는 큰집인 천자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작은 집의 역할을 한다. 큰집에 경사가 있을 경우는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는 것이다.

 

선조 임금이 율곡 등과 그날 같이 읽은 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봉아, 너는 잘 생각하라. 이제 백성들은 너의 부친 문왕을 공경하고 따르는데 달렸으니 들은 바를 계승하고 덕이 될 말을 실행하라. 가서 은나라의 옛 어진 왕들에게 널리 도움을 구하고 백성들을 다스려라. 그대는 멀리 은나라의 늙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마음을 정하고 교훈을 삼아라. 옛 어진 왕들에 대해서 널리 듣기를 구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보호하며 하늘같이 크게 되게 하라.”

 

여기서 봉은 주나라 첫 번째 왕의 마지막 아들로 송나라에 책봉된 인물이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하였는데 은나라 유민들이 많은 송나라 지역에 봉을 새 임금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래서 유민들인 은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널리 구하라고 한 것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덕이 풍부해지면 임금의 명령을 지키고 져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임금(주나라 천자)께서 이르시길, 오호라 봉아! 내 몸에 병을 앓듯이 하여 공경할지어다. 하늘은 두렵지만 진실로 도우려하고, 백성들의 정은 대략 알 수가 있느니라. 내가 듣건대 원망은 큰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곳에도 있는 것이니, 따르지 않는 이는 따르게 하고 힘쓰지 않은 이는 힘쓰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그대여! 일 할 때에 임금의 뜻을 넓히고 은나라 백성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라. 또 오직 임금을 도와 하늘의 명을 안정시키며 백성들을 새롭게 하라.”

이러한 문장을 선조 임금과 함께 읽고 율곡과 김우옹, 정언지 등 신하 선생님들의 설명이 있었다. 이렇게 임금을 모시고 신하들이 유교 경전이나 역사 서적을 읽고 임금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 제도를 경연(經筵)제도라 한다. 고려시대에 처음 시작된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 그 제도가 정비되고, 강화되어 소위 경연정치가 활성화되었다. 경연정치라 함은 경연을 하는 장소에서 정부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검토와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율곡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경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594년(선조 27년) 7월 9일에 대사헌 김우옹(金宇顒)등이 경연을 열자고 다음과 같이 건의를 하였다.

“생각하건대 옛날에 지혜로운 군주는 전쟁과 혼란한 세상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두어 계속 학문을 힘썼습니다. 이는 옛날 일을 거울삼아 근본을 배워서 국가사업에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경연을 열지 않은 지가 이미 3년입니다. 전하의 학문이 이미 고명하고 전하의 인덕(人德)이 이미 넓다고 하라도 마음의 은미한 곳이 어찌 다 도리에 부합되고 호령과 시행이 어찌 다 적절하겠습니까? 그리고 궁중에서의 사사로운 자리가 어찌 다 올바르고, 관직의 임명과 파면의 상벌에 어찌 다 사심이 없겠습니까? 그 중에 하나라도 잘못이 있다면 학문을 하는 공이 중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하늘의 뜻을 누리고 인심에 보답하겠습니까?”

그동안 삼년 동안이나 경연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그 때문에 궁중에서 이루어진 정치, 예를 들면 관직의 임명이나 파면 등에 사사로운 결정이 없었는지 묻었다. 그동안의 결정에 하나라도 잘못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경연정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반문하였다. 이렇듯 경연은 대궐에서 이루어진 사사로운 결정에서부터 관리의 임면,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등에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김우옹 등은 계속해서 이렇게 요청하였다.

“앞으로는 부디 편전(便殿)에 나오셔서 경연을 열고 공경(公卿)에서부터 유신(儒臣)까지 날마다 돌아가면서 모시게 허락해 주십시오. 서로의 생각을 물어 의리(義理)가 정밀해지게 하고, 또한 정령(政令)의 득실, 민간의 고통, 군무(軍務)의 결함에 대해서도 모두 터놓고 말하게 하고 서로 의견을 절충한다면 많은 계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의 정치가 새로워 질 것이니 왜구의 환난을 해결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민본정치란 민본(民本), 즉 백성을 근본으로 섬기는 정치를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치와는 다른 것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나름대로 백성을 중시하는 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연제도였다. 경연의 목적은 임금을 공부시키는 것이었지만, 임금과 그를 둘러싼 궁중 측근들의 정책과 결정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평가하며, 여러 가지 의견을 제안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1>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라가 잘 되려면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자 주변에 모여야 한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먼 장래를 설계하고 계획하여 차근차근하게 일을 추진해야한다.

논어⌋의 「요왈편」에

“가까운 친척보다도 현명한 사람이 더 낫다”

는 말이 있다. 일가친척이나 혈연 지연으로 주위 참모들을 모을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모아서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 나라를 부흥시키는 첩경이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제시한 의견을 듣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그래서는 당연히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없을 것이다.

율곡은 어느 날 선조 임금을 모시고 맹자를 강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율곡은 임금이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해 놓고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러자 선조가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은 분명히 그렇다. 나도 그 점은 잘 안다. 때문에 지난번에 현명한 사람을 쓰자고 말한 것은 진실로 좋았다. 그러나 사람이 좋기만 하고 일의 경험이 없을 경우에 일을 중도에 너무 지나치게 할까 염려되었다.”

일을 맡겼을 경우, 경험이 없으면 일 추진이 너무 편협하거나 외골수로 지나쳐 그 결과가 어그러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율곡이 존경하던 조광조(趙光祖, 1482-1520)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이상 정치를 꿈꾸고 중종의 총애를 받아, 미신을 타파하고 향약을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를 지지한 중종마저 그를 미워하여 결국 유배지 화순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선조는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섣불리 일을 맡겼다가 실패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번번이 일이 너무 과하게 지나칠 것만을 근심하십니다. 오늘날 신하들이 전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중도에 지나친 일이 생길 경우, 위에서 제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일을 시키고 나서는 그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 지켜봐야 한다. 그러다 지나침이 있으면 제동을 걸면 되는 것이다. 율곡의 생각은 일을 추진하는 편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선조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다. 고집하는 사람이 제재를 듣지 않고 반드시 제 멋대로 일을 추진해버리면 어찌 하겠는가?”

율곡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어찌 일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하여 많은 선비들이 과거급제 만을 출세하는 길로 여기고 있으나 첫째가는 인물들은 반드시 과거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과거로 사람을 쓰는 것은 말세의 관습으로 어찌 성세(盛世)의 일이겠습니까? 혹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가 대관이 되면 좋지 못한 자도 섞여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시겠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공론이 크게 행해진다면 반드시 마땅한 사람이 선발될 것입니다. 공론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문사(文士) 중에도 선하지 못한 자가 많이 있어 중요 직책을 맡게 될 것입니다. 어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만 근심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등용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는 선조에 대해서 율곡은 과거 제도 자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율곡은 자신이 과거를 통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관직을 얻고 왕과 가까이 할 수 있었지만, 국가에서 인재를 채용할 때 과거급제자만 우대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 있으며 과감히 일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선조는 아무래도 뒷감당을 하지 못할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사실 선조 대왕은 지금 율곡의 따끔한 충언에 요리조리 변명을 하면서 곤란한 상황을 면하려고 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신하가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선조 자신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율곡이 맨 처음에 지적한 것처럼 선조는 사람을 임명해놓고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이 쓴 ⌈만언봉사(萬言封事)⌋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전하께서 명철하심에는 남음이 있으나 덕을 베푸심은 넓지 못하며, 선(善)을 좋아하심은 얕지 않으나 의심이 많으신 점은 버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 중에 올바른 의견을 아뢰기에 힘쓰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치고 외람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남보다 빼어나려 애쓰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여러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면 그들이 당파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죄짓고 잘못한 것을 공격하면 그들이 편파적으로 모함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황의동 저, ⌈율곡 이이⌋, 152쪽)

 

선조 7년(1574년) 정초에 나라에 재난이 심하였다. 그래서 선조는 조정의 관리들부터 초야(草野)의 선비들에게 이르기까지 널리 국난 극복을 위한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그때 우부승지(右副承旨)의 직책에 있었던 율곡(당시 39세)은 장문의 상소문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그것이 만언봉사다. 거기에서 율곡은 선조의 문제점 중 하나로 마음이 좁고 의심이 많아 신하들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율곡이 임금에게, 훌륭한 사람들을 등용해 놓고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자 선조 임금은 요리조리 말을 돌리면서 율곡의 비판을 피해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왕의 변명에 율곡도 지지 않고 끈질기게 왕의 말을 따라가면서 비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지 않을까?

 

율곡은 ⌈만언봉사⌋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좋은 말이 있어도 그것을 채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사가 신하가 되었어도 노나라 목공의 영토가 줄어드는 것이 더욱 심하기만 하였고, 맹자가 경이 되었어도 제나라 선왕의 왕업은 흥성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진언하는 사람들이란 자사나 맹자 같은 사람들도 아니려니와, 그 말을 채택하였다는 실상에 대해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데 어떠하겠습니다.”(황의동 저, ⌈율곡 이이⌋, 153쪽)

좋은 참모만 있으면 뭐하겠는가? 그 참모를 활용하여 국가 대사를 운용하여야 나라가 흥성하는 것이다. 퇴계와 율곡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을 곁에 두었던 선조 시대에 왜 그렇게 정치가 무기력하였는지 율곡의 글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나라에 기강이 없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0

나라에 기강이 없는 이유

 

선의 14대 국왕 선조(1552년~1608년, 재위 1567년 ~ 1608년)는 서자 출신의 임금이었다.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서자였다. 서자란 정실부인이 아닌 첩에게서 난 아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차별의 대상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선조는 서자 콤플렉스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조는 특히 유교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성리학을 장려하였으며, 대유학자를 존경하는 한편, 사림들을 널리 등용하였다. 성종 때부터 조선의 정치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즉 유학자들은 선조의 지원을 받아 정치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선조는 퇴계 이황(1501-1570), 율곡 이이(1536-1584), 그리고 우계 성혼(1535-1598) 등 대유학자들과 경연을 하고 학문과 역사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퇴계 이황을 깊이 신뢰하였는데 퇴계가 사망하고 난 뒤에는 율곡을 가까이하고 그의 학문과 사상을 경청하였다. 이 때문에 율곡은 선조를 만나 경연을 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임금에게 도움이 되는 말과 충언을 거듭하였다. 경연할 때의 모습을 기록한 사료에는 그의 그러한 정성과 충정이 절절히 베어져있다.

경연이 있던 어느 날 율곡이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기강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구습을 답습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기대할 것이 없게 됩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지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대신들과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일시에 그들이 발분할 수 있도록 하고 기강을 세워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조시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시대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인들에게 능멸을 당한 시대의 임금이 바로 선조이다. 이 시대에 율곡이 살고 있었으니 율곡의 눈에 조선은 얼마나 걱정스럽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임금 앞에서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그의 말은 바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다는 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기강은 법령이나 형벌로 억지로 확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조정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공정(公正)하게 집행되고 사사로운 정(情)이 행해지지 않아야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무엇으로 서겠습니까?”

조정의 관리들과 왕족들이 공정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행동을 하고, 사악한 행위들이 만연하니 국가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옆에 같이 있던 김우옹이 율곡의 충언을 거들었다.

“오늘날의 폐단은 정말 그 말과 같습니다.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고 사의(私意)가 횡행하여 세워진 법을 고치려 하면 법이 세워지자마자 폐단이 또 생깁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시어 마음에 천리(天理)가 유행하고 인욕(人欲)이 없어져서 크게 공변되고 지극히 바른 도리만이 행해지게 하신다면, 사람들이 다 감동 분발하여 명령이 나오면 반드시 행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뜻을 세워 정심·성의에 힘쓰신다면 사업이 요(堯)·순(舜)·탕(湯)·무(武)를 기약할 것이니, 초 장왕·제 위왕은 말할 것도 못될 것입니다.”

임금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堯)·순(舜)·탕(湯)·무(武)는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가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왕들이다. 이들처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임금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학에서는 통치자의 마음은 그가 펴는 정치와 별개의 것이다. 통치자의 마음 보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를 둘러싼 정치제도이며, 국가를 경영하는 데 도구가 되고, 지침이 되는 법률이다. 통치자는 제도에 따라 그리고 법에 따라 성실하게 권력을 행사하면 된다.

그렇다면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와 법률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국민에게서 나온다.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입법자들은 국민이 뽑고, 그 집행을 감시하는 사법자들 역시 국민이 선임한다. 통치자 역시 국민들이 뽑는다. 민주주의, 즉 백성이 주인인 정치 체제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입장에서 과거 유학자들의 정치 이야기는 너무도 수동적이고 통치자 의존적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정치였던 것이다. 소위 유교의 왕도정치이며, 민본정치다.

 

율곡이 또 이어서 이렇게 왕에게 아뢰었다.

“오직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정치가 참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을 쓸 때, 통상적인 사례에 얽매이지 않고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 있는 사람을 부려서 각각 그 능력에 맞게 했습니다.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분수는 정해져 있으니, 오늘날에도 반드시 사람을 가려서 벼슬을 주고 책임을 맡겨 성취를 요구해야 모든 공적이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묘년에 조광조(趙光祖)가 중종의 지지를 받아 큰일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는 선비로 일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하여 소란사태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덕분에 소인들이 틈을 타서 사림(士林)을 해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을 맡은 자들이 기묘년의 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기묘년의 사람들이 일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으나 어찌 오늘날 전혀 일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왕에게 율곡은 세종대왕 때의 관리 등용 방법, 그리고 조광조 개혁이 실패로 끝난 이유 등을 들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20)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을 확립한 인물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전파하고 성리학적인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실패하고, 반란 주모자로 몰려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율곡은 계속하여, 방법이나 절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임금의 마음과 의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임금께서 큰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몸소 행하여 근본이 맑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어 많은 신하들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먼저 자기를 닦고 나서 반드시 어진 사람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은 벼슬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일을 시행해야 만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십니다만 불러서 벼슬만 시키실 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참으로 도리를 지키는 선비라면 어찌 그런 허례허식을 위해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당시 선조가 행한 정치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직설적으로 언급하였다. 어진사람들을 채용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끈질기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율곡도 대단하지만 신하의 따끔한 충고를 진지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듣고 있는 선조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시대의 정치가들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9>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다

 국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통치자인 대통령의 마음에 달려있는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독재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민주국가에서 통치자의 권한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국가의 세 권력, 즉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나뉘어 있는 것은 최고 권력자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한 제도이다.

 

고대 때부터 훌륭한 정치는 백성들이 그 통치자의 존재를 모르도록 하라는 말이 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그가 있는지 조차 모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통치자다. 가장 좋지 못한 통치자는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다. 통치자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를 믿지 않는다. 훌륭한 통치자는 말을 삼간다. 통치자가 훌륭하여 정치가 잘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노자의 말을 빌린다면, 날마다 저녁 아홉시 골든타임 뉴스에 통치자의 뉴스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송된다면 그런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유교에서 바라는 훌륭한 통치자는 누구일까? 선조 6년(1573년) 10월 어느 날 율곡이 김우옹 등과 함께 선조임금을 모시고 인심도심설 강의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선조 임금이 갑자기 이렇게 하소연을 하였다.

“우리나라 일은 참으로 하기 어렵구나. 한 가지 폐단을 고치려 하면 다른 한 가지 폐단이 또 생겨, 그 한 가지 폐단이 고쳐지기도 전에 그 폐단을 더하게 되니, 손발을 쓸 수 없구나.”

이이가 이를 듣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일이 그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국가에 기강이 서지 않아서 인심이 많이 해이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어 구차하게 자리만 채운 자가 많습니다. 이들은 먹고 지내는 것만을 알 뿐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폐단을 고치라는 명령이 한번 내려지면, 먼저 꺼리는 마음을 품고서 받들지 않을 뿐더러 고의로 폐단이 생기게 합니다. 이것이 공을 들여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율곡이 진단한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 기강이 서지 않았다는 점, 둘째 사람을 잘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었다는 점, 셋째, 일부러 폐단을 고치지 않는 개혁 반대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율곡이 선조에게 제시한 처방약은 다음과 같았다.

“위에서 임금이 먼저 스스로 뜻[聖志]을 정하여 반드시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며, 호오(好惡)·시비(是非)를 한결같이 천칙(天則)을 따라서 공정하게 하여 어지럽지 않게 되면 기강이 확립될 것입니다.”

 

율곡은 두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먼저 임금이 개혁하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세울 것. 그리고 변함없는 원칙에 따라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할 것.

임금 자신이 개혁할 뜻은 없으면서 신하들 앞에서 입으로만 백번 개혁을 외쳐본들 궁궐 안 밖의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또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니 국가의 기강이 헤이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을 듣고 옆에 있던 김우옹이 이렇게 거들었다.

“학문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많으나 옛사람의 말을 듣고 배워 그 진의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몸과 마음에 꼭 필요한 공부를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옛글에 해박하더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선조 임금은 옛글을 읽기만 했지 자신이 몸소 실천하는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제가 보건대, 삼가 임금의 학문이 고명하여 아는 것이 매우 광범위하지만 정사 일에서는 그 보람을 보지 못하니,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인 병폐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정심(正心)·성의(誠意)의 설에 대해 옛사람이 이미 극진하게 말하였는데 이제는 도리어 절실하지 않게 여깁니다.”

선조 임금이 경전 공부를 많이 하여 박식은 하지만 정치에는 그것이 잘 활용되지 못하니 필시 그가 배운 공부에 문제가 있거나 임금 자신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신랄한 비판을 한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뜻을 정성스럽게 하라고 옛사람들은 말했으나, 임금은 이 말을 절실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일은 다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성의·정심에서 힘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잘 다스려지기를 기대하여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옛사람의 천만 가지 말이 모두가 매우 절실하나 그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敬)자 하나입니다. ‘경’자는 온갖 선이 있는 곳인데, 경을 논한 말은 매우 많으나 그 가운데에서 이른바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히 하면 마음이 곧 전일(專一)해지고 마음이 전일해지면 그르고 편벽된 것이 절로 없어지므로 이것을 간직하면 천리(天理)가 밝아진다.’는 말이 치밀하고 친절하니,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다 여기에 착수해야 합니다.”

뜻을 정성껏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경건한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였다.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편벽된 마음을 잘 다스린다면 천리가 밝아진다고 까지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임금의 마음이 교만해지고 자만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이러한 말을 듣고 선조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옳다. 마음을 정제하고 엄숙히 하는 것을 어찌하여 착수할 곳이라고 하느냐 하면, 정제 엄숙은 외면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힘쓰기 쉽기 때문이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은 내면을 말한 것이어서 착수하기 어렵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이란 성리학에서 ‘경(敬)’자를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바깥의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선조는 이렇듯 아주 깊이 있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술술 풀어낼 정도로 박식한 군주였다.

율곡은 이러한 선조 임금에 대해 다시 한번 따끔하게 충고를 하였다.

“마음을 정제하고 엄숙히 하는 것은 겉으로만, 즉 외모만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의 모습만 그렇게 가지고, 실질적인 정치는 천리(天理)와 다르게 행하신다면 마음 자체가 원래부터 정제하고 엄숙한 것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성제(成帝)는 조정에 임하면 아주 조심스러운 모습을 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존엄하기가 신(神)과 같았으나 정치가 엉망이었으니 어찌 그 마음 상태를 경(敬)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를 듣고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성제의 경우는 마음이 정제하고 엄숙한 것이 아니요. 그의 행동을 기록한 사관(史官)이 그 태도를 잘 수식하여 말하였을 뿐이오.”

선조 임금의 말을 듣고 있으면 잘 배운 학생과 같다. 또박또박 자기 할 말을 다하고, 또 조리에 맞게 말한다. 하지만 율곡이 보기에는 그것뿐이었다. 율곡은 실질적으로 정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목격하면서 선조의 부족함을 힘껏 지적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당시는 천하의 모든 일이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는 시대였으니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도자는 겸손해야한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8>

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곡은 모두 네 사람의 임금을 모셨다.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이다. 그가 과거에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한 때는 명종 때였다. 명종 3년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1년에 한성시에 수석합격을 하였으며, 19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명경시에 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차례나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율곡이 장원 급제를 한 시험을 보면 진사 초시, 한성시, 별시, 식년 문과초시, 전시, 복시 등 화려하다. 명종 때 그는 호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에 임명되어 화려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젊고 똑똑한 율곡을 더욱 가까이 두고 국가의 큰 정치에 관여토록 한 것은 선조 대왕이었다.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33세 된 율곡을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에 임명하였다. 이 직책은 사헌부의 정5품 관직인데 보통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된다. 특히 문과 급제자 중에서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발탁되었다. 새로 맞이한 선조 시대의 대표적인 젊은 관료이자 학자로 율곡이 선택된 것이다.

선조는 반년쯤 뒤에 율곡을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로 임명하였다. 홍문관은 집현전과 같은 곳으로 임금에게 간언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겸직으로 임명된 경연시독관은 정5품 관직으로 임금의 공부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책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임금의 선생님이 된 것이다. 경연시독관은 경연이 끝나면 경연에 참석한 대신들과 국가 대사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중요한 직책이었다. 선조의 율곡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임금의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또 율곡 자신의 임무가 임금을 가르치고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것이었으므로,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직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 6년, 1573년 10월 12일 경연 때의 일이다.

임금이 경연의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인심(人心, 인간적인 마음)과 도심(道心, 도덕적인 마음)은 두 가지 마음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생길 적에 도의(道義)로 나타나면 도심이라 하고 식색(食色)과 같은 욕망으로 나타나면 인심이라 하는데, 욕망이 절도에 맞는 것도 곧 도심이다.”

율곡이 이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의리에 대하여 소견이 정밀하신데 어찌하여 이 마음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옮기지 않으십니까. 요즈음 보건대, 천시(天時)·인사(人事)가 날로 점점 어그러져서 천재지변이 거듭 나타나도 예사로 여겨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강이 풀리고 인심이 흩어져서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임금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퇴폐를 정돈하지 않으신다면 흙더미가 무너지는 형세가 얼마 안 가서 올 것입니다.”

임금이 그동안 배웠던 것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생각해서 인심과 도심에 대해서 한마디 하였는데, 젊은 율곡은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모습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왕 앞에서 다소 지나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율곡은 당시 조정의 안팎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삼품의 홍문관 직제학으로 자신의 맡은 바 임무가 바로 그러한 직언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선조 1년 때(1568년)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된 뒤에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강릉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선조 3년 때(1570년) 신병으로 사퇴하고 해주(海州)에 가 있었다. 선조 4년 때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이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 거기에서 은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선조는 재임 5년차 되던 때(1572년) 그를 다시 사간원 사관, 홍문관 응교, 홍문관 전한 등에 임명하였다. 율곡이 이들 관직을 모두 사퇴하였으나 그 다음해(1573년, 선조 6년) 선조는 다시 그를 직제학으로 임명하여 궁중에 가까이 그를 불러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선조의 신임이 이러하였으므로 거기에 부응하여 나라를 위하고 선조 대왕을 돕는 절실한 마음으로 궁궐 내외부의 사정을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고 간언을 한 것이다.

율곡은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성인(聖人)에게도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반드시 자기보다 어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한마디 선한 말로써 스승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도 성인이 취택하였던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반드시 탕(湯) 임금의 훌륭한 스승인 이윤(伊尹)과 같아야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다면 선한 말이 어디로부터 들어오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널리 들어서 선한 말을 가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신하들이 다 나의 스승이 되고 선한 말들이 임금의 몸에 모여서 덕업이 높고 넓어지게 됩니다. 이제 전하께서 겸허하고 퇴양(退讓)하시는 것이 하교(下敎)에 나타났으니, 신은 감격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율곡은 임금의 신분이면서 선조가 자신의 직언을 듣고 싶어 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다만 겸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스스로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면 이는 선을 행할 근본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물러서서 일을 맡기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날 뜻이 없으면 겸양이 도리어 병폐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말씀은 겸허하시지만 공론을 따르지 아니하며,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남을 그르게 여기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도리어 남을 나만 못하게 여기는 병폐가 있는 것이니, 신은 답답합니다.”

선조가 겸허하고 겸손하기는 하지만 공론을 따르지 않고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고 판단하며,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궁중의 병폐가 생기고 나아가 백성들의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율곡은 임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그것이 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조정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오늘날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세 정승)은 다 인망이 있으니 어찌 자신들의 의견이 전혀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봉록만 받아먹고자 하겠습니까. 의견을 개진하려고 하여도 임금님의 뜻에 거슬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도리어 임금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므로 아무 말 없이 답답하게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임금님의 뜻이 나라가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면 대신들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도 각각 품은 뜻을 아뢸 것입니다.”

왕 되는 사람이 신하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지 않으니 모두 답답하게 입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최고위 관료들인 정승들도 입을 닫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임금이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만약 대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자신의 생각을 각각 다 말한다면 율곡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가 맡은 역할과 임무가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400여년 전, 왕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왕조시대의 일이지만 요즘 되새겨 읽어도 그의 발언은 신선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순서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7>

나라를 다스리는 순서

 

슨 일에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해야 할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에도 본질적인 부분이 있고 지엽적인 부분이 있다. 본질을 잘 꿰뚫어 추진하고 그것을 잘 완수하게 되면 지엽적인 것들은 자연히 잘 정리가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일의 본질을 잘 파악해서 처리한다. 잘못하는 사람은 두서없이 일을 하다 지엽적인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미숙한 채로 일을 끝낸다.

조그마한 일도 이러한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떻겠는가? 율곡이 선조 대왕에게 성학(聖學, 통치를 위한 임금의 학문)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서 강론할 때(1573년 10월 12일)의 이야기다.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내 성품이 어리석고 둔하여 감히 큰일을 할 수가 없다.“

율곡이 말했다.

“대왕의 성품이 원래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지 못하신다면 저도 절망하겠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영리하고 총명하시지만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큰 뜻을 분발(奮發)하지 못하시니,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필부(匹夫)가 글을 읽고 몸소 행하는 것도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뜻이 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 나라의 백성을 맡아서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졌고 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나셨으니 어찌 스스로 분발할 뜻이 없겠습니까?”

율곡은 먼저 임금님을 추겨 세웠다. 임금님의 자질도 충분하고 정치를 잘 하고자 하는 의욕도 강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향약(鄕約)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거행하라고 명하셨으니 참으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대의 법’이란 중국 ‘하은주’ 시대의 법이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던 시대에 실시하였던 법, 즉 훌륭한 제도라는 의미다.

향약이란 향촌 사회의 약속, 즉 자치 규약을 말한다. 율곡은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2년 전에 청주목사로 부임했었다. 그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제정하여 청주 지방 백성들의 자치 능력을 키워주고자 하였다. 그 다음해 병으로 청주에 계속 있지 못하고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가 뜻했던 향약의 실시는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율곡은 자신이 추진했던 향약을 이야기 하면서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다”고 하였다. 본질적이면서 우선시해야 할 부분이 있고, 지엽적이며 나중에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향약은 만민을 바르게 하는 법입니다.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향촌의 자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는 향약의 기본 정신은 유교 사상에 바탕을 깔고 있다. 서로 덕업을 권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예속으로 서로 사귀며, 환난을 당해서 서로 도와서 구하자는 내용이다. 율곡도 충주목사를 하면서 서원향약을 만들어 추진하였는데, 향약은 백성들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적으로 이끄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나쁜 의미로 말한다면 ‘자치’라기 보다는 관주도형의 농촌 계몽운동, 혹은 시민 계몽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부에서 주도를 하게 되면 자칫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추진하는 자에 따라서는 민간 탄압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율곡은 이 점을 분명히 경계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이다. 윗물이 흐린데 어찌 아랫물이 맑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곡의 한마디 한마디가 일의 순서와 본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기본이 안 갖추어져 있는데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율곡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미 성전(盛典, 즉 향약)을 거행하였으니 중지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시어 조정에 시행함으로써 정령(政令)이 다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 뒤에야 백성이 감동되어 흥기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이란 향약의 실시를 말한다. 기왕에 추진한 향약을 중지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임금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도록 건의하였다. 백성들에게 펴고자 한 ‘향약’의 규정을 임금부터 스스로 힘껏 실천을 한 뒤에 조정에서 시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 정부의 정책과 명령이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다면 백성들도 감동하여 즐거이 향약을 실천할 것이라고 한다.

요즘의 정치 상황에도 잘 맞는 말이다. 어떤 정치가들은 국민을 계몽하고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한다. 율곡에 따르면 국민을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국회의원, 정치가, 고위직 공무원부터, 가장 위에는 대통령부터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려면, 본질적인 부분이 우선적으로 잘 다스려진 뒤에야 나라 전체가 잘 다스려진다고 역설한 442년 전 율곡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6>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말은 요즘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을 한자말로 바꿔보면 ‘치국(治國)’이다. ‘치국’이란 전통시대 지식인들에게는 흔히 쓰는 말이었다.

특히 중국의 고대 문헌에는 매우 빈번하게 이 ‘치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당시에는 ‘국가를 다스린다’는 치국의 개념이 매우 중요했다. ‘지식’이란 국가 통치를 위한 지식이었고, ‘지식인’이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글을 배운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교사상에서 ‘치국’은 대개 ‘평천하(平天下)’와 함께 어울려 등장한다.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혹은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의 ‘평천하’는 사실상 ‘치국’과 같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라 ‘국(國)’자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지칭할 수 있는 글자이지만 중국에서는 한 지방을 뜻하는 의미가 강하다. ‘천하(天下)’라는 말이 비로소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평천하’는 ‘중국 전체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바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와도 바꿔 쓸 수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 사서(四書)의 한 권인 대학에 ‘치국, 평천하(治國, 平天下)’라는 문장이 나온다. 두 단어를 나란히 이어서 쓰면서 ‘나라를 잘 다스려야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정치가란 어떤 한 지방을 잘 다스려야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전통시대 유교 지식인은 유학 공부를 시작하면 우선 맨 처음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 평천하’라는 말부터 배운다. ‘치국 평천하’ 앞에 ‘수신제가’라는 말이 붙어 있다. ‘수신’이란 자기 몸을 닦는 것, 즉 도덕적인 수양을 하는 것이다. ‘제가’란 집을 가지런히 한다, 즉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의미다. 요즘은 ‘집’이란 뜻이 한 가정의 의미가 강하지만, 고대에, 특히 중국에서 ‘가(家)’란 ‘국(國)’이나 마찬가지로 한 지방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했다. 작은 지방은 ‘가’, 큰 지방은 ‘국’이었다. 고대의 농경시대에 가족은 보통 대가족을 이루어 수 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우리나라 시골에도 옛날에는 하나의 성씨를 가진 일가친족이 모여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그런 마을이 더 커서, 마치 하나의 정치 공동체처럼 집단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집단을 ‘가(家)’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가’란 역시 ‘치국’이나 ‘평천하’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그마한 집단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그러므로 ‘자기 몸을 잘 다스리고 수양을 하면, 작은 집단을 잘 다스리고, 나아가 더 큰 집단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중요한 포인트는 ‘자기 몸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다.’

유교적 교양을 가진 전통시대 지식인은 어떤 집단을 다스리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수신’의 문제를 따진다. 자기 몸을 잘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가정이나 어떤 지방이나 나아가 국가 전체를 잘 다스리겠냐는 것이다.

과거에 수차례나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한 율곡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정치 문제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유학자들과는 좀 더 다른 혜안이 있었다.

선조 대왕 때(6년, 1573년, 10월 12일) 경연의 자리에서 임금이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러가서는 오지 않았는가?”

율곡이 병을 핑계대고 관직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고 묻는 것이었다.

율곡이 말했다.

“신은 병이 깊고 재주가 없어 스스로 돌아봄에 큰일을 할 수가 없는데 나라의 봉록만을 먹는 것은 참으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물러가서 죄를 면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대의 죄는 내가 아는 것이니 지나치게 겸양하는 말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다시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그대는 물러가 있어도 자주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나랏일을 잊지 않는 것을 알 만하다.”

율곡은 초야에 있을 때도 국가의 일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임금에게 올렸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깊은 것을 확인하고 선조 대왕에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신은 초야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임금님의 학문성과가 얼마나 성취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임금이 깊은 궁궐에 깊이 있으면서도 참다운 덕이 있다면, 백성들이 보고 느껴서 사방이 감동하는 법입니다. 헌데 오늘날 백성들이 초췌하고 풍속이 퇴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율곡이 본 초야의 백성들은 태평성대의 시대에 볼 수 있는 백성들이 아니었다. 폭군이나 무능한 임금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백성들이었다.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莫此爲甚]’고 하였으니 얼마나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구절에 친숙한 보통의 유학자라면, 백성들의 고통은 임금의 수양 부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거기에서 그친다. 율곡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좀 더 발전된 진단을 내놓는다.

“신은 성학(聖學, 임금의 수양공부)이 날로 밝아지기를 기대했었으나 끝내 보람을 보지 못하니, 신은 참으로 괴상하게 여깁니다. 성질(聖質, 임금의 성품)이 영명(英明)하시어 참으로 큰일을 하실 수 있는 자질이신데, 즉위하신 처음에 높은 신하들이 잘못 보좌하여, 매번 비근한 사례를 끌어대어 선비들의 말을 물리치고 억눌렀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도록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수양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그 보람이 없었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조정의 높은 대신들이 하급 공무원들, 혹은 재야의 선비들이나 지식인들의 좋은 의견을 무시하고 억눌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원문을 보면 율곡은 이들을 ‘유자(儒者)’, 즉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궁중에서 지식인들의 자유스러운 의견을 대신들이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꿔 말하자면 정부에서 언론 통제를 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선조 대왕 자신이 막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신들이 막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결국은 백성들이 임금의 마음과는 달리 생활이 궁핍하고 행동이 퇴폐해지게 된 것이다.

아직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주’나 ‘자유’, ‘인권’의 개념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정치에 있어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율곡은 지적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시대이며 인권과 자유가 시민들이 향유하는 삶의 최고의 가치로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은 그러한 것을 무시하고 표현 통제, 언론 통제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정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정치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율곡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임금이 해야 할 공부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05>

임금이 해야 할 공부

 

‘대통령학’이라는 학문분야가 있다.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다. 한국대통령학회도 있고, 한국대통령학연구소도 있다. ‘대통령학’이라면 사실 유교의 가르침만큼 체계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유교, 특히 성리학은 그러한 학문이 집대성된 철학이다.

곡은 선조에게 수시로 대통령학 강의를 하였다. 선조 2년의 기록이다.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생각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다스리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학문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단지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아와 고서(古書)를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하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지로 효과가 있게 되는데, 그런 다음에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연이란 궁중에서 학자들이 임금과 함께 유교 경전이나 역사서 등을 읽는 것이다. 말하자면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율곡은 임금이 잡다한 서적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격물(格物)이란 사물을 잘 살펴보고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치지(致知)란 지식을 넓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통하여 뜻을 정성스럽게 가지며[誠意],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正心]. 대학에 나오는 이러한 개념은 바로 마음 공부, 수양 공부를 의미한다. 마음을 바로 하는 공부를 한 뒤에야 실질적인 효과가 나오고 비로소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율곡이 선조 2년, 즉 1569년에 임금을 앞에 두고 이렇게 대통령학을 가르칠 정도가 되었던 것은 어떤 배경 때문이었을까?

율곡은 당시 34세였다. 그는 1564년(명종 19)에 문과에 급제한 뒤, 호조좌랑으로 임명되고, 곧이어 예조좌랑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비행을 일삼던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해에는 횡포를 일삼던 재상 심통원을 탄핵하여 관직에서 쫓아냈다. 1568년에는 명나라 사신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동행하였으며, 그 다음해 1569년에 귀국한 뒤에는 홍문관의 부교리, 교리로 승진되었다. 그와 동시에 춘추관기사관을 겸임하였으며,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율곡은 당시 임금의 경연에 참석하고 임금을 가르치며, 임금과 관료들의 잘못을 살펴서 바로잡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거침없는 충고와 가르침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임금은 왜 수양 공부를 해야 하는가? 율곡은 임금에게 계속 이렇게 말했다.

“필부는 집에 있으므로 아무리 학문의 공이 있다 해도 그 효과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아 마음과 뜻에 축적된 것이 정사(政事)에 발휘되는 까닭에 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재 민생은 궁핍하고 풍속은 경박하며 기강은 무너지고 관리들의 기풍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해가 되는데도 다스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의 격물·치지·성의·정심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이런 풍조가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날로 더욱 퇴패(頹敗)해진다면 나라 모양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름 없는 필부, 즉 일반 시민은 영향력이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그가 결정한 일들이 한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지만 임금의 결정은 그렇지 않다. 임금의 마음 씀에 따라서 수천만, 수억의 인구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피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임금의 한마디 말에 따라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결정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은 잡다한 지식을 쌓기 전에 먼저 마음의 수양공부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 밑의 신하들이 그것을 따라 정치가 잘 이루어지고, 백성들은 당연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율곡은 당시 풍조가 경박하고 기강이 무너진 것은 결국 임금인 선조의 수양 공부가 부족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지극히 유학자다운 판단이었다. 율곡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크게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분발하시어 도학(道學)에 마음을 두시고 선정(善政)을 강구하시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임금이 장차 삼대(三代)의 도를 흥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십시오. 그런 뒤에 모든 신하들의 선악을 자세히 살피시어 충군 애국하는 자들을 가려 그들과 함께 일을 하시고, 아무 뜻도 없이 평범하게 국록만 탐하는 자들은 큰 직책에 있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인사의 타당함을 얻고 인물과 자리가 서로 걸맞게 된다면, 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선비들 중 세상에 소용이 되는 자가 반드시 나와 나라의 일이 제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도학’에 마음을 두라는 것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며, ‘삼대’의 도(道)를 흥기시키자는 것은 중국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좋은 정치와 제도를 조선에서 다시 부흥시키자는 것이다. 요즘의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다소 편협한 제안일 수 있으나,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인 전통사회에서는 유교를 중시하는 지식인으로서 당연한 제안이었다.

이날 기록의 마지막 부분에 율곡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제안하였다.

“이제 전하께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시어 일상의 언행을 순수하게 하시고, 한결같이 올바르게 하여 신하와 백성들의 모범이 되신다면, 군자(君子)들은 믿는 바가 있게 되어 충성을 다해 보좌할 것이며, 소인들 역시 임금의 마음을 사사로이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선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임금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맹자⌋(「이루상편」)에

“군주가 어질면 모든 일처리가 어질지 않음이 없고, 군주가 의로우면 모든 일이 의롭지 않음이 없고, 군주가 바르면 모든 일이 바르지 않음이 없다. 군주의 마음이 바르게 되면 나라가 안정된다.”

고 하였다. 율곡은 그 문구를 이용해 임금이 항상 몸가짐과 생각을 바르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삼권분립의 정신을 바탕으로 정치가 행해지는 지금과 달리, 율곡이 살았던 전통시대에는 임금의 역할이 막중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정신 자세가 매우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반드시 대통령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