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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04>

정치가가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치에 뜻을 둔 사람들은 대개 ‘학력’ 관리에 힘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학력 관리가 아니라 ‘학교 간판’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 진학하여 좋은 학연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이 동문들의 표를 얻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고, 또 투표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과시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가는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569년 선조 2년 때의 이야기다.

율곡은 당시 34세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였다. 홍문관은 성종 때(1470년) 설치된 기관으로 집현전의 성격을 계승한 것이다. 업무는 주로 문서에 관련된 일을 하였는데, 간언(諫言)의 임무도 있었다. 간언이란 임금이 국정을 행할 때 잘못 판단을 하거나 국가대사를 추진하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그 잘못을 지적하고, 직언을 하는 것이다.

8월 16일(음력), 율곡은 왕에게 맹자를 강의하였다. 왕조실록 기사 「홍문관 교리 이이(李珥, 율곡)가 맹자를 강의하고 인심(人心)의 진작과 성학(聖學)의 정진을 말하다」라는 기록의 이야기다. 인심이란 요즘으로 말하자면 ‘민심’이며, ‘성학’이란 대통령의 수양 공부다. 율곡은 맹자 문장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각 시대마다 각기 숭상한 바가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숭상한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있었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공략하여 탈취하는 데 그쳤습니다. 서한(西漢) 때는 순박함을 중시하고, 동한(東漢) 때는 절의(節義)를, 서진(西晉) 즉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청담(淸談)을 중시했습니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주나라 때로 동주(東周)의 후반에 속한 시기다. 전반기는 춘추(春秋)시대라고 불린다. 공자가 살았던 때는 춘추시대 말엽이며, 맹자가 살았던 때는 전국시대 초기다. 전국시대는 특히 약육강식의 시대로 상하의 관계가 흐트러지고 힘 있는 자가 득세하는 시기였다. 율곡은 ‘부국강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어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율곡의 설명에 따르면, ‘부국강병’의 정책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단지 전쟁에 이기고 남을 공격하고 탈취하는 일을 중시할 뿐이다. 그는 한나라 때는 순박함이나 절의를 중시하였다고 하면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청담사상을 중시하였음을 지적한 뒤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된 사람은 백성들이 중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그 것이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권력과 세력을 가진 간사한 신하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그 뒤를 이어서 관리들의 기상이 쇠약해지고 나태해져 한갓 녹(祿)을 받아먹고 자기 한 몸 살찌울 줄만 알지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 뜻을 가진 이가 있어도 모두 속된 시류에 휩쓸려 감히 기력을 발휘하여 국세를 진작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이러하니 임금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가지시고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켜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잘못된 시류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율곡이 중국 고대의 역사, 엄밀히 말하면 문화사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은 한 것은 정치 지도자는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고, 시류를 파악하고, 백성들과 관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파악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정치지도자 스스로의 ‘공부’를 통해서만 그런 것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율곡은 “국세를 진작시키라”, “임금이 마땅히 일을 크게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가져라”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래에 대한 비전의 제시다.

젊은 나이의 율곡은 당시 선조 2년의 시류와 세태에 대해서 몹시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특히 권세를 가진 관료들이 나태하고 대의를 보지 못하며 사적인 이익 추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원문에서 ‘사기(士氣)’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를 ‘선비의 기풍’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관리들의 기풍’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당시 율곡이 비판하고 있는 점은 국정과 관련된 잘못이지, 초야에서 글을 읽는 선비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어서 율곡은 맹자의 공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임금의 책임을 언급하였다.

 

“옛날에 맹자는 필부의 힘으로 단지 언어(言語)로 사람들을 가르쳤는데도 사악한 논의를 종식시키고 바른 도(道)를 넓히어 우(禹)임금과 같은 공을 이루었습니다. 임금께서는 백성을 다스릴 책임을 맡고 있으니 이 도로써 제대로 백성들을 가르치기만 하면 후세에 교화를 드리울 뿐만 아니라 당대에 교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맹자에 그치고 말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잘못된 일에 빠져들어 홍수의 재해와 양묵(楊墨)의 피해보다 심하니, 임금께서는 다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시어, 군주의 책임을 다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율곡이 맹자를 예로 든 것은 당시 강연에 사용한 책자가 맹자였기 때문이다. 맹자는 권력도 없었고, 임금의 위치에 있지도 않았으나 글을 쓰고 가르침을 통하여 큰 공을 이룩하였다고 보고 임금이 된 지 2년차인 선조에게 맹자의 가르침을 받들고 따르면 어찌 그보다 못하겠는가하고 분발을 촉구하였다.

맹자에도 언급되어 있는 ‘양묵’의 피해란 양주(楊朱)와 묵가의 피해를 말한다. ⌈맹자⌋ (「진심장구」)에 이런 말이 있다.

“양주는 ‘나를 위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나의 한 오라기 털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에 묵자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여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모든 털이 다 닮아 없어지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한다고 한다.”

어느 주장이나 그것은 세상에 피해를 주는 것이다. 그 출발은 임금이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교화를 세상에 널리 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교화’란 어떤 의미일까? 당시 율곡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공자가 설파한 인의(仁義)의 가르침만이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가 의미한 ‘교화’는 공맹의 사상을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말로 이러한 ‘교화’의 뜻을 바꿔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비전을 정치 지도자가 제시하고, 그것을 일반 시민들과 공유해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으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과 과거시험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3>

율곡과 과거시험

 

율곡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즉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한차례 과거에 합격하기도 어려운 데 아홉 번이나 과거에 합격했다는 것은 율곡이 그만큼 열심히 유교 공부를 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파주 자운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 옆에서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율곡에게는 이 시기가 조용히 학문에 침잠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그는 갑자기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불교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였지만 환속하여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잇달아 장원 급제를 하였다.

율곡은 이미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서 장원 급제를 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1556년 21세 때, 한성시에 수석 합격하였다. 1558년 23세 때 행해진 별시(別試)에서는 「천도책(天道策)」이라는 문장으로 장원하고, 그 뒤에 있었던 생원진사시(1564년)에 합격하고, 다시 한달 뒤에 시행된 명경시(明經試)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장원 급제를 발판으로 그는 곧 호조좌랑,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거쳐서 홍문관 부교리, 춘추관 기사관, 홍문관 교리, 청주 목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급제하였던 성과가 그의 화려한 관직생활의 배경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공무원 시험이었던 과거시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는 3년마다 치르는 식년시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 알성시 등 시험이 있었다. 시험 단계별로는 먼저 초시를 보고, 거기에 합격하면 복시를 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전에 들어가 왕 앞에서 보는 전시가 있었다. 복시에서는 33명을 뽑았는데 전시에서 그 순위를 결정하였다.

중종 32년, 즉 율곡이 탄생한 다음해인 1537년에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의 관리들이 문장을 중시하고 궁궐이나 관청에서 문헌을 매우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감탄하면서 조선의 관리들은 도대체 어떤 단계를 거쳐 선발되는지 몹시 궁금해 하였다. 마침 경복궁을 방문하여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중종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명나라 사신 : 저희들이 외람하게 천은을 입어 조서를 받들고 문헌(文獻)의 나라에 와서, 예의와 제도가 모두 갖추어져 참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보고 매우 탄복했습니다. 한 가지 일을 묻겠습니다. 귀국에서는 관리를 뽑는데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까?

조선의 임금 : 향시(鄕試)는 인·신·사·해(寅申巳亥)의 해에 시행하고 회시(會試)는 자·오·묘·유(子午卯酉)의 해에 시행합니다.

명나라 사신 : 인원수는 몇 명이나 됩니까?

조선의 임금 : 회시에서는 33명을 뽑습니다.

명나라 사신 : 과거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까?

조선의 임금 : 있습니다.

명나라 사신 : 그렇다면 그 기록을 한 번 보았으면 합니다.

조선의 임금 : 그렇게 하시지요.

 

율곡이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장원을 한 성과를 보면 그런 일이 너무도 쉬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이었다. 조선시대에 보통 양반집 자제들은 5살 정도가 되는 때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서당이나 자기 집에서 천자문 공부를 하고, 동몽선습과 같은 초급용 학습교재를 사용하여 한문 읽기와 쓰기 기초를 세웠다.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도 나중에는 중요한 초급 학습교재로 활용되었다.

기초과정을 마치면 아이들은 그 뒤에 유교경전인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 삼경(三經, 시경·서경·역경)을 교과서로 삼아 철저한 경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과거 시험의 기본텍스트가 바로 사서삼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뒤 보통은 20년에서 30여년 간을 그러한 공부에 매진한 뒤에 비로소 과거합격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합격자들은 유학의 경학공부와 함께 한문으로 시문과 문장을 짓는 능력을 배양하게 되고, 국가가 현재 처해 있는 중요한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잘 정리하여 어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시험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당시 현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책문(策文) 시험이 있었다. 율곡이 별시에서 장원할 때 지었던 「천도책」은 바로 그러한 시험의 답안이었다.

결국 과거에 합격한 조선의 관리들은 사서삼경의 문장을 거의 완벽하게 외우고, 한문 고전의 멋진 글귀들을 활용하여 자신의 문장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알았으며, 국가의 시급한 과제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식견을 갖춘 인재였다. 사서 삼경은 특히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읽고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하는 인문학적 철학사상을 기본 소양으로 갖춘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왜 이러한 지식인들을 관리로 채용하였을까? 우선은 당시 외교나 국방과 같이 국가적인 대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나,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한문과 한자에 대한 소양이 필요했다. 국가의 중요한 기록이나 문헌이 모두 한자와 한문으로 되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했던 중국이 그러한 문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인 이유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들의 성품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공평무사하여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성리학 공부를 하고 수양을 한 지식인은 그러한 품성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불교나 도교를 공부한 사람들 보다는 주자학에 기초한 유학 공부를 한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데 더 적합할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은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학 경전을 중요 교과서로 삼고 그것을 과거시험으로 테스트한 것이다.

명나라 사신과 ⌈시경⌋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2

명나라 사신과 ⌈시경⌋

 

교 경전 중에 ⌈시경⌋이 있다. ‘시(詩)의 경전’이라는 뜻의 ⌈시경⌋은 ⌈예기⌋,⌈춘추⌋,⌈역경⌋, ⌈서경⌋과 함께 오경(五經) 중 하나로 꼽는다. 이는 중국 최초의 시가집 혹은 민요집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제자 교육용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당나라 때 ‘오경’에 포함되어 ⌈시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시경⌋은 원래 ⌈제시(齊詩)⌋,⌈노시(魯詩)⌋, ⌈한시(韓詩)⌋, ⌈모시(毛詩)⌋의 네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지만 ⌈모시⌋만 남고 모두 멸실되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시경⌋은 모시로 불리기도 한다. 주나라의 시(詩)라는 뜻에서 ⌈주시(周詩)⌋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경⌋에 실려 있는 시는 모두 311편인데 이중 6편은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다. 전체는 풍(風), 아(雅), 송(頌)의 노래로 분류되어 있는데 ‘풍’은 각지에서 수집된 민요로 사랑의 노래나 일을 하면서 하는 노래가 많다. ‘아’는 연회 때 사용된 노래 가사이며, ‘송’은 제사 지낼 때 사용된 노래 가사다. ‘아’와 ‘송’은 주 왕조를 찬양하는 노래가 많다. 이러한 ⌈시경⌋의 노래 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나라의 사회와 풍속, 나아가 그 시대의 정치와 사상,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노래가 이른 것으로는 서주시대, 즉 주나라 초기의 것도 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시경⌋에 보이는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논어⌋<위정>)

라고 하였는데, 시를 쓰고 읽는 마음에는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고대 때부터 외교 현장에서는 적절한 ⌈시경⌋의 글귀를 사용한 외교적 교류가 적지 않았다. 율곡의 생존시대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현장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1537년 중종 32년, 율곡이 태어난 다음 해의 이야기다. 중종(中宗, 1488-1544)은 연산군의 뒤를 이어 반정으로 임금이 된 왕이다.

그해 3월,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파견되어 궁중에 들어왔다. 3월 10일(음력)에 왕이 경복궁의 태평관에서 하마연을 베풀어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하였다. 이 때 중종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경(詩經)⌋에 ‘즐겁구나, 우리 님은. 나라의 빛이로다[樂只君子, 邦家之光]’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대인 같은 훌륭한 분을 모셨는데 만일 어질고 지혜로우신 명나라 황제의 고마우신 분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렇게 뵙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명나라 황상의 은덕이 망극합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환영 만찬에서는 우리나라 전통의 토속악이 배경 음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원래 중중이 인용한 ⌈시경⌋의 「남산유대(南山有臺)」는 중국 고대에 손님을 접대하는 연회에서 자주 사용되던 노래였다. 그 시경의 구절을 이용하여 중국측 사신들에게 조선의 문화적 수준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들을 이미 조선의 예법이 섬세하고 수준이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이미 다음과 같이 감탄의 인사를 한차례 전한 차였다.

“저희들이 처음 명나라 조정을 떠나올 적에 어찌 귀국의 예의가 이와 같이 아름다울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곳에 와서 보니 온 각지의 고을 관원들은 일마다 예를 다하여 온갖 법도가 참신하였으니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사신의 한사람인 부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국왕께서 신민들을 잘 가르쳐 하는 일이 모두 법도에 들어맞으니 대단히 감탄스럽습니다.”

 

외국 사신에 대하여 ‘예의가 아름답다’거나 ‘예를 다한다’는 개념은, 국가 간에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현대적인 외교 관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국제질서 아래에서는 격식을 잘 갖춘 외교적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국왕의 ⌈시경⌋ 글귀를 전해들은 명나라 사신의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께서 대국을 섬기는 정성이 이러하시니 이는 반드시 황천(皇天)이 도와주어 우리 대명(大明)과 기쁘고 슬픈 일을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만세토록 무한한 복입니다.”

이어서 명나라 부사(副使) 역시 시경의 문구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경⌋에 ‘울타리가 되시고 담 기둥이 되시니, 모든 제후들이 본받으시네.[立屛之翰, 百辟爲憲]’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전하의 위엄과 권위를 직접 뵙고 보니 참으로 훌륭한 임금이십니다.”

중국의 천자를 지극한 마음으로 섬기는 조선의 국왕의 모습이 다른 모든 제후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말은 요즘의 국가 관념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천하주의적이며 중화주의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살았던 전통시대에는 자연스러운 외교적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

명나라 사신이 인용한 ⌈시경⌋의 문구 바로 뒤에는 ‘굽은 쇠 뿔잔에 맛있는 술을 부어 올린다.’라는 문장이 이어지고 있어 당시 술을 주고받는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워주는 의미도 있었다. 연회가 끝나는 순간에는 또 ⌈시경⌋의 문구를 이용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임금: “흐뭇한 술자리가 밤에 벌어졌으니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명나라 사신 :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리.”

임금: “내게 맛있는 술 있어 좋은 손님 잔치하며 즐기시네…마음으로 사랑하거늘 어찌 말하지 않으리. 마음속에 품고 있거늘 어찌 하루라도 그대를 잊으리.”

 

외교적인 수사가 가득 담긴 ⌈시경⌋의 문구를 적절히 사용하여 서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광경이다. 당시는 ⌈시경⌋ 속에 들어있는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또 그것을 한자도 틀림없이 외우고 있어야 국제적인 교류가 가능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조선시대의 궁중에서 유교 경전의 위상이 어찌하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기록보다 ⌈논어⌋를 중시한 이언적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

역사기록보다 ⌈논어⌋를 중시한 이언적

 

곡(1536-1584)이 외가인 오죽헌에서 태어나 아직 어머니 신사임당 품속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중종 33년 (1538)년 1월 21일, 율곡이 세 살되던 때인 당시 임금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이었는데, 조정에서 임금이 신하들과 유교 경전을 읽고 있었다. 이 때 임금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이언적(李彦迪)이 왕세자의 교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끄집어냈다.

“조정의 잘잘못을 아뢰려고 하지만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급선무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세자를 잘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이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예민(銳敏)하여 학문이 통달(通達)하였으니,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복(福)입니다.”

당시 세자는 중종의 장남으로 나중에 12대 국왕이 되는 인종이다. 인종은 1544년에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병으로 8개월 만에 승하한 불운의 왕이었다. 이언적이 세자의 자질이 총명하고 학문이 훌륭하여 종묘·사직의 복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종묘·사직이란 국가라는 뜻이다. 종묘란 역대 왕과 왕비를 모신 사당이며, 사직은 토지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말하는데, 둘을 합쳐서 ‘국가’, 즉 조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다.

이언적은 이날 임금의 교육을 맡은 ‘시강관(侍講官)’으로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고 있었다. 시강관이란 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문관을 말한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란 중국 명나라의 학자 구준(邱濬)이 1487년에 ⌈대학연의(大學衍義)⌋라는 책을 보충하여 지은 서적으로,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의 여덟 조목 가운데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 논한 책이다.

이언적(1491년-1553년)은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는데, 15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1539년에는 전주부윤을 역임한 적도 있는 유학자였다. 그는 특히 주자가례에 정통하였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퇴계 이황의 학문에 큰 영향을 준 학자로 유명하다. 이날 임금을 가르치는 경연(經筵)은 그가 전주부윤에 나가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세자를 보호하고 기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대체로 배움에는 근간이 되는 부분과 지엽적인 부분, 즉 아주 중요한 것과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앞선 성현(성인과 현자, 즉 지혜로운 자)들이 남긴 경전(經傳)을 반복해서 깊이 생각하고 성리(性理)를 연구하는 것이 근본적이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역사 기록을 훑어보면서 앞선 시대의 정치를 고찰하여 오늘날의 귀감과 경계로 삼는 것은, 비록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기는 하나, 지엽적이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역사와 앞 선 시대의 정치에 대해서 배우는 것 보다는 유교 경전의 사상을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성현들의 경전인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리(性理), 즉 인간의 본성과 그 이치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는 결국 송나라 주자가 집대성한 주자학, 즉 성리학을 철저히 배우는 것이 몹시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인직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제가 들으니, 요즘 왕세자를 가르치는데, 아침에는 ⌈자치통감강목⌋을 가르치고, 낮에는⌈논어⌋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사서적을 우선으로 삼고 경전(經傳)을 나중으로 삼는 것입니다. 대체로 해가 뜨는 아침에는 사람의 마음과 기운이 맑고 깨끗하여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가 환하게 드러나므로 마땅히 ⌈논어⌋를 아침에 진강하고 역사서적인 자치통감강목은 낮에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다.”

세자는 당시 23살이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대학에 다니는 학생과도 같은 나이다. 그런 세자에게 역사과목을 아침에 먼저 가르치고, 낮에 도덕 과목을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마땅히 도덕을 가르치는 논어를 먼저 듣게 하고 역사를 가르치는 자치통감강목은 나중에, 즉 낮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과목을 먼저 듣고 나중에 듣고 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이언적에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 주희, 즉 주자가 집필한 중국의 역사서로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에 대해서 큰 제목은 강(綱)으로 세우고, 역사적 사실은 목(目)으로 구별하여, 즉 ‘강목’의 형식으로 편찬한 서적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오대 십국 시대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이언적은 그 이유에 대해서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임금이 통치하던 당(唐)나라와 순임금이 통치하였던 우(虞)나라 그리고 삼대인 하상주(夏商周)의 삼대(三代) 이전에 어찌 역사 기록이 있었겠습니까? 심학(心學)이 있었을 뿐입니다.”

당우와 하상주, 즉 하은주(夏殷周) 삼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태평성대의 시기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평화의 시기 이전에 역사 기록은 없었으며 오직 심학(心學)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심학이란 마음의 학문, 즉 도덕 수양의 학문인 논어 등 경학이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언적이 이렇게 말한 것은 당시 사회가 태평성대의 시대였고 임금들이 모두 성인이며 성군들이었기 때문에 혼란한 사회와 정치를 기록한 역사 서적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보는 역사서적은 그 뒤에 어지러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언적은

“하상주 삼대 이후에는 본받을 만한 것은 적고 어지러운 것이 많습니다. ⌈자치통감강목⌋을 진강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비록 중간에 그만둘 수는 없겠으나, 왕을 가르치는 제왕(帝王)의 학문에서 너무나 그 차례를 잃었습니다.”

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중종은 시강관인 이언적의 가르침을 듣고 “이러한 주장이 매우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언적의 의견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에서 우리는 적어도 중종 시대까지는 왕세자의 교육에 역사 서적이 전하는 흥망성쇠의 가르침을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개국한지 150여년이 지나면서 역사적인 가르침 보다는 유교 경전의 도덕적 가르침을 점점 더 중시하게 되었다. 율곡 이이는 성리학의 주리(主理)적 측면이 더 강조되는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유교를 배웠으며 과거시험을 준비하여 나중에는 장원 급제를 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율곡의 사상은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