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는 겸손해야한다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8>

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곡은 모두 네 사람의 임금을 모셨다.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이다. 그가 과거에 아홉 차례나 장원급제를 한 때는 명종 때였다. 명종 3년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명종 11년에 한성시에 수석합격을 하였으며, 19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명경시에 또 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차례나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율곡이 장원 급제를 한 시험을 보면 진사 초시, 한성시, 별시, 식년 문과초시, 전시, 복시 등 화려하다. 명종 때 그는 호조좌랑,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에 임명되어 화려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젊고 똑똑한 율곡을 더욱 가까이 두고 국가의 큰 정치에 관여토록 한 것은 선조 대왕이었다. 선조는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33세 된 율곡을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에 임명하였다. 이 직책은 사헌부의 정5품 관직인데 보통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된다. 특히 문과 급제자 중에서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을 할 수 있는 인물이 발탁되었다. 새로 맞이한 선조 시대의 대표적인 젊은 관료이자 학자로 율곡이 선택된 것이다.

선조는 반년쯤 뒤에 율곡을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로 임명하였다. 홍문관은 집현전과 같은 곳으로 임금에게 간언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겸직으로 임명된 경연시독관은 정5품 관직으로 임금의 공부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책을 읽어주고 설명을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임금의 선생님이 된 것이다. 경연시독관은 경연이 끝나면 경연에 참석한 대신들과 국가 대사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자문에 응하는 등 중요한 직책이었다. 선조의 율곡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임금의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또 율곡 자신의 임무가 임금을 가르치고 임금의 잘못을 간하는 것이었으므로, 율곡은 자신의 생각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직언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 6년, 1573년 10월 12일 경연 때의 일이다.

임금이 경연의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인심(人心, 인간적인 마음)과 도심(道心, 도덕적인 마음)은 두 가지 마음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생길 적에 도의(道義)로 나타나면 도심이라 하고 식색(食色)과 같은 욕망으로 나타나면 인심이라 하는데, 욕망이 절도에 맞는 것도 곧 도심이다.”

율곡이 이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의리에 대하여 소견이 정밀하신데 어찌하여 이 마음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옮기지 않으십니까. 요즈음 보건대, 천시(天時)·인사(人事)가 날로 점점 어그러져서 천재지변이 거듭 나타나도 예사로 여겨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강이 풀리고 인심이 흩어져서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임금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퇴폐를 정돈하지 않으신다면 흙더미가 무너지는 형세가 얼마 안 가서 올 것입니다.”

임금이 그동안 배웠던 것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생각해서 인심과 도심에 대해서 한마디 하였는데, 젊은 율곡은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따끔한 일침을 가하는 모습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왕 앞에서 다소 지나친 발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율곡은 당시 조정의 안팎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삼품의 홍문관 직제학으로 자신의 맡은 바 임무가 바로 그러한 직언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선조 1년 때(1568년)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된 뒤에 외할머니의 병환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강릉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선조 3년 때(1570년) 신병으로 사퇴하고 해주(海州)에 가 있었다. 선조 4년 때 홍문관 교리,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이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 거기에서 은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선조는 재임 5년차 되던 때(1572년) 그를 다시 사간원 사관, 홍문관 응교, 홍문관 전한 등에 임명하였다. 율곡이 이들 관직을 모두 사퇴하였으나 그 다음해(1573년, 선조 6년) 선조는 다시 그를 직제학으로 임명하여 궁중에 가까이 그를 불러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선조의 신임이 이러하였으므로 거기에 부응하여 나라를 위하고 선조 대왕을 돕는 절실한 마음으로 궁궐 내외부의 사정을 위기 상황으로 진단하고 간언을 한 것이다.

율곡은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성인(聖人)에게도 스승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반드시 자기보다 어질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한마디 선한 말로써 스승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도 성인이 취택하였던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반드시 탕(湯) 임금의 훌륭한 스승인 이윤(伊尹)과 같아야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임금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게 여긴다면 선한 말이 어디로부터 들어오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널리 들어서 선한 말을 가려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신하들이 다 나의 스승이 되고 선한 말들이 임금의 몸에 모여서 덕업이 높고 넓어지게 됩니다. 이제 전하께서 겸허하고 퇴양(退讓)하시는 것이 하교(下敎)에 나타났으니, 신은 감격스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율곡은 임금의 신분이면서 선조가 자신의 직언을 듣고 싶어 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다.

“다만 겸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스스로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면 이는 선을 행할 근본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 물러서서 일을 맡기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날 뜻이 없으면 겸양이 도리어 병폐가 되는 것입니다. 전하의 말씀은 겸허하시지만 공론을 따르지 아니하며,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남을 그르게 여기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도리어 남을 나만 못하게 여기는 병폐가 있는 것이니, 신은 답답합니다.”

선조가 겸허하고 겸손하기는 하지만 공론을 따르지 않고 자신은 옳고 남은 그르다고 판단하며,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궁중의 병폐가 생기고 나아가 백성들의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율곡은 임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그것이 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조정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오늘날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세 정승)은 다 인망이 있으니 어찌 자신들의 의견이 전혀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봉록만 받아먹고자 하겠습니까. 의견을 개진하려고 하여도 임금님의 뜻에 거슬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도리어 임금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므로 아무 말 없이 답답하게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임금님의 뜻이 나라가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면 대신들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도 각각 품은 뜻을 아뢸 것입니다.”

왕 되는 사람이 신하들의 의견을 잘 들어주지 않으니 모두 답답하게 입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최고위 관료들인 정승들도 입을 닫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임금이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만약 대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자신의 생각을 각각 다 말한다면 율곡이 이렇게까지 나서서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였다. 그가 맡은 역할과 임무가 바로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400여년 전, 왕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왕조시대의 일이지만 요즘 되새겨 읽어도 그의 발언은 신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