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임금과 경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2>

선조 임금과 경연

 

1575년 6월 24일(음력)의 일이다. 이 해는 선조 8년으로 율곡은 40세가 되던 해였다. 이 해 3월 병 때문에 잠시 고향인 파주 율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임금의 유교 경전 공부인 경연(經筵)에 참가하였다.

당시 부제학의 자리에 있었던 율곡은 김우옹, 정언지 등과 함께 선조 임금을 모시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교과서는 상서(尙書) 강고편(康誥篇)이었다.

상서는 서경(書經)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다. 유교의 다섯 경전(五經) 중 하나로 꼽힌다.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진 이 책은 요순시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중에서 요순시대는 신화의 시대다. 실지로 중국 역사는 하나라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전통시대에 지식인들은 요순시대가 실지로 존재했고 이상적인 통치자인 요임금과 순임금도 실재하였다고 믿었다.

은나라는 상나라라고도 불린다. 이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 ~ 1046년경에 존재한 중국 최초의 왕조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의 마지막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로 불리는데, 은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의 이목을 집중한바 있다. 상나라는 중국 중원지방의 동쪽 지역에 근거하였는데, 서쪽지방에 주나라가 등장하여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 무왕은 상나라를 물리친 뒤에 그 땅을 나누어 자기 친족과 부하들에게 분배하였다.

예를 들면 제나라 지역은 건국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강태공에게 주고, 노나라 지역은 주나라 천자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에게 주었다. 이렇듯 점령지 땅의 일부를 떼어 부하나 친족에게 통치를 맡기는 제도를 분봉(分封)제도라고 한다. 그 땅은 봉토(封土)라고 하며, 그 땅을 통치하는 자를 제후(諸侯)라고 한다. ‘후’라는 글자가 임금을 뜻하므로 ‘제후(諸侯)’란 여러 임금, 혹은 임금들이라는 뜻이다. 봉토를 천자로부터 하사 받아 그 땅을 임금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통치하는 제도를 봉건제도(封建制度)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종법제도라는 혈연 기반의 제도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종법제도는 천하와 그 소속 국가들의 관계를 종갓집, 즉 큰집과 작은 집의 관계로 규정한다. 모든 나라는 큰집인 천자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작은 집의 역할을 한다. 큰집에 경사가 있을 경우는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하고,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지키는 것이다.

 

선조 임금이 율곡 등과 그날 같이 읽은 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봉아, 너는 잘 생각하라. 이제 백성들은 너의 부친 문왕을 공경하고 따르는데 달렸으니 들은 바를 계승하고 덕이 될 말을 실행하라. 가서 은나라의 옛 어진 왕들에게 널리 도움을 구하고 백성들을 다스려라. 그대는 멀리 은나라의 늙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마음을 정하고 교훈을 삼아라. 옛 어진 왕들에 대해서 널리 듣기를 구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보호하며 하늘같이 크게 되게 하라.”

 

여기서 봉은 주나라 첫 번째 왕의 마지막 아들로 송나라에 책봉된 인물이다.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장악하였는데 은나라 유민들이 많은 송나라 지역에 봉을 새 임금으로 임명한 것이다. 그래서 유민들인 은나라 사람들에게 도움을 널리 구하라고 한 것이다. 이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덕이 풍부해지면 임금의 명령을 지키고 져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임금(주나라 천자)께서 이르시길, 오호라 봉아! 내 몸에 병을 앓듯이 하여 공경할지어다. 하늘은 두렵지만 진실로 도우려하고, 백성들의 정은 대략 알 수가 있느니라. 내가 듣건대 원망은 큰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곳에도 있는 것이니, 따르지 않는 이는 따르게 하고 힘쓰지 않은 이는 힘쓰게 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그대여! 일 할 때에 임금의 뜻을 넓히고 은나라 백성들을 받아들여 보호하라. 또 오직 임금을 도와 하늘의 명을 안정시키며 백성들을 새롭게 하라.”

이러한 문장을 선조 임금과 함께 읽고 율곡과 김우옹, 정언지 등 신하 선생님들의 설명이 있었다. 이렇게 임금을 모시고 신하들이 유교 경전이나 역사 서적을 읽고 임금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는 제도를 경연(經筵)제도라 한다. 고려시대에 처음 시작된 이 제도는 조선시대에 그 제도가 정비되고, 강화되어 소위 경연정치가 활성화되었다. 경연정치라 함은 경연을 하는 장소에서 정부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검토와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율곡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경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1594년(선조 27년) 7월 9일에 대사헌 김우옹(金宇顒)등이 경연을 열자고 다음과 같이 건의를 하였다.

“생각하건대 옛날에 지혜로운 군주는 전쟁과 혼란한 세상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두어 계속 학문을 힘썼습니다. 이는 옛날 일을 거울삼아 근본을 배워서 국가사업에 활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경연을 열지 않은 지가 이미 3년입니다. 전하의 학문이 이미 고명하고 전하의 인덕(人德)이 이미 넓다고 하라도 마음의 은미한 곳이 어찌 다 도리에 부합되고 호령과 시행이 어찌 다 적절하겠습니까? 그리고 궁중에서의 사사로운 자리가 어찌 다 올바르고, 관직의 임명과 파면의 상벌에 어찌 다 사심이 없겠습니까? 그 중에 하나라도 잘못이 있다면 학문을 하는 공이 중단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하늘의 뜻을 누리고 인심에 보답하겠습니까?”

그동안 삼년 동안이나 경연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그 때문에 궁중에서 이루어진 정치, 예를 들면 관직의 임명이나 파면 등에 사사로운 결정이 없었는지 묻었다. 그동안의 결정에 하나라도 잘못은 없었는지, 있었다면 경연정치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반문하였다. 이렇듯 경연은 대궐에서 이루어진 사사로운 결정에서부터 관리의 임면,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등에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김우옹 등은 계속해서 이렇게 요청하였다.

“앞으로는 부디 편전(便殿)에 나오셔서 경연을 열고 공경(公卿)에서부터 유신(儒臣)까지 날마다 돌아가면서 모시게 허락해 주십시오. 서로의 생각을 물어 의리(義理)가 정밀해지게 하고, 또한 정령(政令)의 득실, 민간의 고통, 군무(軍務)의 결함에 대해서도 모두 터놓고 말하게 하고 서로 의견을 절충한다면 많은 계책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국내의 정치가 새로워 질 것이니 왜구의 환난을 해결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민본정치란 민본(民本), 즉 백성을 근본으로 섬기는 정치를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혹은 민주정치와는 다른 것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나름대로 백성을 중시하는 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경연제도였다. 경연의 목적은 임금을 공부시키는 것이었지만, 임금과 그를 둘러싼 궁중 측근들의 정책과 결정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평가하며, 여러 가지 의견을 제안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