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6>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말은 요즘 보통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을 한자말로 바꿔보면 ‘치국(治國)’이다. ‘치국’이란 전통시대 지식인들에게는 흔히 쓰는 말이었다.

특히 중국의 고대 문헌에는 매우 빈번하게 이 ‘치국’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당시에는 ‘국가를 다스린다’는 치국의 개념이 매우 중요했다. ‘지식’이란 국가 통치를 위한 지식이었고, ‘지식인’이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 글을 배운 사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교사상에서 ‘치국’은 대개 ‘평천하(平天下)’와 함께 어울려 등장한다.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 혹은 ‘천하를 평정한다’는 뜻의 ‘평천하’는 사실상 ‘치국’과 같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라 ‘국(國)’자는 우리나라를 통째로 지칭할 수 있는 글자이지만 중국에서는 한 지방을 뜻하는 의미가 강하다. ‘천하(天下)’라는 말이 비로소 중국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평천하’는 ‘중국 전체를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며, 그것은 바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와도 바꿔 쓸 수 있는 것이다.

유교에서 사서(四書)의 한 권인 대학에 ‘치국, 평천하(治國, 平天下)’라는 문장이 나온다. 두 단어를 나란히 이어서 쓰면서 ‘나라를 잘 다스려야 천하를 평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정치가란 어떤 한 지방을 잘 다스려야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전통시대 유교 지식인은 유학 공부를 시작하면 우선 맨 처음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 평천하’라는 말부터 배운다. ‘치국 평천하’ 앞에 ‘수신제가’라는 말이 붙어 있다. ‘수신’이란 자기 몸을 닦는 것, 즉 도덕적인 수양을 하는 것이다. ‘제가’란 집을 가지런히 한다, 즉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의미다. 요즘은 ‘집’이란 뜻이 한 가정의 의미가 강하지만, 고대에, 특히 중국에서 ‘가(家)’란 ‘국(國)’이나 마찬가지로 한 지방을 가리키는 의미가 강했다. 작은 지방은 ‘가’, 큰 지방은 ‘국’이었다. 고대의 농경시대에 가족은 보통 대가족을 이루어 수 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우리나라 시골에도 옛날에는 하나의 성씨를 가진 일가친족이 모여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그런 마을이 더 커서, 마치 하나의 정치 공동체처럼 집단을 이룬 경우가 많았다. 그런 집단을 ‘가(家)’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가’란 역시 ‘치국’이나 ‘평천하’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조그마한 집단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란 그러므로 ‘자기 몸을 잘 다스리고 수양을 하면, 작은 집단을 잘 다스리고, 나아가 더 큰 집단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중요한 포인트는 ‘자기 몸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다.’

유교적 교양을 가진 전통시대 지식인은 어떤 집단을 다스리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 ‘수신’의 문제를 따진다. 자기 몸을 잘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가정이나 어떤 지방이나 나아가 국가 전체를 잘 다스리겠냐는 것이다.

과거에 수차례나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한 율곡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정치 문제를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유학자들과는 좀 더 다른 혜안이 있었다.

선조 대왕 때(6년, 1573년, 10월 12일) 경연의 자리에서 임금이 율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러가서는 오지 않았는가?”

율곡이 병을 핑계대고 관직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하고 묻는 것이었다.

율곡이 말했다.

“신은 병이 깊고 재주가 없어 스스로 돌아봄에 큰일을 할 수가 없는데 나라의 봉록만을 먹는 것은 참으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므로 물러가서 죄를 면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그대의 죄는 내가 아는 것이니 지나치게 겸양하는 말을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다시 물러가지 말도록 하라. 그대는 물러가 있어도 자주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나랏일을 잊지 않는 것을 알 만하다.”

율곡은 초야에 있을 때도 국가의 일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임금에게 올렸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깊은 것을 확인하고 선조 대왕에게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신은 초야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임금님의 학문성과가 얼마나 성취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임금이 깊은 궁궐에 깊이 있으면서도 참다운 덕이 있다면, 백성들이 보고 느껴서 사방이 감동하는 법입니다. 헌데 오늘날 백성들이 초췌하고 풍속이 퇴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율곡이 본 초야의 백성들은 태평성대의 시대에 볼 수 있는 백성들이 아니었다. 폭군이나 무능한 임금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백성들이었다.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었다[莫此爲甚]’고 하였으니 얼마나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구절에 친숙한 보통의 유학자라면, 백성들의 고통은 임금의 수양 부족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거기에서 그친다. 율곡도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 좀 더 발전된 진단을 내놓는다.

“신은 성학(聖學, 임금의 수양공부)이 날로 밝아지기를 기대했었으나 끝내 보람을 보지 못하니, 신은 참으로 괴상하게 여깁니다. 성질(聖質, 임금의 성품)이 영명(英明)하시어 참으로 큰일을 하실 수 있는 자질이신데, 즉위하신 처음에 높은 신하들이 잘못 보좌하여, 매번 비근한 사례를 끌어대어 선비들의 말을 물리치고 억눌렀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도록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수양공부를 열심히 하였으나 그 보람이 없었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 조정의 높은 대신들이 하급 공무원들, 혹은 재야의 선비들이나 지식인들의 좋은 의견을 무시하고 억눌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원문을 보면 율곡은 이들을 ‘유자(儒者)’, 즉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궁중에서 지식인들의 자유스러운 의견을 대신들이 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바꿔 말하자면 정부에서 언론 통제를 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선조 대왕 자신이 막은 것은 아니겠지만, 대신들이 막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결국은 백성들이 임금의 마음과는 달리 생활이 궁핍하고 행동이 퇴폐해지게 된 것이다.

아직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민주’나 ‘자유’, ‘인권’의 개념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정치에 있어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율곡은 지적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시대이며 인권과 자유가 시민들이 향유하는 삶의 최고의 가치로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은 그러한 것을 무시하고 표현 통제, 언론 통제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정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정치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율곡에게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