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민본주의 제도 – ‘경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13

조선시대의 민본주의 제도 – ‘경연

 

늘날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삼권분립을 바탕으로 권력기관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취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군주제는 이와 달리 한명의 군주에게 모든 권한이 돌아간다. 그 권한을 제한하는 일이 없이 군주의 마음대로 모든 국가의 대사가 운영된다. 전통시대의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임금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군주제 국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군주제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군주의 권한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사관이 왕의 일상사와 언행을 기록하는가 하면, 왕을 덕이 있는 군주가 되어 덕치정치를 하도록 가르치기도 하고, 임금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관리를 두어 임금의 잘잘못을 따지도록 하기도 하였다.

왕을 가르쳐 덕치 정치를 펴도록 하는 제도는 경연(經筵)이다. 오늘날도 가끔 형식적으로나마 대통령이 석학을 초청하여 강의를 듣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일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직적으로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료까지 두면서 임금을 가르쳤다.

율곡과 관련된 역사기록을 보면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여 발언을 하는 기록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1575년 6월 24일(음력)에는 율곡이 경연에 참석하여 임금과 함께 ⌈상서⌋를 읽는 기록이 있다. 또 그 이전인 1569년 9월 25일 기록에도 경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날 율곡은 선조에게

“예로부터 큰일을 성취한 군주가 정치를 흥기시키려 했을 때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현자를 대하였습니다. 군신간의 주고받는 대화는 마치 메아리 울리듯 하였으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위 아래가 서로 믿게 되어 정치가 잘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군자가 현자를 섬기고 군신(君臣) 간에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경연을 설명한 것이다.

율곡은 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신이 여러 차례 궁궐에 들어와 전하를 뵈었는데 항상 신하들의 말에 조금도 응수하여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개 한 집안의 부자(父子)와 부부가 아무리 지극히 친한 관계라 하더라도 만약 아비가 자식에게 답하지 않거나 지아비가 아내에게 답하지 않으면 그 정(情)도 막히게 됩니다. 하물며 그 이름과 위상이 현격히 다른 군신(君臣)의 관계는 어떻겠습니까?”

1569년은 율곡은 34세 되던 해로 궁궐에 들어와 선조를 가까이서 모신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29세 때 호조좌랑으로 처음, 관계에 진출한 뒤로 30세 때 예조좌랑, 31세 때 이조좌랑, 그리고 32세 때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임명되었다. 이 해에 선조는 임금이 되었다. 율곡은 임금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선조의 과묵한 모습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율곡은 경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신하가 임금님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은 경연(經筵)뿐이기 때문에 입시하는 신하들이 미리 아뢸 내용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궁리하고 정리해 놓았다가도 임금님의 앞에만 오게 되면 그 위엄에 겁을 먹고는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못하여 10분의 2∼3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대왕께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응수를 해주신다 해도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뜻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입을 꼭 다물고 말씀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말을 막는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경연을 준비하는 신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리 유학 경전을 잘 읽는 신하라도 임금님 앞에서는 그 위엄에 눌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의 응대가 쌀쌀하니 그 신하들, 즉 선생님들은 더 주눅이 들어 입을 닫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율곡은 임금에게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급히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노력을 하셔야지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않고 있으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선조 대왕이 명종 대왕(明宗大王)으로부터 2백 년 조선의 우환을 받은 것이지 즐거운 세상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조선의 운명이 날로 위태로워지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해서 발분하지 않는 것인지 물었다.

이렇듯 경연제도란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백성을 위하고 군주의 권한을 견제하는 제도였다.

경연의 방법은 대체로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시기에 정비되었다. 경연은 시간에 따라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 낮에 하는 주강(晝講), 저녁에 하는 석강(夕講)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차례, 혹은 두 차례의 경연을 하다가 차츰 성종 시기에 이르러, 하루에 3차례 경연을 하는 방식이 확립되었다. 경연에 참석하는 관리는 초기에는 6, 7명 정도였으나 차츰차츰 더 많은 관리들이 경연에 참가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의정부,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등의 고위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경연 자리가 자연스럽게 정부 부서 간의 정책 협의 기구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율곡이 사망한 뒤의 1581년(선조 14년)에는 율곡의 친구이기도 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참석하였는데 그는 당시 관리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경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관료들에 제한되어 있었는데 처음으로 재야의 성혼이 참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재야 학자들이 자주 초빙되었다.

경연에 사용된 교재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4서(四書)와⌈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5경(五經), 그리고 역사서적인『자치통감(資治通鑑)』·『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등이었다. 말하자면 주로 유교 경전과 역사서적이다. 자치통감은 중국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역사서이며,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은 남송의 주희(朱憙), 주자가 쓴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임금의 경연에는 유교와 관련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주요 텍스트 외에도 『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심경(心經)』·『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國朝寶鑑)』등이 부교재로 사용되었다.

강의를 하는 방식은 먼저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읽고, 번역을 한 뒤에 설명을 한다. 그 다음 국왕이 잘 모르는 점에 대해 질문을 하면,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한다. 역사서는 통독(通讀)을 하고 사서와 오경의 경우에는 주석서를 읽어 그 뜻을 풀이하였다. 물론 당시 중요시된 주석서는 주자의 주석서로, 그 서적을 통해서 주자학, 즉 성리학의 핵심적인 내용을 배워나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