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언(諫言)’듣기를 싫어한 선조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 14>

간언(諫言)’듣기를 싫어한 선조

 

 태종의 언행을 기록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이런 말이 나온다.

“간언(諫言)이란 군주나 웃어른에게 충고하는 것을 말한다.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 시세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 간언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충성스런 간언을 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언(諫言)’의 간(諫)자는 말씀 언(言)과 가릴 간(柬)자로 구성되어 있다. 가릴 간은 ‘분간하다’는 뜻도 있다. 즉 간언이란, 분간하는 말, 혹은 분간하고 가릴 수 있도록 하는 말을 뜻한다.

정관정요⌋의 ‘정관(貞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이며, ‘정요(政要)’란 ‘정치의 핵심’, 혹은 ’정치의 요체‘라는 뜻이다. ⌈정관정요⌋는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는데, 당 태종이 부하 관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이다.

정관정요⌋의 설명에 따르면 신하들의 간언이 없다면 거울 없이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자신이 행하는 정치를 정확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들이 간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정관정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군주는 신임하지 않는 자가 간언하면 비방한다고 생각하고 신임하는 사람이 간언하지 않으면 봉록만 훔치는 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성격이 연약한 사람은 속마음이 충직해도 말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이는 신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군주가 먼저 신하를 믿고 간언을 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경연제도와 함께 ‘간언’제도도 왕권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중시되었다. 율곡이 참여한 1575년 6월 24일의 경연에 율곡과 선조 사이에 다음과 같은 말이 오고갔다.

 

율곡: 근래에 대간(臺諫,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이 말하는 것을 임금께서 따르지 않는 것이 많아 인심이 자못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선조: 이는 내가 불민한 탓이다. 그러나 요임금, 순임금 때에도 그 말이 틀리다고 따르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니, 어찌 항상 한갓 그렇다고 따르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율곡: 진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따라야 할 일은 속히 따르셔야 합니다.

 

율곡이 임금께서 간언을 담당하는 관리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지적하자 선조는 항상 따르기만 해서는 되겠는가하고 묻는다.

같이 경연에 참석했던 김우옹이 율곡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의 기강은 오로지 대간에게 달려 있으므로 대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기강이 무너집니다. 반드시 대간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 사기(士氣)를 진작시켜야 합니다.”

선조임금은 간언을 자주 듣는 것이 싫었던지 다시 이렇게 말했다.

“대간의 말도 옳지 않은 것이 많다.”

임금의 고집스러운 발언에 율곡이 또 나서서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대간의 말에 잘못이 있으면 따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간의 말이 항상 그럴 것이라 하여 처음부터 듣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율곡은 대간을 대신해서 자신이 이렇게 간언을 하였다.

“지금 백성들이 초췌하여 지고 기름진 땅과 연못이 이미 다 말라버렸습니다. 조정에서 비록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나 은택(恩澤)이 아래에까지 미치지 않아, 마을마다 원망하고 근심하는 소리가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백성들은 조정이 깨끗하고 밝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백성이 이와 같으니 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오늘날 인심이 바르지 않습니다.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법령은 행해지지 않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임금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시고 근본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선조 27년(1594년) 7월 9일의 왕조실록 기사에도 조정의 언로(言路)와 간언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나온다.

“십수년 이래 사대부들 사이에는 말을 하는 것을 기피하여,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는 어물어물 우유부단하여 구차스레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관원)에 있는 자는 시세에 따라 부침(浮沈)하여 좋은 벼슬을 보전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 갈수록 심합니다. 그 폐단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에 전하께서는 허물을 들을 수 없게 되셨습니다. 전하께서 허물을 들을 수 없어 국사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신들은 저도 모르게 모발이 송연해집니다.

더구나 지금은 형세가 매우 위급하여 이미 다 전복되었으니 이야말로 사람들이 스스로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계책이 있으면 반드시 알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임금에게 따지고 책망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고, 전하께서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을 채용하여 시행하셨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말할 만한 일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말을 하였으나 취할 것이 못 되어 그런 것입니까?”

율곡도 선조대왕이 훌륭한 인물들을 등용한 뒤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였으나, 이 상소문에도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1594년은 율곡이 사망한 뒤 10년이 지난 때인데, 이때도 선조는 신하들의 간언 듣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정관정요⌋의 문구에서 보았듯이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정관정요⌋는 “시세의 흐름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 할 뿐만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는데 조선의 선조는 간언 듣기를 싫어하여 그러한 기회를 상실하고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여 국가가 위기에 빠지는 상황을 초래하였으니, 참으로 우둔한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