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기강이 없는 이유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10

나라에 기강이 없는 이유

 

선의 14대 국왕 선조(1552년~1608년, 재위 1567년 ~ 1608년)는 서자 출신의 임금이었다.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서자였다. 서자란 정실부인이 아닌 첩에게서 난 아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에는 차별의 대상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선조는 서자 콤플렉스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선조는 특히 유교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성리학을 장려하였으며, 대유학자를 존경하는 한편, 사림들을 널리 등용하였다. 성종 때부터 조선의 정치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 즉 유학자들은 선조의 지원을 받아 정치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선조는 퇴계 이황(1501-1570), 율곡 이이(1536-1584), 그리고 우계 성혼(1535-1598) 등 대유학자들과 경연을 하고 학문과 역사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특히 퇴계 이황을 깊이 신뢰하였는데 퇴계가 사망하고 난 뒤에는 율곡을 가까이하고 그의 학문과 사상을 경청하였다. 이 때문에 율곡은 선조를 만나 경연을 할 때는 정성을 다하여 임금에게 도움이 되는 말과 충언을 거듭하였다. 경연할 때의 모습을 기록한 사료에는 그의 그러한 정성과 충정이 절절히 베어져있다.

경연이 있던 어느 날 율곡이 선조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기강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구습을 답습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기대할 것이 없게 됩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큰 뜻을 분발하여 지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대신들과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일시에 그들이 발분할 수 있도록 하고 기강을 세워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선조시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시대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일본인들에게 능멸을 당한 시대의 임금이 바로 선조이다. 이 시대에 율곡이 살고 있었으니 율곡의 눈에 조선은 얼마나 걱정스럽게 보였을지 짐작이 간다. 임금 앞에서 나라에 기강이 없다는 그의 말은 바로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다는 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기강은 법령이나 형벌로 억지로 확립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조정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공정(公正)하게 집행되고 사사로운 정(情)이 행해지지 않아야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무엇으로 서겠습니까?”

조정의 관리들과 왕족들이 공정하지 못하고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행동을 하고, 사악한 행위들이 만연하니 국가의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옆에 같이 있던 김우옹이 율곡의 충언을 거들었다.

“오늘날의 폐단은 정말 그 말과 같습니다.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고 사의(私意)가 횡행하여 세워진 법을 고치려 하면 법이 세워지자마자 폐단이 또 생깁니다. 반드시 임금께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시어 마음에 천리(天理)가 유행하고 인욕(人欲)이 없어져서 크게 공변되고 지극히 바른 도리만이 행해지게 하신다면, 사람들이 다 감동 분발하여 명령이 나오면 반드시 행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뜻을 세워 정심·성의에 힘쓰신다면 사업이 요(堯)·순(舜)·탕(湯)·무(武)를 기약할 것이니, 초 장왕·제 위왕은 말할 것도 못될 것입니다.”

임금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堯)·순(舜)·탕(湯)·무(武)는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가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왕들이다. 이들처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임금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학에서는 통치자의 마음은 그가 펴는 정치와 별개의 것이다. 통치자의 마음 보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를 둘러싼 정치제도이며, 국가를 경영하는 데 도구가 되고, 지침이 되는 법률이다. 통치자는 제도에 따라 그리고 법에 따라 성실하게 권력을 행사하면 된다.

그렇다면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제도와 법률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국민에게서 나온다. 법률과 제도를 만드는 입법자들은 국민이 뽑고, 그 집행을 감시하는 사법자들 역시 국민이 선임한다. 통치자 역시 국민들이 뽑는다. 민주주의, 즉 백성이 주인인 정치 체제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입장에서 과거 유학자들의 정치 이야기는 너무도 수동적이고 통치자 의존적이다. 하지만 당시 시대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정치였던 것이다. 소위 유교의 왕도정치이며, 민본정치다.

 

율곡이 또 이어서 이렇게 왕에게 아뢰었다.

“오직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정치가 참으로 본받을 만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을 쓸 때, 통상적인 사례에 얽매이지 않고 어진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 있는 사람을 부려서 각각 그 능력에 맞게 했습니다.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분수는 정해져 있으니, 오늘날에도 반드시 사람을 가려서 벼슬을 주고 책임을 맡겨 성취를 요구해야 모든 공적이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묘년에 조광조(趙光祖)가 중종의 지지를 받아 큰일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는 선비로 일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하여 소란사태를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덕분에 소인들이 틈을 타서 사림(士林)을 해쳤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을 맡은 자들이 기묘년의 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기묘년의 사람들이 일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으나 어찌 오늘날 전혀 일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왕에게 율곡은 세종대왕 때의 관리 등용 방법, 그리고 조광조 개혁이 실패로 끝난 이유 등을 들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20)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을 확립한 인물이다. 중종의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관료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전파하고 성리학적인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훈구파의 반발로 실패하고, 반란 주모자로 몰려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하였다.

율곡은 계속하여, 방법이나 절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임금의 마음과 의지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임금께서 큰일을 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먼저 몸소 행하여 근본이 맑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일이 순조롭게 추진되어 많은 신하들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먼저 자기를 닦고 나서 반드시 어진 사람을 높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은 벼슬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일을 시행해야 만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어진 사람을 좋아하십니다만 불러서 벼슬만 시키실 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참으로 도리를 지키는 선비라면 어찌 그런 허례허식을 위해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당시 선조가 행한 정치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직설적으로 언급하였다. 어진사람들을 채용하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끈질기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율곡도 대단하지만 신하의 따끔한 충고를 진지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듣고 있는 선조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이 시대의 정치가들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