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다스리는 순서


<역사속의 율곡학 스토리텔링07>

나라를 다스리는 순서

 

슨 일에나 순서가 있는 법이다. 먼저 해야 할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에도 본질적인 부분이 있고 지엽적인 부분이 있다. 본질을 잘 꿰뚫어 추진하고 그것을 잘 완수하게 되면 지엽적인 것들은 자연히 잘 정리가 된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일의 본질을 잘 파악해서 처리한다. 잘못하는 사람은 두서없이 일을 하다 지엽적인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정작 중요한 부분은 미숙한 채로 일을 끝낸다.

조그마한 일도 이러한데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어떻겠는가? 율곡이 선조 대왕에게 성학(聖學, 통치를 위한 임금의 학문)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대해서 강론할 때(1573년 10월 12일)의 이야기다.

임금이 이렇게 말했다.

“내 성품이 어리석고 둔하여 감히 큰일을 할 수가 없다.“

율곡이 말했다.

“대왕의 성품이 원래부터 영리하고 총명하지 못하신다면 저도 절망하겠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영리하고 총명하시지만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큰 뜻을 분발(奮發)하지 못하시니,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필부(匹夫)가 글을 읽고 몸소 행하는 것도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뜻이 있는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한 나라의 백성을 맡아서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가졌고 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나셨으니 어찌 스스로 분발할 뜻이 없겠습니까?”

율곡은 먼저 임금님을 추겨 세웠다. 임금님의 자질도 충분하고 정치를 잘 하고자 하는 의욕도 강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였다.

“향약(鄕約)은 삼대(三代)의 법인데 전하께서 거행하라고 명하셨으니 참으로 근대에 없던 경사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대의 법’이란 중국 ‘하은주’ 시대의 법이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졌던 시대에 실시하였던 법, 즉 훌륭한 제도라는 의미다.

향약이란 향촌 사회의 약속, 즉 자치 규약을 말한다. 율곡은 이러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2년 전에 청주목사로 부임했었다. 그 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제정하여 청주 지방 백성들의 자치 능력을 키워주고자 하였다. 그 다음해 병으로 청주에 계속 있지 못하고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가 뜻했던 향약의 실시는 중지되고 말았다. 그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율곡은 자신이 추진했던 향약을 이야기 하면서 “모든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다”고 하였다. 본질적이면서 우선시해야 할 부분이 있고, 지엽적이며 나중에 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향약은 만민을 바르게 하는 법입니다.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향촌의 자치 규약이라고 할 수 있는 향약의 기본 정신은 유교 사상에 바탕을 깔고 있다. 서로 덕업을 권하고, 과실을 서로 경계하며, 예속으로 서로 사귀며, 환난을 당해서 서로 도와서 구하자는 내용이다. 율곡도 충주목사를 하면서 서원향약을 만들어 추진하였는데, 향약은 백성들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적으로 이끄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나쁜 의미로 말한다면 ‘자치’라기 보다는 관주도형의 농촌 계몽운동, 혹은 시민 계몽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부에서 주도를 하게 되면 자칫 백성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고, 추진하는 자에 따라서는 민간 탄압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율곡은 이 점을 분명히 경계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한 것이다. 윗물이 흐린데 어찌 아랫물이 맑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곡의 한마디 한마디가 일의 순서와 본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기본이 안 갖추어져 있는데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율곡은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미 성전(盛典, 즉 향약)을 거행하였으니 중지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시어 조정에 시행함으로써 정령(政令)이 다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 뒤에야 백성이 감동되어 흥기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이란 향약의 실시를 말한다. 기왕에 추진한 향약을 중지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임금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도록 건의하였다. 백성들에게 펴고자 한 ‘향약’의 규정을 임금부터 스스로 힘껏 실천을 한 뒤에 조정에서 시행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 정부의 정책과 명령이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한다면 백성들도 감동하여 즐거이 향약을 실천할 것이라고 한다.

요즘의 정치 상황에도 잘 맞는 말이다. 어떤 정치가들은 국민을 계몽하고 가르치고 훈계하려고 한다. 율곡에 따르면 국민을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국회의원, 정치가, 고위직 공무원부터, 가장 위에는 대통령부터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한 뒤에 만민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조정과 백관이 아직 바르게 되지 않았는데 먼저 만민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어서 일이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려면, 본질적인 부분이 우선적으로 잘 다스려진 뒤에야 나라 전체가 잘 다스려진다고 역설한 442년 전 율곡의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