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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1만자의 상소를 올리다


 

율곡, 1만자의 상소를 올리다

 

율곡전서』제5권 소(疏)에 기록된 「만언봉사」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요약해본다.

“신은 삼가 아룁니다. 정사는 때의 알맞음을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성실한 노력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니, 정사를 하면서 때의 알맞음을 모르고 일을 당하여 성실한 노력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총명 영의하시고 선비를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시매, 안으로는 음악과 주색을 즐기는 일이 없고 밖으로는 말달리고 사냥을 좋아하는 일이 없으시니, 옛날 군주들이 자신의 마음과 덕을 해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다 하겠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노성(老成)한 신하를 믿어 의지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쓰며, 곧은 말을 너그럽게 용납하여 공론이 잘 시행되므로 조야(朝野)가 부푼 가슴을 안고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고대하고 있으니, 기강이 엄숙해지고 민생이 생업을 즐겨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기강으로 말하면, 사사로운 정을 따르고 공도를 등지는 것이 예전 그대로이고 명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그대로이고 백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그대로이고, 그 민생으로 말하면 집에 항상 생산이 없는 것이 예전과 마찬가지이고, 안주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마찬가지이고, 궤도를 벗어나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개탄하고 삼가 그 까닭을 깊이 찾아내어 한번 전하께 말씀드리려고 하면서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엊그제 삼가 전하께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대신에게 내리신 전교를 보니, 전하께서도 크게 의아해 하시고 깊이 탄식하시어 이 재변을 구제할 계책을 들어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뜻있는 선비가 할 말을 다할 기회인데, 애석하게도 대신들은 지나치게 황공하고 불안해 한 나머지 할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재변이 일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 심원하여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우나 역시 임금을 사랑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옛날 명철하고 의로운 임금이 큰 사업을 이룰 수 있는데도 정사가 혹시 닦여지지 않으면 하늘은 반드시 견책을 내보여 놀라게 하였으며, 하늘과 관계를 끊은 자포자기한 임금에 있어서는 도리어 재변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재변이 없는 재변이야말로 천하에 가장 큰 재변인 것입니다.(중략)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자세히 보시고 익히 검토하시며 신중히 궁구하고 깊이 생각하시어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한 뒤에 이를 받아들이거나 물리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채택하신다면 그 진행을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 정성껏 그것을 시행하게 하고 확신을 갖고 지켜 나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보수적인 세속의 견해로 인하여 바뀌게 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그르다 하며 남을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3년이 지나도록 나랏일이 여전히 부진하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으며 군대가 정예로워지지 않는다면, 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리어 요망한 말을 하는 자의 경계가 되도록 하소서.”

 

1574년(선조 8) 1월 당시 천재지변이 자주 발생하자 선조는 대신들에게 이러한 천재지변에 대응하는 계책을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이에 응하여 1만자가 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 것이 바로 「만언봉사」이다. 이때 율곡은 나이 39세로 승정원 우부승지였다.

율곡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 200여 년이 지난 당시를 그동안 나라 전체에 많은 폐단이 쌓인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국가 운영체제의 혁신을 통하여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지 않으면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따라서 정치․경제․민생․군사 문제 등 국정 운영의 모든 분야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역사적 사례와 문제의 진단, 그리고 철저한 원인 분석에 의거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율곡의 시무책이 드러나 있는 글 가운데 「만언봉사」가 특별히 중요한 까닭은 그가 추구한 개혁의 두 가지 핵심어가 가장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시의(時宜), 즉 ‘시기에 알맞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공(實功), 곧 ‘실질적인 공적을 얻는 것’이다. 율곡은 「만언봉사」를 통해 ‘적당한 시기’와 ‘실질적인 효과’ 이 두 가지야말로 개혁을 성공시키는 핵심임을 밝혔다.

율곡은 상소의 말미에서 자신의 건의를 채택하여 국정을 개혁한다면 반드시 3년 이내에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상소를 읽은 선조는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요순시대를 만들겠다는 뜻을 볼 수 있었다. 그 논의는 참으로 훌륭하여 아무리 옛사람이라도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신하가 있는데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어찌 걱정을 하겠는가. 그 충성이 매우 가상하니 감히 기록해 두고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다만 일이 혁신에 관계되는 것이 많아 갑자기 전부 고칠 수는 없다. 이 상소문을 여러 대신에게 보여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고 상소문을 등서하여 올리라.”

고 하면서 끝내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만약 당시 선조와 조정에서 율곡의 상소를 채택하여 개혁 정치를 실행하였다면, 아마도 조선왕조가 제2의 도약을 이뤄 임진왜란과 같은 초유의 국난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선조를 움직여 경장을 이끌어 내어 토붕와해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율곡의 진심 어린 노력은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율곡의 이 「만언봉사」는 조선왕조 오백년사에 있었던 상소문 중의 상소문으로 후대의 정치인과 학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감안해 본다면 아직도 율곡의 이 상소문은 유효하다고 할 것이다.

자연재해에서 임금의 길을 묻다


 

자연재해에서 임금의 길을 묻다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1518) 5월 15일의 일이다.

시(酉時)에 세 차례 크게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뢰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중종 :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내가 사람을 쓰는 데 항상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끝나자 곧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처음과 같이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전우(殿宇)가 흔들렸다. 상이 앉아 있는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첫 번부터 이때까지 무릇 세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그 여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한참 만에야 가라앉았다. 이때 부름을 받은 대신들의 집이 먼 사람도 있고 가까운 사람도 있어서, 도착하는 시각이 각각 선후(先後)가 있었으나 오는 대로 곧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광필 :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마는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홍문관 저작 이충건(李忠楗) : “근래에 재변이 계속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진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어찌 오늘날같이 심한 것이야 있었겠습니까? 조정 정사(朝廷政事)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利害)·질병(疾病) 등을 진실로 강구해야 합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고 천한 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기강이 설 수 있을 것 같으면서 끝내 서지 못하는 것은, 하민(下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대신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재행(才行)이 쓸 만한 자를 취인(取人)하는 일에 대해 조정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상께서도 성명(成命)이 계셨습니다.

대신이 진실로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 시행할 수 없는 까닭을 변명해야 할 것이요, 부득이 시행해야 할 것이라면 마땅히 속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끌면서 좀처럼 봉행할 뜻이 없으니, 상께서 명이 계신데도 대신이 이럴진대 하물며 그 아랫사람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기강이 서지 않은 것은 대신이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지진에 대한 기록은 매우 많다. 문헌 기록 가운데 지진에 관해 체계적인 내용을 담은 최초의 책은 『삼국사기』이다. 서기 2년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있었던 지진을 시작으로 모두 107건의 지진을 기록하고 있는데, 1년 평균 0.1회 정도 발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지진 기록은 매우 간단하고, 발생 건수 또한 비교적 적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신라의 경주, 백제의 위례성과 부여, 고구려의 국내성과 평양 등 삼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지진만 기록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고려시대의 지진에 관한 기록은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나 있다. 475년간 194건의 지진이 기록되어 있어서 1년 평균 0.4회 정도 일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와 달리 수도에만 국한하지 않고 보다 체계적으로 지진을 관측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1863년(철종 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67건에 이른다. 대략 1년에 네 번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지진 발생이 증가했다기보다는 지진에 대한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 천문 현상과 지진을 관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관상감에서는 천재지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관상감일기』를 남겼다.

위의 중종실록 기록은 1518년 5월 15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 차례 큰 지진이 일어나 담장과 성첩이 무너졌으며, 임금이 정사를 보는 전각의 지붕이 요동치고 용상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지진의 발생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그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하였다. 동양의 재이관(災異觀)에서는 세상의 현상을 천도(天道)의 실현이라 보았다. 임금의 책무는 하늘의 이치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자연재해의 발생은 하늘의 이치를 구현하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며, 이 경우 왕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실천방법으로 음식 가지 수 줄이기, 정전(正殿) 피하기, 죄수 풀어 주기 등이다.

또한 궁궐 내의 궁녀의 원한이 하늘에 미친 것이라 생각하여 궁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하들에게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자연재해는 왕을 하늘의 대리자로 인정하는 조건이며, 반대로 신하들이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는 1574년 정월 초하룻날의 『선조실록』의 기사에는

“재변(災變)으로 인해 임금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고기반찬을 물리치고 음악을 듣지 않았다.”

고 기록하였다. 날이 가물고,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가 하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자연재해와 변고가 잇닿자 선조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선조가 신하들에게 어려운 시국을 타개할 계책을 구한다는 교지를 내리자, 율곡은 11,6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이 글이 ‘1만자로 이루어진 상소문’이라는 뜻을 담은 「만언봉사」이다.

율곡이 혹독한 신입관료의 신고식을 없애다


 

율곡이 혹독한 신입관료의 신고식을 없애다

 

경연일기(經筵日記)』1569년(선조 2) 9월의 기록이다.

사관(四館: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신진(新進: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침학(侵虐)하는 풍습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이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교화를 없애는 폐습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처음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을 사관(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에서 신래(新來)라 지목하여 곤욕을 주고 괴롭히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개 호걸의 선비는 과거 자체를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갓을 부수고 옷을 찢기우며 흙탕물에 굴러 체통을 잃고 염치를 버린 뒤에야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부)에 오르게 된다면 호걸의 선비치고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새로 과거한 사람을 접대하는 데 매우 예모(禮貌)를 지킨다 하는데 만일 이 소문을 듣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 풍속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침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이가 대답하기를,

“글에 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고려 말년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여 거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로 입에 젖내나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이라 지목하고 분개해 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임금이

“이는 개혁하여야 할 일이다.” 하고 드디어 통절히 개혁하도록 명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매스컴을 통해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과도한 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고를 접하곤 한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대학 신입생 환영회처럼 혹독한 신고식 문화가 있었다. 신참례(新參禮)라는 것이 그것으로, 관직에 들어온 신입에게 가하는 집단 괴롭힘이었다. 신참례는 조선 건국 초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왔고, 너무 과한 탓에 종종 사회문제가 되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하였다. 조선의 신참들은 오늘날의 새내기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은 신참의 신고식 비용을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면신례를 해야 했고,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해야 했다. 심한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15세기의 학자 성현(成俔)이 편찬한 『용재총화』에도 이러한 신참례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관료의 비리를 감찰하여 탄핵하는 기관인 사헌부는 오늘날 검찰과 같은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이른바 군기가 센 곳이었다. 사헌부에서는 새로 들어 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을 보였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 한 긴 나무를 신참한테 들게끔 하는데, 이를 경홀(擎笏)이라 했다. 이 나무를 들지 못하면 신참은 선배에게 무릎을 내놓아야 했으며 선배가 먼저 주먹으로 무릎을 때리고 이어 윗사람부터 차례로 내려가며 때리도록 했다. 또 신참에게 물고기잡기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참이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럽혀지게 했다. 또한 거미 잡는 놀이라 하여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질러 두 손이 옻칠을 한 것처럼 까맣게 되면 물에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라고 하니 그 물을 먹고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밖에도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하는 ‘삼천삼백’, 관련 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되 바로 읽어내리는 ‘순함(順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하는 ‘역함(逆銜)’,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오물을 칠하게 하는 등 신참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하였다. 겨울에는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볕을 쬐게 하는 육체적 가학은 물론이요,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까지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신래들을 침학하고 괴롭히는 습속이 워낙 다양해서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신참례의 폐단을 막고자 조선시대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신래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자는 장(杖) 60대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암암리에 관습화돼 이어진 신참례의 습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율곡 이이는 이러한 풍속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이라고 일컬어지듯이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행실도 모범적인 반듯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신참례라는 명목으로 신참을 괴롭히는 선배들의 생리가 누구보다도 싫었을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소속된 후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율곡은 신참례가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고 생각하였고, 위의 『석담일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신참례 혁파를 건의하여 마침내 성사시키게 되었다. 율곡은 신참례의 폐단을 지적한 뒤 선조가 신참례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묻자, 고려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원래의 신참례는 부정한 권력으로 관직에 오른 함량 미달의 인물들에게 국가의 관직은 함부로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 알려주고자 시도되었지만, 율곡이 살던 시대에는 그 애초의 취지는 잊힌 채 그저 하급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 문제화 되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율곡의 입장에서 이러한 풍습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습이었기 때문에 이의 혁파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던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10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1518) 7월 27일의 일이다.

강에 나아갔다.

중종 : 하․은․주나라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인데, 후세에는 구독(口讀:소리내어 읽음)만 할 뿐이니 인륜을 밝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학문을 하되 인륜을 밝히는 것을 알면 이것이 실학이다.

조광조 : 무릇 교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둘러 하려면 절대 이루지 못합니다. 이른바 인륜이나 대강령은 오륜(五倫:다섯 가지의 지켜야 할 도리)에 근거하나 이외에도 많은 이치가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위아래가 힘써 행하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조정이 바루어지고 백성은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은 이로써 다스리고 스승은 이로써 가르치는 것이 옛날의 도(道)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람마다 거듭 일러 친절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감화되고 훈도(薰陶:학문이나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함)되어 점차 젖어 들어가 선함을 따르게 되는 것이니, 이는 가르치는 것이나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전에는 『소학』을 괴이하고 허황된 학문이라 하여 읽지 않았는데, 근일에 신이 성균관에 돌아가서 보니, 입학하는 사람은 다 『소학』을 끼고 있었으며 읽는 자가 또한 많아서 전에 괴이하고 허황되다는 것이 지금은 상례(常例)로 여기고 있고, 오히려 읽지 않는 자를 부형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근원을 캐보면 위에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바르게 보이셨으므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다 선하니 어찌 교화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자사(子思:노나라의 유학자. 공자의 손자)가 『중용』에 ‘공경을 돈독히 하매 천하가 평안히 다스려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천하의 일은 만 가지이나 홀로 ‘공경을 돈독히 함’을 천하를 담당하는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마음이 방일(放逸: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노는 것)하지 않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고, 마음이 한번 방일하면 만 가지 이치가 허물어지는데, 하물며 천하가 평안히 다스려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문제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제기해 온 질문이다. 특히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하는 질문과 논쟁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철학, 정치,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에게도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였다. 맹자는 인간은 원래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그에 맞서 인간은 근본이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고대 서양에서는 인간의 본성 자체에는 나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은 원초적인 죄악을 가진 악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힘을 얻었다.

정통 유가(儒家)에서 성선설을 논리적으로 주창한 최초의 인물은 맹자였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가 우물에 막 빠지려는 순간, 깜짝 놀라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마음은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아기를 구해서 그 부모와 교분을 트거나 보상을 받겠다는 계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그런 자발적인 도덕성이 갖추어져 있어서 저절로 드러날 뿐이다. 맹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람 또한 본래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내재된 그러한 도덕적 마음이 ‘사단(四端)’, 곧 ‘네 가지 도덕의 단서’이다. 가엾고 애처로워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거짓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내주는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선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빼앗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남을 해치는 마음이 생겨나고, 충성과 믿음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선이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위적인 교육과 교화로서만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교육이라는 인위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 제도에 따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교정․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굽은 나무는 반드시 굽은 것을 바로잡는 도구를 사용하고 수증기로 쪄서 바로잡은 다음에 곧게 된다. 또 무딘 연장은 반드시 연마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날카로워진다. 같은 이치로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은 반드시 스승을 본받은 다음에 바르게 되고, 예의를 얻은 후에 다스려지는 것이다. 옛 성왕(聖王)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 그 행동이 올바르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워져 다스려지지 않게 되자, 예의(禮儀)를 일으켜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성정(性情)을 바로잡고 교화시켰다. 이에 비로소 인간 세상은 다스려지고 또한 도리와 이치에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량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신봉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선하니 어찌 교화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라는 조광조의 말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착하게 태어나며, 제대로 된 도덕과 품성 교육을 받는다면 악하게 자랄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경연의 문제아, 연산군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9

<경연의 문제아, 연산군>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병진(1496) 1월 2일의 기록이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내일에 경연에 나가려고 했었는데 몸이 편치 않아 나기지 못하겠으니, 그대들이 내가 병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부끄럽다.”

 

다시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병진(1496) 11월 22일의 기록이다.

어서(御書:임금이 쓴 글이나 서신)를 내리기를,

“경 등은 경연을 정지한다고 하여 나를 게으르다고 하지 말라. 나는 약한 몸으로써 갑자기 대우(大憂:부모의 상)을 만나 어찌 할 바를 몰랐었는데, 이른 봄 제사를 드리다가 심한 감기에 걸린 이후 잠시만 수고로워도 다시 발병하여 지금까지 낫지 않아서,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만약 차도만 있으면 경연에 나가려 한다.”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병진(1496) 11월 23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시를 지어 내리기를,
기침과 열이 자주 있고 피곤한 기분이 계속되어
이리저리 뒤치며 밤새껏 잠을 못 이루네.
간하는 대간들 종묘사직 중함은 생각하지 않고
소장을 올릴 때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
하고, 전교하기를,
“감히 시를 짓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표시하는 것뿐이다. 숙직하는 승지는 이것을 보라.” 하였다.

 

또 『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정사(1497) 3월 11일의 기록이다.

부제학 이승건 등이 아뢰었다.
:어제 신 등이 아뢴 것을 전하께서 의당 깊이 생각해야 하옵니다. 경연은 왕자(王者)의 중한 일이므로 정지하거나 폐지하여서는 안 됩니다.“

어서(御書)로 답하기를,
“안질이 간혹 안개가 앞을 가리는 것 같다. 연회에서는 앉아서 먹을 뿐이니, 글을 보는 일과는 다르다. 눈이 좀 나으면 어찌 제왕의 일을 싫어하겠느냐.”

 

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갑자(1504) 8월 15일의 기록이다.

유순 등에게 전교하기를,

“나의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비록 경연에 나가더라도 어찌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나는 조회 받는 등의 일은 반드시 해야 하나, 경연에는 반드시 나가야 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유순 등이 아뢰기를,

“경연은 좋은 일이므로 인군은 마땅히 나가야 하나, 어찌 반드시 구애될 것이야 있겠습니까? 성상의 옥체를 헤아려 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연산군은 경연에서도 문제아였다. 아버지 성종이 하루 세 번의 경연과 야대까지 성실하게 수행한 것과는 달리, 아들인 연산군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세자 시절에도 서연(書筵:왕세자의 교육제도)에 충실하지 않았고, 왕이 된 후에는 경연 역시 소홀했을 뿐만이 아니라 아예 경연을 완전히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 초부터 경연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초기 실록에는 자주 경연을 걸러서 오랫동안 쉬었으니 다시 경연에 참석하라고 주청하는 신하들과 옥신각신하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띈다. ‘몸이 편치 않아 나가지 못하겠다.’, ‘약을 먹고 있어서 못나간다.’, ‘몸살 감기가 심하다.’ 등 핑계의 종류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경연에 못 나가는 이유를 담은 시를 지어 보여주기도 하였다.

즉위한 지 3년이 넘어가면서는 연산군의 핑계가 점차 달라졌다.

“내가 요즘 눈병이 있어서 경연에 못 나간다.”

그러나 성대한 연회나 잔치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눈이 아파 경연에 못 나오신다면서, 어찌 잔치에는 가십니까?”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연회에서는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을 뿐이니, 글을 보는 일과는 다르지 않느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주 빠지기는 했지만,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경연에 참석하곤 하였던 연산군은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무수한 신하와 선비를 죽이고 귀양을 보냈다. 바른 말을 하는 신하는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제 그 누구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 군주가 된 것이다.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해도 어느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그저 왕이 시키는 대로 ‘지당하십니다.’라고만 할 뿐이었다.

이제 연산군은 더 이상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댈 필요도 없었다. 어느 신하도 경연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04년 8월 15일, 연산군은

“나의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비록 경연에 나가더라도 어찌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라면서 경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아무리 학문이 높은 왕이라도 자기 스스로 ‘이미 학문이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말은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미 폭군이 된 연산군에게 목숨을 걸고 바른 소리를 할 신하는 더 이상 없었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경연마저 없애버린 연산군은 비위나 맞추는 간신과 함께 국사는 내팽개치고,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1506년 9월,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주동이 된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자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쓸쓸히 죽었다. 학문을 게을리 하고 쾌락만 쫓던 왕의 최후는 참으로 쓸쓸하고 비참했다.

왕이 인재를 대하는 법을 말하다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8

<왕이 인재를 대하는 법을 말하다>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 5월 20일의 일이다.

 

강에 나아갔다.

조광조 : 송나라의 건국공신인 조보(趙普)가 어떤 사람을 어떤 벼슬에 천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허락하지 않자 다시 천거했고, 태조는 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조보가 다시 천거하자 태조는 크게 노하여 천거장을 찢었습니다. 조보는 안색을 평안히 유지하면서 찢어진 서찰을 주워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조보는 찢어진 천거장을 맞추어 꿰맨 후 이를 태조에게 보였습니다. 그제야 태조는 깨닫고 조보의 천거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또 조보는 태조가 싫어하는 사람의 벼슬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태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궁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조보는 궁실 문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굳세고 과단성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에 굳세고 간절하게 간하는 일은 아랫사람이 할 일이지 대신은 그리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신 역시 나랏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니, 조보가 간절히 간한 것과 궁실 문을 떠나지 않고 서 있었던 것과 같이 해야 대신의 체면이 바로 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대신은 큰일에만 관계할 뿐이어서, 대간이 하는 일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옳고 바른 일이라면 대신이 먼저 나서 굳세고 간절하게 간해야 합니다. 또한 임금의 과실은 대신이 먼저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 시절 황희나 허조 같은 이는 세종께서 작은 잘못이 있어도 대간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빈청으로 가서 직접 논계(論啓:신하가 임금에게 잘못을 논박하여 보고함)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고 계속 앉아 있다가 기어이 윤허를 얻고서야 물러갔다고 합니다. 또한 집을 돌아간 뒤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잠도 제대로 못자며 국사를 잊어본 일이 없다 하니, 대신이란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나라 태조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조보에게 맡겼고, 조보 역시 천하의 모든 일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습니다. 기왕에 재상 자리를 두었다면 재상에게 모든 일을 전적으로 맡겨야 대신이 그의 포부를 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우(賢愚:현명함과 어리석음)를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맡기기만 한다면 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북송(北宋:960~1126)의 명재상이었던 조보는 시골 아전 출신이었다. 어릴 때는 건달로 지냈고, 철이 들어서는 전쟁터를 전전했기 때문에 배움이 짧았다. 북송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고 관직에 오른 뒤 열심히 읽은 책은 『논어』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정적들은

“고작 논어 한 권 읽은 무식한 사람이 재상을 너무 오래한다.”

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조보는 태종에게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 읽은 책은 논어 한 권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반으로 태조께서 천하를 도모하는 데 도움을 드렸고, 나머지 반으로 폐하(태종)께서 태평성대를 여시는 데 기여했습니다.”

후대에 이 말이 와전돼 조보가 ‘반쪽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반부논어(半部論語)’란 고사성어가 생겼다.

조광조는 조보와 황희를 예로 들면서, 대신은 국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소신 있게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밝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말로 하기에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관직을 박탈당하고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소신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을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충신이자 인재라고 할 것이다.

경연에서 관료의 적격 여부를 논하다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6

<경연에서 관료의 적격 여부를 논하다>

 

성종실록』성종 9년 무술 10월 7일의 이야기다.

을 마쳤다.

허침 : 창원군(昌原君:세조의 둘째 아들)은 죄를 범한 것이 가볍지 아니한데, 한 해가 안 되어 갑자기 벼슬을 돌려주었습니다. 또 임사홍은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해서 먼 지방에 귀양 보냈는데, 겨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소환하였습니다. 아마도 국가의 법이 이로부터 허물어질 듯합니다.

성종 : 임사홍이 벌써 돌아왔는가?

김승경 : 임사홍이 서울에 들어온 지 벌써 사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종 : 공주의 병이 나은 뒤에 배소(配所:귀양지)로 돌려보내겠다.

허침 : 이조는 인물이 적격자인가를 심사하고 백관을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게 하는 곳이므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하루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중선을 판서로 삼았습니다. 박중선이 무신이라서 그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성종 : 문신으로서 비록 경적(經籍:경전의 서적)을 밝게 통달한 자일지라도 일을 처리하는 데는 간혹 잘못 조처하는 수도 있고, 무신이라 하더라도 일을 잘 처리하는 자가 있다. 하나만 가지 논할 수는 없다. 박중선은 어떠한 사람인가?

윤필상 : 박중선은 세조조에 여러 번 좋은 벼슬을 역임하여 병조판서까지 되었는데, 지금 이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승소 : 박중선이 비록 무신일지라도 글을 알고 사리에 통달하였습니다. 다만 일을 처리하고 판단하는 데 능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시험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종 : 박중선은 참으로 바꿀 수 없다.

허침 : 참판 신정은 비록 자질이 명민하나, 역시 물망(物望:여론)에 맞지 않은 자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인물을 전형하는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신은 인물의 전형과 선발이 정밀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성종 : 참판이 물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허침 : 여론이 모두 청렴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성종 : 이조는 중대한 곳인데, 그 사람됨이 이와 같다면 그 벼슬에 둘 수 없다. 저마다 아는 것을 말하라.

윤필상 : 신정은 일찍이 도승지가 되었으니, 그 사람됨을 성상께서 자세히 알고 계실 터입니다. 그가 청렴하지 않은지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승소 : 신정이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은 신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듣건대, 신정은 사는 것이 넉넉하다고 합니다. 대개 부(富)란 원망의 대상이므로 여론이 이와 같습니다.

안침 :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 신정이 청렴하지 못한지는 신이 자세히 알지 못하나, 여론이 이와 같으면 전형의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안윤손 : 신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여론은 참으로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으 말과 같습니다.

성종 : 신정이 도승지로 있을 때 잘못한 일이 없었고, 이제 참판이 되어서도 잘못이 없으며, 또 무슨 일이 청렴하지 못하다고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근거 없는 말만 가지고 갑자기 벼슬을 바꾸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허침 : 유양춘은 행실이 경박한 사람이라서 참으로 조정의 벼슬에 서용할 수 없는 사람인데, 지금 군자감(軍資監: 군사상에 필요한 물자를 관장하는 기관) 주부로서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를 맡아보던 기관) 교리에 올랐습니다. 온당치 못합니다.

성종 : 자기 의견을 말하라.

윤필상 : 유양춘이 예문록(藝文錄:예문관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 그 후보자의 성명을 적은 기록)에 참여하여 뽑혔으니, 만약 이문(吏文:공문서에 쓰던 특수한 양식의 이두문체 또는 용어)과 한훈(漢訓:중국어)에 정통하다면 쓰더라도 괜찮습니다.

이승소 : 그러합니다.

성종 : 승문원의 소임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양춘이 이문에 정통하다면 쓰더라도 무방하나, 정통하지 못하다면 쓸 수 없다. 이문에 정통한지 여부를 이조에 물어보도록 하라.

 

조선시대의 관료 임명 절차를 보면 문․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에서 각 판서 이하 책임자들이 모여서 적격자 3인씩을 후보자로 선발하여 그 성명을 일일이 기록하여 왕에게 주문하도록 하는 비삼망제도(備三望制度: 한 사람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에 세 사람의 후보자의 이름을 갖추어 천거하던 일)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 국왕은 세 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점을 찍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낙점(落點)을 거쳐 조보(朝報:오늘의 관보나 신문)에 공표함으로써 인사조치가 행해진다.

그리고 그 후 서경(署經:국왕이 관료를 임명하면 대간에서 심사해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제도)을 거쳐야 비로소 관료로 정식 임명되었다. 이처럼 엄격한 절차를 거쳐 임명된 관료라도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경연에서 관직에 선발된 관료의 적격성 여부를 논의해서 교체하기도 하였다.

이날 경연에서 맨 처음 언급된 창원군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종친이라는 신분을 믿고 제멋대로 불법을 자행했는데, 성격이 오만무례하고 포악하였다. 지방에 가서는 수령들을 능욕하고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으며, 심지어 여종을 죽이고 암매장한 죄로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원군이 종친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해주고 먼 곳으로 부처(付處:어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충청도 진천에 유배하기로 결정했으나, 세조의 소생으로는 창원군 형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정희대비(세조의 비)가 간청하여 며칠 만에 먼 곳으로 부처한다는 판결마저 철회했다. 그 뒤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판결 철회가 부당하다며 몇 차례 상소했으나, 성종은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임사홍은 효령대군(孝寧大君:태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보성군의 사위이고, 그의 두 아들 또한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에게 장가들어서 왕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1478년(성종 9) 4월에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친아버지처럼 그를 의지하던 공주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는데, 이 기사에서는 임사홍이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지 사흘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경연에서 성종이 공주의 병을 운운한 것은, 현숙공주가 아버지 예종을 여윈 뒤 시아버지 임사홍을 친아버지처럼 따랐는데, 그가 유배 간 뒤 그리워하여 거의 병이 날 지경이 되었던 것을 말한다.

위의 경연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의 친․인척을 포함한 권력자나 관료들의 비리는 국가의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공정하게 선발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과 끝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경연에서 왕의 건강도 점검하다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5

<경연에서 왕의 건강도 점검하다>

 

선조실록』선조 38년 을사 11월 3일의 일이다.

시에 임금이 별전에 나아가니 영사 유영경, 지사 유근, 특진관 박홍로․남근, 대사간 성이문, 참찬관 유간, 시강원 박진원, 지평 민덕남, 검토관 박안현, 가주서 이홍망, 기사관 임장․이현이 입시하였다.

유영경 : 성상의 건강 상태가 어떠하십니까? 풍습(風濕:질병을 부르는 기운으로 바람의 기운과 습하고 축축한 두 기운이 만나 근육과 신경 등에 장애를 일으키는 증상)을 치료하는 약을 일전에 드렸는데, 효과를 보셨습니까?

선조 : 부기(浮氣)가 간혹 있는데 왼손이 오른손보다 심하다. 겨울 동안에는 약을 약간 복용하고 있다가 따스한 봄이 되기를 기다려 침과 뜸을 시술받을 생각이다. 의술은 경연에서 말할 것이 아니나, 마침 이를 언급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근래에는 의술이 너무도 허술하다. 내가 의술은 알지 못하나, 병의 증세와 이치로 궁구하면 또한 알 수 있다. 약을 쓰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인데, 의관들은 쉽게 약을 써서 어느 병에 대해 물으면 무슨 약을 쓰라 이르고, 가미(加味:이미 구성되어 있는 처방에 다른 약재를 더 넣는 것)하는 것 또한 많아서 본방(本方:한의학 서적에 있는 그대로의 약방문)의 약효를 잃게 한다. 내가 필요 없는 약을 복용한 것이 이제 해를 넘겼다. 이 약을 복용하여 효과가 없으면, 또 다른 약을 복용하곤 할 따름이다.

유영경 : 옛사람들은 병의 증세를 알아서 다스렸는데, 지금 사람들은 병의 증세를 알지 못합니다.

선조 : 중종조에 안찬(安瓚)이란 의관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두통 앓는 것을 보고 바로 낙상(落傷)이 원인이라고 진단을 하고 약을 써서 즉시 그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참으로 귀신같다고 하겠다.

3대를 계승한 의원이 아니면 그 약을 먹지 않는다 했고, 공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약은 감히 먹지 않는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약의 복용을 신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약 쓰기를 매우 쉽사리 하니, 지금의 의술을 알 만하다.

중원 사람은 이에 대해 많은 책자를 만들었는데, 『평림(評林)』과 『의학입문(醫學入門)』같은 책들은 모두 양생(養生:병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 관리를 잘하여 오래 살기를 꾀하는 것)의 방법을 말하여 사람을 기만한 것으로서, 우리나라 사람이 이를 믿고 배운다면 필시 생명을 잃는 일이 많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모두 신농씨(神農氏:전설상의 제왕)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대개 사견으로서 방서(方書:약방문을 적은 책)를 만들기 때문에 도리어 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조정의 선비 가운데도 의술에 능한 자가 있었다. 정작(鄭碏)의 형 정염(鄭磏)은 의술에 정통하여 인종을 진찰하였다. 그런데 지금 의술은 단지 찌꺼기만을 훔쳤을 뿐이다. 나는 심병(心病)을 앓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면서도 말의 시비를 알 수 없다. 또 내가 일전에는 입으로 토설하지 못하여 벙어리 같았는데, 오늘날 이 자리에서 경들과 함께 말할 줄을 어찌 예측하였겠는가?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조선 제14대왕 선조였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였던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아마도 태어나는 순간엔 왕이 될 운명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제각각 성격상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선조도 인격적 결함이 많은 왕이었다. 이황․이이․조식․기대승․류성룡 등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성리학의 갖가지 학설과 이론이 만발한 데다, 충실하게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왕이 된 소년 군주 선조로서는 당대 석학들로부터 받는 최고 수준의 교육과 제왕의 자질에 대한 요구가 엄청난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을 넘게 되면서 국가체제의 모순이 드러날 대로 드러나, 율곡 이이가 표현한 대로 고대광실(高臺廣室:높은 누대와 넓은 집)의 기와집이 겉만 멀쩡하고 속은 벌레가 먹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상태였다. 여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7년간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나라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위의 경연은 참혹한 전란이 끝난 뒤 10년이 채 안 된 시점이었던 1605년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44세였다. 선조의 부기는 오랫동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결과 생긴 병증으로 보인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로가 쌓이면 노곤하고 피곤해져서 말하는 것도 짜증나고, 움직이면 숨이 차며 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불안해지는 증상이 나타난다.

이런 스트레스성 장해가 선조에게 부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심병은 기혈이 부족하거나 기가 몰리고 심화(心火)가 왕성해져서 생기는 병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리면서 아프며, 숨이 차고 잠을 잘 자지 못하며 정신이 흐리멍덩하고 건망증이 생기기도 한다. 선조가 스스로 자기가 한 말의 시비를 알 수 없고 때로는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기도 했다는 증상과 일치한다. 막중한 국사로 스트레스가 쌓인 데다가 역대 어느 왕도 겪지 못한 전란을 당했으니, 어찌 이런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군자와 소인은 어떻게 구별할까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4

<군자와 소인은 어떻게 구별할까>

 

중종실록』중종 14년 기묘 5월 11일의 기록이다.

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글에 임하여 말하였다.

중종 : 군자와 소인은 마땅히 분별해서 쓰거나 퇴진시켜야 한다. 범중엄(范仲淹:송나라의 학자․개혁자), 한기(韓琦:송나라의 정치가), 부필(富弼:송나라의 재상), 구양수(歐陽脩:송나라의 정치가․문인) 등이 모두 조정에 등용될 때에는 임용할 만한 현명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어찌 초야에 버려진 현명한 사람이 없겠는가? 대신들은 마땅히 그들을 찾아 추천하여 등용되게 해야 한다.

조광조 : 예로부터 올바른 사람은 적고 사특한 사람은 많습니다. 왕안석(王安石:송나라의 개혁정치가)이 권세를 부리던 때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송나라 선인 고황후와 인종 시절에는 소인배를 모두 내쳤기에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사사로이 서로 비난하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습니다. 지금은 과연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같은 조정의 신하들끼리 어찌 서로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대신들이 이를 경계하여 서로 권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마는,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어찌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근심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 기회에 성상께서나 대신들이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군자가 조정에 들어오고 소인은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한다면, 나타나지 않은 악이 자연히 소멸되어 선으로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중종 : 훌륭한 의원은 환자를 볼 때, 병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치료하는 것이 아니요, 병이 난 다음에 치료하려면 늦는 것이니, 지금 어찌 이와 같이 되는 염려가 없겠는가? 소인이 진출하면 군자만 모함하는 것이 아니라 해독이 종묘사직에까지 미칠 수 있으니 매우 염려스런 일이다.

신용개 : 비록 지금이 성왕의 덕이 널리 퍼져있다고는 하지만, 소인이 없지 않을 것이요, 다만 술책을 부리지 못할 뿐이고,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반드시 발동할 것입니다.

조광조 : 직접 본 일로 말하건대, 연산군 때 조정에 드날린 사람들은 단지 공신이 되기만 숭상하여 아첨으로 일관했고, 행적은 비록 높지 못하지만 학문의 뜻이 높은 사람은 논박과 공격을 받아 용납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하나, 앞날에 소인이 틈을 타게 된다면, 군자가 씨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송나라 시절과 지금이 서로 흡사하니 군자와 소인의 진퇴에 있어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준 : 송나라의 경우 왕안석이 제거되자 정사가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원우(元祐:송나라 철종의 연호)의 군자들(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사마광․정이․소식 등의 학자를 말한다.)이 모두 물러나자 소인이 틈을 타고 들어와 다시 조정을 뒤집었습니다. 이를 볼 때, 조정의 사세를 당당히 하여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모름지기 군자를 진출시켜 등용하고 소인이 될 길을 방지하여 조정이 당당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소인은 뒤로 물러가서도 밤낮으로 군자를 해치고 조정에 화를 끼치려 온갖 교묘한 간계를 부리므로, 현혹되지 않는 사람이 드문 법입니다. 중등 이하의 사람들은 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혐의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소인의 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종 : 군자가 진출하면 소인이 물러나고 소인이 진출하면 군자가 물러나기에 사세가 서로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요, 비록 한때 군자와 소인을 알아 진퇴한다 하더라도, 소인은 항시 군자를 해치려고 하기 때문에 틈이 생기면, 군자는 씨가 남을 수 없고 사직은 반드시 위태해지는 것이다.

조광조 : 군자는 소인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소인은 반드시 임금과 대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엿 본 다음 틈을 노리니, 대신과 임금이 마음을 한가지로 협력하여 틈을 보이지 않으면 됩니다.

중종 : 소인은 진출하기 위해 여러 술책을 부리는데, 근래에는 대신과 임금이 화합해 있어 그 술책을 써먹지 못하기 때문에 화살을 쏜 것이다.[사헌부의 문 및 대궐문에 화살을 쏘았었다.]

기준 : 이로 보더라도 소인의 심술을 알 수 있습니다.

신용개 : 소인의 정상이란 끝까지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화살을 쏜 것은 곧 임금과 대신의 단단한 신뢰를 깨뜨리려는 소인의 짓이나, 사림 중에 소인이 있다면 진실로 두려운 일입니다.

 

인용문이 좀 길어졌지만 이 기사는 조선시대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어떻게 하면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퇴진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중종이 말한 범중엄․한기․부필․구양수는 모두 송나라 무렵의 신하로 당시 나라를 평안케 한 훌륭한 인재들이었다. 특히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범중엄은

“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는 명언을 남긴 인물로 유명한데, 주희(朱熹:송나라의 성리학자)는 그를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고황후는 다섯 번째 황제인 영종의 황후로 아들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였을 때 수렴청정을 하며, 사마광 같은 유능한 신하를 대거 등용해 태평성대를 이룬 여걸이다. 그래서 고황후가 수렴청정한 시절을 ‘원우(元祐)의 치세’라고 부르고, ‘원우의 군자들’은 사마광․정이․소식 등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학자와 문인들을 가리킨다.

인종은 송나라 네 번째 황제인데, 이 시기에 주돈이와 이정자 같은 유학자가 나오고 한기와 범중엄 그리고 구양수와 사마광 같은 명신들이 등장하여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평가받는다.

중종은 반정(反正:정도를 잃은 왕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던 일)으로 왕이 된 인물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진성대군으로 봉해져 살다가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박원종․성희안 등이 중심이 되어 반정을 일으키고 왕으로 추대된다. 스스로의 힘이 아닌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이 된 탓에 처음에는 이들 반정 공신들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왕권까지 우습게 보는 도를 넘어선 훈구파 공신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던 중종은 새로운 대안 세력을 모색하게 되니, 그것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었다.

조광조는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규정하고 훈구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왕권을 통한 왕도정치 실현을 추구하면서 중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여러 가지 급진적인 개혁을 펼쳐나가게 된다. 특히 조광조 등이 반정공신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자격을 박탈한 것은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위의 글에 등장하는 화살을 쏘아 투서를 했다는 말은 조광조를 탄핵하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 익명으로 투고된 일을 말한다. 조광조 덕분에 많은 벼슬아치들이 물러나 낙향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조광조와 임금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음해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을 잘 분별하여 소인이 조정에 발붙일 틈이 없게 해야 한다고 했던 중종도 결국에는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훈구파 공신들과 손을 잡고 조광조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백성들의 민심이 조광조를 향하고, 젊은 사림들은 왕권의 권위에 도전하며, 심지어 왕을 가르치려 드는데 반감을 가지고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을 통해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의 꿈도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왕도 잘못했으면 야단을 맞아야지요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3

<왕도 잘못했으면 야단을 맞아야지요.>

 

성종실록』성종 7년 병신 5월 11일의 이야기이다.

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 최한정(崔漢禎)과 장령 박효원(朴孝元)이, 황효원(黃孝源)이 첩(妾)으로 처(妻)를 삼은 죄를 논계(論啓:임금에게 신하의 잘못을 논박하여 보고함)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최한정 : 일전에 영응대군 부인의 집에 행차하신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효령대군(태종의 둘째 아들)은 종실의 원로이므로 대가(大駕:임금이 타는 수레)가 그 집에 가게 되면 이는 사실 백성들이 다 같이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구수영(영응대군의 사위)은 일개 신하에 불과한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몸소 가시어 보십니까?

성종 : 구수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조 때부터 대군의 부인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또 지나다가 들른 것이지 일부러 간 것은 아니다.

최한정 : 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입니다. 일개 부인을 보기 위하여 민가로 행차를 하심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행동은 사관이 반드시 기록을 하니,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세금을 운반하는 배를 보시려 할 때 이를 만류한 것은 왕의 거동은 경솔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현석규와 야대에 입시하였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옛 임금들은 자신의 허물을 듣기 싫어했으나, 나는 그렇지 않으니, 모두들 마음을 다하여 숨기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신은 그 하교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성종 : 내가 참으로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땅히 삼가겠다.

 

영응대군은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그는 세종이 38살, 소헌왕후가 40살에 낳은 막내아들로서 세종이 가장 예뻐한 아들이었다. 늘그막에 얻은 막둥이를 너무도 사랑한 세종은 왕실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영응대군에게 주었고, 영응대군의 집을 너무 화려하게 지어준 나머지 조정에서 논란이 불거질 정도였다. 세종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영응대군의 집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에 비해 며느리가 영 눈에 차질 않았다. 영응대군은 1444년 당시 11살의 나이로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을 했는데, 며느리 송씨는 궁궐의 엄격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방적인 성격의 여성이었던 듯 하다. 아마 세종의 눈에는 며느리가 발랄한 정도를 넘어서, 아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드세었던 것이 매우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

막내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세종은 아들을 강제로 이혼시켰고, 해주정씨 가문의 규수를 골라 서둘러 재혼을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송씨를 잊지 못한 영응대군이 아버지 몰래 전 부인을 만나러 다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딸을 둘이나 낳았다. 차마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헤어지기는 했지만, 영응대군에게 있어서 송씨는 첫사랑이자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결국 영응대군은 1453년(단종 1) 정씨 부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송씨 부인을 다시 맞이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봉작(封爵:작위를 봉해주는 일)한 사령장을 거두고, 송씨 부인을 대방부부인으로 봉작했다. 두 번 이혼한 경력은 영응대군이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영응대군의 졸기(卒記:사망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적은 기록)에는

“부왕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삼았다.”

라고 기록돼 있다.

송씨의 자유분방한 성격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논란을 남겼다. 송씨 부인은 영응대군이 죽은 후 양주의 범굴사를 원당(願堂:왕실의 명복을 빌던 사찰)으로 삼았고,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왕실과 사족 집안의 여성들을 불러 모아 대대적인 불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송씨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에서 기록되었다.

성종이 영응대군의 부인 집에 행차한 때는 1476년(성종 7)의 일로 이때는 이미 영응대군이 죽은 지 9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최한정은 왕이 경솔하게 민간인의 집에 행차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종친이라고는 하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응대군의 부인 집에 행차한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자신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최한정은 영응대군의 부인을 위해 행차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된 것이라고 다그쳐 꾸짖었다. 그러자 성종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왕의 잘못을 면전에서 꾸짖는 신하나,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개선을 약속하는 왕이나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친분이 있는 사적인 관계에서도 타인의 잘못을 질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절대 권력의 상징인 왕에게 그것도 눈앞에서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조선의 정치문화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왕도 잘못하면 야단을 맞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