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혹독한 신입관료의 신고식을 없애다


 

율곡이 혹독한 신입관료의 신고식을 없애다

 

경연일기(經筵日記)』1569년(선조 2) 9월의 기록이다.

사관(四館: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의 신진(新進:새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을 침학(侵虐)하는 풍습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이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교화를 없애는 폐습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처음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을 사관(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에서 신래(新來)라 지목하여 곤욕을 주고 괴롭히는데 하지 않는 짓이 없을 정도입니다. 대개 호걸의 선비는 과거 자체를 그리 대단히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갓을 부수고 옷을 찢기우며 흙탕물에 굴러 체통을 잃고 염치를 버린 뒤에야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부)에 오르게 된다면 호걸의 선비치고 누가 세상에 쓰이기를 원하겠습니까. 중국에서는 새로 과거한 사람을 접대하는 데 매우 예모(禮貌)를 지킨다 하는데 만일 이 소문을 듣게 되면 반드시 오랑캐 풍속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침학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느 때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이가 대답하기를,

“글에 전하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고려 말년에 과거가 공정하지 못하여 거기에 뽑힌 사람이 모두 귀한 집 자제로 입에 젖내나는 것들이 많았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이라 지목하고 분개해 하여 침욕(侵辱)하기 시작하였다 합니다.”

임금이

“이는 개혁하여야 할 일이다.” 하고 드디어 통절히 개혁하도록 명한 것이다.

 

우리는 가끔 매스컴을 통해 대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과도한 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고를 접하곤 한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대학 신입생 환영회처럼 혹독한 신고식 문화가 있었다. 신참례(新參禮)라는 것이 그것으로, 관직에 들어온 신입에게 가하는 집단 괴롭힘이었다. 신참례는 조선 건국 초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왔고, 너무 과한 탓에 종종 사회문제가 되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하였다. 조선의 신참들은 오늘날의 새내기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은 신참의 신고식 비용을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면신례를 해야 했고,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해야 했다. 심한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15세기의 학자 성현(成俔)이 편찬한 『용재총화』에도 이러한 신참례에 대한 기록들이 나온다. 관료의 비리를 감찰하여 탄핵하는 기관인 사헌부는 오늘날 검찰과 같은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 이른바 군기가 센 곳이었다. 사헌부에서는 새로 들어 온 사람을 신귀(新鬼)라 하여 여러 가지로 욕을 보였다. 방 가운데서 서까래만 한 긴 나무를 신참한테 들게끔 하는데, 이를 경홀(擎笏)이라 했다. 이 나무를 들지 못하면 신참은 선배에게 무릎을 내놓아야 했으며 선배가 먼저 주먹으로 무릎을 때리고 이어 윗사람부터 차례로 내려가며 때리도록 했다. 또 신참에게 물고기잡기 놀이를 하게 하는데, 신참이 연못에 들어가 사모(紗帽: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로 물을 퍼내서 의복이 모두 더럽혀지게 했다. 또한 거미 잡는 놀이라 하여 손으로 부엌 벽을 문질러 두 손이 옻칠을 한 것처럼 까맣게 되면 물에 손을 씻게 한 뒤 그 물을 마시라고 하니 그 물을 먹고 토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밖에도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하는 ‘삼천삼백’, 관련 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되 바로 읽어내리는 ‘순함(順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하는 ‘역함(逆銜)’,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오물을 칠하게 하는 등 신참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하였다. 겨울에는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볕을 쬐게 하는 육체적 가학은 물론이요,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까지 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신래들을 침학하고 괴롭히는 습속이 워낙 다양해서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러한 신참례의 폐단을 막고자 조선시대의 헌법인 『경국대전』은 ‘신래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자는 장(杖) 60대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암암리에 관습화돼 이어진 신참례의 습속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율곡 이이는 이러한 풍속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율곡은 ‘구도장원공’이라고 일컬어지듯이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행실도 모범적인 반듯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신참례라는 명목으로 신참을 괴롭히는 선배들의 생리가 누구보다도 싫었을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소속된 후 선배들에게 공손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율곡은 신참례가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고 생각하였고, 위의 『석담일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신참례 혁파를 건의하여 마침내 성사시키게 되었다. 율곡은 신참례의 폐단을 지적한 뒤 선조가 신참례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묻자, 고려후기 권문세족의 자제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관직을 차지하자 이들의 버릇을 고쳐주고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원래의 신참례는 부정한 권력으로 관직에 오른 함량 미달의 인물들에게 국가의 관직은 함부로 차지할 수 없다는 점을 은연중 알려주고자 시도되었지만, 율곡이 살던 시대에는 그 애초의 취지는 잊힌 채 그저 하급자를 괴롭히는 수단으로 전락하여 사회 문제화 되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율곡의 입장에서 이러한 풍습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습이었기 때문에 이의 혁파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