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10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1518) 7월 27일의 일이다.

강에 나아갔다.

중종 : 하․은․주나라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인데, 후세에는 구독(口讀:소리내어 읽음)만 할 뿐이니 인륜을 밝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학문을 하되 인륜을 밝히는 것을 알면 이것이 실학이다.

조광조 : 무릇 교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둘러 하려면 절대 이루지 못합니다. 이른바 인륜이나 대강령은 오륜(五倫:다섯 가지의 지켜야 할 도리)에 근거하나 이외에도 많은 이치가 있으니, 이를 중심으로 위아래가 힘써 행하면 어찌 다스려지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조정이 바루어지고 백성은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은 이로써 다스리고 스승은 이로써 가르치는 것이 옛날의 도(道)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람마다 거듭 일러 친절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감화되고 훈도(薰陶:학문이나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함)되어 점차 젖어 들어가 선함을 따르게 되는 것이니, 이는 가르치는 것이나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전에는 『소학』을 괴이하고 허황된 학문이라 하여 읽지 않았는데, 근일에 신이 성균관에 돌아가서 보니, 입학하는 사람은 다 『소학』을 끼고 있었으며 읽는 자가 또한 많아서 전에 괴이하고 허황되다는 것이 지금은 상례(常例)로 여기고 있고, 오히려 읽지 않는 자를 부형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근원을 캐보면 위에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바르게 보이셨으므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다 선하니 어찌 교화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자사(子思:노나라의 유학자. 공자의 손자)가 『중용』에 ‘공경을 돈독히 하매 천하가 평안히 다스려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천하의 일은 만 가지이나 홀로 ‘공경을 돈독히 함’을 천하를 담당하는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대개 마음이 방일(放逸: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노는 것)하지 않으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고, 마음이 한번 방일하면 만 가지 이치가 허물어지는데, 하물며 천하가 평안히 다스려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문제는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제기해 온 질문이다. 특히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하는 질문과 논쟁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철학, 정치,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에게도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하는 문제는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였다. 맹자는 인간은 원래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그에 맞서 인간은 근본이 악하다는 성악설을 주장했다. 고대 서양에서는 인간의 본성 자체에는 나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으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은 원초적인 죄악을 가진 악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힘을 얻었다.

정통 유가(儒家)에서 성선설을 논리적으로 주창한 최초의 인물은 맹자였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가 우물에 막 빠지려는 순간, 깜짝 놀라 달려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 마음은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아기를 구해서 그 부모와 교분을 트거나 보상을 받겠다는 계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그런 자발적인 도덕성이 갖추어져 있어서 저절로 드러날 뿐이다. 맹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람 또한 본래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내재된 그러한 도덕적 마음이 ‘사단(四端)’, 곧 ‘네 가지 도덕의 단서’이다. 가엾고 애처로워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거짓을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내주는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선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투고 빼앗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남을 해치는 마음이 생겨나고, 충성과 믿음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선이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위적인 교육과 교화로서만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교육이라는 인위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 제도에 따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교정․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굽은 나무는 반드시 굽은 것을 바로잡는 도구를 사용하고 수증기로 쪄서 바로잡은 다음에 곧게 된다. 또 무딘 연장은 반드시 연마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에 날카로워진다. 같은 이치로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은 반드시 스승을 본받은 다음에 바르게 되고, 예의를 얻은 후에 다스려지는 것이다. 옛 성왕(聖王)들은 인간의 악한 본성으로 그 행동이 올바르지 않고 세상이 어지러워져 다스려지지 않게 되자, 예의(禮儀)를 일으켜 세우고 제도를 만들어 인간의 성정(性情)을 바로잡고 교화시켰다. 이에 비로소 인간 세상은 다스려지고 또한 도리와 이치에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량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신봉했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선하니 어찌 교화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라는 조광조의 말처럼,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착하게 태어나며, 제대로 된 도덕과 품성 교육을 받는다면 악하게 자랄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