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에서 관료의 적격 여부를 논하다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6

<경연에서 관료의 적격 여부를 논하다>

 

성종실록』성종 9년 무술 10월 7일의 이야기다.

을 마쳤다.

허침 : 창원군(昌原君:세조의 둘째 아들)은 죄를 범한 것이 가볍지 아니한데, 한 해가 안 되어 갑자기 벼슬을 돌려주었습니다. 또 임사홍은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해서 먼 지방에 귀양 보냈는데, 겨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소환하였습니다. 아마도 국가의 법이 이로부터 허물어질 듯합니다.

성종 : 임사홍이 벌써 돌아왔는가?

김승경 : 임사홍이 서울에 들어온 지 벌써 사흘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종 : 공주의 병이 나은 뒤에 배소(配所:귀양지)로 돌려보내겠다.

허침 : 이조는 인물이 적격자인가를 심사하고 백관을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게 하는 곳이므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하루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박중선을 판서로 삼았습니다. 박중선이 무신이라서 그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성종 : 문신으로서 비록 경적(經籍:경전의 서적)을 밝게 통달한 자일지라도 일을 처리하는 데는 간혹 잘못 조처하는 수도 있고, 무신이라 하더라도 일을 잘 처리하는 자가 있다. 하나만 가지 논할 수는 없다. 박중선은 어떠한 사람인가?

윤필상 : 박중선은 세조조에 여러 번 좋은 벼슬을 역임하여 병조판서까지 되었는데, 지금 이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이승소 : 박중선이 비록 무신일지라도 글을 알고 사리에 통달하였습니다. 다만 일을 처리하고 판단하는 데 능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시험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종 : 박중선은 참으로 바꿀 수 없다.

허침 : 참판 신정은 비록 자질이 명민하나, 역시 물망(物望:여론)에 맞지 않은 자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찌 인물을 전형하는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신은 인물의 전형과 선발이 정밀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성종 : 참판이 물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허침 : 여론이 모두 청렴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성종 : 이조는 중대한 곳인데, 그 사람됨이 이와 같다면 그 벼슬에 둘 수 없다. 저마다 아는 것을 말하라.

윤필상 : 신정은 일찍이 도승지가 되었으니, 그 사람됨을 성상께서 자세히 알고 계실 터입니다. 그가 청렴하지 않은지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승소 : 신정이 청렴하지 못하다는 말은 신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듣건대, 신정은 사는 것이 넉넉하다고 합니다. 대개 부(富)란 원망의 대상이므로 여론이 이와 같습니다.

안침 :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질다고 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 신정이 청렴하지 못한지는 신이 자세히 알지 못하나, 여론이 이와 같으면 전형의 지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안윤손 : 신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나, 여론은 참으로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으 말과 같습니다.

성종 : 신정이 도승지로 있을 때 잘못한 일이 없었고, 이제 참판이 되어서도 잘못이 없으며, 또 무슨 일이 청렴하지 못하다고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근거 없는 말만 가지고 갑자기 벼슬을 바꾸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허침 : 유양춘은 행실이 경박한 사람이라서 참으로 조정의 벼슬에 서용할 수 없는 사람인데, 지금 군자감(軍資監: 군사상에 필요한 물자를 관장하는 기관) 주부로서 승문원(承文院:외교문서를 맡아보던 기관) 교리에 올랐습니다. 온당치 못합니다.

성종 : 자기 의견을 말하라.

윤필상 : 유양춘이 예문록(藝文錄:예문관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 그 후보자의 성명을 적은 기록)에 참여하여 뽑혔으니, 만약 이문(吏文:공문서에 쓰던 특수한 양식의 이두문체 또는 용어)과 한훈(漢訓:중국어)에 정통하다면 쓰더라도 괜찮습니다.

이승소 : 그러합니다.

성종 : 승문원의 소임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양춘이 이문에 정통하다면 쓰더라도 무방하나, 정통하지 못하다면 쓸 수 없다. 이문에 정통한지 여부를 이조에 물어보도록 하라.

 

조선시대의 관료 임명 절차를 보면 문․무관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와 병조에서 각 판서 이하 책임자들이 모여서 적격자 3인씩을 후보자로 선발하여 그 성명을 일일이 기록하여 왕에게 주문하도록 하는 비삼망제도(備三望制度: 한 사람의 벼슬아치를 뽑을 때에 세 사람의 후보자의 이름을 갖추어 천거하던 일)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면 국왕은 세 명의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점을 찍어 최종 결정을 내리는 낙점(落點)을 거쳐 조보(朝報:오늘의 관보나 신문)에 공표함으로써 인사조치가 행해진다.

그리고 그 후 서경(署經:국왕이 관료를 임명하면 대간에서 심사해 동의하거나 거부하는 제도)을 거쳐야 비로소 관료로 정식 임명되었다. 이처럼 엄격한 절차를 거쳐 임명된 관료라도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경연에서 관직에 선발된 관료의 적격성 여부를 논의해서 교체하기도 하였다.

이날 경연에서 맨 처음 언급된 창원군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서 종친이라는 신분을 믿고 제멋대로 불법을 자행했는데, 성격이 오만무례하고 포악하였다. 지방에 가서는 수령들을 능욕하고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으며, 심지어 여종을 죽이고 암매장한 죄로 국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원군이 종친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면해주고 먼 곳으로 부처(付處:어느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충청도 진천에 유배하기로 결정했으나, 세조의 소생으로는 창원군 형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정희대비(세조의 비)가 간청하여 며칠 만에 먼 곳으로 부처한다는 판결마저 철회했다. 그 뒤로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판결 철회가 부당하다며 몇 차례 상소했으나, 성종은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임사홍은 효령대군(孝寧大君:태종의 둘째 아들)의 아들인 보성군의 사위이고, 그의 두 아들 또한 예종의 딸 현숙공주와 성종의 딸 휘숙옹주에게 장가들어서 왕실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1478년(성종 9) 4월에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친아버지처럼 그를 의지하던 공주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나왔는데, 이 기사에서는 임사홍이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지 사흘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경연에서 성종이 공주의 병을 운운한 것은, 현숙공주가 아버지 예종을 여윈 뒤 시아버지 임사홍을 친아버지처럼 따랐는데, 그가 유배 간 뒤 그리워하여 거의 병이 날 지경이 되었던 것을 말한다.

위의 경연 기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의 친․인척을 포함한 권력자나 관료들의 비리는 국가의 기강을 흐트러뜨리고 사회의 불평등과 부정의 근원이 됨을 알 수 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공정하게 선발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과 끝임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