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의 문제아, 연산군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9

<경연의 문제아, 연산군>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병진(1496) 1월 2일의 기록이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내일에 경연에 나가려고 했었는데 몸이 편치 않아 나기지 못하겠으니, 그대들이 내가 병이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부끄럽다.”

 

다시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병진(1496) 11월 22일의 기록이다.

어서(御書:임금이 쓴 글이나 서신)를 내리기를,

“경 등은 경연을 정지한다고 하여 나를 게으르다고 하지 말라. 나는 약한 몸으로써 갑자기 대우(大憂:부모의 상)을 만나 어찌 할 바를 몰랐었는데, 이른 봄 제사를 드리다가 심한 감기에 걸린 이후 잠시만 수고로워도 다시 발병하여 지금까지 낫지 않아서,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만약 차도만 있으면 경연에 나가려 한다.”

 

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병진(1496) 11월 23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시를 지어 내리기를,
기침과 열이 자주 있고 피곤한 기분이 계속되어
이리저리 뒤치며 밤새껏 잠을 못 이루네.
간하는 대간들 종묘사직 중함은 생각하지 않고
소장을 올릴 때마다 경연에만 나오라네.
하고, 전교하기를,
“감히 시를 짓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표시하는 것뿐이다. 숙직하는 승지는 이것을 보라.” 하였다.

 

또 『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정사(1497) 3월 11일의 기록이다.

부제학 이승건 등이 아뢰었다.
:어제 신 등이 아뢴 것을 전하께서 의당 깊이 생각해야 하옵니다. 경연은 왕자(王者)의 중한 일이므로 정지하거나 폐지하여서는 안 됩니다.“

어서(御書)로 답하기를,
“안질이 간혹 안개가 앞을 가리는 것 같다. 연회에서는 앉아서 먹을 뿐이니, 글을 보는 일과는 다르다. 눈이 좀 나으면 어찌 제왕의 일을 싫어하겠느냐.”

 

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갑자(1504) 8월 15일의 기록이다.

유순 등에게 전교하기를,

“나의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비록 경연에 나가더라도 어찌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나는 조회 받는 등의 일은 반드시 해야 하나, 경연에는 반드시 나가야 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

유순 등이 아뢰기를,

“경연은 좋은 일이므로 인군은 마땅히 나가야 하나, 어찌 반드시 구애될 것이야 있겠습니까? 성상의 옥체를 헤아려 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선시대 폭군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연산군은 경연에서도 문제아였다. 아버지 성종이 하루 세 번의 경연과 야대까지 성실하게 수행한 것과는 달리, 아들인 연산군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세자 시절에도 서연(書筵:왕세자의 교육제도)에 충실하지 않았고, 왕이 된 후에는 경연 역시 소홀했을 뿐만이 아니라 아예 경연을 완전히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 초부터 경연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 초기 실록에는 자주 경연을 걸러서 오랫동안 쉬었으니 다시 경연에 참석하라고 주청하는 신하들과 옥신각신하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띈다. ‘몸이 편치 않아 나가지 못하겠다.’, ‘약을 먹고 있어서 못나간다.’, ‘몸살 감기가 심하다.’ 등 핑계의 종류도 다양했다. 심지어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경연에 못 나가는 이유를 담은 시를 지어 보여주기도 하였다.

즉위한 지 3년이 넘어가면서는 연산군의 핑계가 점차 달라졌다.

“내가 요즘 눈병이 있어서 경연에 못 나간다.”

그러나 성대한 연회나 잔치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눈이 아파 경연에 못 나오신다면서, 어찌 잔치에는 가십니까?”

신하들이 연산군에게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연회에서는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을 뿐이니, 글을 보는 일과는 다르지 않느냐?”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주 빠지기는 했지만,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경연에 참석하곤 하였던 연산군은 1498년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무수한 신하와 선비를 죽이고 귀양을 보냈다. 바른 말을 하는 신하는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제 그 누구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 군주가 된 것이다.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해도 어느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그저 왕이 시키는 대로 ‘지당하십니다.’라고만 할 뿐이었다.

이제 연산군은 더 이상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댈 필요도 없었다. 어느 신하도 경연에 나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504년 8월 15일, 연산군은

“나의 학문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비록 경연에 나가더라도 어찌 더 배울 것이 있겠는가?”

라면서 경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아무리 학문이 높은 왕이라도 자기 스스로 ‘이미 학문이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라는 말은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미 폭군이 된 연산군에게 목숨을 걸고 바른 소리를 할 신하는 더 이상 없었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경연마저 없애버린 연산군은 비위나 맞추는 간신과 함께 국사는 내팽개치고,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았다. 그러다 1506년 9월, 박원종과 성희안 등이 주동이 된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자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쓸쓸히 죽었다. 학문을 게을리 하고 쾌락만 쫓던 왕의 최후는 참으로 쓸쓸하고 비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