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잘못했으면 야단을 맞아야지요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3

<왕도 잘못했으면 야단을 맞아야지요.>

 

성종실록』성종 7년 병신 5월 11일의 이야기이다.

연에 나아갔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대사간 최한정(崔漢禎)과 장령 박효원(朴孝元)이, 황효원(黃孝源)이 첩(妾)으로 처(妻)를 삼은 죄를 논계(論啓:임금에게 신하의 잘못을 논박하여 보고함)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최한정 : 일전에 영응대군 부인의 집에 행차하신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효령대군(태종의 둘째 아들)은 종실의 원로이므로 대가(大駕:임금이 타는 수레)가 그 집에 가게 되면 이는 사실 백성들이 다 같이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구수영(영응대군의 사위)은 일개 신하에 불과한데 어찌하여 전하께서 몸소 가시어 보십니까?

성종 : 구수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조 때부터 대군의 부인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또 지나다가 들른 것이지 일부러 간 것은 아니다.

최한정 : 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입니다. 일개 부인을 보기 위하여 민가로 행차를 하심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행동은 사관이 반드시 기록을 하니, 경솔하게 움직이면 안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세금을 운반하는 배를 보시려 할 때 이를 만류한 것은 왕의 거동은 경솔하면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현석규와 야대에 입시하였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옛 임금들은 자신의 허물을 듣기 싫어했으나, 나는 그렇지 않으니, 모두들 마음을 다하여 숨기지 말라.’ 라고 하셨는데, 신은 그 하교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성종 : 내가 참으로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땅히 삼가겠다.

 

영응대군은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그는 세종이 38살, 소헌왕후가 40살에 낳은 막내아들로서 세종이 가장 예뻐한 아들이었다. 늘그막에 얻은 막둥이를 너무도 사랑한 세종은 왕실의 진귀한 보물을 모두 영응대군에게 주었고, 영응대군의 집을 너무 화려하게 지어준 나머지 조정에서 논란이 불거질 정도였다. 세종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영응대군의 집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에 비해 며느리가 영 눈에 차질 않았다. 영응대군은 1444년 당시 11살의 나이로 여산송씨 가문의 규수와 혼인을 했는데, 며느리 송씨는 궁궐의 엄격한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방적인 성격의 여성이었던 듯 하다. 아마 세종의 눈에는 며느리가 발랄한 정도를 넘어서, 아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드세었던 것이 매우 거슬렸던 것으로 보인다.

막내며느리가 탐탁지 않았던 세종은 아들을 강제로 이혼시켰고, 해주정씨 가문의 규수를 골라 서둘러 재혼을 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송씨를 잊지 못한 영응대군이 아버지 몰래 전 부인을 만나러 다닌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딸을 둘이나 낳았다. 차마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헤어지기는 했지만, 영응대군에게 있어서 송씨는 첫사랑이자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결국 영응대군은 1453년(단종 1) 정씨 부인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송씨 부인을 다시 맞이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춘성부부인 정씨에게 봉작(封爵:작위를 봉해주는 일)한 사령장을 거두고, 송씨 부인을 대방부부인으로 봉작했다. 두 번 이혼한 경력은 영응대군이 죽을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영응대군의 졸기(卒記:사망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적은 기록)에는

“부왕의 명령 때문에 송씨를 버렸고, 정씨는 버릴 만한 죄가 없는데도 사랑과 미움으로 내쫓고 받아들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삼았다.”

라고 기록돼 있다.

송씨의 자유분방한 성격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논란을 남겼다. 송씨 부인은 영응대군이 죽은 후 양주의 범굴사를 원당(願堂:왕실의 명복을 빌던 사찰)으로 삼았고,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왕실과 사족 집안의 여성들을 불러 모아 대대적인 불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송씨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에서 기록되었다.

성종이 영응대군의 부인 집에 행차한 때는 1476년(성종 7)의 일로 이때는 이미 영응대군이 죽은 지 9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최한정은 왕이 경솔하게 민간인의 집에 행차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종친이라고는 하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영응대군의 부인 집에 행차한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자신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최한정은 영응대군의 부인을 위해 행차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된 것이라고 다그쳐 꾸짖었다. 그러자 성종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 삼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왕의 잘못을 면전에서 꾸짖는 신하나,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개선을 약속하는 왕이나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친분이 있는 사적인 관계에서도 타인의 잘못을 질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절대 권력의 상징인 왕에게 그것도 눈앞에서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조선의 정치문화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왕도 잘못하면 야단을 맞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