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인재를 대하는 법을 말하다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8

<왕이 인재를 대하는 법을 말하다>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 5월 20일의 일이다.

 

강에 나아갔다.

조광조 : 송나라의 건국공신인 조보(趙普)가 어떤 사람을 어떤 벼슬에 천거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허락하지 않자 다시 천거했고, 태조는 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조보가 다시 천거하자 태조는 크게 노하여 천거장을 찢었습니다. 조보는 안색을 평안히 유지하면서 찢어진 서찰을 주워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조보는 찢어진 천거장을 맞추어 꿰맨 후 이를 태조에게 보였습니다. 그제야 태조는 깨닫고 조보의 천거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또 조보는 태조가 싫어하는 사람의 벼슬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태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궁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조보는 궁실 문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굳세고 과단성 있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에 굳세고 간절하게 간하는 일은 아랫사람이 할 일이지 대신은 그리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신 역시 나랏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니, 조보가 간절히 간한 것과 궁실 문을 떠나지 않고 서 있었던 것과 같이 해야 대신의 체면이 바로 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대신은 큰일에만 관계할 뿐이어서, 대간이 하는 일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옳고 바른 일이라면 대신이 먼저 나서 굳세고 간절하게 간해야 합니다. 또한 임금의 과실은 대신이 먼저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신이 듣건대 세종 시절 황희나 허조 같은 이는 세종께서 작은 잘못이 있어도 대간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빈청으로 가서 직접 논계(論啓:신하가 임금에게 잘못을 논박하여 보고함)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고 계속 앉아 있다가 기어이 윤허를 얻고서야 물러갔다고 합니다. 또한 집을 돌아간 뒤에도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잠도 제대로 못자며 국사를 잊어본 일이 없다 하니, 대신이란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나라 태조는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조보에게 맡겼고, 조보 역시 천하의 모든 일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습니다. 기왕에 재상 자리를 두었다면 재상에게 모든 일을 전적으로 맡겨야 대신이 그의 포부를 행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우(賢愚:현명함과 어리석음)를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맡기기만 한다면 이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북송(北宋:960~1126)의 명재상이었던 조보는 시골 아전 출신이었다. 어릴 때는 건달로 지냈고, 철이 들어서는 전쟁터를 전전했기 때문에 배움이 짧았다. 북송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고 관직에 오른 뒤 열심히 읽은 책은 『논어』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정적들은

“고작 논어 한 권 읽은 무식한 사람이 재상을 너무 오래한다.”

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조보는 태종에게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 읽은 책은 논어 한 권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반으로 태조께서 천하를 도모하는 데 도움을 드렸고, 나머지 반으로 폐하(태종)께서 태평성대를 여시는 데 기여했습니다.”

후대에 이 말이 와전돼 조보가 ‘반쪽의 논어로 천하를 다스렸다.’는 ‘반부논어(半部論語)’란 고사성어가 생겼다.

조광조는 조보와 황희를 예로 들면서, 대신은 국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소신 있게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밝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말로 하기에 이보다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관직을 박탈당하고 목숨마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소신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을 해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충신이자 인재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