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에서 임금의 길을 묻다


 

자연재해에서 임금의 길을 묻다

 

중종실록』중종 13년 무인(1518) 5월 15일의 일이다.

시(酉時)에 세 차례 크게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뢰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중종 : “오늘의 변괴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내가 사람을 쓰는 데 항상 잘못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친정(親政)이 끝나자 곧 변이 일어났고 또 오늘의 친정은 보통 때의 친정과는 다른데도 재변이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더욱 두려운 것이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처음과 같이 지진이 크게 일어나 전우(殿宇)가 흔들렸다. 상이 앉아 있는 용상은 마치 사람의 손으로 밀고 당기는 것처럼 흔들렸다. 첫 번부터 이때까지 무릇 세 차례 지진이 있었는데 그 여세가 그대로 남아 있다가 한참 만에야 가라앉았다. 이때 부름을 받은 대신들의 집이 먼 사람도 있고 가까운 사람도 있어서, 도착하는 시각이 각각 선후(先後)가 있었으나 오는 대로 곧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광필 : “지진은 전에도 있었지마는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재직하여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홍문관 저작 이충건(李忠楗) : “근래에 재변이 계속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진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어찌 오늘날같이 심한 것이야 있었겠습니까? 조정 정사(朝廷政事)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利害)·질병(疾病) 등을 진실로 강구해야 합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고 천한 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기강이 설 수 있을 것 같으면서 끝내 서지 못하는 것은, 하민(下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대신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재행(才行)이 쓸 만한 자를 취인(取人)하는 일에 대해 조정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상께서도 성명(成命)이 계셨습니다.

대신이 진실로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 시행할 수 없는 까닭을 변명해야 할 것이요, 부득이 시행해야 할 것이라면 마땅히 속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끌면서 좀처럼 봉행할 뜻이 없으니, 상께서 명이 계신데도 대신이 이럴진대 하물며 그 아랫사람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기강이 서지 않은 것은 대신이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지진에 대한 기록은 매우 많다. 문헌 기록 가운데 지진에 관해 체계적인 내용을 담은 최초의 책은 『삼국사기』이다. 서기 2년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있었던 지진을 시작으로 모두 107건의 지진을 기록하고 있는데, 1년 평균 0.1회 정도 발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지진 기록은 매우 간단하고, 발생 건수 또한 비교적 적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신라의 경주, 백제의 위례성과 부여, 고구려의 국내성과 평양 등 삼국의 수도에서 일어난 지진만 기록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고려시대의 지진에 관한 기록은 조선전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나 있다. 475년간 194건의 지진이 기록되어 있어서 1년 평균 0.4회 정도 일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와 달리 수도에만 국한하지 않고 보다 체계적으로 지진을 관측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1863년(철종 15)까지 472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지진 건수는 무려 1,967건에 이른다. 대략 1년에 네 번꼴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보다 빈도가 훨씬 높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지진 발생이 증가했다기보다는 지진에 대한 관측이 정밀해지고, 보고 체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 천문 현상과 지진을 관측하는 관상감이라는 관청을 두었고, 관상감에서는 천재지변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여 『관상감일기』를 남겼다.

위의 중종실록 기록은 1518년 5월 15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세 차례 큰 지진이 일어나 담장과 성첩이 무너졌으며, 임금이 정사를 보는 전각의 지붕이 요동치고 용상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지진의 발생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해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그 원인을 정치에서 찾으려 하였다. 동양의 재이관(災異觀)에서는 세상의 현상을 천도(天道)의 실현이라 보았다. 임금의 책무는 하늘의 이치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자연재해의 발생은 하늘의 이치를 구현하는 임금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며, 이 경우 왕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실천방법으로 음식 가지 수 줄이기, 정전(正殿) 피하기, 죄수 풀어 주기 등이다.

또한 궁궐 내의 궁녀의 원한이 하늘에 미친 것이라 생각하여 궁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하들에게 국정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자연재해는 왕을 하늘의 대리자로 인정하는 조건이며, 반대로 신하들이 왕에게 정치적 조언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는 1574년 정월 초하룻날의 『선조실록』의 기사에는

“재변(災變)으로 인해 임금께서 정전(正殿)을 피하고, 고기반찬을 물리치고 음악을 듣지 않았다.”

고 기록하였다. 날이 가물고,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가 하면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자연재해와 변고가 잇닿자 선조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선조가 신하들에게 어려운 시국을 타개할 계책을 구한다는 교지를 내리자, 율곡은 11,6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이 글이 ‘1만자로 이루어진 상소문’이라는 뜻을 담은 「만언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