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와 소인은 어떻게 구별할까


경연, 왕의 공부 이야기 4

<군자와 소인은 어떻게 구별할까>

 

중종실록』중종 14년 기묘 5월 11일의 기록이다.

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글에 임하여 말하였다.

중종 : 군자와 소인은 마땅히 분별해서 쓰거나 퇴진시켜야 한다. 범중엄(范仲淹:송나라의 학자․개혁자), 한기(韓琦:송나라의 정치가), 부필(富弼:송나라의 재상), 구양수(歐陽脩:송나라의 정치가․문인) 등이 모두 조정에 등용될 때에는 임용할 만한 현명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어찌 초야에 버려진 현명한 사람이 없겠는가? 대신들은 마땅히 그들을 찾아 추천하여 등용되게 해야 한다.

조광조 : 예로부터 올바른 사람은 적고 사특한 사람은 많습니다. 왕안석(王安石:송나라의 개혁정치가)이 권세를 부리던 때의 일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송나라 선인 고황후와 인종 시절에는 소인배를 모두 내쳤기에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만, 사사로이 서로 비난하는 자들은 여전히 많았습니다. 지금은 과연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마는, 같은 조정의 신하들끼리 어찌 서로 용납되지 않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대신들이 이를 경계하여 서로 권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마는,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어찌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근심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 기회에 성상께서나 대신들이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군자가 조정에 들어오고 소인은 손을 쓰지 못하도록 한다면, 나타나지 않은 악이 자연히 소멸되어 선으로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중종 : 훌륭한 의원은 환자를 볼 때, 병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치료하는 것이 아니요, 병이 난 다음에 치료하려면 늦는 것이니, 지금 어찌 이와 같이 되는 염려가 없겠는가? 소인이 진출하면 군자만 모함하는 것이 아니라 해독이 종묘사직에까지 미칠 수 있으니 매우 염려스런 일이다.

신용개 : 비록 지금이 성왕의 덕이 널리 퍼져있다고는 하지만, 소인이 없지 않을 것이요, 다만 술책을 부리지 못할 뿐이고,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때가 되면 그들은 반드시 발동할 것입니다.

조광조 : 직접 본 일로 말하건대, 연산군 때 조정에 드날린 사람들은 단지 공신이 되기만 숭상하여 아첨으로 일관했고, 행적은 비록 높지 못하지만 학문의 뜻이 높은 사람은 논박과 공격을 받아 용납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하나, 앞날에 소인이 틈을 타게 된다면, 군자가 씨도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송나라 시절과 지금이 서로 흡사하니 군자와 소인의 진퇴에 있어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기준 : 송나라의 경우 왕안석이 제거되자 정사가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원우(元祐:송나라 철종의 연호)의 군자들(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사마광․정이․소식 등의 학자를 말한다.)이 모두 물러나자 소인이 틈을 타고 들어와 다시 조정을 뒤집었습니다. 이를 볼 때, 조정의 사세를 당당히 하여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소인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모름지기 군자를 진출시켜 등용하고 소인이 될 길을 방지하여 조정이 당당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소인은 뒤로 물러가서도 밤낮으로 군자를 해치고 조정에 화를 끼치려 온갖 교묘한 간계를 부리므로, 현혹되지 않는 사람이 드문 법입니다. 중등 이하의 사람들은 사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혐의하는 마음이 생기므로 소인의 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중종 : 군자가 진출하면 소인이 물러나고 소인이 진출하면 군자가 물러나기에 사세가 서로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요, 비록 한때 군자와 소인을 알아 진퇴한다 하더라도, 소인은 항시 군자를 해치려고 하기 때문에 틈이 생기면, 군자는 씨가 남을 수 없고 사직은 반드시 위태해지는 것이다.

조광조 : 군자는 소인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일을 도모할 수 없는 것뿐입니다. 소인은 반드시 임금과 대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엿 본 다음 틈을 노리니, 대신과 임금이 마음을 한가지로 협력하여 틈을 보이지 않으면 됩니다.

중종 : 소인은 진출하기 위해 여러 술책을 부리는데, 근래에는 대신과 임금이 화합해 있어 그 술책을 써먹지 못하기 때문에 화살을 쏜 것이다.[사헌부의 문 및 대궐문에 화살을 쏘았었다.]

기준 : 이로 보더라도 소인의 심술을 알 수 있습니다.

신용개 : 소인의 정상이란 끝까지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화살을 쏜 것은 곧 임금과 대신의 단단한 신뢰를 깨뜨리려는 소인의 짓이나, 사림 중에 소인이 있다면 진실로 두려운 일입니다.

 

인용문이 좀 길어졌지만 이 기사는 조선시대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어떻게 하면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퇴진시킬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중종이 말한 범중엄․한기․부필․구양수는 모두 송나라 무렵의 신하로 당시 나라를 평안케 한 훌륭한 인재들이었다. 특히 명재상으로 평가받는 범중엄은

“천하의 근심에 앞서 걱정하고,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

는 명언을 남긴 인물로 유명한데, 주희(朱熹:송나라의 성리학자)는 그를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고황후는 다섯 번째 황제인 영종의 황후로 아들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였을 때 수렴청정을 하며, 사마광 같은 유능한 신하를 대거 등용해 태평성대를 이룬 여걸이다. 그래서 고황후가 수렴청정한 시절을 ‘원우(元祐)의 치세’라고 부르고, ‘원우의 군자들’은 사마광․정이․소식 등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한 학자와 문인들을 가리킨다.

인종은 송나라 네 번째 황제인데, 이 시기에 주돈이와 이정자 같은 유학자가 나오고 한기와 범중엄 그리고 구양수와 사마광 같은 명신들이 등장하여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평가받는다.

중종은 반정(反正:정도를 잃은 왕을 몰아내고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던 일)으로 왕이 된 인물이다. 성종의 둘째 아들로 진성대군으로 봉해져 살다가 연산군의 폭정이 심해지자, 박원종․성희안 등이 중심이 되어 반정을 일으키고 왕으로 추대된다. 스스로의 힘이 아닌 신하들의 도움으로 왕이 된 탓에 처음에는 이들 반정 공신들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왕권까지 우습게 보는 도를 넘어선 훈구파 공신들의 월권행위에 제동을 걸 필요성을 느꼈던 중종은 새로운 대안 세력을 모색하게 되니, 그것이 조광조 등 젊은 선비들이었다.

조광조는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규정하고 훈구세력으로부터 독립된 왕권을 통한 왕도정치 실현을 추구하면서 중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여러 가지 급진적인 개혁을 펼쳐나가게 된다. 특히 조광조 등이 반정공신 가운데는 공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하자고 건의하여 마침내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자격을 박탈한 것은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위의 글에 등장하는 화살을 쏘아 투서를 했다는 말은 조광조를 탄핵하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 익명으로 투고된 일을 말한다. 조광조 덕분에 많은 벼슬아치들이 물러나 낙향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조광조와 임금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음해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을 잘 분별하여 소인이 조정에 발붙일 틈이 없게 해야 한다고 했던 중종도 결국에는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훈구파 공신들과 손을 잡고 조광조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백성들의 민심이 조광조를 향하고, 젊은 사림들은 왕권의 권위에 도전하며, 심지어 왕을 가르치려 드는데 반감을 가지고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을 통해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의 꿈도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