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은 왜 문묘에서 쫓겨날 뻔했을까


율곡은 왜 문묘에서 쫓겨날 뻔했을까

 

선왕조는 공자를 받드는 유교의 나라이자 지식인의 나라였다. 건국 이듬해에 문묘(文廟), 즉 공자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그 6년 뒤에는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열어 유생을 길러 냈다. 지금의 성균관대 명륜동 캠퍼스 안에 있는 성균관 대성전(사적 143호)이 조선의 문묘다.

원래 문묘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에선 유학과 주자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인(賢人)들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이 때문에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조선 모든 유학자들이 한번쯤 꿈꿔봤을 소원이 되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자신의 학문과 삶이 완벽히 유학적이었으며, 또한 이후 여러 후학들의 모범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묘 종사란 유학적 삶의 가장 화려한 종착점이기도 했을 것이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었기 때문에 문묘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나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조선시대에 문묘종사가 도학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 그 명분 뒤에 숨겨진 실리는 단순히 도학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문묘에 종사되는 일은 학문이나 도학의 문제를 넘어 정치의 문제였고, 권력의 문제였다.

1575년(선조 8) 동서분당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였다. 처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던 것이 동인에서 남인․북인으로, 서인에서 노론․소론으로 나뉘어졌다. 특이한 점은 학문과 정치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퇴계의 문하였다면 퇴계의 문인이나 그를 종주로 삼는 학파들로 구성되어 있는 동인에 자연스럽게 속하게 된다. 또한 같은 이유에서 퇴계를 문묘에 종사한다는 것은 곧 퇴계의 학문이 올바름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붕당의 정당성이나 정치적 위신도 덩달아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의 문묘종사 논쟁은 정치권력 투쟁과 교묘히 연관되어 있다.

문묘에 종사된 18명의 우리나라 선현 가운데 종사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었다. 이이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이었다. 2년 후인 1625년부터는 이이와 성혼을 함께 종사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두 사람이 문묘에 종사된 것은 1682년(숙종 8)이었으니, 자그마치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6년 뒤인 1689년(숙종 15)에 문묘에서 출향(黜享: 위판을 퇴출하고 제사에서 제외하는 일)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다시 종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가 누구인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성리학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세계에서도 드물게 화폐에도 등장하는 학자가 아닌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율곡 이이가 무슨 이유로 문묘에 종사되기까지 숱한 논란을 겪었고, 한 번 문묘에서 쫓겨나는 수모까지 겪게 되었을까?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잡았던 북인, 그 가운데서도 대북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인조반정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서인이면서 학통으로는 율곡학파 계열이었다. 이귀는 이이의 제자임을 자처했고, 신경진도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김류는 이항복․성혼의 문인이며, 이시백은 성혼과 김장생의 문인이다. 반정 세력의 정신적 후원자를 자임했던 김장생은 이이의 수제자였다.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일 만인 1623년(인조 원년) 3월 27일에 제기됐다. 이날 아침 경연에서 유순익이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자고 제안했고, 이어서 민성징․이민구․유백중 등이 그의 문묘 종사가 공론이라는 이유를 들어 윤허할 것을 청했다. 이렇듯 반정이 일어난 지 보름도 안 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굳이 이이의 문묘 종사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이의 문묘 종사가 시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천리를 멸하고 인륜을 무너뜨려 위로는 종묘사직에 죄를 짓고 아래로는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었다.”

는 것이었다. 주자학적 가치에서 볼 때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은 천륜을 어긴 것이다. 또한 명나라에 등을 돌린 것 역시 당시 주자학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의리와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광해군이 명의 구원 요청을 사실상 거부하고 후금과 적절한 관계를 모색한 것은 오랫동안 유지돼왔던, 명을 중심에 둔 중화질서 체제를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노쇠한 명 대신 후금(훗날 청)이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던 시기에 여전히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고 명의 은혜를 운운하는 것은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판알만 튀겨서 해결할 수는 없다. 때로는 커다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당시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에서 나라의 이익 못지않게 나라 사이의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이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폐한 것과 후금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모색한 것 등은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명분은 반정 자체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서인의 집권까지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대북의 대안이 꼭 서인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인 세력으로서는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해줄 다른 명분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유순익이 지금은 눈을 씻고 새롭게 변화해야 할 때라면서 이이의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인조는 이이의 문묘 종사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권력이 서인들에게 지나치게 집중될 경우에 그것이 가져올 폐단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이의 문묘 종사는 그의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들의 의견일 뿐 공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이와 성혼을 함께 문묘에 종사하자는 공식적인 주장은 1625년(인조 3) 2월 오첨 등 40명의 해주 유생들에 의해서 처음 제기됐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도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하려고 했으나 영남 유생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성균관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635년(인조 13)에 와서다. 이 해 5월 관학 유생 송시형 등 270여 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를 했다.

송시형 등은 이이와 성혼이 이황을 이어 유림의 종장이 됐고, 특히 주자학 이론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이학의 이론을 완성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 상소는 당시 율곡학파의 영수이던 김집이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집은 김장생의 아들로서 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송시열․송준길 등에게 전한 인물이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서는 이이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 아니면 이이와 성혼을 함께 문묘에 종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그래서 그들은 김집에게 문의를 했고, 결국 그의 견해에 따라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함께 추진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남인들은 이이와 성혼을 사림의 종장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인 계열의 성균관 유생들은 두 학자의 문묘 종사를 반대해 서인 계열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마침내 채진후 등 50여 명이 성균관을 나와 동학(東學)에 자리를 잡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남인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려는 서인 측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1635년 6월 19일에는 황해도 생원 윤홍민 등 48명, 파주 유생 유응태 등 36명, 경기 유생 신희도 등 33명, 그리고 평안도 유생 홍선 등 33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뿐만 아니라 사학 유생 윤숙거 등 140여 명이 상소를 올렸고, 그 뒤에도 개성 유생 고형 등 50명, 풍덕 유생 최시달 등 15명, 전라도 유생 김시길 등 195명, 충청도 유생 민여기 등 50명이 잇달아 상소를 올렸다. 다음해인 1636년(인조 14) 10월에도 진사 윤성 등 수백 명이 상소를 올려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세 번에 걸쳐 주청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한결같이 문묘 종사의 문제는 함부로 논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렸다. 특히 홍선 등에 대해서는

“몸을 수양하고 글을 읽는 일이 곧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알지도 못하는 일을 굳이 논하여 남의 비웃음을 사는 일은 하지 말라”

고까지 했다. 『인조실록』에서는

“이때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관학 유생들이 선동하여 꾄 것이라고 하는 유언비어가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답변이 이와 같았다”

고 하였다.
이때 남인들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채진후의 상소를 보면

“비록 두 신하의 학술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지만”

이라고 해 이이와 성혼의 학문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비켜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이의 문장과 학문은 한때의 명신이 되기에 족하니 어진 관리라고 부를 수 있다”

고 해 이이의 학문을 높게 평가했으나, 문묘에 종사하기에는 출처가 바르지 않다는 비판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여기서 이이의 출처가 바르지 않다는 것은 그가 한때 불교를 공부한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혼에 대해서는

“이이보다 (학문이) 한참 아래이고 또 간흉과 한 무리가 된 실상과 임금을 버린 행적은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본 것”

이라며 문묘에 종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성혼에 대해 문제 삼은 것은 기축옥사 때 정철과 한 패가 되어 최영경 등 죄 없는 선비들을 죽였다는 것과 임진왜란 때 피난길에 나선 임금을 제때에 모시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서인 계열의 태학생 홍위 등 수백 명은 효종 즉위년(1649) 11월 23일을 비롯해 수차례에 걸쳐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효종의 답변은

“문묘 종사는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여서 경솔하게 논의하기 어렵다”

는 것이었다.

남인 측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효종 1년(1650) 2월에 진사 유직을 대표로 한 영남 유생 900여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 900여 명이나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남인들의 의지가 확고했음을 말해준다.
성균관에서도 서인 계열 유생 사이의 불신과 반목은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을 보듯이 했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다. 서인 재임(齋任: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들은 처음에 이상진․유직 등 8명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했다가 다시 논의해 4명을 구제했으나, 도리어 유직에게만큼은 부황(付黃)의 유벌(儒罰)을 추가했다. 부황은 지목된 사람의 이름을 누런색 종이에 써서 북에 붙이고 그 북을 치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벌이다. 이는 죄상을 널리 알리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유림 자체의 처벌로소 유생들에게는 최고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남인 계열 유생 50여 명은

“하찮은 과거를 위해 구차스럽게 성균관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고 하면서 퇴거했다.
이 문제에 대해 영의정 이경여는 유직이 선현을 모함했기 때문에 유적에서 삭제하는 것은 당연하므로 유직의 삭적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해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효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직에게 내린 부황의 처벌을 풀도록 분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서인 계열 유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임금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효종은

“피차의 유생들이 한결같이 명령을 어기고 있는데, 이들은 유독 이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알바 아니다.”

라는 반응을 보였다.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 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것은 나는 그들을 이 나라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격한 감정이 실린 발언이었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설 학생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라 안에 살지 않는 자는 또한 교화를 벗어난 일개 난민일 뿐입니다. 이런 죄명을 지고 무슨 얼굴로 다시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라며 공관(空館: 성균관 유생들이 관(館)을 비우고 물러나가던 일)을 풀지 않았다. 이 문제는 결국 효종으로부터 잘못했다는 사과를 이끌어내고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감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효종은 끝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현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은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다시 추진했다. 현종 즉위년(1659) 12월에는 관학 유생 윤항 등이 다섯 차례에 걸쳐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부제학 유계 등도 같은 내용의 차자를 올렸다. 효종 3년에는 김포 진사 이영원을 비롯해 강원도․평안도․함경도․충청도․전라도 유생들이 연이어 문묘 종사를 청했다. 이렇듯 두 선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현종 재위 15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 반복됐지만, 인조․효종과 마찬가지로 현종도 일관되게 거부했다. 역시 서인들의 위상이 강화돼 권력이 서인들에게 더욱 집중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편 현종대에 벌어진 두 차례의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서인 세력은 급격히 위축됐고 마침내 숙종이 즉위한 직후 남인 정권이 출범했다. 인조반정 이후 실로 50여 년 만에 있었던 정권 교체였다. 이를 흔히 갑인환국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680년(숙종 6) 이른바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부터다. 이 해 8월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이 3차례에 걸쳐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 해 8월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이 3차례에 걸쳐 두 사람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했다. 이어서 1681년(숙종 7) 9월에는 이연보 등 관학의 팔도 유생 500여 명이 두 선현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결국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현실화된 것은 바로 이 해(1681년)였다. 숙종은 9월 19일 이연보 등이 전날에 이어 재차 상소를 하자 드디어 담당판서와 대신들에게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양현(兩賢)의 도덕과 학문은 실로 한 세대에서 우러러 사모하여 사림의 모범이 되니,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대체로 누가 불가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대대의 조정에서 일찍이 윤허하지 않았던 것과 내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것은 모두 신중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인사들의 주청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또한 간절해서 끝내 억지로 어기기 어려우니, 그것을 해당 관서로 하여금 대신에게 묻도록 하여 특별히 오현을 종사하는 청을 윤허할 수 있도록 하라.

숙종실록』권12, 숙종 7년(1681) 9월 19일 무진조

이날 대신 김수항․김수흥․정지화․민정중․이상진이 모두 종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자 숙종은 우리나라의 두 선현과 송나라의 세 선현(양시․나종언․이동)의 문묘 종사를 허락했다. 이이와 성혼이 실제로 문묘에 종사된 것은 그 이듬해(1682년) 5월 20일이었다. 이로써 60년 가까이 끌어오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전히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동안 이기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문묘에서 쫓겨났다 다시 종사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취소하고 그 두 사람의 위패를 문묘에서 철거했다. 물론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서인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종사되긴 했지만, 이이와 성혼이 살아서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인조 즉위 이래로 매우 중요한 정치적 사안 가운데 하나였다.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인 서인들의 학통이 그 두 학자로 소급되기 때문에, 그들의 문묘 종사는 곧 서인들에게 학통의 권위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남인에게는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던 학통의 권위마저 위협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서인들에 의해 추진된 두 학자의 문묘 종사가 남인들의 반대와 여러 대에 걸친 임금의 견제로 쉽사리 실현될 수 없었고, 게다가 출향과 복향을 겪어야만 했던 데는 이 같은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