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사직상소


율곡의 사직상소

 

늘날 선조는 당쟁의 폐단과 임진왜란의 참화를 부른 암군(暗君:어리석은 임금)이라는 혹독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사실 처음부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임금은 아니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폭정에서 겨우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특별히 명종의 총애를 받던 선조가 1567년 왕으로 등극했다.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인해 즉위 초에는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정사 처리에 능숙하여 1년 만에 친정을 하게 될 정도로 선조는 영민했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사회는 희망에 부풀었다. 부패한 척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던 어두운 시대가 끝나고 올바른 유학자인 사림(士林)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는 기대였다. 이러한 여망에 부응하듯 즉위 초 선조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매일 경연에 나가 정치와 정사를 토론하고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할 정도로 뛰어난 군왕의 자질을 보였다. 또한 정계에서 훈구, 척신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했다.

특히 학문을 사랑한 선조는 비록 퇴계와 율곡으로부터 존경받는 군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당시 성리학의 거두였던 이 두 학자를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하고 존중했다. 실제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퇴계를 스승으로 불러들였다. 병을 이유로 퇴계가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선조는 친히 편지를 보내

“어진 임금은 어진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라고 하면서 어리석은 자신을 깨우쳐달라며 극진한 예우로 모셨다. 선조가 성군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한 만큼, 율곡은 다가올 찬란한 미래에 대한 기대감에 마음이 더욱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율곡의 부푼 기대와는 달리 정작 선조는 퇴계의 가르침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퇴계는 1569년(선조 2) 3월 늙고 병약함을 이유로 들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다. 율곡은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5개월여가 지난 8월 16일부터 경연에 참석해 선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율곡의 노력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성군의 뜻을 세우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시간이 지나자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는 방법까지 나름대로 터득했다.

선조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바뀌었다. 오만하고 의심이 많던 선조는 임금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척신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사림 역시 이내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임금은 신하를, 신하는 임금을, 신하는 다른 신하를 불신하면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마치 임금이 성군의 뜻과 방향을 좇아 정치를 하도록 이끄는 것이 자신이 벼슬하는 유일한 이유인 양 줄기차게 선조에게 선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율곡은 강한 어조로 임금의 태도를 비판했으며, 갈수록 치열해져만 가는 붕당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온 힘을 쏟았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1578년(선조 11), 1579년(선조 12)에 제출되었던 대사간 사직상소에 잘 드러난다.

1578년 5월 1일, 대사간에 임명된 율곡은 곧바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신이 쓸 만한 사람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당면한 일들에 대해 하문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의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신다면 다시는 소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선조는 그동안 여러 차례 율곡을 요직에 등용했지만, 정작 그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임금이 자신의 간언을 들을 생각이 없으니 사직하는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라면 더는 자신에게 출사(出仕: 벼슬길에 나아감)하라고 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반응에 선조도 그날로 임명을 철회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으니 글로 써서 아뢰라.”

라고 말했다. 그러자 율곡은 기다렸다는 듯 장문의 글을 올렸다.

지금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은 곤궁하여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졌음은 전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임금은 한 나라의 근본으로 정치가 잘 다스려지냐 혼란스러우냐는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습니다. 임금이 할 도리를 다했는데도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율곡은 임금의 다스림의 근본은 ‘성군과 선치(善治)’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선조에게 성군이 되겠다는 뜻을 선포하고 선정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였다. 임금의 강력한 의지와 실천만이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평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곡이 보았을 때 임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는 일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임금은 그 선택의 올바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얻어 부족함을 채우고 더 나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요, 순, 우, 탕과 같은 성군들이 자신의 총명함을 과신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좋은 말을 수용하려고 애썼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이들 임금의 경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선조가 자신만 옳다는 아집에 빠져 독단적으로 정치를 행하고 있으니,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율곡은 선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쓸 만한 재능을 가진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할까 봐 걱정하시고, 곧은 말을 개진하며 논쟁하는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명령을 어길 것이라며 지레 싫어하십니다. 유학자로서의 행실을 실천하는 선비가 있으면 전하께서는 그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의심하십니다. 소신은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떤 도를 배우고 어떤 계책을 아뢰어야 전하의 마음에 부합하여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까?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우선 누구라도 자신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언로를 열어놓아야 한다. 옛말에 간쟁(簡爭)하는 신하가 일곱 사람만 있다면 어떤 임금도 성군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나라도 부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임금은 자신의 뜻을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여론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문제도 결국 자만 때문이다.

흔히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해도 결코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 일이 실패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 탓이다. 내 판단은 분명히 옳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방해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오로지 주관적인 잣대를 사용한다. 그에게는 내 생각을 따르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내 생각을 반대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율곡은 선조의 잘못과 허물들을 가감 없이 거론했다. 그리고 상소의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부디 전하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마옵소서. 「하서(夏書: 『서경』의 편명)」에 이르기를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대처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이미 위태로운 조짐이 드러났으니,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바로잡을 일이 시급합니다.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율곡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가리켜 ‘흙이 무너지는 형세’, ‘쌓아놓은 계란이 무너지는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2백 년 묵은 집이 낡아서 동쪽을 고치면 서쪽이 무너지고, 서쪽을 고치면 동쪽이 무너져, 유명한 목수라도 어찌 손댈 바를 모를 지경리라고 했다. 삼척동자 어린 아이의 눈에도 나라가 망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 백성의 부모라는 임금은 팔짱만 끼고 앉아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밤중에 벌떡 일어나게 된다고 술회했다.

율곡은 절박했다. 병이 들기 전에 예방했다면 좋았겠지만, 병이 아직 심하지 않은 지금이라도 치료에 나서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율곡은 왕명을 거역하고 사직상소라는 강경한 형식을 통해 선조를 일깨우고자 한 것이다.

율곡은 이듬해인 1579년 5월에 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동인과 서인에 관한 논의가 큰 문젯거리가 되고 있으니, 신은 이 점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라며 붕당에 대한 견해와 대책을 상세히 개진했다.

사실 조정과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선 것은 선조 8년, 즉 1575년 때이지만, 이 사건의 발단은 윤원형이 한창 권세를 떨치고 있던 1564년(명종 19)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있던 심의겸이 공무 때문에 윤원형이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심의겸은 우연히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마주쳤다. 이조민은 전부터 심의겸과 잘 아는 사이여서 자신의 서재로 그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조민의 서재에는 손님용 침구가 많이 놓여 있는 걸로 보아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심의겸은 드나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해 이조민에게 누구의 침구인지 물었다.
이조민은 심의겸의 물음에 별 생각 없이 답변해주었는데, 그 가운데 김효원이 있었다. 김효원은 당시 과거급제는 하지 못했지만 글과 학문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들은 심의겸은 마음속으로 ‘학문을 한다는 선비가 어찌 권문세가의 무식한 자제들과 어울려 지낸단 말인가. 절개가 있는 선비가 아니구나.’ 하고는 이때부터 김효원을 비루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은 권력에 빌붙어 출세 길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성화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잠시 동안 윤원형의 집에 묵은 것뿐이었다. 심의겸은 앞 뒤 사정도 살피지 않고 한 가지 면만 보고 김효원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여하튼 그 다음 해 3월 김효원은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고, 그 몸가짐이 단정하고 책임감이 강해 날로 명성을 얻어갔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김효원은 오래지 않아 이조좌랑의 요직에 천거되었다. 그런데 심의겸이 번번이

“김효원은 예전에 난신(亂臣) 윤원형의 집에 드나들며 권세를 좇던 비루한 사람”

이라며 가로막고 나섰다. 이 때문에 김효원은 낭관이 된 지 6∼7년이 지난 다음에야 이조좌랑이 될 수 있었다. 이조좌랑이 된 김효원은 학문과 인품을 두루 갖춘 선비들을 천거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후배 사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김효원은 자기 앞을 가로막은 심의겸에게 만큼은 관대하지 못하고 그를 괘씸하게 여겨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심의겸은 어리석고 고지식하며 거친 인물이다. 크게 쓸 수 없는 인물이다.”

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심의겸의 주변 인물들은 김효원이 원한을 품고 보복이나 하는 소인배라고 떠들고 다녔고, 김효원을 따르는 인물들은 또 그들대로 심의겸을 두고 올바른 선비를 해치는 간악한 사람이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이런 와중에 김효원과 심의겸을 확실하게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어 갈 때 자신의 후임(이조좌랑)으로 천거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을 두고서

“이조의 관직은 외척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래서 등용할 수 없다.”

라고 극력 반대했다. 심의겸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씨의 일족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심의겸은 난신 윤원형의 문객 노릇을 한 주제에 도리를 따진다면서 크게 분노했다. 그러자 김효원을 따르는 세력이

“김효원은 나라를 위해서 한 말인데, 심의겸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올바른 선비를 핍박한다.”

면서 성토했고, 이에 대해 심의겸의 편을 든 세력은

“심의겸의 말은 직접 보고 들은 실상을 전했을 뿐이다. 오히려 김효원이 원한 때문에 외척임을 구실삼아 심충겸을 반대하고 있다. 이것은 소인배나 하는 행동이다.”

라면서 비난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서로를 더욱 배척했고, 이때부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당쟁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한쪽으로 분류하기가 힘든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괜한 일을 만들어 소문내기 좋아하는 자들이 동인과 서인에 관한 갖은 설을 지어내어 실상은 살펴보지도 않고 단지 의겸과 가까운 사람은 서인으로, 효원과 가까운 사람은 동인이라고 하니, 조정과 신하들이 모두 동․서로 편입”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굳어져“논의가 갈수록 과격해지고 바로잡아 제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율곡은 상소에서 두 사람 모두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고 하였다.

효원도 신이 아는 자이고 의겸도 신이 아는 자입니다. 이 둘의 사람됨을 논한다면 다 쓸 만합니다. 잘못을 논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을 군자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을 소인이라고 부른다면, 신은 그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율곡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심의겸은 외척으로서 정치에 개입하려 한 잘못이 있고, 김효원은 사적인 감정으로 심의겸을 비난한 잘못이 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되면 자연스레 화합할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이러한 율곡의 입장은 미봉책이라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었다. 그도 이 점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사람들은 신에게 ‘둘 다 옳다고 얼버무리니 시비가 분명하지 않다.’고 나무랍니다. 천하에 어떻게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있을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논함에 있어 세상에는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경우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율곡은 만약 한쪽이 옳고 한쪽이 그르다고 한다면, 헐뜯는 말을 마구 쏟아내고 서로 질투와 반목을 거듭하는 형세를 결코 없앨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시시비비를 가리다보면 또다시 예전 사화처럼 큰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진정 동인과 서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세상의 일이란 둘 다 옳은 것도 있고 둘 다 그른 것도 있다면서, 김효원과 심의겸 양쪽의 반목과 대립은 모두 그른 것이라는 양비론(兩非論)을 내세웠다.

지금 조정의 분열을 해소하지 않고 저들이 서로 헐뜯고 다투게 내버려 둔다면 머지않아 종기가 곪아 터지는 아픔이 오늘날보다 더욱 심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동인과 서인의 묵은 감정을 씻어버리고 다시는 서로를 구별하지 말도록 명하옵소서. 당파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어질고 재능이 있으면 등용하고, 그러지 못하면 버리시옵소서. 편벽되게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자와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자는 억제하고, 남을 모함하여 없는 말을 지어내거나 공연한 일을 만들려고 하는 자는 배척하옵소서.

율곡이 동서 화합을 위해 주장한 논리를 보면, 그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말부터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사자들 간의 자발적인 화해가 어렵다면 임금이 강제로라도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인재 등용을 통해 갈등을 억제하고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율곡의 주장은 붕당의 반발을 살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 신의 상소가 아침에 올라가면 저녁도 되지 않아 신을 헐뜯는 말이 쏟아질 것이옵니다.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만두지 않는 것은 신이 받은 큰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이 몸을 다 바치더라도 어찌 주저하오리까.

동서 분당을 전후한 시기, 율곡은 조정과 사림을 이끄는 리더 중의 리더였다. 따라서 율곡의 말 한마디 혹은 행동 하나가 조정과 사림에 끼치는 영향력과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 율곡은 자신을 둘러싼 이러한 정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과 당파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서 항상 동서화합을 부르짖었다.

율곡의 이 사직 상소는 배수의 진을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 생명을 걸고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자신이 앞장설 테니 임금도 노력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곧바로 그를 해임한다. 율곡의 말처럼 동인과 서인 세력은 결국 말을 다스리지 못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에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는 비극을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