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

“숙헌(율곡 이이의 자)이 형의 편지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봉함을 뜯고 두 번 세 번 되풀이 읽었습니다.”

(1560년 10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숙헌이 요즘 임진나루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희 집이 다소 넓기에, 네댓 날쯤 문회(文會)를 열어 『대학』과 『논어』를 강론할 생각입니다. 형이 왕림하여 질정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1577년 윤8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형에게 보내는 숙헌의 편지를 전해 받았습니다. 편지를 미리 뜯어보아도 좋다는 숙헌의 허락이 있었지요.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읽어보았더니, 숙헌의 날카로운 칼날도 형에게 완전히 제압되었군요. 제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1579년 11월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

위에서 인용한 글은 모두 우계 성혼이 송익필에게 보낸 편지의 한 단락이다. 율곡 이이와 함께 대학자인 우계 성혼이 학술모임에 초대하기도 하고, 서로 편지를 공유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던 송익필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종 시대부터 선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그의 가족사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중종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상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515년(중종 10), 조광조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며 중종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시 조광조는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종이를 제조하는 부서인 조지서의 사지로 재직 중인 초보 관리였다. 조지서라는 별 볼일 없는(?) 관서에 근무하던 조광조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초보 관리의 신분으로 치른 알성시에서 합격한 이후였다. 알성시 장원 급제 뒤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과 사간원 정언을 거쳐 마침내 홍문관에 입성한다. 홍문관 관리가 된 조광조는 중종의 뜨거운 총애를 받으며 승진을 거듭했고 개혁을 주도하며 젊은 선비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조광조는 특히 엉터리로 임명된 반정공신들과 부정부패가 만연한 훈구대신들에 대하여 날선 비판을 하였는데, 그를 추종하는 사간원․사헌부, 홍문관과 성균관의 젊은 유생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때 비판의 대상이 된 대신들 가운데 단 한 명의 예외가 바로 이조판서 안당이었다. 안당은 드물게도 신진 사림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은 대신이었고,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1518년(중종 13) 5월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와 신진 사림들은 강경하게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 중 자격이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의 공신 작위를 박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환수해야 한다는 것)를 주장했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공신에 임명된 총 117명 가운데 4등 공신 65명 전원을 포함한 76명이 공신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조광조와 신진사림들은 비로소 역사를 바로잡았다고 기뻐했지만, 이들은 중종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위훈삭제는 공신들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의 콤플렉스를 자극한 것이다.

위훈삭제가 이루어진 지 3일 뒤, 중종은 후궁 희빈 홍씨의 아버지이자 반정공신인 홍경주와 남곤에게 밀명을 내려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는 관리들을 체포하였다. 결국 조광조에게는 사약이 내려졌고, 그를 추종했던 선비들도 모두 숙청되었다.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조광조가 사사된 뒤 중종의 마음을 알아챈 신하들은 안당에 대한 탄핵의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안당은 고신(告身: 관직 임명장)을 빼앗겼다.
기묘사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과 친밀했던 안당은 집중적으로 탄핵을 받았다. 그를 비난하는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세 아들들이 모두 현량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이다. 현량과는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관리등용 제도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 받아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사람은 임금과 대신들 앞에서 심층 면접을 본 뒤 곧바로 벼슬을 내리는 방식이었다. 현량과가 시행되자 조광조와 친밀한 젊은 선비들이 대거 발탁되었는데, 그 중에는 안당의 세 아들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안당을 비난하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현량과가 실시된 지 얼마 뒤 안당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안처겸, 안처함, 안처근 형제들은 어머니의 초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곧바로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합격도 취소되었다. 다시 정규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는 이상 정계에 진출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1521년(중종 16),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3년의 시간이 흘렀고 안처겸 형제들의 삼년상도 끝이 났다. 탈상을 하는 날, 안처겸 형제들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과 모여 세상을 한탄하며 조광조를 숙청한 조정 대신들을 비난하였다. 안당은 아들들의 이런 생각이나 행동이 위험하다고 여겨 주의를 주었지만 혈기왕성한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들들을 설득하지 못한 안당은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갔다. 바로 이때 안당의 이종 서조카 송사련이 안처겸 형제를 역모로 고발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는 정실부인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을 하는 대신 데리고 있던 집안의 노비 중금을 비첩으로 삼았다. 중금은 안돈후와의 사이에서 딸 감정을 낳았다. 노비의 딸 감정은 천출이긴 하였지만 혈연적으로는 안당과 이복 남매였다. 안당은 감정의 노비문서를 없애고 신분을 양인으로 바꿔주었다. 감정은 평민 출신 군인 송인과 혼인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송사련은 안당에게 이종조카였고 안처겸에게는 이종사촌간이었다. 따라서 송사련은 안당 집안의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냈다. 그런데 이 송사련이 안처겸의 역모를 고발한 것이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역모에 민감했고 기묘사화가 끝난 지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긴장했다. 곧바로 친국(親鞫: 임금이 죄인을 몸소 신문하는 것)이 열렸고 모진 고문 끝에 관련자들이 속출했다. 안처겸, 안처근 등 7명은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역모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20여 명이 숙청되었다. 역모 사건이었기 때문에 연좌제가 적용되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안당은 교형(絞刑: 교수형)을 받았고, 남은 가족들은 변방으로 쫓겨나는 형벌을 받았다. 이 사건을 ‘신사무옥’이라고 한다.

신사무옥은 조광조를 추종하던 마지막 세력까지 숙청된 사건이자 송사련과 안당 가문과의 길고긴 악연이 시작된 것을 의미했다. 신사무옥으로 안당의 가문은 풍비박산되었고, ‘같은 집안사람’으로서 역모를 고변한 26세의 송사련은 공신으로 책봉되어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렸다. 종5품 관상감 판관으로 재직 중이던 송사련은 신사무옥이 마무리된 지 열흘 만에 다섯 품계를 뛰어넘어 정3품 중추부 첨지사로 승진하였고, 안당 가문에서 몰수한 재산은 송사련의 차지가 되었다. 신사무옥은 노비의 손자 송사련의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신사무옥 당시 안당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둘째 아들 안처함이었다. 아버지 안당의 성품을 닮은 그는 형 안처겸과 동생 안처근이 시절을 한탄하며 세상을 뒤집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모으자 극구 말렸던 인물이다. 신사무옥 이후 경상도 청도에 유배된 안처함은 항상 행동을 조심한 덕분에 1522년(중종 17)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안처함은 처가가 있는 경기도 용인에 거처를 마련하고 여생을 조용히 보내다가 1543년(중종 38) 세상을 떠났다.

구봉 송익필은 1534년(중종 29) 바로 송사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익필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총기를 드러냈지만 이름난 유학자의 제자가 되지 못했다. 안당의 가문을 몰락시킨 송사련의 악명이 선비들 사이에서 워낙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익필은 독학으로 성리학을 공부하며 과거시험에 매달렸다. 송익필은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만이 아버지의 오명을 씻고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558년(명종 13) 다섯 살 아래의 동생 송한필과 나란히 소과 초시에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송익필은 이내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송익필 형제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이 알려지자 사관 이해수, 김홍식 등이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며 그 자식들은 역시 얼손(노비의 자손)들이니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선비들 사이에서는 송사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559년(명종 14) 결국 송익필의 초시 합격은 취소되었고, 대과 응시 자격도 박탈되었다. 이때 송익필의 나이는 스물여섯,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양반의 신분을 얻었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스물여섯의 송익필은 입신양명의 꿈을 포기한 채 파주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송익필은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바로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연마한 ‘율곡 이이’와 조광조의 제자였던 성수침의 아들 ‘우계 성혼’이었다. 율곡 이이는 관료가 되기 위해 과거시험을 준비했고, 우계 성혼은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송익필은 독서에 매달렸다. 이처럼 각자 목표하는 길은 달랐지만 세 사람은 서로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키워갔다.

1560년(명종 15) 가을, 송익필은 제자 한 명을 받았다. 율곡을 통해 알게 된 김계휘가 아들 김장생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제자를 기른다는 것은 이제 과거시험을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송익필은 고민 끝에 김장생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후 과거길이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치열하게 학문을 연구한 송익필의 명성은 점점 세상에 알려졌고 김장생을 시작으로 많은 제자들이 파주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송익필의 인생에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듯 점점 어두워지고만 있었다. 1566년(명종 21) 신사무옥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당의 둘째 아들 안처함의 아들인 안윤이 할아버지 안당의 신원 복귀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명종은 안당의 신원을 복귀시켰고 고신과 직첩도 돌려주었다. 안당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안당의 후손들로서는 거의 50년 만에 선조의 명예를 회복한 셈이었다. 안당이 명예를 회복할수록 송사련 일가에 대한 비난 여론은 거세졌다.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 송사련은 이를 개의치 않았고 유력 인사들이나 명사들과 교류를 즐기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비상한 두뇌로 고변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인생을 바꾼 송사련은 그 자체로 만족했다. 그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명예직 당상관으로서의 신분을 즐기면서 당대의 권세가들과 어울리며 평생을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하지만 양반이자 공신의 아들로 태어난 송익필은 달랐다. 그는 실력도 빼어났고 목표도 있었지만, ‘송사련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한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정정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출사의 꿈을 접은 송익필이 할 수 있는 것은 한가한 서생으로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뿐이었다. 송익필은 성리학 중에서도 특히 예학(禮學)을, 그중에서도 가례(家禮)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태생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정정당당할 수 없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괴로움을 학문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 결과 송익필에게 학문을 배운 김장생은 훗날 조선 예학의 종주로 성장하였다.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배운 학문을 아들 김집과 김집의 제자 송시열에게 가르쳤다. 김집은 정실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율곡 이이의 서녀를 소실로 맞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하여 김집은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 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집은 아버지의 제자였던 송시열을 자신의 제자로 받았다. 송익필․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학맥은 그대로 서인의 계보가 되었다.

이처럼 후대에 흔히 율곡의 제자들로 일컬어지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혼과 송익필의 제자이기도 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친우 사이인 율곡, 성혼, 송익필은 제자를 공유하는 하나의 학단(學團)을 이루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부분이 율곡의 제자로 알려진 것은 율곡의 학문적 비중과 사회적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사실상 성혼, 송익필과 공유되었던 제자들이 율곡문하로 흡수되어 알려졌던 면이 있다. 또한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송익필의 처지와 신분 때문에 그의 제자를 자처하기가 꺼려졌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선조가 즉위한 지 8년째가 되던 1575년, 조선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발생한다. 곧 후배 사림이 동인을 형성하고 선배 사림이 서인을 형성하여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조정이 온통 동서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기 시작했을 때,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가 80세였으니 천수를 누린 셈이었다. 송익필은 율곡에게 아버지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位)를 베푸는 나무패)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도 못하고 조정에 출사할 수도 없는 송익필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한 율곡은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율곡은 누구보다 조광조를 존경해왔고 송사련이 사람들에게 어떤 비난을 받고 있는지도 잘 알았지만, 흔쾌히 친우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당쟁이 본격화된 이후 송익필의 당파와 당색은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그 후 당쟁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율곡이 동인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송익필은 서인 세력의 숨은 브레인으로 활약을 펼치게 된다. 송익필은 친우인 이이와 정철, 성혼 등이 조정의 주요 사안이나 정책에 대하여 조언을 청할 때면 언제든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었다. 조정에 나아갈 수 없다는 단점으로 인하여 송익필은 오히려 조정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었다. 그는 파주 구봉산 자락에 앉아서 율곡을 통해 선조의 심리를 읽어냈고 동인들의 목표와 방향을 파악했다. 덕분에 송익필의 조언은 율곡과 서인 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1584년(선조 17) 1월, 율곡 이이가 4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 이이의 죽음은 당파를 초월하여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서인들은 늘 율곡에게 동인의 편을 든다며 원망하였고, 동인들은 율곡이 어차피 서인의 편이라며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서인 중에서 율곡을 대체할 인물은 어디에도 없었고, 동인 중에서 율곡처럼 조정의 화합을 이끌 인물도 없었다.
율곡을 통해 세상과 조정과 소통하고자 했던 송익필이 느낀 상실과 슬픔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서인 세력은 양지에서 활동하던 수장을 잃었고, 양지를 잃은 서인 세력은 음지에서 활동하던 수장 송익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익필은 조정에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율곡의 죽음과 함께 서인의 실각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송익필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1586년(선조 19), 안당의 손자 안윤이 송익필의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내용은 송익필의 외할머니 감정이 안돈후(안당의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노비 중금(안돈후의 비첩)과 그녀의 전남편(노비) 사이에서 생긴 딸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송익필 일가는 안당 집안과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안당 집안의 사노비였다. 중종 시대에 만들어진 『대전후속록』에 따르면 비록 노비라 하여도 2대에 걸쳐 양인이 할 수 있는 부역에 종사하면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여기에 따르면 송익필의 경우, 아버지 송사련과 할아버지 송인이 양역에 종사하였고, 또 이미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지 6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안당의 후손들은 60여 년을 기다려온 복수를 완성하기 위해 동인 세력과 손을 잡았다. 사헌부를 장악한 동인 세력에 의해 국법은 무시되었고 소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드디어 그 해 7월 15일, 송익필 집안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졌다.

“송사련의 후손 송익필 형제와 그 자손들을 원래대로 안씨 가문의 사노비로 되돌려라.”

판결이 나오자마자 송익필 집안의 일가친척 70여 명은 모두 안당 가문의 보복을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져 도망노비가 되었다. 송사련의 무덤은 사정없이 파헤쳐졌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송사련에 대한 안당 가문의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참혹한 사건이었다.

송익필도 안당 가문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쳤다. 그가 도망친 곳은 깊숙한 지방이 아니라 대궐에 가까운 한양, 그것도 동인의 수장 이산해의 집이었다. 송익필이 한양을 떠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동인 이산해의 집에 숨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 이산해는 송익필에게 서인에서 동인의 편으로 전향하면 모든 고초를 해결해 주겠노라고 회유했다고 한다. 송익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송익필이 다시 노비로 환천되자 제자들과 친구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으나 선조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성혼과 정철은 송익필의 노비문서를 구입하여 그를 다시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돈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안당 가문에서 이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소송을 진행한 것도 판결을 이끌어낸 것도 동인이었지만 이들은 송익필을 환천시켜 서인의 기세를 완전히 꺾은 것에 만족할 뿐 송익필을 안당 가문에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노비가 아닌 사노비였기에 도망노비를 찾는 것은 주인의 몫이라는 주장이었다. 동인 중에는 송익필과 학문적․문학적 교류가 깊었던 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차마 송익필을 직접 끌고 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정여립의 역모 사건인 ‘기축옥사’의 배후 조종자의 역할을 한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고, 조헌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의 미움을 받아 송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1593년(선조 26)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갈 곳이 없던 그는 스승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김장생이 충청도 당진에 거처를 마련해 주자 그곳에서 책을 저술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1599년(선조 32) 6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악업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송익필. 그의 삶은 영광보다 고난이, 명예보다 비난이 가득했다. 송익필은 가정의 아픔과 부친의 불명예를 학문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립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장가로 불렸으며, 그가 지은 「제율곡문(祭栗谷文)」은 조선시대 23대 문장의 하나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는 입신양명이 좌절되자 기꺼이 친구들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서인 세력의 책략가가 되어 당쟁의 역사를 만들었고, 스승을 하늘처럼 존경하는 제자들을 길러내어 조선 산림의 종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