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험으로는 나라에 필요한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였다.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하여 관리 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과거에 합격하는 데 일생을 걸었다. 과거시험에는 관리를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그리고 율관․역관․의관 등 기술직 종사자를 뽑는 잡과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물론 문과(대과라고도 함)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방에서 뽑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다. 소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뉜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정도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진사시는 문장력을 알아보는 시험이었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논술시험에 해당된다. 고전소설에서 ‘최진사’, ‘허생원’ 등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생원시나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오늘날 논술고사는 대학입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조선시대에도 진사시 이외에 본시험인 문과에서 책문(策文)이라 하여 주제에 맞는 문장 작성 능력을 비중 있게 평가했다. 그런데 문장시험에서는 직접 생각해낸 글 대신 다른 사람의 문장을 그대로 베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인조대의 학자 신흠은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기존의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경우가 거의 반수가 되었다.“고 개탄하기도 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 이 둘을 합쳐서 소과라 했으며, 이 시험에 합격하면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자격을 부여받았다. 성균관에서는 출석 점수인 원점(圓點)이 300점 이상 되어야 대과인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줘 성실성을 과거 응시의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지금의 내신성적과 유사한 셈이다.

문과 역시 초시, 복시, 전시를 거쳐 총 33인의 합격자를 선발했다. 식년시가 3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니 3년에 33명의 관리가 뽑혔다. 조선시대에 공무원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학자들마다 통계에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문과 시험이 대략 744회 실시되어 급제자는 모두 1만 4,620여 명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기 시험인 식년시 163회에서 6,063명, 각종 부정기 시험 581회에서 8,557명이 선발되었다. 다만 이 숫자는 중시를 제외한 숫자이다. 따라서 당시에는 과거 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 간다’는 뜻의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는 그토록 멀고도 험하게 느껴졌던 과거길이 오늘날 여행을 뜻하는 관광길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이 흥미롭다.

과거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것을 방방(放榜)이라 했다. 과거 합격자가 발표된 뒤에 궁중에서 방방의 또는 창방의라는 의식이 치러졌다. 왕은 어좌에 앉고 시신과 백관이 서 있는 가운데 의식이 치러졌으며, 급제자는 차례대로 왕에게 사배례를 올린 다음 합격증인 홍패․백패와 어사화와 주과(酒果) 등을 하사받았다. 과거에 함께 합격한 사람은 동기생이라 하여 아무리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친구처럼 지냈고, 따로 계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했다. 합격자는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삼일유가(三日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관과 선배, 친척을 방문하며 인사하는 일)를 했으며, 합격자를 배출한 마을에서는 경사가 났다 하여 한바탕 큰 잔치를 베풀었다. 조선후기에는 「평생도」라 하여 자기 일생의 주요 장면을 8폭 병풍에 담아 집에 보관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는데, 이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이 과거 합격 장면이었다. 그만큼 과거급제는 개인의 자랑이자 가문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전 시기에 걸쳐 문과 시험이 740여 회 치러졌으므로 장원급제자도 740여 명이다. 문과 급제자 전체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숫자이고, 1년에 장원급제자가 대략 1.4명 배출되었으니 정말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문과 급제는 개인의 영광일 뿐 아니라 가문의 커다란 영예였다. 급제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는데 더구나 장원급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장원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이는 엄중한 금기를 깨고 불공을 드리기도 하고, 과거 시험만 보게 해준다면 개구멍이라도 지나겠다고 통사정을 하는가 하면, 신문고를 두드리는 이까지 있었다. 그리고 장원급제자들 가운데는 어렵다는 과거에 연달아 장원을 차지한 수재도 있었고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도 있었다.

반드시 머리가 좋고 똑똑해야 장원급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선시대 과거의 장원들 중에는 신동으로 널리 알려져 이름을 날린 사람도 많았다. 우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어려서부터 총명해서 여섯 살에 글을 읽고 글귀를 지어 사람들이 모두 신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세종 20년(1438)에 19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종 26년(1444)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해서 사간원 우사간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정시에도 다시 장원을 차지해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그는 특히 시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장원이었다. 그가 사은사로 북경에 가서 통주관에서 안남국(베트남)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도 장원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중국 당대에 형성된 시체. 일정한 격률과 엄격한 규범을 갖춤) 한 율을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했고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을 지어 응답했다. 그러자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기재(奇才)다”

라고 했다. 또한 요동 사람 구제(丘霽)가 서거정의 시를 보고는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

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세조 2년(1456)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은 10세에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세종이 22세인 그를 불러서 말하기를

“옛날에 사람이 7보를 걷는 동안 시를 지은 사람도 있고 동발(銅鉢: 타악기의 하나)을 친 소리가 끝나는 동안에 시를 지은 일도 있는데, 네가 능히 옛 사람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춘운(春雲)’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자 임원준은 즉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화창한 삼춘 날씨에, 멀고 먼 만 리 구름이로다. 바람은 천 길이나 헤치고, 햇빛에 오화가 문채 나네. 상서로운 빛은 옥전에 어리었고, 서기(瑞氣)는 금문을 옹위하네. 용을 따를 날을 기다려, 장맛비가 되어 성군을 보좌하리라.”

이 시를 듣고 임금은 한참 동안 칭찬을 했고, 얼마 후 그에게 집현전 관직을 제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훗날 훈구파의 거물 임사홍의 아버지인 까닭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뒷날의 사관은 그를 성질이 음침하고 교활하며 탐심 많고 간사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어머니가 기이한 꿈을 꾼 후 그를 낳았는데, 5세에 책을 읽을 줄 알아 눈만 스치면 곧 암송하고 글도 잘 지은 신동이었다. 그는 태종 14년(1414)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최고의 신동을 꼽자면 율곡 이이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율곡을 잉태할 때 꿈에 동해 바다에 나갔더니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있다가 자기 품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또 태어나기 전날 밤 사임당은 큰 바다에서 흑룡이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율곡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율곡을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고, 율곡의 아이 시절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율곡의 천재성은 어려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세 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옛 사람이 쓴 시의

“은행 껍질은 푸른 옥구슬을 머금었고, 석류 껍질은 부서진 붉은 진주를 싸고 있네”

라는 시귀를 인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일곱 살 때에 이미 경서에 통달했고,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는데도 일찍이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여덟 살 때는 고향 마을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花石亭)’이란 시를 지었고, 열 살 때에는 강릉 경포의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다.

13세가 되던 명종 3년(1548)에 서울에서 진사 초시에 해당하는 진사해(進士解)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율곡이 어린 나이에 급제한 것이 기특하여 승정원에서 불러보니 동년배의 다른 급제자는 자못 뽐내는 태도를 보였으나 율곡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한다.

율곡은 23살이 되던 명종 13년(1558) 겨울에 문과 별시 초시에 장원급제했는데, 당시 고관(考官: 시험관)이었던 정사룡 등은 그의 2,500여 자에 달하는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을 보고 놀라

“우리들은 여러 날 애써서 생각하던 끝에 비로소 이 문제를 구상해냈는데, 이모(李某)는 짧은 시간에 쓴 대책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천재이다.”

고 말하였다. 율곡의 「천도책」은 당시의 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후일 명나라에까지 알려졌다. 뒷날(1582년) 율곡이 원접사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사신이 율곡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천도책」을 지은 분이냐”

고 물었다는 것으로 보아, 율곡의 명성은 이미 그 당시 중국의 학계에까지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율곡은 문과 별시의 최종 시험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율곡은 아버지 삼년상을 치른 후, 29세 되던 해인 명종 19년(1564)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같은 해 식년문과에도 급제했다. 생원과 진사시는 초시와 복시에서 장원하고, 문과시험에서는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일곱 번 장원을 차지하였다. 여기에다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별시 초시에 장원한 것을 합치면 아홉 번 장원을 한 셈이다. 한 사람이 아홉 번 장원을 차지한 것은 역사상 길이 남을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요즘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 경이로운 기록이다. 이렇게 연이어 장원으로 뽑히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이 지나간다면서 우러러보았다고 한다. 율곡이 여러 차례 장원한 것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명종은 그를 대궐로 불러들여 ‘석갈등용문(釋褐登龍文: 갈옷을 벗고 용이 되어 출세하다)’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