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실천이 없는 학문은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곡이 첫 벼슬살이(호조좌랑)를 시작한 때는 1564년(명종 19) 8월이었다. 이후 율곡은 1567년(명종 22)까지 3년여 동안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선조가 즉위한 다음 해(1568)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초기 관직 생활 동안 조정의 핵심 기구에서 정치와 행정 경험을 쌓은 율곡은 1568년(선조 1)에는 천추사 서장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 경험과 더불어 해외 문물을 접하는 기회까지 누렸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홍문관 부교리, 이조좌랑에 이어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1570년(선조 3) 율곡은 해주 야두촌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으려 하였으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미 학문의 성취를 이루기 시작하였던 때라 정중한 상소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에 돌아와 조선 성리학의 연구에 전념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주변에 학문과 경륜 높은 인재가 있어야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조정이 건재하게 되고, 백성들은 그 건재한 조정에 의지하여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1574년(선조 7) 율곡은 군왕의 간곡한 소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황해감사로 나가 반 년 남짓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면서 대사간, 대사헌, 호조판서 등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동서로 갈라진 정쟁의 갈등이 날로 높아지는 현실에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급기야 1579년(선조 12) 율곡은 통치자의 정신적 해이와 신료들의 무능함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사임을 청한다.

어제 대사간 이이가 사면하고 아뢰었다.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기강이 무너진 것과 민생이 곤궁한 것은 상께서도 이미 다 알고 계실 것이므로 더 진달(進達:윗사람에게 전달함)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성상께서는 이미 마음을 미루어 위임하시려는 뜻이 적으시고 조정 신하들은 또한 담당하여 힘을 다해 보려는 뜻이 모자랍니다.

큰 관원은 유속(流俗:세속. 세상에 유행하는 일반적인 풍습)대로 하는 것만 편하게 여겨 수수방관하며 성패(成敗)를 임의로 놔두고 있고, 작은 관원은 비록 건백(建白: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함)하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혹자는 과격하고 혹자는 우활하여 실용에 절실하지 못하여 의논이 가닥만 많고 통일되는 바가 없습니다.

국가의 사세가 날로 글러짐이 마치 물이 더욱 아래로만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때에는 위로 임금의 허물과 실수를 바로잡음이나 아래로 관원들의 태만과 경솔을 경각시키는 일은 오직 간관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진실로 재주와 성의를 겸비하고 학식과 생각이 탁 트이어 옛것에 얽매이지도 않고 지금의 사태에 현혹되지도 않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조실록』선조 12년 5월 22일 자

선조는 율곡과 같이 학덕이 높고, 성품이 올곧은 신하를 가까이 두기를 원하였다. 때로는 동료 신료들의 무책임을 통박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바로 알려서 치도를 확립하게 하려는 신료들을 가까이에 두고 싶어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바른 말하는 신료들을 탄핵하는 세력들이 공존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선조는 시골로 내려간 율곡을 다시 대사간으로 불렀다. 대사간의 직책은 간쟁을 수습하고 처리하는 막중한 자리다. 그러나 율곡이 올린 사양상소는 칼날과도 같았다.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로 이이를 부르니 이이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오지 않고서 상소를 올려 동서의 분당에 대하여 논하면서

“동인이 서인을 공격함이 너무 심하여 억지로 시비를 결정하고자 하니 바라건대 동서의 당론을 타파하고 사류들을 보합케 하여 그들이 한마음으로 나라에 몸 바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상소의 사연이 시사(時事)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이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와 옥당이 어지럽게 논박하였다.

선조수정실록』선조 7년 1월 1일 자

조선왕조가 개국한지도 어언 2백여 년이 지나 알게 모르게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회의 여러 면에서 병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살았던 율곡은 조선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었다. 당시 퇴계를 비롯한 선학들이 개척하고 다져 놓은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토대로 그 이상을 현실 사회에 접목하고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넘쳐나고 있었다.

또한 선조는 사가(私家)에서 태어나 성장한 사림 출신이나 다름없었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사림 출신의 스승들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그들과 함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다짐하였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그런 쪽으로 성숙되어 있었고, 성리학적 이념으로 의식화된 사림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기도 하였다. 선조는 이들을 개혁 세력으로 삼아서 적극 등용한다면 침체된 정계를 개편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같은 신구 정치 세력의 교체기에 이이가 대표적인 관료학자로 이념 집단인 사림의 정치화를 선도할 적임자라고 선조는 믿었다.

선조에게 율곡의 간곡한 가르침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율곡은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상소문을 올려 선조의 선정을 일깨우고자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일에는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습니다.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 것은 오활한 듯하나 성과가 있고, 말단만을 일삼는 것은 절실한 것 같으면서도 해가 됩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말한다면 조정을 화합시키고 옳지 못한 정사를 고치는 것이 근본이고, 병력과 식량을 조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말단입니다. 말단도 실로 거행해야 하겠지만 더욱 먼저 해야 할 것은 근본입니다.

선조수정실록』선조 14년 4월 1일 자

 

서애 류성룡이 율곡 이이에게 이 말의 진의를 물었다.

“전일 궐정에서 의논할 때 공은 근본적인 장책(長策: 제일 좋은 대책이나 방책)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입니까?”

하자 율곡의 대답은 명쾌하였다.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아래로는 조정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입니다. 그런데 상의 뜻은 사류를 경시하고 유속의 무리들을 신임하니 무슨 일인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율곡이 생각하고 있는 임금의 소임과 신하의 소임이 무엇인지가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율곡은 평생을 성인(聖人)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율곡이 세운 평생의 뜻은 ‘성인이 되겠다.’였다. 이는 과거에 급제해 이름을 드높이고 권력과 출세를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고 옛 성현을 본받아 자신을 갈고 닦고 백성을 가르치는 삶을 의미하였다. 그렇기에 율곡은 시간을 아껴 늘 공부하고,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며,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언했다. 또한 백성들의 삶과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의 정치적 여건은 그의 이런 의지와 실천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선조는 입으로는 성군의 정치를 말하면서도 이를 실천할 의지가 없는 임금이었다. 율곡의 끊임없는 간언에도 선조는 변명과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율곡이 생각하기에 선조는 용군(庸君)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용군이란 마음이 나약해서 뜻이 굳지 못하고, 결단력이 부족해서 낡은 관습에만 매달리는 탓에 나날이 나라와 백성을 쇠락의 길로 밀어 넣는 임금이다.

선조는 “총명하고 지혜롭지만 덕을 베푸는 것이 넓지 못하고, 좋은 말을 듣기를 즐기지만 또한 많은 의심을 버리지 못해”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임금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힘써 건의를 해도 지나치지 않나 의심하고, 기개와 절조를 숭상하는 신하는 교만하거나 과격하다고 의심하고, 명예를 얻는 신하는 혹시 당파를 이루지 않나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을 비판하면 편파적으로 모함하지 않나 의심하느라 아무런 일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이러한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와 백성은 폭군이나 혼군이 다스릴 때처럼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살거나 큰 재앙을 입지는 않는다. 하지만 큰 발전과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고 자칫 후퇴와 쇠락의 구렁텅이로 추락할 수 있다.

다만 용군은 폭군이나 혼군과는 다르게 일을 추진할 뜻과 실행할 결단력이 부족할 뿐이다. 따라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자신의 약점과 결점을 보완하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해 혁신한다면 큰 발전과 성장을 이끌 수도 있다. 율곡이 항상 선조의 모자람을 질책하면서도 끝내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못한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