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말하다

 


율곡,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말하다

 

선시대에는 조정에서 총명한 문신들을 선발하여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여가를 주는 제도로서 이른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시행하였다. 이 제도는 1426년(세종 8)에 처음 실시되었는데 이때에는 독서하는 장소를 자택으로 한정했기 때문에 독서에 전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진관사(津寬寺 :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소재의 사찰)를 독서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기도 한 문신들이 사찰에 머물면서 독서와 연구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1492년(성종 23)에 마포에 남호독서당을 설치했으나 갑자사화의 여파로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517년(중종 12) 봄에 대사헌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연 풍광이 뛰어난 두모포(豆毛浦)에 정자를 짓고 동호독서당을 두었다. 동호(東湖)는 ‘동쪽의 호수’라는 뜻이지만 사실은 한강의 동쪽, 현재 서울 성동구 옥수동과 압구정동 사이를 흐르는 한강을 가리킨다. 강이지만 마치 호수처럼 넓기 때문에 호수라고 한 것이다.

이 동호독서당은 이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질 때까지 75년 동안 조선 학문 연구의 주요 산실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호독서당은 독서당의 역사상 가장 활발한 역할을 하였던 중종에서 선조 시기의 독서당이다.
역대 왕들은 젊고 능력이 출중한 문신, 학자, 관료들을 이곳에 보내어 재충전의 기회를 갖도록 했다. 지금의 안식년 제도와 매우 유사하다. 독서당에 궁중 음식 전담기관인 태관(太官)에서 만든 음식이 끊이지 않고, 임금이 명마와 옥으로 장식한 수레, 안장을 하사했음에서 국왕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율곡이 독서당에 들어간 해는 1569년(선조 2)으로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였다. 『율곡전서』「연보」에 따르면, 율곡이 실제 독서당 입당 명을 받은 때는 서른셋 되던 해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였다. 그러나 이때 독서당에 들어갔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해 11월에 이조좌랑으로 제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조모 이씨의 와병 소식에 사직소를 올리고 시병(侍病: 병자의 곁에 있으면서 시중을 듦)을 하기 위해 강릉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569년 6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된 율곡은 같은 해 9월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이는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월과(月課)로 지어서 올리는 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종의 ‘사가독서 보고서’였다. 따라서 율곡은 6월에서 9월 사이의 어느 때에 동호독서당에서 독서하며 연구한 것을 발표한 셈이다.

손님이 물었다.

“삼대 이후로 다시 왕도를 행한 자가 없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주인이 슬프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도학이 밝혀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 이후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도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머리로만 천하를 파악해서, 의미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임시방편으로 끌어다가 날을 보내니 수천 년도 다만 하룻밤처럼 지나갔을 뿐입니다. 정자(程子)께서 주공이 죽고 백세 동안 제대로 다스린 자가 없다고 하셨으니 정말로 그렇습니다.”

손님이 물었다.

“한나라 이후로 글을 읽은 자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른바 도학(道學)은 어떤 학문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비루하군요. 선생의 말씀이! 도학이라는 것은 격치(格致: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름)로써 선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으며, 몸에 쌓으면 천덕(天德: 하늘의 덕)이 되고 정사에 시행하면 왕도가 됩니다. 저 독서라는 것은 격물치지 가운데 한 가지일 뿐입니다. 책을 읽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말만 잘하는 앵무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양나라 원제(508∼554)가 만 권의 책을 읽었지만 마침내 위나라의 포로가 되었으니, 이 역시 도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삼대 이후로 도학을 행하는 임금이 끊어져 없다고 할지라도 어찌하여 도학을 행한 선비조차 없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다만 군주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선비들의 우활함을 의심하여 천직(天職: 타고난 직업이나 직분)을 함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학을 행하는 선비를 진유(眞儒: 유학의 정도를 지키는 참된 선비)라고 합니다. 맹자 이후에 진유가 나타나지 않았다가 천 년 뒤에 비로소 주렴계가 은미한 것을 밝히고 깊은 뜻을 드러내 정자와 주자를 계승하였습니다. 이후에 이 도가 세상에 크게 밝혀졌으니 하늘에 해가 높이 뜬 것과 같았습니다. 다만 송나라의 임금이 도학을 알지 못해 대현(大賢)을 낮은 관직에 머물게 하여 백성이 그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손님이 물었다.
“한․당 이후로 영민하고 총명하며 능력이 있는 임금이 없지 않은데 어째서 모두 진유를 알아보지 못했겠습니까? 다만 서로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 아닙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후세의 임금 가운데 누가 진유를 등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선생이 이를 알려주십시오.”

손님이 물었다.

“한나라 고조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군자는 반드시 임금이 공경을 지극히 하고 예를 다하길 기다린 이후에야 나아가는데, 저 한나라 고조는 본래 게으르고 무례하며 그가 부리는 사람들도 모두 부귀공명에 뜻을 둔 자들일 뿐입니다. 진유가 어찌 거세(踞洗: 왕포가 명을 받들어 한나라 고조를 만나러 갔으나 고조가 걸터앉아 여자들이 발을 씻게 하면서 그를 맞이한 사실을 말함)의 치욕을 즐기어 스스로 한신(韓信)이나 왕포의 대열에 몸을 섞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문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문제는 자포자기한 임금입니다.”

손님이 크게 놀라 물었다.

“문제는 천하의 어진 임금입니다. 자포자기했다고 하시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삼대 이후에 천하의 현군이 진실로 문제와 같은 사람은 없었으나 다만 지향(志向)이 비루하고 천박해서 옛 도를 반드시 회복할 수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편안하고 조용한 것에 안주하고 근근이 백성을 기르기만 하였으니 옛 도를 회복하지 못한 것이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문제와 같은 사람은 끝내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자포자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진유를 만났더라도 반드시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손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무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무제는 속으로는 욕심이 많았으나 겉으로는 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 인의라 말하는 것이 모두 허문(虛文)을 숭상하여 아름답게 보이게만 할 뿐이니 성심으로 도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동중서와 급암과 같은 사람도 마침내 등용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진유를 등용할 수 있었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광무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광무제는 그릇이 고조에 미치지 못합니다. 자기 멋대로 행하는 데만 힘쓰고 삼공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았으니 그가 진유에게 성공적으로 정사를 이끌기를 바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님이 물었다.

“명제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말하였다.

“명제는 지나치게 꼼꼼하여 임금의 도량이 없었습니다. 벽옹(辟雍: 주나라 때 천자가 도성에 건립한 대학)에 가서 삼로에게 예를 행하는데 다만 형식적일 뿐이니 어찌 이른바 진유를 알겠습니까. 하물며 호교(胡敎: 불교)를 처음으로 숭상하여 만세토록 끝없는 근심을 열어놓았으니, 이 사람이 어찌 유능한 임금이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당 태종은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태종은 아버지를 위협하고 병사를 일으켜 형을 죽이고 제위를 빼앗았으며 동생의 처에게 음행을 하였으니 개, 돼지와 같습니다. 태종이 비록 진유를 등용하고자 하여도 진유가 어찌 태종의 신하가 되고자 했겠습니까?”

손님이 물었다.

“송 태조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태조는 주나라 세종의 총신으로 진교의 변이 닥치자 끝내 찬탈을 행한 신하가 되었으니 진유라면 반드시 실망하여 떠났을 것입니다.”

손님이 놀라 물었다.

“진실로 선생의 말과 같다면 진유는 끝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입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만약 진유가 소열제를 만났다면 그 뜻을 약간이나마 펼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공명을 세 번 방문하였을 때 공명은 신분이 낮고 나이가 적었으며, 소열제는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았습니다. 공명에 대해서 다만 그 이름만을 들었을 뿐 깊이 알지 못하였으나 매우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두 번 세 번 찾아갔으니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공명을 진유로 여기고 반드시 공경하고 믿었던 것이니, 저는 후세의 임금으로는 오직 소열제만이 거의 진유를 등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유능한 임금은 반드시 공경하고 믿는 신화가 있으니 서로 친한 것이 부자와 같고, 서로 뜻이 맞는 것이 물과 물고기와 같고, 서로 조화로운 것이 궁상(宮商: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듯이 소리 또는 시문의 운율이 아주 우아하고 정교하게 나는 것)과 같고, 서로 합쳐지는 것이 계부(契符: 부신(符信) 또는 부절)와 같은 이후에야 말은 쓰이지 않은 것이 없고, 도는 행해지지 않은 것이 없고, 일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요가 순을, 순이 우․고요를, 탕이 이윤을, 무정이 부열을, 문왕이 태공을 대하는 것과 같은 예가 이런 경우입니다. 또한 이에는 미치지 못하나 다음이 될 수 있는 사례가 제갈량에 대한 소열의 행위일 것입니다. 후세의 군신들은 모두 이런 사례에 미칠 수 없습니다.”
손님이 물었다.

“부견(苻堅: 5호16국시대 전진의 3대 임금)이 왕맹에 대한 관계와 당 태종이 위징에 대한 관계 또한 서로 잘 만났다고 이를 만하나 제가 헤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주인이 대답했다.

“제가 서로 잘 만났다고 말한 것은 올바름으로써 서로 믿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저 부견은 오랑캐의 추장으로서 용렬한 인물 가운데 조금 나은 편이고, 왕맹이 짜낸 책략의 공으로도 한 세대조차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입에 담을 만하겠습니까? 태종은 명예를 좋아하는 군주이고, 위징도 명예를 좋아하는 신하입니다. 비록 서로 잘 만나 한 세대를 다스린 것 같았으나 살아서는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고, 죽어서는 비를 넘어뜨리는 수모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 어찌 마음으로 기뻐하고 정성으로 믿은 것이겠습니까!”

천재일우(千載一遇)’란 고사성어가 있다. 말 그대로 천 년이 지나야 한 번 만날까 말까 한다는 말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며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동진(東晉)의 원굉(袁宏)이 쓴 「삼국명신서찬(三國名臣序贊)」에 나오는 말로

“백락(伯樂:춘추시대 진나라의 정치가로 말을 잘 감정하는 것으로 유명함)을 만나지 못하면 천 년을 가도 천리마 하나 생겨나지 않는다.”

고 하면서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운 것을 비유하였다.

율곡 또한 『동호문답』에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기 어려움을 논하고 있는데, 우선 먼저 왕도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도학인 성리학이 밝혀지지 않은 데서 찾았다. 즉 삼대 이후에 왕도를 행한 임금이 없기 때문에 도학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율곡은 왕도를 행한 임금이 없었기에 도를 행하는 선비, 곧 진유가 임금에게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율곡은 이렇게 제대로 된 임금과 신하가 만나기 어려움을 지적하면서도 궁극적인 책임을 군주에게 물었다. 한나라 고조와 문제, 무제, 후한의 광무제, 명제, 당 태종, 송 태조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사실 율곡이 예로 든 황제들은 그 공으로 따졌을 때에는 중국 역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들이다. 적어도 총명함과 능력 면에서 다른 임금들보다는 월등했다. 그럼에도 율곡은 이들을 제대로 된 신하를 등용하지 못한 임금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한 고조는 게으르고 무례하며, 부리던 신하들조차 모두 부귀공명에나 뜻을 두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신하에게 수치스러운 행위를 강요하거나 신하를 예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유를 만날 수 없었다고 보았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현군(賢君)으로 평가받는 한 문제도 현실에 안주하여 백성을 안정시키는 정도에 그쳤을 뿐 건설적인 이상향을 추구할 의지가 없는 비루한 군주로 보았다.
한 무제는 한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다. 그러나 율곡의 평가는 냉정하였다. 인의를 베풀었지만 성심으로 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허례를 숭상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후한의 창시자 광무제에 대해서도 그가 한 고조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며, 자기 멋대로 행하고 삼공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았던 한계를 지적하였다. 당 태종이나 송 태조도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단점을 지적하여 진유가 결국 가까이할 수 없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진유는 끝내 세상에 용납될 수 없었을까? 이 질문에 율곡은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를 예로 들었다. 유비가 평가받을 수 있었던 이유로 높은 지위에 있었고 나이도 많았지만 몸소 제갈공명을 찾아간 점을 들었다. 즉 공경스럽고 믿을 만한 신하가 있더라도 유능한 임금과 짝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했던 것이다.

결국 율곡은 군주와 신하가 만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책임이 군주에게 있는데, 군주가 믿을 만한 신하를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는 용현(用賢)의 문제는 율곡이 치인 또는 경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로, 국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를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곧 임금과 신하의 올바른 만남의 출발임을 지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