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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혁명군 총사령관 김류

 

김류(金瑬, 1571-1648)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이귀(李貴, 1557-1633),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이고 호는 묵재(默齋)이다.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598년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과 풍악을 벌여 놀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이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申景禛)·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이항복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논한 이야기가 여러 번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항복이 귀양 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곧 김류) 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ㆍ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항복이 김류를 광해군의 폐정을 끝장낼 인물로 점찍은 것처럼 이귀 또한 김류를 높이 평가하여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귀가 김류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할 때의 대장은 나처럼 노쇄한 자는 안 될 것이오. 영감은 원래 장수의 물망이 있는 사람이니,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오. 영감을 대장으로 삼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본래 김류는 문과 급제한 인물이지만 무장의 능력이 있었다. 이귀가 김류에게 장수의 물망이 있다는 말이 그런 의미다. 이런 사정에 대해서는 박세채가 구체적으로 밝혔다.

“김류는 천성이 비범하고 기국이 엄숙하고 단정하며 또한 문장을 잘하고 지략이 있었다. 일찍이 대궐 뜰에서 책문 시험을 볼 때에 병무(兵務)에 대해 매우 잘 논했으므로 사람들이 장상의 재목이 된다고 여겼는데, 이 때문에 광해주 때에도 자주 원수(元帥)의 물망에 올랐다. 계해년 정사(靖社)에 모든 사람이 추대하여 영수(領袖)로 삼은 것도 이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금이 반정하기 전에 세 번 그 집에 찾아가서 큰일을 도모하였다.”

김류가 반정군의 대장이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거사 당일 김류가 늦게 합류하여 잠시나마 혼란이 발생한다. 혁명의 성패는 일초일각을 다투는 법인데 대장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회합 장소에 모인 이들의 심사가 어떠했을지 족히 가늠하게 된다. <연려실기술>에는 김류가 늦게 합류한 사연을 적어두었다.

“이때 김류가 고변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앉아서 잡히기를 기다려 주저하며 나가지 못하였는데, 심기원이 원두표와 함께 그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모이기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어찌 움직이지 않소?’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날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뿐이오.’ 하였다. 기원이 말하기를, ‘그러면 장차 고스란히 잡혀간단 말이오? 이 마지막 지경에 이르러서 잡으러 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금부도사가 어찌 두려울 것이오.’ 하였다. 김류가 옳게 여겨 그 아들 경징(慶徵)을 불러서 전통(箭筒)과 마구(馬具)와 군복을 재촉하여 갖추고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니, 기원의 군사가 이미 와서 정렬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이 대장좌(大將座)를 설치하여 김류를 부축하여 자리에 올리고,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ㆍ박유명(朴惟明) 등과 함께 절하여 꿇어앉고는 항오(行伍)를 정돈하여 사현(沙峴)을 넘어갔다. 김류가 늦게 온 것은 실로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밤이 되자, 이괄이 군관 20여 명을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먼저 갔는데 고요하기만 하고 사람의 형적이 없었다. 근심하고 낭패할 즈음에 홀연히 한 점의 불빛이 서북 산 아래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을 보고 달려가서 기다리니,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송영중(宋英重)ㆍ한교(韓嶠) 등이 각각 모집한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모였다. 조금 뒤에 장유(張維)가 와서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을 하여 벌써 국청을 개설하고 사방으로 나가 체포하는데, 도감 중군(都監中軍) 이곽(李廓)이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왔다.’고 하였다. 이때 미리 약속하였던 모든 군사가 태반도 오지 않았고 장단(長湍)의 군사도 아직 오지 않았는데, 다만 대오(隊伍)도 되지 않던 수백 명 오합지졸만이 이 소식을 듣고는 겁을 내고 무너져 흩어지려 할 판이었다. 이귀가 이괄의 손을 잡고 귀에다 입을 대고 말하기를, ‘대장 김류가 오지 않고 일이 이미 이쯤 되었으니, 반드시 그대가 대장이 되어야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오. 나도 평일에 본래 군사 일에 등한하지 않았으나, 창졸간에 힘을 얻기 어렵소.’ 하였다. 드디어 이괄을 추천하여 대장으로 삼고 말하기를, ‘나(이귀 자신)부터 누구든지 규율을 어기면 목을 베시오.’ 하고 거느리고 있던 군사들로 하여금 줄지어 이괄에게 전하게 하니 이괄이 기꺼이 따랐다. 곧이어 군관들을 불러 써두었던 의(義) 자 수백 조각을 꺼내어 모든 사람에게 나눠주니, 모두 옷 뒤에 달아 표적을 삼았다. 이시백(李時白)이 말하기를, ‘군에 계통이 서지 않으면 활동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빨리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이괄이 곧 그 말대로 하여 엄하게 부서를 단속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심기원과 원두표가 찾아가 김류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면 반정이 어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다급해진 이귀가 김류를 대신하여 이괄을 대장으로 삼았는데 만약 이대로 반정을 거행하여 성공했다면 이괄의 난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바로 “밤중이 된 후에 김류와 여러 사람이 다른 곳에서 모여 전령으로 이괄을 부르니, 이괄이 크게 노하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이귀가 극력 권하여 그리로 가서 모였다. 이에 이괄이 김류에게 대장을 사양하였으니 당초의 약속을 준수하기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 이괄의 심사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미 이괄의 난은 싹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설을 허용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혁명가 이귀


혁명가 이귀

 

이귀(李貴, 1557-1633)는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 김류(金瑬, 1571-1648), 김자점(金自點1588-1651) 등과 함께 계해정사(癸亥靖社) 1등 공신에 책봉된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이다.

이귀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년(광해군 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 평산 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는데, 아들 시백의 응원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귀(李貴)가 귀양 가 있을 때 이상한 돌을 한 개 얻었는데, 이름을 용암(龍巖)이라고 하고 거기에 한 수의 절구를 쓰기를,

슬프다 용이여 덕이 어찌 쇠하였는가 / 吁嗟龍兮德倚衰
물결 복판에 길게 누웠으니 세상이 모르는구나 / 長臥波心世不知
융중에 있는 제갈공명을 비웃지 말라 / 莫笑隆中諸葛老
은근히 세 번 찾음이 어찌 때가 없으랴 / 殷勤三顧豈無時

하였다.

이귀의 아들 시백(時白)이 화답하기를,

당년에 한 나라의 국운이 쇠함이 부끄럽고 한이 되어 / 愧恨當年漢業衰
돌로 변하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구나 / 變形爲石不求知
깊은 못에서 자주 고개를 돌리며 / 深潭入處頻回首
부질없이 융중 꿈이 깰 때를 생각하도다 / 空憶隆中夢覺時

하니 이귀가 기뻐하며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부자지기(父子知己 부자간에 서로 알아준다는 말)라 하겠다.’ 하고는 드디어 비밀스러운 의논을 정하였다.”

 

이귀는 아들만이 아니라 그의 딸도 반정을 도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먼저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동생 자겸(自兼)의 아내였는데, 일찍이 과부가 된 후에 정조를 잃고 절간으로 떠돌아다니며 아미타불을 섬겼는데, 앞 설에는 자겸이 젊어서 불법을 좋아하여 죽을 때에 아내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삼가 불도를 닦으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씨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산에 들어가서 숨어 살았다고 한다. 간음한 일이 발각되어 잡히어 심문을 당하게 되니 궁중에 들어가기를 원하므로 광해가 허락하였다. 일설에서 광해가 풀어주고 성중(城中) 자수궁(慈壽宮)에 있게 하였는데 이씨가 이것이 인연이 되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生佛)이라 일컬어 신봉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한다. 궁중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김상궁과 사귀어 모녀 간을 맺게 되었다. 항상 말하기를,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의 충성을 불행하게도 대북(大北)이 질시하여 항상 모해를 받는다……’ 하였다. 나날이 억울한 것을 호소하고 또 김자점을 후원하여 뇌물을 쓰는데 부족하면 김상궁에게서 꾸어서 다른 궁인에게 주고 또 다른 궁인에게 꾸어서 상궁에게 바치니, 이렇게 돌린 것이 수천 냥이므로 모든 궁인들이 기뻐하여 모두 김자점을 성지(成之)라 자를 부르며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광해가 유상(惟翔) 등이 아뢰는 말을 듣고 매양 잡아 신문하고 싶어도, 상궁과 개똥이[介屎] 등이 말하기를, ‘성지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사람이며, 더구나 한미한 선비에 불과한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 하니 광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귀는 반정의 주역인 김류, 김자점보다 연장자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보면 이귀가 반정 주역의 연장자로서 오랫동안 일을 도모했음을 알 수 있다. 반정의 대장으로 추대된 김류도 이귀가 포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귀가 이름 있는 선비인 김자점ㆍ심기원과 무장(武將) 신경진ㆍ구굉 등과 함께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와 협의하였다. 김여물의 아들 김류가 시의(時宜)에 부합하지 못한 채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이때에 동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경진의 아버지 신립(申砬)과 김류의 아버지 여물(汝岉)이 임진왜란 때에 충주에서 함께 전사한 인연으로 평소 정의가 두터웠으므로 경진을 시켜 뜻을 통하게 하였더니 김류가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신립 장군의 아들로 인정반정의 중핵 중 한 명인 신경진도 역시 이귀를 통해 반정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귀가 당시 일에 강개하여 반정할 뜻을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으면서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전에 함흥 판관(咸興判官)이 되었을 때 신경진(申景禛)은 북우후(北虞候)로 있었는데, 이귀는 신경진이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인 줄 알고 마음으로 서로 깊이 결탁하였다. 이귀가 체직되어 돌아온 후 신유년 4월에 아내의 상사를 당하자 신경진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당시 상황에 말이 미치자, ‘지금 세상이 어찌 사대부가 벼슬할 때인가?’ 하였다. 이귀가 희롱삼아 답하기를, ‘이때는 태평성대라 할 만한데 그대는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내가 고변(즉 고발)을 할 것이다.’ 하였더니, 경진이 “내가 먼저 고변할 것이니 어쩔 것인가?” 하여 이귀가 그 뜻을 추측하고 드디어 의논을 정하였다.”

혁명가 이귀가 반정을 도모하면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데에는 광해군의 폐정을 반대한 여론의 동향이 중요한 지렛대가 되기는 했겠지만 이귀에 대한 신망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은 조정 안에서 중한 명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걱정하여 그 사위 장신(張紳)을 시켜 설득하게 하였더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이귀도 함께 공모하였는가?’ 하므로 장신이 그렇다고 하니 이흥립이 말하기를, ‘그러면 이 의거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허락하였다. 장유(張維, 장신의 형)가 이귀에게 회답하여 알리니 이귀가 크게 기뻐하여 일어나 절하며 사례하였다. 드디어 흥립을 시켜 손수 글을 써서 장단(長湍)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흥립이 안에서 호응하기로 하였다.”

혁명은 그 시작이 승패의 중요한 갈림이 되는데, 이귀가 거사 초기에 반정을 성공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내용들이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이흥립의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

“이날 인조가 특명으로 이귀를 호위대장에, 신경진을 부장에, 김자점ㆍ심기원ㆍ심명세ㆍ송영망(宋英望) 등을 종사관에 임명하였다. 이서ㆍ이괄ㆍ이흥립 등도 모두 여기에 소속시켜 이들에게 절제를 받지 않는 자는 먼저 베고 뒤에 알리게 하였다. 모든 일이 새로 시작되어 육조와 모든 관아에 인원이 미처 배치되지 않았으므로 설치와 시행이 모두 이귀에게서 나왔다.”

반정을 일으키고 그 빠른 수습을 이귀가 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서 왕가의 최고 어른인 대비의 윤허를 받아야 혁명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역시 이귀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날 이귀가 명을 받들어 도승지 이덕형과 함께 의물(儀物)을 갖추어 대비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귀가 그 아들 시백(時白)을 시켜 인조에게 아뢰어 인조가 곧 서궁으로 가서 문안드리니, 대비가 드디어 임금으로 책립하자는 명을 내렸다.”

“이때 인조가 또 이정귀(李廷龜)를 보내니, 대비가 분판(紛板)에 글을 써서 내보이기를, ‘좋은 대궐에 앉아서 스스로 하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기에 꼭 나를 청하는가?’ 하였다. 인조는 대비가 끝내 마음 돌릴 뜻이 없음을 알고 해가 저물 즈음, 수레를 갖추고 친히 서궁에 나아가는데 폐주(광해군)를 여(輿)에 태워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래도 대비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므로 인조가 땅에 엎드려 대죄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대비가 또한 전국보(傳國寶 옥새)를 들이라고 재촉하므로 이귀가 대답하기를, ‘대비께서는 전국보를 받아서 장차 무엇에 쓰시렵니까. 신의 머리가 부러져도 국보는 들이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대비가 ‘오늘 한 일을 내가 상세하게 알지 못하니 글을 써서 들이라.’ 하므로, 이귀가 김대덕(金大德)을 시켜 자초지종을 모두 쓰게 하고 또 임기응변으로 말하기를,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이 사방의 의병을 거느리고 와서 모일 것입니다.’ 하였다. 대비가 친히 안뜰에 서서 시녀를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장이 어찌 나를 의심하느냐? 나에게 친아들이나 있느냐? 국보를 재촉하여 거두는 것은 국체(國體)를 존중하기 위함이다.’ 하니 이귀가 ‘진실로 그러시다면 정전(正殿)에 납시어 임금을 책립하고 대신을 불러 국보를 전하는 것이 옳겠사온데, 하필 국보를 빨리 들이라 하시나이까?’ 하였다. 이렇듯 상하가 서로 고집만 피우고 있을 때, 인조가 박홍구(朴弘耈)에게 명하여 국보를 받들어 들이게 하고, 또 계자(啓字)도 들이게 하였다. 대비가 대신과 도승지에게 명하여 오랫동안 뜰아래 엎드려 있던 인조를 받들어 들어오게 하여, 비로소 책립하는 예를 행하였다.”

“대비가 전후의 어렵고 위태로웠던 사실을 역력히 진술하고, 또한 조종(祖宗) 이래 임금이 신하와 백성에게 행한 도리에 대해 말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가 모든 일이 겨를이 없다고 여러 번 청하고 인조도 또한 겸손함이 매우 간절하니, 대비가 천천히 옥새를 주면서 ‘잘하시오.’ 하였다.”

<연려실기술>의 기록들을 보면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준비하고 결행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귀의 민활함과 주도면밀함이 잘 드러난다. 게다가 아들과 딸들까지도 반정에 참가했다. 혁명가 이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신성문무(神聖文武) 한 인조

 

인조(1595-1649)는 조선의 제16대 왕(재위 1623~1649)이다.

자는 화백(和伯)이고, 호는 송창(松窓)이며 휘는 종(倧)이다.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이고 어머니는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왕이고 15대 왕은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인조는 1623년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조선의 제16대 왕이 되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그 후에도 병란을 겪었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표방하면서 1627년 후금의 침입을 받고 형제의 의(義)를 맺었다. 바로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는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는데,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한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하고 군신(君臣)의 의를 맺는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곧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시대의 양대 전란이다. 임진왜란은 선조 때에 병자호란은 인조 때에 겪은 국난이다. 역대로 사가들이 선조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인조 또한 평이 좋지 않다.

애초에 반정을 도모하던 세력들은 광해군을 대신할 왕을 누구로 할 것인지 상당히 고심했을 것이다. 봉건왕조에서 반정의 최종적인 성공은 반정 후에 추대된 왕에 달렸기 때문이다. 반정 세력을 옹호하면서도 국론을 한데로 모을 수 있는 적임자.

 

반정을 의논할 적에 반정으로 모실 왕을 논하는 이야기들이 <연려실기술>에 나온다.

“신경진(申景禛)이 승평군(昇平君, 김류)과 반정을 의논하면서 먼저 추대할 분을 정하려 할 때에 공이 인조대왕을 두고 말하기를, ‘신성문무(神聖文武)가 실로 천명을 받을 만한 인물이다.’ 하였다.”

“처음에 여러 사람이 의거(義擧)를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용의 걸음과 범의 걸음 같으며,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으니 신인(神人)의 주인이 됨직하다.’ 하였다.”

“신경진이 평소 김류와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하루는 조용히 글 배우기를 청하고는 바로 사략(史略)을 내어놓았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내치다. [伊尹放太甲 ]’는 대목에 이르러서 책을 덮으며 탄식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일이 옳은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태갑이 탕(湯)의 법도를 뒤엎었으니 내쫓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하였다. 경진이 말하기를, ‘요즈음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는 ‘옛날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하였다. 경진이 울며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는가? 나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그냥 앉아서 볼 수가 없다.’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그것이 내 뜻이다.’ 하였다. 이내 묻기를, ‘마음 가는 데가 어디 있는가?’ 하니, 경진이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 인조)은 바로 선조의 친손인데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니 하늘이 주신 바이다.’ 하여 마침내 의논이 결정되었다.”

 

이 기록들은 반정이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주상 인조에 대한 평임을 감안하더라도 인조의 풍모를 가늠하는데 도움을 준다. 조선의 왕으로 추대될 만한 인물로서의 인조의 모습 말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이외에도 인조의 풍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록들이 다수 나온다.

“임금은 성품이 매우 공손하고 검소하여 항상 사치를 경계하고 음악과 여색, 진기한 오락을 아예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하교하기를, ‘사치와 화려함은 말류의 폐습이니, 이 어찌 다스려진 세상에서 숭상할 일이겠는가. 우리 조종 때부터 절약과 검소를 몸소 행하여 윗사람이 표본이 됨으로써 뭇백성이 감화되었으니, 순박한 풍속이 수백 년 동안 흘러 내려왔다. 그동안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어지러운 조정의 군신들이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화려함을 숭상하여 의복과 거마와 궁실 등을 사치스럽게 하지 않음이 없으니 염치(廉恥)가 이로 인하여 무너져 없어지고 백성이 이로 인하여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이 대업을 이어받아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여 먼저 이러한 풍습을 없애려고 생각하였으나, 물들어 더러워진 지 이미 오래이므로 갑자기 개혁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예부터 백성을 바꾸어 다스리는 법은 없으며, 위에서 좋아하는 것은 아래서 반드시 더 좋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치한 풍습이 변하지 않는 것은 위에서 모범을 보이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무릇 우리 종실과 공, 경, 대부들은 모두 나의 뜻을 체득하여 혼인 잔치와 손님 대접하는 것이나 거마, 의복의 제도에 검소와 절약을 힘써서 나쁜 풍습을 크게 고쳐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인조가 검소한 덕이 있다는 설명은 선조가 검소한 덕이 있었다고 밝힌 <연려실기술> 선조 조목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두 임금이 공히 존귀한 왕좌에 있었음에도 검약한 생활을 했다는 점은 대서특필할 만하다. 이는 두 임금이 천성으로 검약한 덕을 숭상한 바도 있었겠지만 국란을 겪은 후 산업과 물자가 궁핍한 시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더욱 검소한 덕을 실천했을 수도 있겠다.

“임금이 상벌을 삼가고 벼슬을 아꼈으며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이형익(李馨益)과 박군(朴頵)은 의술로 사랑을 받았으나 박군은 육품(六品)에 지나지 않았고, 형익은 삼품산질(三品散秩)이었다.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하였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였고, 임금의 한 마디 칭찬과 꾸짖음이 곧 평생의 판정이 되었다. 궁중에서 쓰는 상(床)과 자리는 아예 붉은 칠을 하지 않았으니, 그 검소한 덕이 이와 같았다.”

“임금은 문장이 매우 뛰어났으나 아예 한 구의 시도 짓지 않았고, 비답하는 문자도 또한 내시(內侍)에게 베껴서 쓰게 하고, 손수 초(草)한 것은 물 항아리에 담가 찢어버렸으므로 종친과 왕자의 집에는 몇 줄의 필적도 없었다.”

 

인조가 말이 무겁고 감정 표현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 인조의 행위를 여러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천성으로 ‘신성문무(神聖文武)’ 하거나 ‘해와 달 같은 의표(儀表)’가 있기도 하겠지만 신하들이 임금의 뜻이 어떠한가를 측량하지 못하도록 하고, 몇 줄의 필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데에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고심이 배여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임금의 체모가 준엄하고 무거우며 덕량이 깊고 넓어 몸가짐 하나하나가 규범에 어긋나지 않았다. 보위에 있은 지 27년 동안에 효를 다하고 윤리를 돈독히 하며, 학문을 닦고 어진 이를 가까이 두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마음과 힘을 다하며, 교화를 두텁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궁중을 엄하게 다스리고 벼슬을 아끼며, 절약과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간언을 용납하며, 형옥을 보살피고 나쁜 당파를 없애는 것이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와 조금도 중단이 없었다.”

 

위의 글은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인조 지문(誌文)의 일부이다. 이는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이 인조에 대한 총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 수단을 통해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조선의 왕으로 국부의 체통을 가지고 있다는 평이다. 물론 위대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항복, 반정의 정신적 지주


이항복, 반정의 정신적 지주

 

<연려실기술>에는 계해정사(癸亥靖社) 조목을 두고 인조반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한다.

인조는 1623년 곧 계해년에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光海君)을 내쫓고 인조(仁祖)를 옹립하는데, 이를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 부르고 반정이 성공한 후에 계해정사공신(癸亥靖社功臣)을 책봉한다.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며, 이에 책록된 공신은 총 53명이다.

반정에 참가한 문신과 무신이 모두 이항복의 문인이었다고 <연려실기술>은 이성령(李星齡)이 지은 <일월록(日月錄)>을 인용한다. 이성령의 기록은 반정과 이항복이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는 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항복이 귀양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김류의 자)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이 말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반정에 가담한 문신과 무신이 모두 항복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여 이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라는 이성령의 말은 이항복이 반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만 도리어 이항복이 반정을 적극적으로 도모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긴 이어서 나온 인용문은 이항복이 심지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지적하면서 흐느끼기까지 했다는 내용이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이쯤 되면 이항복이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반정의 주역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확실히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박세채(朴世采)의 <남계집(南溪集)>을 인용하여 이항복이 반정에 끼친 영향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항복은 광해주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서북도(西北道)의 관리 임명을 전적으로 주관하였다. 또 김류를 종사관으로 삼고 무신 신경진(申景禛, 平城)을 비롯한 구굉(具宏, 綾城), 구인후(具仁垕, 綾川), 정충신(鄭忠信, 錦南) 이하와 문사로서 선배인 신흠(申欽)을 비롯한 이정귀(李廷龜), 김상헌(金尙憲)과 후배인 최명길(崔鳴吉, 完城)을 비롯한 장유(張維, 新豐), 조익(趙翼, 浦渚), 이시백(李時白, 延陽) 이하 그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반정공신의 여러 사람들은 대체로 모두 항복이 평소 길러둔 사람들이었으니, 옛날에도 이만큼 사람을 많이 얻은 이가 없었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 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박세채의 기록은 이항복이 실제로 반정을 지휘하지는 않았다는 점만 빼면 반정의 총설계자라는 점을 부각한다.

이항복이 김류와 이귀의 꿈에 나타나 거사를 독려했다는 기록은 <백사행장(白沙行狀)〉에 기록된 내용과도 상호 연결된다.

“무오년 5월에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에 귀양 가 있었다. 하루는 꿈에 선조가 용상에 앉아 있고, 유성룡(柳成龍)ㆍ김명원(金命元)ㆍ이덕형(李德馨)이 함께 입시하고 있었다. 선조가 이르기를, ‘혼(琿 광해의 이름)이 무도하여 동기를 해치고 어머니를 가두어 두니 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항복이 아니면 이 의논을 결정하지 못하겠으니 속히 부르소서.’ 하였다. 이에 항복이 깜짝 놀라 깨어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살아있을 날이 오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이틀 뒤에 죽었다.”

 

선조는 용상에 앉아있고 유성룡(柳成龍)ㆍ김명원(金命元)ㆍ이덕형(李德馨)이 입시하였는데, 선조가 이항복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명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이항복이 죽고, 후일 반정 당일 반정의 주역인 김류와 이귀의 꿈에 이항복이 나타나 거사를 독려하였다는 이야기는 절묘하다.

이항복은 정사년에 폐모(廢母)가 부당함을 간하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 가서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는데, 귀양을 가기 전에 광해군의 실정을 해학으로 지적한 일화 한 토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공은 농담을 즐겼다. 일찍이 비변사 회의가 있던 날 공이 유독 늦게 왔으므로 혹자가 말하기를, ‘어찌 늦었습니까?’ 하니 공이,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하니,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자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공의 이 말은 비록 익살에서 나왔으나, 대개 당시의 일이 대부분 허위를 숭상했기 때문에 풍자의 뜻을 붙인 것이다.”

“환자(宦者, 내시)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당시의 국정을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난했으니 비수를 품은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율곡이 바라는 통치자


율곡이 바라는 통치자

 

소라이: 그러신가요? 선생님은 나라 안 정치의 모든 문제가 임금의 실천의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시지요? 백성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문제보다.

율곡: 그렇습니다. 도덕적인 마음의 자세도 중요하고요. 제가 임금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한 것은 선생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옛날 고대 성왕(聖王)들은 마음 쓰는 것이나 행동이 아주 투명하여 만물이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임금의 뜻을 분명히 보고,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여도 원망하지 않았고, 이롭게 해주어도 은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는 가까운 신하들까지도 임금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한 나라의 최고 어른인 임금이 말씀과 행동을 너무 가볍게 하면, 아래 있는 신하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소라이: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도 최고 통치자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지 않는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율곡: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글을 써 올리기 며칠 전, 우리 임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신하들이 큰 제안을 다투어 말하고 이전에 없었던 일을 하기 좋아하니, 앞으로 우리나라 풍속이 당연히 순박해지고 정치가 참 잘 되겠구나.”

그런데 이러한 임금의 말씀이 나오자 밑에 있는 많은 신하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혹을 가지고 임금의 눈치를 보는 일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착한 일은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옛날, 중국의 사상가 소옹(邵雍)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덕을 높이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높인다.”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덕이 중시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이 중시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지 않고 말로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나라는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임금께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큰 소리만 다투어 말한다고, 어찌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제대로 된 일이 있었습니까? 또한 전하께서는 큰 제안을 옳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그르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그 큰 제안이란 것도 실은 임금을 인도하여 올바른 도리를 행하게 하고 좋은 정치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마땅히 그 의견을 지체 없이 채택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요. 혹시라도 임금이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큰 제안을 다투어 말한다.”하시면서 사실은 신하들의 그런 제안을 비꼬거나 풍자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의 간격이 더 커집니다. 신하들이 제안을 올렸더라도 그것을 임금이 쓰지 않으면 그 제안이 비록 아무리 좋아도 무익합니다. 좋은 제안을 채택하여 쓰지 않으며 그런 제안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면한 현안들이 제대로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소라이: 임금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임금이 좋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소라이: 말씀을 들으니 일리가 있습니다만, 임금에 대한 기대가 저보다는 많으시군요. 저는 그렇게까지 군주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들은 그렇게, 그런 신분으로 태어났고, 우리는 이렇게 신하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다르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사람이라는 점에서 최고 통치자와 우리는 같습니다. 신분만 다르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처럼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마음이 순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의 시정잡배보다 그들은 더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이시군요.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 즉 도덕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군주에게 다음과 같은 것도 요구하셨지요. ⌈만언봉사⌋에서 말씀하신, ‘임금에게 자기 몸을 닦는 요령’입니다.

“자기 몸을 닦는 요령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께서 삼대(三代)의 흥성했던 시대 상황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기약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성학(聖學), 즉 유학공부에 힘써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도록 노력하는데 힘쓰는 일입니다.

셋째는 한쪽으로 치우친 사심(私心)을 버리고 지극히 공평한 도량을 넓히는 일입니다.

넷째는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여 충성스런 조언이 가져올 이익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율곡 : 그렇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침체에 빠지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지요. 그리고 대개는 임금의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고, 그래서 임금을 향한 요구인 것이지요. 제가 우리 임금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 것은, 첫째로 저는 우리 임금의 자질이 매우 훌륭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자하심은 백성을 보호하기에 충분하고, 총명하심은 간사한 자를 분별하기에 충분하며, 용맹은 결단을 내리시기에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임금은 성왕(聖王)이 되겠다는 의지가 없고, 좋은 다스림을 추구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성왕과 같은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 스스로 과소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분발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임금이 자기 몸을 닦는 일에 노력을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진실로 마음을 쏟는다면, 현인을 찾아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고 그들과 함께 폐단을 개혁하여 어려운 시국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소라이: 혹시 그러시면 임금이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면, 사치 풍조를 개혁할 수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율곡: 그 점은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조선의 백성들은 지금 궁핍해 있습니다. 그들의 재물이 바닥난 것이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걷어가는 공물(貢物)을 경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그리고 궁궐에 있는 임금이 비용지출을 줄인다면, 적은 수입으로도 충분히 지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라이: 그렇기는 하지요. 저는 우리 쇼군에게 감히 그런 말을 못했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율곡: 제가 조정에 있을 때 궁중의 사치가 매우 심했습니다.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당시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고 서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궁중의 일입니다.

소라이: 일본에서 쇼군은 그 정도까지 사치스럽지는 못했습니다. 물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천하의 물건은 원래 쇼군 것이다. 쇼군이 물건을 사서 먹을 것이 아니라 징발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하면 그런 주장을 하였겠습니까? 그 정도로 일본 에도시대의 물가는 쇼군의 밥상을 걱정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율곡: 저는 임금에게 이렇게 직언했습니다. 궁정에서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으로 굶주린 사람의 몇 개월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옷 한 벌의 비용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지어도 한 사람을 따로 먹여 살리기가 부족한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습니다. 열 사람이 길쌈을 해도 한 사람의 옷을 따로 마련하기가 부족한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우리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어 추위에 떨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사치의 피해는 천재지변보다도 심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만약 궁중에 있는 임금부터 먼저 절약과 검소에 힘써 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명령을 부지런히 내린다 하더라도 밑에 신하들과 백성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선대 임금들이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한 노력을 살펴보고, 훌륭한 선대 임금들의 비용지출 규모와 사례를 검토하도록 명령을 내려, 궁중의 비용지출을 줄이면 나라 안의 백성들이 모두 그런 정신을 본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정 안팎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 풍습을 고쳐서, 사람들이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내려 준 재물을 아끼고 백성들이 힘을 펴게 될 것입니다.

소라이: 선생님의 그런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을 군주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율곡: 예, 오늘 감사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으며 다시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누지요.

소라이: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라이가 구상하는 사회


소라이가 구상하는 사회

 

소라이: 저는 에도 시가지를 평화로운 시가지로 만들기 위해서 방법을 조금 달리 했습니다. 들어보시지요. 에도에는 원래 거리의 안전을 담당하는 책임 공무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에도 시가지 전체를, 그렇게 넓은 지역 전체에 걸쳐있는 도로를 겨우 한 두 사람의 담당자가 두루두루 통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도둑을 담당하는 공무원도 있지요. 즉 방화나 도둑을 조사하는 공무원이 에도 시가지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에도 거리를 한 두 조직의 공무원으로 구석구석 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곡: 그렇지요. 에도와 같이 큰 도시는 향촌의 시골마을과는 다르지요.

소라이: 옛날에 도둑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있었습니다. 나카야마 카게유(中山勘解由, 1633∼1687)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엄격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도둑을 체포하면 곧바로 사형시켜버렸지요. 그래서 도둑들이 무서워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에도에 막부를 설치한 초기의 지배 방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무력과 권위를 보여줌으로써 나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조심하도록 한 조치였지요.

율곡: 법가주의이군요. 무사의 나라답습니다. 비웃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육이 아니라 엄격한 법에 의해서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모든 도둑을 전부 소탕해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시의 엄격한 유풍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그런 제도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와 비교해보면 막부의 정치 방침도 변했습니다. 요즘 담당자들도 나카야마 카게유와 같은 사람은 아주 드물게 되었습니다. 또 시대가 평화롭게 되면서 무슨 일이든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이 숫자가 적은 인원으로는 에도 전체에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합니다.

율곡: 그렇지요. 많은 관료와 담당자들이 필요하겠지요.

소라이: 일본이나 중국 고대의 법제를 생각해보면 도둑이나 범죄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궁성 수비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현재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요리키(與力)나 도신(同心)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수비대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일은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선례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떤 공무원이 형벌을 집행하는 권한을 쥐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서라도 죄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 서민의 당연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비대는 체포하는 일만을 임무로 하고, 체포한 자는 형벌을 관장하는 다른 공무원에게 넘겨주어 그 공무원이 죄를 조사하여 살리든지 죽이든지 조치를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도둑 담당 공무원이 형벌을 집행하고 있기 때문에 요리키나 도신이 죄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자기 멋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옛날의 법제와 다릅니다.

율곡: 소라이 선생님은 그런 문제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셨군요. 행정의 달인이십니다.

소라이: 과찬이십니다. 계속 말씀드리면, 넓은 에도 시가지에서 무가(武家, 무사들)의 거주지나 일반 시민의 거주지에 숨어 있는 범죄자를 찾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죄인의 체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리들을 양성해두고 그들이 범죄자를 찾는 전담 공무원으로서 직책을 수행해나가도록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자를 적발하는 담당자가 사실은 원래 범죄자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서 범죄자를 적발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래의 제도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그런 직책에 임명된 것이기 때문에 임명된 자는 하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곡: 결국 도둑에게 도둑을 잡게 하는 것이군요. 그러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도둑을 잡는 사람들이 도둑들과 결탁하면 근본적으로 도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요리키나 도신의 급료가 아주 적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편하게 생활할 수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세상의 물가가 모두 크게 올랐기 때문에 누구나 생활이 곤란합니다. 특히 도신과 같은 낮은 신분의 관리는 급료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부업으로 여러 가지 세공물을 만들어 팔아 그 수입과 급료를 합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며 집을 보유하고 자기가 맡은 당번 근무를 수행합니다.

당번 근무라는 것은 한 달에 3일 정도인데, 이렇게 가벼운 근무를 수행하는 것조차도 위와 같은 실정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요리키나 도신과 달리 도둑 담당 조직에 소속된 경우라면, 겨우 한 조직이나 두 조직으로 도둑을 체포하기 때문에 매우 바쁩니다. 매일 밤이나 낮이나 요리키나 도신이 여기저기를 순회하면서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지요. 외출하려면 의복도 집에 있을 때와 다른 것을 입게 되고, 짚신이나 도시락 등에 들어가는 경비도 필요합니다. 너무 가혹한 업무지요.

율곡: 그것은 조선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지방 관리에게 충분한 급료를 못주니 지방 관리들이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먹을 것을 빼앗게 되는 것이지요.

소라이: 예, 관리들이 매일 나가서 돌아다닌다면 안에서 근무할 틈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놔두고라도, 급료가 부족하니 무엇으로 부모와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신분의 관리에게 형벌의 권한을 맡기기 때문에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 임명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언제까지나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율곡: 그렇지요.

소라이: 이런 사태가 된 것은 막부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이묘(大名)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귀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나 지혜가 있더라도 민간의 실정을 잘 모르고 아랫사람들의 생활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학문을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에서 시행한 옛 시대의 법제와 비교 고찰하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옛날부터 전해지는 관례의 형식만을 지키고 정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결국에 이치를 앞세워 살펴본다면 무리한 추진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곡: 결국, 고위 관료들의 문제이고 군주를 둘러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소라이: 저는 그래서 바둑판에 질서 정연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에도 전체를 잘 계획해서 확실하게 장악,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핵심적인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무가(武家) 거주지가 있는 지역도 일반 시민의 거주지처럼 거리마다 나무로 만든 출입구, 즉 기도(木戶)를 설치하여 출입구마다 지키는 사람, 즉 ‘기도 담당(木戶番)’을 두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반 시민들만 그렇게 통제가 되어 있는데, 관료들인 무사들의 거주지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지요.

율곡: 역시 제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시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거리마다 담당자를 임명하여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각 거리에서 상담을 하도록 하고, 도둑이나 혹은 사체를 유기하는 자가 있다면 출입구를 닫도록 합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야간에 일어나면 각목을 부딪쳐 소리를 내거나 대나무 피리를 불어 인접한 거리 거리에 알리도록 합니다. 사전에 규칙을 정하는 것이지요. 또 무사들의 거주지마다 출입문을 설치하여 야간의 통행을 금지합니다. 영주(大名)가 아니거나 혹은 하인에게 창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정도의 신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특히 엄중하게 통과를 금지해야 합니다.

율곡: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소라이: 에도 시가지 전체를 이와 같이 합니다. 그래서 공무로 통행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고 개인적 일이라도 임신부나 급한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러 가는 산파, 즉 조산부(助産婦)나 혹은 의사 등을 보내고 맞이하는 경우에는 각 문마다 차례차례 확인하면서 통과시킵니다. 순차적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통과시키거나 금지한다면 위에 소개한 여러 가지 나쁜 일들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율곡: 하하, 백성들을 철저하게 시가지 내에 가두어서 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 같으면 바로 반란이 일어날 겁니다. 답답하다고.

소라이: 에도에서 모든 무가의 거주지는 원래 직무상 하나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의 거주지에 모아서 거주시키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대번(大番 오반, 에도성의 경비대)이 원래 12조직으로 나뉘어 있는 것에 대응하여, 거리도 1번(一番) 거리에서 6번 거리까지 각각 바깥과 안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2조직에 상응하는 12곳의 거리가 거주 구역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그 때는 대번팀(大番組)의 멤버인 번사들(番士, 당번이 된 무사)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소속되어 있는 요리키나 도신 등 하급 신분의 관리들도 함께 조직별로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직책으로 전근을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다시 새롭게 조직에 들어오는 경우, 그리고 직무에 과실이 있어 면직된 경우도 생기면서 그러한 질서가 흐트러지고 혼란스럽게 된 것입니다.

율곡: 신기한 제도가 있었군요. 하나의 마을이 정부의 한 조직에 대응하도록 짜여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흐트러진 것이지요. 특히 권위가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에 맞는 거주지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가 혼란스럽게 되어 지금은 같은 직책이나 같은 조직에 속한 관리들이 서로 다른 곳으로 나뉘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결과 지금은 다른 직책이나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조직의 무사가 무사(武士)로서의 인품이 갖추어져 있는지, 그 집안의 살림살이가 어떤지 서로 살펴볼 도리가 없게 되었지요.

율곡: 당연하게 그렇겠지요.

소라이: 같은 거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자기 집안의 상세한 일까지 무엇이든지 이웃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사이에 서로가 상세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직장에 출근하면 서로 다른 직책과 다른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간섭하지 않고, 한집 한집이 모두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무사들은 매우 버릇없고 이기적이 되었으며 무슨 일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방탕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그러면 선생님의 제안은 무엇인지요?

소라이: 저는 그래서 어떻게든지 옛날의 법과 제도처럼, 번사들이나 요리키, 도신들도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한 자들은 한 곳에 함께 거주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대표자도 같은 곳에 거주를 시켜 다른 직책을 맡아 전근을 하거나, 신규로 자기 조직에 들어오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거주지를 바꾸어 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직의 대표자는 자기 조직에 속한 자의 사람 됨됨이라든지 뭐든지 상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도둑 담당 관리 등이 자기 부하의 나쁜 일을 모르는 경우는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율곡: 다소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통제방법입니다.

소라이: 만약에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였는데도, 자기 조직에 소속한 사람들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조직을 맡은 책임자가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지 않으면 조직의 책임자로 누구를 임명한다 하더라도 훌륭하게 조직을 통솔해나갈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위와 같이 거주지를 바꿔가면서, 그리고 조직의 책임자까지 한 곳에 거주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로 금방 실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거리마다 담당자를 정해두고 각거리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을 조직이나 직책과는 상관없이 정해둔 담당자가 모두 관리를 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율곡: 마치 현대 일본의 고반(交番)과 비슷하군요. 물론 기능은 많이 다르지만.

소라이: 그리고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하게 교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의 풍속처럼 서로 허세를 부리고 집집마다 자기 멋대로 생활해서는 노름이나 시문(詩文)을 이용한 도박 등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상속이나 양자에 관해서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도 조사할 수가 없으며, 개인의 행실이나 살림살이가 엉망이라고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직급이 낮은 무사이면서 집을 지키는 가족이나 하인이 많지 않을 경우, 만일 화재가 발생하거나 도둑이 들었을 때에 혹은 부하들이 서로 싸움을 할 때에는 그런 사태를 장악하고 처리할 사람이 없어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위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 둔다면, 바둑판에 미리 줄을 그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바둑을 둘 수가 있는 것처럼 조직적으로 일을 처리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이 한다면 처음에는 그것이 부자유스럽게 생각되어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사회 풍속으로 자기들 멋대로 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지장이 생기는 일도 있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에도 시가지는 결국 평온하게 되고 치안이 잘 유지될 것입니다.

율곡: 전부 듣고 보니 매우 이상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농공상을 말씀하시면서 사회전체가 군사조직에 가깝다는 말씀을 하셔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으로는 이상한 제도인 것 같습니다.

소라이: 그렇게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선생님처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이미 일부는 에도시대 초기에 시도했던 제도이기 때문이지요.

율곡: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제도와 법률에 의해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생각과는 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 같군요.

대동사회와 향약


대동사회와 향약

 

율곡: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나 건물에 방화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 심성의 문제가 크지요. 사람들이 드믄 길에서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나이 어린 부랑자들도 그렇고 사람 시체를 몰래 버리는 문제도 그렇고 도덕과 교육의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역시 정통 유학자이시며, 정통 성리학자이시군요.

율곡: 저는 1571년에 청주목사로 임명된 적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향약(鄕約)이라는 것을 만들어 실시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향약이란, 소위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조선 중기에 지방의 사림이 농민이나 노비 등 하층민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농촌의 공동체를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로 이끌어가는 수단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대동사회란 무엇인지요.

율곡: 제가 생각하는 대동사회는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대동사회와 같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큰 도가 행하여지자, 사람들은 천하를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했다.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택하여 정치를 맡겼고, 서로 믿고 화목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지 자기의 어버이만을 친애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 자식들만을 사랑하지 않았다. 늙은이들이 그 생을 편안히 마칠 수 있게 되고, 장년들은 항상 쓰일 곳이 있게 되었으며, 어린아이들은 의지하여 성장할 곳이 있게 되었다. 홀아비나, 과부, 고아 그리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 폐질에 걸린 사람은 모두 다 부양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남자는 자기 직업이 있고, 여자는 모두 돌아갈 남편의 집이 있었다. 재화가 헛되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꺼려하였지만 반드시 자기만 사사로이 감추어 두지 않았으며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간사한 꾀가 막혀서 일어나지 못했고, 도둑이 훔치거나 도적들이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바깥문을 여닫지 않았으니 이것을 대동의 세상이라고 한다.

소라이: 제가 생각하는 사회도 결국은 그런 것이지요. 다만 그 과정이 조금 다르지만요.

율곡: 저는 그 다음해 청주에서의 일을 사양하고 해주로 내려갔다가 고향인 파주 율곡 촌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습니다. 청주목사 때, 서원향약을 만들어 실시하면서 다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임금 앞에서 향약을 반대하기도 했지요.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지요.

“요사이 신하들이 급히 향약을 행하고자 청하므로 주상(임금)께서도 행하도록 명령하셨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향약을 행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이 잘 살도록 하는 일을 먼저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은 나중에 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삶의 고통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으니, 시급히 모든 폐단을 빨리 없애서 거꾸로 매달린 듯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준 다음에야 향약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 교육은 쌀밥과 고기반찬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건강이 아주 나빠서 죽도 잘 소화가 안 된다면 쌀밥과 고기반찬이 아무리 좋은들 먹을 수 있겠습니까?”

소라이: 그렇지요. 배가 부른 뒤에 예의가 있는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야지요.

율곡: 당시 궁정에서 제 의견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어떤 사람은 제 면전에 대고 비난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에는 민생의 곤란이 아무리 심하여도 향약만 행하면 과연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어 정치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렇소.”하고 대답하기에, 제가 그럼 “당신은 능히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있소?”라고 물었지요. 저는 또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부터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도 예속(禮俗: 예의 풍속)을 이루는 일이 있소? 지금 부자간이 비록 지극히 친한 사이라고 하지만 만일 아들의 기한을 생각해 주지 않고 날마다 매질이나 하며 학문을 권한다면 반드시 서로 헤어지고 말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은 어떻겠소?”

제가 당시 그렇게 향약을 반대한 것은, 지방에 가보니 지방에서 큰소리치는 관리나 유지들이 향약을 핑계로 백성들을 매우 괴롭혔기 때문이요. 그것을 걱정한 것이지요. 그런 나쁜 사람들을 누가 단속할 것인가? 만약 향약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반대한 것이지요. 하지만 향약 자체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향약은 필요하지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향약을 시도해서 나중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향약의 체제와 내용이 잘 짜여 있어서 조선 향약 중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소라이: 해주 향약은 어떤 내용인지요?

율곡: 예, 농촌의 같은 마을 사람들, 즉 향약 구성원들 가운데 수재나 화재를 만나면 서로 돕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이 들었을 때나 질병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 그리고 어린 자녀를 두고 어른이 죽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그 남은 자식들을 돌보도록 했지요. 너무 가난한 사람이 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정신으로 그들을 돕게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농촌 사회가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지요.

개혁방법의 차이


개혁방법의 차이

 

소라이: 그런데 선생님의 개혁안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율곡: 무엇인지요?

소라이: 임금에 대한 건의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율곡: 어떻게 많다는 것인지요?

소라이: 예를 들면 ⌈만언봉사⌋(1. 상하가 서로 믿는 실질적인 노력이 없음을 논함)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건의합니다.

“임금께서는 밝은 지혜가 넉넉하시지만 덕이 넓지 못하시고, 착한 것을 좋아하하기는 하시나 의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견을 올리려고 힘쓰면 지나친 월권이라고 의심하시고, 기개와 절개를 높이는 자를 보면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신하 가운데 어떤 자가 여러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면 당파가 있어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의심하시고, 신하 중에 어떤 사람이 죄가 있을 경우, 그를 공격하면 삐딱하게 모함한다고 의심하십니다.”(원문을 현대어 문장으로 의역함, 이하 같음)

저는 우선 이렇게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직언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습니다.

율곡: 허허,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요?

소라이: 저는 제가 제시하는 개혁안(⌈정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최고 직위에 있는 군주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도는 성인이 창조한 것입니다. 또 거꾸로 말한다면 성인이란 도를 창조한 사람이지요. …… 옛날에 도를 예악형정(禮樂刑政)의 제도로 체계화한 사람은 요․순․우․탕 그리 문왕과 무왕 등 이른바 삼대의 군주들입니다. 그들이 성인 중에도 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어디까지나 예와 악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도덕을 완전무결하게 모두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인도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도덕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규 소라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11-212참조)

선생님은 임금에게 덕이 넓지 못하고 의심이 많다고 지적하시지만 사람의 덕은 그 사람의 성(性)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덕이 어찌 하나같이 다 같겠습니까?

율곡: 제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시군요.

소라이: 예, 그렇지요. 선생님이 위에 제시한 내용 외에도 ⌈만언봉사⌋를 보면 군주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필하는 신하들이 맡은 일에 실질적 노력이 없다(臣隣無任事之實)’, ‘경연(經筵)을 해도 성취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經筵無成就之實)’, ‘현인을 등용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招賢無收用之實)’,
‘재이(災異)에 대응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遇災無應天之實)’,
‘여러 정책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群策無救民之實)’
등도 거의 모두 임금을 향한 요구가 아닙니까?

율곡: 구체적으로 어떤 점인지요?

소라이: 예를 들면 경연과 관련하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요즘에는 경연을 자주 열지 않아 신하들이 임금을 접견하는 일도 드물지만, 경연을 열어도 전하께서 예를 차리는 모습이 엄숙하여 참석자들이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문답이 매우 드물지만 전하께서 따져서 묻는 것도 자세하지 못할뿐더러, 정치의 요체와 시대의 당면한 폐단을 물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면, 전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들으시기만 할 뿐, 달리 체험해 보고 실천해 보시려는 실질적 노력이 없습니다. 경연을 마친 뒤에는 대전(大殿) 안이 깊어서 전하를 모시는 신하들은 바라보고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옆에는 단지 내시와 궁녀들만이 있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시고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그것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밖에 있는 신하들은 어떻겠습니까?

율곡: 이런 제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한 나라를 개혁하는데 임금의 의지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위에 열거한 문제들도 임금이 도두가 임금의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의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시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그럼 어떻게 정치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소라이: 저는 우선 정치는 최고 통치자와는 그렇게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제도를 만들면 될 뿐입니다. 말하자면 법과 룰을 만드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그것을 잘 만들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정담의 맨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예를 들면 바둑판에서 치수를 정확히 재서 종횡으로 선을 긋는 일과 같습니다. 바둑판에 선을 그어 넣는 것이지요. 그렇게 전체를 조망한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추진해나가는 것입니다. 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 바둑판에서는 아무리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라도 바둑을 제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획이 없이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또 하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지형을 고려하여 물이 잘 흘러가도록 우선 강의 물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줄기를 만들지 않고 단지 홍수를 막으려고만 해서는 설사 우왕(禹王)과 같은 치수(治水)의 달인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율곡: 정치하는 과정을 중시하시는 군요. 그러니까 단계를 거쳐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지요?

소라이: 구체적인 제도와 법률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에도에 있었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에도에서 시행한 화재 예방 조치이지요. 막부가 에도 시가지에 있는 건축물에 대해서 4면의 벽에 흙을 칠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의 모든 벽을 흙벽으로 칠하라고 지도를 하여 사람들이 자기 집을 모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도에서 일어난 화재가 그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줄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행정지도와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곡: 그러한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그것이 말하자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화재 예방 이외에 막부의 정치에 관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옛 시대에 행해진 정치의 방법에 근거하여 상세하게 제 생각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정담⌋이라고 하는 개혁론입니다.

율곡: 그래서 결국, 선생님의 개혁 구상에는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 점은 저의 개혁론과 너무 다릅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최고 통치자의 의지와 마음이 중요하지 않는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는 최고 통치자보다는 그 최고 통치자가 만들어내는 법률과 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군주의 마음 수양이 아니라, 군주가 만든 제도와 법규가 세상을 바로 잡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율곡: 저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그런 방향이 제가 주장하는 고문사학, 즉 소라이학의 큰 지향점이지요.

율곡: 그럼 바둑판 이야기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런 제안이 있는지요? 한 가지만 소개해주시면 어떨까요? 정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소라이: 예, 우리 에도에서 요즘 문제가 되는 일을 한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요즘 에도에 도둑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치고 있지요. 아니면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야간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강도짓을 합니다. 또 나이어린 부랑자들이 칼을 빼 들고 사람을 위협하여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즐기기도 합니다.

율곡: 한양에도 그런 일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만.

소라이: 심한 경우에는 아이를 길에 버리거나 사람의 시체를 몰래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제지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누가 “사체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면, 그 주변 사람들은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서로 자기 집 앞에는 못 버리게 할뿐입니다. 버리는 행위 자체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집의 담장 바깥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이기 때문에 그곳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니 에도 전체가 무질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에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문제를 보면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율곡학


율곡학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의 소개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율곡학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습니다. 상세히 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율곡: 몇 가지 후인들이 평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저의 학문을 소개하기로 하지요. 먼저 제 학문은 나중에 한국에서 김장생, 김집,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등 서인과 노론 혹은 소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들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일시적이나마 승려였기 때문에 성리학자가 아니라고 논박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계속 성균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고 또 그 사람들이 집권을 하면서 문묘에 종사되고, 조선에서 퇴계 이황의 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존재로 추앙을 받게 됩니다. 사실상 임진왜란 뒤 조선이 끝날 때까지 저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저의 위상은 퇴계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했지요.

소라이: 그렇군요.

율곡: 저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에 근거합니다. 선생님은 성리학을 비판하시지만 조선에서는, 적어도 주류 학자라면 성리학을 벗어나 다른 학문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일본 에도시대보다 학문적인 폭이 좁았지요. 저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성리학 이론을 따지는 편이고, 그런 학문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지요. 공리공담은 싫어했습니다. 실지로 관료생활을 하면서 그런 쓸모없는 토론보다는 실용적인 토론에 더 관심이 많았지요. 나중에 조선에 등장하는 실학은 저의 영향이 큰 것으로 평가됩니다. 말하자면 저의 그런 관점을 실학의 효시로 보기도 하지요.

소라이: 조선에서 실학의 원조이시군요.

율곡: 그런 셈입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저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모두 그런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념적, 교조적인 이론으로 빠진 경우도 많습니다.

소라이: 실학과는 반대되는 경향이군요.

율곡: 저는 조선의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살던 시대는 조선이 건국한 뒤에 시간이 흘러 사회가 쇠퇴해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기존에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고 사치가 만연하며 나라의 쇠락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보았지요.

소라이: 그래서 제시한 것들이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 개혁안이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저는 성리학자로 주자의 이기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리는 형이상자이며 존재의 근원이자 원리이며, 기는 형이하자로 물질적 존재자이지요. 주자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리와 기가 서로 발동한다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했습니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지요. 저는 리와 기가 사실은 하나나 마찬가지라고 보았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선후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일부 후인들은 퇴계의 주리설(主理說)과 대응시켜 주기설(主氣說)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제가 기의 뿌리인 리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또 저는 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理氣不相離),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理氣不相雜). 그리고 이런 것을 합하여 리와 기의 오묘함(理氣之妙)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사실 이론에 치우친 이론일 뿐입니다.

소라이: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문외한입니다.

율곡: 문외한이시라기 보다는 비판자이시지요? 선생님은 이기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소라이: 사실 그렇지요. 그러한 논의에 대해서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율곡: 저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이 발동할 때 도의를 위해서 발동하면 도심이요, 육체를 위해서 발동하면 인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인심과 도심은 한 가지 마음이지만 발동하는 원인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마음은 하나인데, 성명(性命)에서 나오면 도심이요, 형기(形氣)에서 나오면 인심이지요.

소라이: 저는 그러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형기(形氣)를 중시하는 편에 속합니다. 인간에게 도심은 없다. 인심이 모든 것이다, 이렇게 보는 편입니다.

율곡: 그런가요? 더 설명을 드리자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도심이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먹고입고 싶은 마음은 인심이지요. 제 생각에 인심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고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심은 마땅히 보호하고 양육하여 넓혀나가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소라이: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일본 사상에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일부 유학자들은 그 점에 대해서 논의도 하지만 저는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소라이학


소라이학

 

소라이 :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율곡: 어떤 것인지요?

소라이: 고향이 경기도 파주인지요, 강원도 강릉인지요. 태어나신 곳이 강릉이라고 하셔서요.

율곡: 강릉은 외가입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지요. 지금은 오죽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지요. 본가, 즉 아버님 고향은 파주입니다. 지금의 경기도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참동안 성장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인지요? 본가에 가지 않으시고.

율곡: 조선시대에 유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조선도 독자적인 풍속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외가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안은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고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희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습니다.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는데 딸들에게도 유학을 적극적으로 가르치셨지요. 제가 말씀드린 유학은 성리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공자, 맹자, 주자를 어려서부터 배우신 분입니다. 저는 사실 그런 어머니에게 글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소라이: 아, 어머님에게 글과 유학 경전을 배우셨다니 역시 한국에서 신사임당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율곡 : 어머님은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고향이?

소라이: 저는 도쿄, 그러니까 에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가 에도 막부에 출근하는 의사였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들 중 한사람이셨지요. 그래서 어려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14세 때 까지는요. 그때 저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가문에서 가르치는 정통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지요.

율곡: 그러다가 부친과 함께 유배를 가신 것이 군요.

소라이: 아니요, 엄밀히 말씀드리면 부친과 함께 유배를 당한 것은 아니고요. 부친이 쇼군의 미움을 받아서 부친만 유배를 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유배를 가신 것이지요. 다행히 유배지가 어머니 고향이어서 생각보다는 자유스럽고 편하게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유학에 심취해서 좀 더 깊이 유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요.

율곡: 선생님은 일본유학사에서 고문사학파라고 하는 아주 독특하고 독창적인 학파를 세우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상세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고문사학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학파입니다.

소라이: 독특하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만, 중국과 조선에서 깊이 연구한 성리학에 대한 깊이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철학적, 추상적인 이론에는 깊이가 없는 것이 제 학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율곡: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조선에서 최고의 학자그룹에 속한 제 후배학자 다산 정약용도 선생님의 고문사학을 받아들이고 선생님의 학문에 감탄을 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고문사학을 일본의 사상사에서, 즉 일본의 어떤 학문적인 맥락에서 제시하신 것인지요?

소라이: 먼저 고문사학이라는 이름부터 소개를 하겠습니다. 고문사학(古文辭學)이란 말 그대로 옛 글(文)과 단어(辭)를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그러한 옛글과 단어를 잘 연구해서 공자, 맹자를 연구하고 고대의 유학을 연구하자는 학문입니다. 성리학, 그러니까 주자가 만든 학문인 신유학은 비판하지요. 가짜 학문이라고.

율곡: 아, 그런 입장이군요. 그럼 그러한 주장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선생님이 독자적으로 주장하게 된 것인지요?

소라이: 아닙니다. 에도시대에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있었습니다. 거의 동시대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라고 하는 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 그리고 제가 그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우리 3사람을 묶어서 고학파(古學派)라고 하고 고학파 3걸이라고도 부릅니다.

율곡: 고학파란 ‘옛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옛날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지요. 고학파가 말하는 옛날이란 바로 공맹시대, 즉 한나라 이전의 옛날을 말합니다. 그 이후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유학사상은 부정합니다. 주로 주자학을 부정하지요.

율곡: 계속 설명해보시지요.

소라이: 고학파들이 서로 만나서 그런 학문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는 사실 선배 학자인 이토 진사이하고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저 혼자 그분을 좋아하고, 싫어한 것이지만요.

율곡: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소라이: 1704년, 제가 39세 되던 해였습니다. 혼자 공부를 하다가 의심난 곳이 생겨서 이토 진사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대선배님이지요. 당시 진사이는 78세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써 보내놓고 줄곧 그 분의 답장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결국 끝내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사이 선생’이 편지를 받고도 자신을 무시하여 답장을 해주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몹시 큰 상처였지요. 물론 진사이의 책임은 없습니다.

율곡: 왜요?

소라이: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사이 선생은 제가 편지를 보낸 그 다음해에 사망했습니다. 제가 편지를 보낼 당시 이미 그분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진사이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 이토 토가이가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 편지를 자기 아버지 유고집에 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답장도 안 해주고, 무시했으면서도 유고집에는 실었으니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저는 진사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사이를 비판하는 제 문장에 뭔가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하

율곡: 진사이의 학문하고 선생님의 고문사학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요?

소라이: 예, 같은 고학파라도 진사이의 학문은 고의학(古義學)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런 고의학을 고대 문장인 ‘육경(六經)’에 대한 무지와 중국 고대사회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학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진사이는 ⌈논어⌋ ⌈맹자⌋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저의 고학(古學), 즉 고문사학은 ‘육경’을 중시하고 그 ‘육경’에 근거하여 학문을 합니다. 육경이란 고대 선왕(先王)의 사적을 옛날의 말, 즉 고문사(古文辭)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기록으로 공자의 ⌈논어⌋와 ⌈맹자⌋를 읽는 것이지요.

율곡: 명나라에도 고문사학파가 있었지요? 방법이나 지향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만.

소라이: 그렇습니다. 사실 저의 고문사학은 명나라 고문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명나라 때 고문사를 주창하고, 진한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문장을 연구하여 시와 문장을 썼습니다. 이들은 당나라 이전의 서적만을 읽고, 그 언어 그대로 모방하여 시문을 쓰자고 했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데 나중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선의 유학자들은 선생님이 왜 그런 사람들의 방법을 배웠는지 궁금하다고 했지요. 왕세정과 이반룡은 일류급의 문장가가 아닌데, 그들에게 선생님이 방법을 배웠다고 하니 결국 선생님도 별로 훌륭한 인물은 못될 것이라고 하였지요. 하하.

소라이: 하지만 저는 그런 왕세정과 이반룡에게 몹시 감동을 느껴,

“나는 하늘의 은총을 입어 이반룡과 왕세정의 책을 읽고 비로소 고문사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하늘의 계시와도 같이 매우 중시하였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문장 연습의 방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문장을 연구하여 고전 해석을 하는 방법까지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고대의 정치와 제도, 나아가 사상을 연구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지요. 옛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옛 도를 규명해야한다는 것이 제가 제창한 고문사학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율곡: 흥미로운 방법이군요. 우리 조선에서는 그런 분야의 학문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인 이론과 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일변도였지요.

소라이: 제 생각으로 고대 성인의 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의 말(古文辭)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말로 고전을 이해한다면 고전의 참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율곡: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에서 육경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옛 제도와 문물을 서술하는 문장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경을 세밀하게 읽어 거기에 쓰인 말들의 용법에 대해 익히고 또 고대의 구체적인 제도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 논어에 나아가야 비로소 공자의 참된 뜻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율곡: 그러면 그러한 방법론으로 유학을 연구하시고, 그것으로 성리학을 비판하시는 것이군요.

소라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학문은 오늘날 학문 기준에서 본다면 정치학에 가깝지요. 주자는 도덕을 잘 닦으면 정치가 잘 다스려진다고 주장합니다. 성리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면 천하국가도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데, 저는 위정자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심정적인 도덕보다도 그의 정치적인 능력과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율곡: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은 우리 조선의 학자들과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저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한 행위에 마음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더 잘 복종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위정자가 정말 도덕적으로 훌륭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곡: 나중에 마루야마 마사오라고 하는 일본의 학자는 선생님의 그 주장을 매우 극찬하여 정치와 도덕이 완전히 분리되어,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된 정치의 세계가 발견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면서 저는 일본 에도시대 의 유학자들을 대거 저의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진사이학의 몰락을 유도한 것이지요.

율곡: 일본 에도시대 중엽에 일본 사상계의 주류로 떠오르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때문에 막부에서는 선생님의 학문을 경계하고, 결국 이단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게 되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막부의 ‘관정이학(寬政異學)의 금(禁)’ 정책에 따라 급격히 저의 고문사학파는 세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율곡: 어떻게 갑자기 그런 일이 발생했지요?

소라이: 사실 1790년에 단행된 이단(異端) 금지의 정책은 전국적인 것이 아니고 당시 하야시 라잔의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당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라고 하지만 그 집안의 위상이 막부에서 유학과 교육을 담당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율곡: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 당시 공립이었는지요?

소라이: 거의 공립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막부에서 세운.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막부에서 급료를 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막부와 함께 연합하여, 지방의 각 번에 학당을 설치하게 하여 여 정통 성리학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막부에서 우리 고문사학파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선포한 순간 우리 학파는 순식간에 세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학당의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정통 주자학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막부 내의 관료들도 정통 주자학을 배우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우리 학파는 그 기운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일본의 유학사상사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참고로 저희 학파가 몰락한 뒤에 국학파가 등장했습니다. 저희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국학파는 제가 주장한 고문사학의 방법론을 중시했습니다. 즉 고대 문장에 나온 단어나 문장의 참뜻을 중시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후대에 집필된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을 중시한 것이지요. 단지 저는 중국의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국학파들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고대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다릅니다.

율곡: 아,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고문사학과 국학은 일맥상통한 점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