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 반정의 정신적 지주


이항복, 반정의 정신적 지주

 

<연려실기술>에는 계해정사(癸亥靖社) 조목을 두고 인조반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한다.

인조는 1623년 곧 계해년에 김류(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이 중심이 되어 광해군(光海君)을 내쫓고 인조(仁祖)를 옹립하는데, 이를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 부르고 반정이 성공한 후에 계해정사공신(癸亥靖社功臣)을 책봉한다. 김류(金瑬)·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10명은 1등공신,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5명은 2등공신, 박유명(朴維明)·한교(韓嶠) 등 28명은 3등공신이며, 이에 책록된 공신은 총 53명이다.

반정에 참가한 문신과 무신이 모두 이항복의 문인이었다고 <연려실기술>은 이성령(李星齡)이 지은 <일월록(日月錄)>을 인용한다. 이성령의 기록은 반정과 이항복이 밀접한 상관성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는 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항복이 귀양길에 오를 때에 작별하면서 김류에게 말하기를, ‘요사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이는 관옥(冠玉, 김류의 자)뿐이다. 힘써주기를 바란다.’ 하니 김류가 묵묵히 있었으나 김류의 뜻은 이미 이때에 정해졌다고 한다. 이 말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반정에 가담한 문신과 무신이 모두 항복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므로 이러한 일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여 이런 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이 확실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라는 이성령의 말은 이항복이 반정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만 도리어 이항복이 반정을 적극적으로 도모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긴 이어서 나온 인용문은 이항복이 심지어 김류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지적하면서 흐느끼기까지 했다는 내용이다.

“광해주 10여 년 동안에 조정은 문란하여 상하가 마음이 이반되고, 대비를 감금하여 아침저녁으로 없앨 궁리를 하니 이항복이 김류(金瑬)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요사이 임금의 정사가 말할 수 없이 어지러우니 우리 무리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다.’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껴 우니 김류가 그 뜻을 알았다.”

 

이쯤 되면 이항복이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반정의 주역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확실히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박세채(朴世采)의 <남계집(南溪集)>을 인용하여 이항복이 반정에 끼친 영향을 더욱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항복은 광해주 때 체찰사(體察使)로서 서북도(西北道)의 관리 임명을 전적으로 주관하였다. 또 김류를 종사관으로 삼고 무신 신경진(申景禛, 平城)을 비롯한 구굉(具宏, 綾城), 구인후(具仁垕, 綾川), 정충신(鄭忠信, 錦南) 이하와 문사로서 선배인 신흠(申欽)을 비롯한 이정귀(李廷龜), 김상헌(金尙憲)과 후배인 최명길(崔鳴吉, 完城)을 비롯한 장유(張維, 新豐), 조익(趙翼, 浦渚), 이시백(李時白, 延陽) 이하 그 문하에 출입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반정공신의 여러 사람들은 대체로 모두 항복이 평소 길러둔 사람들이었으니, 옛날에도 이만큼 사람을 많이 얻은 이가 없었다. 반정하던 날에 항복이 김류, 이귀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오늘 종묘사직을 위하여 이 거사가 있다. 그러나 다음에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매우 걱정하니 여러분은 힘쓸지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박세채의 기록은 이항복이 실제로 반정을 지휘하지는 않았다는 점만 빼면 반정의 총설계자라는 점을 부각한다.

이항복이 김류와 이귀의 꿈에 나타나 거사를 독려했다는 기록은 <백사행장(白沙行狀)〉에 기록된 내용과도 상호 연결된다.

“무오년 5월에 이항복(李恒福)이 북청(北靑)에 귀양 가 있었다. 하루는 꿈에 선조가 용상에 앉아 있고, 유성룡(柳成龍)ㆍ김명원(金命元)ㆍ이덕형(李德馨)이 함께 입시하고 있었다. 선조가 이르기를, ‘혼(琿 광해의 이름)이 무도하여 동기를 해치고 어머니를 가두어 두니 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항복이 아니면 이 의논을 결정하지 못하겠으니 속히 부르소서.’ 하였다. 이에 항복이 깜짝 놀라 깨어서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살아있을 날이 오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이틀 뒤에 죽었다.”

 

선조는 용상에 앉아있고 유성룡(柳成龍)ㆍ김명원(金命元)ㆍ이덕형(李德馨)이 입시하였는데, 선조가 이항복에게 광해군의 폐정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명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이항복이 죽고, 후일 반정 당일 반정의 주역인 김류와 이귀의 꿈에 이항복이 나타나 거사를 독려하였다는 이야기는 절묘하다.

이항복은 정사년에 폐모(廢母)가 부당함을 간하다가 북청(北靑)으로 귀양 가서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는데, 귀양을 가기 전에 광해군의 실정을 해학으로 지적한 일화 한 토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다.

“공은 농담을 즐겼다. 일찍이 비변사 회의가 있던 날 공이 유독 늦게 왔으므로 혹자가 말하기를, ‘어찌 늦었습니까?’ 하니 공이, ‘마침 여럿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늦었소.’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싸우는 자는 누구던가요?’ 하니, ‘환자(宦者)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하자 여러 정승이 배를 잡고 웃었다. 공의 이 말은 비록 익살에서 나왔으나, 대개 당시의 일이 대부분 허위를 숭상했기 때문에 풍자의 뜻을 붙인 것이다.”

“환자(宦者, 내시)는 중[僧]의 머리털을 휘어잡고 중은 환자의 불알을 쥐고 큰 길 한복판에서 서로 싸우고 있었소.” 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말인데, 말도 안 되는 당시의 국정을 말도 안 되는 말로 비난했으니 비수를 품은 해학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