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이학


소라이학

 

소라이 :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율곡: 어떤 것인지요?

소라이: 고향이 경기도 파주인지요, 강원도 강릉인지요. 태어나신 곳이 강릉이라고 하셔서요.

율곡: 강릉은 외가입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지요. 지금은 오죽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지요. 본가, 즉 아버님 고향은 파주입니다. 지금의 경기도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참동안 성장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인지요? 본가에 가지 않으시고.

율곡: 조선시대에 유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조선도 독자적인 풍속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외가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안은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고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희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습니다.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는데 딸들에게도 유학을 적극적으로 가르치셨지요. 제가 말씀드린 유학은 성리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공자, 맹자, 주자를 어려서부터 배우신 분입니다. 저는 사실 그런 어머니에게 글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소라이: 아, 어머님에게 글과 유학 경전을 배우셨다니 역시 한국에서 신사임당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율곡 : 어머님은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고향이?

소라이: 저는 도쿄, 그러니까 에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가 에도 막부에 출근하는 의사였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들 중 한사람이셨지요. 그래서 어려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14세 때 까지는요. 그때 저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가문에서 가르치는 정통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지요.

율곡: 그러다가 부친과 함께 유배를 가신 것이 군요.

소라이: 아니요, 엄밀히 말씀드리면 부친과 함께 유배를 당한 것은 아니고요. 부친이 쇼군의 미움을 받아서 부친만 유배를 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유배를 가신 것이지요. 다행히 유배지가 어머니 고향이어서 생각보다는 자유스럽고 편하게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유학에 심취해서 좀 더 깊이 유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요.

율곡: 선생님은 일본유학사에서 고문사학파라고 하는 아주 독특하고 독창적인 학파를 세우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상세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고문사학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학파입니다.

소라이: 독특하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만, 중국과 조선에서 깊이 연구한 성리학에 대한 깊이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철학적, 추상적인 이론에는 깊이가 없는 것이 제 학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율곡: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조선에서 최고의 학자그룹에 속한 제 후배학자 다산 정약용도 선생님의 고문사학을 받아들이고 선생님의 학문에 감탄을 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고문사학을 일본의 사상사에서, 즉 일본의 어떤 학문적인 맥락에서 제시하신 것인지요?

소라이: 먼저 고문사학이라는 이름부터 소개를 하겠습니다. 고문사학(古文辭學)이란 말 그대로 옛 글(文)과 단어(辭)를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그러한 옛글과 단어를 잘 연구해서 공자, 맹자를 연구하고 고대의 유학을 연구하자는 학문입니다. 성리학, 그러니까 주자가 만든 학문인 신유학은 비판하지요. 가짜 학문이라고.

율곡: 아, 그런 입장이군요. 그럼 그러한 주장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선생님이 독자적으로 주장하게 된 것인지요?

소라이: 아닙니다. 에도시대에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있었습니다. 거의 동시대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라고 하는 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 그리고 제가 그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우리 3사람을 묶어서 고학파(古學派)라고 하고 고학파 3걸이라고도 부릅니다.

율곡: 고학파란 ‘옛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옛날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지요. 고학파가 말하는 옛날이란 바로 공맹시대, 즉 한나라 이전의 옛날을 말합니다. 그 이후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유학사상은 부정합니다. 주로 주자학을 부정하지요.

율곡: 계속 설명해보시지요.

소라이: 고학파들이 서로 만나서 그런 학문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는 사실 선배 학자인 이토 진사이하고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저 혼자 그분을 좋아하고, 싫어한 것이지만요.

율곡: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소라이: 1704년, 제가 39세 되던 해였습니다. 혼자 공부를 하다가 의심난 곳이 생겨서 이토 진사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대선배님이지요. 당시 진사이는 78세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써 보내놓고 줄곧 그 분의 답장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결국 끝내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사이 선생’이 편지를 받고도 자신을 무시하여 답장을 해주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몹시 큰 상처였지요. 물론 진사이의 책임은 없습니다.

율곡: 왜요?

소라이: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사이 선생은 제가 편지를 보낸 그 다음해에 사망했습니다. 제가 편지를 보낼 당시 이미 그분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진사이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 이토 토가이가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 편지를 자기 아버지 유고집에 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답장도 안 해주고, 무시했으면서도 유고집에는 실었으니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저는 진사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사이를 비판하는 제 문장에 뭔가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하

율곡: 진사이의 학문하고 선생님의 고문사학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요?

소라이: 예, 같은 고학파라도 진사이의 학문은 고의학(古義學)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런 고의학을 고대 문장인 ‘육경(六經)’에 대한 무지와 중국 고대사회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학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진사이는 ⌈논어⌋ ⌈맹자⌋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저의 고학(古學), 즉 고문사학은 ‘육경’을 중시하고 그 ‘육경’에 근거하여 학문을 합니다. 육경이란 고대 선왕(先王)의 사적을 옛날의 말, 즉 고문사(古文辭)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기록으로 공자의 ⌈논어⌋와 ⌈맹자⌋를 읽는 것이지요.

율곡: 명나라에도 고문사학파가 있었지요? 방법이나 지향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만.

소라이: 그렇습니다. 사실 저의 고문사학은 명나라 고문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명나라 때 고문사를 주창하고, 진한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문장을 연구하여 시와 문장을 썼습니다. 이들은 당나라 이전의 서적만을 읽고, 그 언어 그대로 모방하여 시문을 쓰자고 했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데 나중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선의 유학자들은 선생님이 왜 그런 사람들의 방법을 배웠는지 궁금하다고 했지요. 왕세정과 이반룡은 일류급의 문장가가 아닌데, 그들에게 선생님이 방법을 배웠다고 하니 결국 선생님도 별로 훌륭한 인물은 못될 것이라고 하였지요. 하하.

소라이: 하지만 저는 그런 왕세정과 이반룡에게 몹시 감동을 느껴,

“나는 하늘의 은총을 입어 이반룡과 왕세정의 책을 읽고 비로소 고문사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하늘의 계시와도 같이 매우 중시하였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문장 연습의 방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문장을 연구하여 고전 해석을 하는 방법까지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고대의 정치와 제도, 나아가 사상을 연구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지요. 옛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옛 도를 규명해야한다는 것이 제가 제창한 고문사학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율곡: 흥미로운 방법이군요. 우리 조선에서는 그런 분야의 학문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인 이론과 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일변도였지요.

소라이: 제 생각으로 고대 성인의 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의 말(古文辭)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말로 고전을 이해한다면 고전의 참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율곡: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에서 육경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옛 제도와 문물을 서술하는 문장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경을 세밀하게 읽어 거기에 쓰인 말들의 용법에 대해 익히고 또 고대의 구체적인 제도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 논어에 나아가야 비로소 공자의 참된 뜻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율곡: 그러면 그러한 방법론으로 유학을 연구하시고, 그것으로 성리학을 비판하시는 것이군요.

소라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학문은 오늘날 학문 기준에서 본다면 정치학에 가깝지요. 주자는 도덕을 잘 닦으면 정치가 잘 다스려진다고 주장합니다. 성리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면 천하국가도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데, 저는 위정자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심정적인 도덕보다도 그의 정치적인 능력과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율곡: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은 우리 조선의 학자들과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저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한 행위에 마음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더 잘 복종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위정자가 정말 도덕적으로 훌륭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곡: 나중에 마루야마 마사오라고 하는 일본의 학자는 선생님의 그 주장을 매우 극찬하여 정치와 도덕이 완전히 분리되어,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된 정치의 세계가 발견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면서 저는 일본 에도시대 의 유학자들을 대거 저의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진사이학의 몰락을 유도한 것이지요.

율곡: 일본 에도시대 중엽에 일본 사상계의 주류로 떠오르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때문에 막부에서는 선생님의 학문을 경계하고, 결국 이단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게 되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막부의 ‘관정이학(寬政異學)의 금(禁)’ 정책에 따라 급격히 저의 고문사학파는 세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율곡: 어떻게 갑자기 그런 일이 발생했지요?

소라이: 사실 1790년에 단행된 이단(異端) 금지의 정책은 전국적인 것이 아니고 당시 하야시 라잔의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당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라고 하지만 그 집안의 위상이 막부에서 유학과 교육을 담당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율곡: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 당시 공립이었는지요?

소라이: 거의 공립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막부에서 세운.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막부에서 급료를 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막부와 함께 연합하여, 지방의 각 번에 학당을 설치하게 하여 여 정통 성리학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막부에서 우리 고문사학파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선포한 순간 우리 학파는 순식간에 세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학당의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정통 주자학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막부 내의 관료들도 정통 주자학을 배우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우리 학파는 그 기운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일본의 유학사상사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참고로 저희 학파가 몰락한 뒤에 국학파가 등장했습니다. 저희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국학파는 제가 주장한 고문사학의 방법론을 중시했습니다. 즉 고대 문장에 나온 단어나 문장의 참뜻을 중시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후대에 집필된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을 중시한 것이지요. 단지 저는 중국의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국학파들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고대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다릅니다.

율곡: 아,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고문사학과 국학은 일맥상통한 점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