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선조를 만나다


율곡, 선조를 만나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새벽 2시경 경복궁 내 작은 침소인 양심당(養心堂)에서 조선 제 13대 왕 명종이 승하하였다. 그의 나이 34세로 재위 22년째였다. 그는 어머니 문정왕후와 외삼촌 윤원형의 위세에 눌려 단 한순간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해 보지 못한 불운한 군주였다.
명종이 위독한 상태를 보이던 6월 27일 한밤중에 다음 왕이 결정되던 순간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비 심씨가 대신인 이준경과 심통원을 급히 불러 침전으로 입대(入對)하게 했을 때 상은 이미 인사불성 상태였다. 준경이 앞으로 나아가 큰 소리로 “신들이 왔습니다.” 했으나 상은 반응이 없었고, 준경이 또 사관을 시켜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올리게 했으나 상은 역시 살피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준경이 왕비에게 아뢰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사직의 대계(大計)를 정해야 합니다. 주상께서 고명(顧命: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함)을 못하실 입장이니, 당연히 중전께서 지휘가 있으셔야겠습니다.”하니, 왕비가 답하기를 “지난 을축년(1565년)에 주상으로부터 받아 둔 전지가 있으니, 모름지기 그 사람을 사군(嗣君:왕위를 이은 임금)으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했다. 이는 을축년 9월, 상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중전이 봉서(封書) 하나를 대신에게 내린 바 있었는데, 하성군 이균(李鈞)을 사군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준경 등은 배사(拜謝)하며 아뢰기를 “사직의 대계는 정해졌습니다.”했다.
《선조수정실록》 권1, 총서

명종이 세상을 떠난 6월 28일 다음 왕이 될 하성균 이균은 모친상을 당해 사직동에 있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그의 나이 16세였다. 새벽 2시경 명종이 눈을 감자 도승지 이양원을 비롯한 몇 명이 사직동 사저로 방문했다. 그러나 아직 새벽이어서 문이 닫혀 있었고 이들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다.
날이 밝고서야 이양원 등은 빈소를 지키던 이균에게 중전의 명을 전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울면서 사양하던 이균도 마침내 의관을 갖추고 경성전(慶成殿)으로 들었다. 경복궁 내 서쪽에 있던 작은 침전인 경성전은 명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었다.
대궐에 들어온 이균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즉위식에 나오라는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균은 경성전의 상차(喪次:상주가 머무는 방)에 머물며 나오지 않았다. 인순왕후와 대신들의 청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근정전으로 나아가기는 했으나 용상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가? 임금 자리는 꿈에도 꿀 수 없었던 후궁의 손자 아닌가? 거듭되는 주청에 결국 하성군은 용상에 올라 백관들의 하례를 받았다. 조선의 역사에서 최초로 후궁의 소생으로 왕이 된 선조 임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선조의 즉위는 사림들, 특히 신진 사림들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라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참으로 지긋지긋했던 척신들의 공포정치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즉위식에 참석한 조정 대신들은 어린 신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나라의 미래를 점쳐보느라 바빴을 것이다. 선조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다 궐내에서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특히 이날 즉위식이 끝나고 신왕의 유모가 화려한 가마를 타고 들어와 무언가를 청탁했다. 그러나 어린 신왕은 청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참람 되게 가마를 타고 들어 온 것을 꾸짖었다. 그 바람에 유모는 집으로 갈 때 걸어서 가야 했다. 또 선조는 즉위하자마자 환관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늘 편전에 묵묵히 앉아 독서에 전념했다. 이에 조정과 재야에서는 성덕(聖德)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높아만 갔다.
선조의 즉위는 바야흐로 사림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권을 잡은 사림은 우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을 갔던 노수신, 유희춘 등을 다시 기용했다. 또한 그동안 관직에 나아가기를 꺼려했던 이황 등 명망 높은 사림들도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시기이다.
조선 국왕 27명 중에서 스승 복이 가장 많았던 인물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선조일 것이다. 이황, 기대승, 이이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성리학의 최고봉들이 그에게 학문적 기초를 놓아주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사흘이 지난 7월 6일, 그가 처음 행사한 인사발령이 바로 이황을 예조판서 겸 경연과 춘추관을 책임지는 동지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때 이황의 나이는 이미 67세였다. 이황은 20여 일 정도 한양에 머물다가 8월 1일 사직을 하고 고향인 안동 도산으로 내려갔다. 10월 1일 선조는 자신이 이황의 낙향을 말리지 못한 것은 경황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경연에서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다. 11월 4일 경연에 참석한 이황은 선조에게 《소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소학》을 통해 사람됨의 본바탕을 함양한 후에 《대학》을 읽어야 통치의 기본이 바로잡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11월 17일 경연에서는 요순 임금이 인으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대목의 《대학》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황이 사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듬성듬성 선조의 학문에 도움을 주었다면, 이황보다 한참 어린 기대승은 훨씬 적극적으로 사림의 세계관을 선조의 머릿속에 담아준 인물이다. 기대승은 선조 즉위년(1567년) 10월 23일 41살의 나이로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된 이후 연일 선조의 학문 연마를 도왔다. 10월 23일의 첫 경연에서부터 기대승은 군자-소인론을 바탕으로 기묘사화 이후 계속된 사림에 대한 탄압을 이야기하면서 마땅히 시비를 가려 억울하게 당한 이들을 풀어줄 것을 선조에게 요청했다. 그는 “어진 이 하나가 참소를 받고 물러가면 사방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은 세상을 등지고 발걸음을 멀리할 것이며 조정에 나오는 자들은 녹만을 탐할 뿐입니다.”고 강조하였다.
율곡 이이가 경연에 참석해 선조의 학문을 돕기 시작한 것은 선조 2년(1569년) 8월 16일부터였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18세, 율곡의 나이는 34세였고 직위는 홍문관 교리였다. 두 사람이 이때 처음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학술 토론의 장인 경연에서는 첫 대면이었다. 《맹자》를 진강한 후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으로서는 한 시대의 사조(思潮)가 어떠한지를 살펴서 그 사조가 잘못되었으면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권간이 국정을 전단한 뒤를 이어받아 사습(士習)이 쇠약하고 나태해져 한갓 녹(祿)을 받아먹고 자기 한 몸 살찌울 줄만 알지, 충군 애국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설령 한두 사람 뜻을 가진 이가 있어도 모두 시속(時俗)에 구애되어 감히 기력을 발휘하여 국세를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속의 풍조가 이러하니 성상께서는 마땅히 크게 일을 성취시키겠다는 뜻을 분발하시어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킨 뒤에야 세도(世道)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척신정치에 의한 폐해를 회복하고 새롭게 혁신하는 정치를 펴기 위해서는 임금 스스로 올바른 공부법에 바탕을 둔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대학》을 염두에 두고서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단지 부지런히 경연에 나와 고서(古書)를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하는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실지로 공효가 있게 된 다음에야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정치 문제에 대해서 “현재 민생은 곤핍하고 풍속은 박악(薄惡)하여 기강은 무너지고 선비 사회의 풍토는 바르지 못한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몇 해가 되었는데도 그 다스림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전하의 격물 치지 성의 정심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만약 전하께서 (지금처럼) 유유범범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형식만을 일삼는다면 비록 공자와 맹자가 좌우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리를 논한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유익함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9월 25일에 율곡은 선조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올렸다. 이 책은 율곡이 지난 한 달여 동안 동호독서당에 머물면서 임금의 학문하는 방법과 정치하는 도리를 문답체로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율곡은 먼저 군주의 길과 신하의 길을 각각 논하고 이어 좋은 군주와 좋은 신하가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역사적 사례를 바탕으로 설명하였다. 이어 그는 조선 역사를 간략히 개관하면서 도학이 땅에 떨어지게 된 경위를 정리하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논하였다. 다음에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교육을 진작시킬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면서 정명(正名)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임을 역설하면서 그 끝을 맺고 있다.
그리고 이날의 경연에서 율곡은 “세종과 세조 같으신 분은 군신(群臣)들과 서로 친하기를 가인(家人)이나 부자(父子)처럼 하였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은혜와 덕에 감격하여 사력을 다했던 것”이라면서 “지금 신이 누차 입시(入侍)하여 전하를 뵈니 신하들의 말에 조금도 응수하여 대답하지 않으십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다 직설적으로 선조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대저 한 집안의 부자와 부부가 아무리 지친의 관계라 하더라도 만약 아비가 자식에게 답하지 않거나 지아비가 아내에게 답하지 않으면 그 정(情)도 오히려 막히게 되는데, 하물며 명위(名位)가 현격한 군신(君臣)의 관계이겠습니까. 여러 신하가 상의 얼굴을 뵙게 되는 것은 경연 자리에서뿐이기 때문에 입시하는 신하들이 미리 아뢸 내용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궁리하고 정리해 놓았다가도, 상의 앞에만 오게 되면 천위(天威)에 겁을 먹고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여 10분의 2~3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상께서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응수를 해주신다 해도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뜻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입을 꼭 다물고 말씀하지 않음으로써 저지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전하를 위해 헤아려보건대 널리 선책(善策)을 구하여 시대를 구제하는 데에 급급하셔야지 깊숙이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셔서는 안 됩니다. 명종대왕께서 200년 종사(宗社)를 전하에게 부탁하셨는데 전하께서는 그 우환을 받으신 것이지 그 즐거운 세상을 이어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200년 종사가 날로 위태로워지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진작시킬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해 선조는 “학문은 온축하여 덕행이 된 뒤에야 밖으로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법인데, 덕행이 없는 몸으로 어떻게 사업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삼대의 융성한 정치도 마땅히 점진적으로 시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는데, 한마디로 학문이 아직 갖추어 있지 않은데 정사를 서두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대승, 이이 같은 소장 사림들이 요구하는 급진개혁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뜻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문제의 본질은 학문 연마의 완급이나 혹은 개혁의 속도 조정이라기보다는 선조 자신의 성품, 즉 협량과 자신감 결여에 있었다. 어린 나이에 정통성 없는 즉위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임과 동시에 선조의 타고난 품성이 더해져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협량과 자신감 결여는 두고두고 신하들에 대한 선조의 불신, 선조에 대한 신하들의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선조는 변덕이 심하고 잘난 척하기를 좋아하는 왕이었다. 선조의 이러한 면을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선조 7년(1574년), 선조의 나이 스물네 살 때의 일이다. 이때 사간원 정언 김성일이 경연에 참석했다. 이날 선조는 경연관들에게 “경들은 나를 전대의 제왕에 비한다면 어느 임금과 견주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정이주가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십니다.”하고 말했다. 요순이라면 성군의 대명사가 아닌가. 이 말을 들은 선조는 내심 흐믓해 했다. 보다못한 김성일이 “전하는 요순 같은 임금이 될 수도 있고 걸주(桀紂)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조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어찌 한 사람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에 김성일은 다시 한 번 선조의 고질적인 병통(病痛)을 날카롭게 찌른다. “전하께서는 천자(天資:타고난 품성이나 소질)가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시기에 어렵지 않으나, 다만 신하가 옳게 간하는 말을 거부하시는 폐단이 있으시니 실로 염려되는 것입니다.” 어느새 신하들에게 데면데면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정곡을 건드린 김성일의 말에 선조는 낯빛이 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신하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유성룡이 나섰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옳습니다. 요순이라는 대답은 임금을 격려하는 말이고, 걸주라는 대답은 경계시키는 말입니다.” 선조는 그제야 노기를 풀었다. 만약 유성룡이 적시에 무마하지 않았다면 김성일에게 후환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신하들의 권력 다툼을 이용했다. 선대 왕들 중에서도 왕권 강화를 위해 집권 세력과 견제 세력을 동시에 키운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선조의 경우에는 세력의 균형이라는 정치적 신념보다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처분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경쟁구도에서 훈구파가 사라짐으로 해서 사림의 분열이 생겼지만, 사림의 분당이 선조의 집권기에 시작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조선 최대의 국란에 미리 대처하지 못한 것도 잘못이지만 전쟁이 일어난 후 선조의 행보는 더욱 실망스럽다. 선조는 유린된 국토를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왕권 유지에만 급급했다. 이순신과 같은 전쟁영웅에 대해서도 질투하고 견제할 정도였다. 서인의 모략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쟁이 진행되던 와중에 이순신을 파면하고 백의종군하게끔 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전공을 세운 사람보다 자신을 호종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했다.
선조는 실제로 명에 가서 원병 파견을 요청했던 정곤수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했던 이항복의 공로를 가장 높이 평가하여 포상했다. 그러면서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무장들의 공로를 평가하는 데는 매우 인색했다.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明軍)의 힘 때문이었다. 우리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운좋게 남은 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했다.“ 거나, ”명군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모두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명나라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선조실록》 선조 34년 3월 14일)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선조가 비정상적으로 명군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그럴수록 명나라에 군사를 요청할 것을 결단한 자신의 역할이 부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릉 유림, 해주 율곡 종택에 가다


강릉 유림, 해주 율곡 종택에 가다.

 

서남기행(西南紀行)』은 두 사람의 강릉 유림이 계미년(1943년) 4월 18일(양력 5월 21일)부터 5월 5일(양력 6월 7일)까지 17일간 한반도 서쪽의 해주에서 남쪽의 안동에 이르는 지역을 여행하면서 선현들의 유적지를 답사한 기행문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서남기행』은 강릉시 운정동 조옥현가의 소장본으로 가로 14.6cm×세로 24.6cm의 크기에 총 42장, 84면으로 한지(韓紙)에 청색 세필로 쓴 필사본이다. 『서남기행』을 쓴 사람은 선교장주(船橋莊主)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의 아들인 경미(鏡湄) 이돈의(李燉儀)이다. 그리고 여행에 동행한 사람은 성균관 전적을 지낸 심의섭(沈儀燮)이었다.
필자는 여행에 나서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함은 성인의 가르침인데, 나는 본래 산수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가까운 명승지는 거의 다녀보았지만 선현(先賢)의 고택과 유적은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이는 비단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재주가 본래 노둔(魯鈍)하여 6세에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겨우 통감(通鑑) 3권도 다 마치지 못하였고 매일 3~4행의 과정(課程)도 암기하지 못하였다. 12세에 동진학교(東進學校)에 입학하였지만 멀지 않아 폐교됨으로써 신구(新舊)의 학문을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혹 여가가 있더라도 용맹정진하는 힘이 없었고 다만 향하여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오늘 나의 동지 오헌(梧軒) 심의섭 형이 기어이 함께 동행 하고자 하니 가히 이난(二難: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사람)의 어울림이라 하겠다.

『서남기행』 중에서 해주 율곡 선생의 종택을 방문하고 석담구곡을 유람한 내용까지 만을 발췌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계미년(1943년) 4월 18일(금요일) 양력 5월 21일 맑음
바야흐로 출발하고자 할 때 마침 오늘이 읍면협의원 총선거일이어서 출발 예정시각을 변경하고 먼저 면사무소에 가서 투표를 한 후, 친우 심의섭과 함께 자동차부로 갔다. 발차 시간이 아직 멀었으므로 상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0시에 자동차를 타고 4시에 양양역에 도착하였는데 기차는 5분전에 이미 출발하여서 부득이 역 앞의 양양여관에서 숙박하였다. 오늘의 행정(行程, 여행 길)은 도보(徒步) 10리, 자동차 130리였다.

4월 19일(토요일) 양력 5월 22일 맑음
해주행 2등 열차표를 사서 원산행 기차에 승차한 것이 오전 6시였다. (기차에서 내뿜는)검은 연기는 하늘에 가득한데 시험삼아 앞으로 나가 바라보니 끝없는 동해 바다와 설악산과 금강산이 숲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후 3시에 안변역에 도착하여 경성행 기차로 갈아타고 10시에 경성에 도착하였는데, 수많은 전등은 별들과 그 밝음을 다투고 있고 오르고 내리는 승객이 가히 인산인해였다. 안동행 기차는 10시에 출발하나 2~3등 열차표는 물론이고 전 좌석이 만원이라 밤새도록 서서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중도의 수색역에서 하차하여 반야(半夜)라도 편히 잘 생각으로 수색역에서 내렸으나 여관은 물론 음식점도 없었다. 밤은 이미 깊었는데 두 사람이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김천대식당(金千代食堂)으로 안내해주었으나, 이 곳 역시 영업시간이 넘었다고 하면서 재삼 간청하였으나 불허하므로 어쩔 수 없이 역 대합실에서 묵었다. 오늘 기차로 간 거리가 1천리였다.

4월 20일(일요일) 양력 5월 23일 맑음
오전 6시에 안동행 기차를 타고 장단역에 도착하니 여기서부터는 개성이 가까워서 종종 삼포(蔘圃)가 바라다 보였다. 개성역에 도착하여 대성여관(大成旅館)에서 아침을 먹고 안내자 한 사람을 구하여 고적(古跡)을 찾아 나섰는데, 먼저 옛 궁궐터 만월대(滿月臺)와 인삼관(人蔘館)을 관람하였다. 인삼관은 특별히 서양식으로 새로 지은 건물인데 기문(記文)은 경학원 제학 공성학(孔聖學)이 찬(撰)하였다. 1년근에서부터 5년근까지 건삼을 진열하고 생삼(生蔘)을 약수에 담가 유리병에 넣은 것 등을 감상하였다. 개성에 온 것이 이번까지 세 번이나 왕씨 후예는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다행이련가 불행이련가.
인삼관에서 북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옛 궁궐터 만월대가 바라보인다. 만월교(滿月橋)를 지나 신봉문(神鳳門) 옛 터를 찾아보고 수십 보 앞으로 나가면 고색창연한 십 수개 층의 돌 계단이 나오고 이를 오르면 경회(慶會)․장화(長和)․원덕(元德) 등의 여러 궁전과 전문(殿門)의 초석(礎石)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옛날의 문물제도를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궁궐터가 다른 곳과 다른 점은 남북은 장방형이고 동서는 협소한데, 그 산세를 살펴보면 송악 높은 봉우리가 북방을 누르고 주맥(主脈) 일룡(一龍)이 굼틀거리며 이어져 만월대에 이르렀다.
만월대 위에서 굽어보니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가옥제도도 다른 곳과 달라 좌우는 초옥(草屋)이 조밀하고 와옥(瓦屋)이나 돌로 지붕을 이은 집들은 중부에 많이 있어서 아직도 옛날의 규모를 보이고 있었다. 언어 또한 달라서 한양은 내려간다고 칭하고, 송경(松京:개성)은 올라간다고 칭하였다.
만월대 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선죽교를 찾아서 계곡을 따라 가다보니 시가지 동남쪽 5리쯤 되는 곳에 두 개의 석교(石橋)가 나왔다. 그 중 한 곳은 돌 난간을 두르고 있으니 이 곳이 곧 포은 정선생이 성인(成仁)한 다리였다. 혈흔은 완연히 변하지 않았으나 냇물이 말라 있어 물에 깨끗이 씻긴 선홍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며 비각(碑閣)을 찾아뵈니 ‘고려충신 포은 정선생 성인비(高麗忠臣圃隱鄭先生成仁碑)’라고 크게 써 있고, 좌우변에는 ‘일대충의 만고강상(一代忠義萬古綱常)’ 8자가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늘 습기를 머금고 있으므로 세칭 읍비(泣碑)라 한다고 하였다. 다리 북쪽 아래에 비각이 있으니 영묘 고묘 양조 어제비(英廟高廟兩朝御製碑)가 나란히 서있는데 단청이 아직도 새것 같았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선생의 유허(遺墟)인 숭양서원(崧陽書院)이 나온다. 수직(守直)의 안내로 정문을 들어서면 동서재가 좌우로 나뉘어 있고 정면 강당의 좌우에는 온돌방이 각 2칸씩 있으며 중앙의 6간 대청에는 시문 현판(懸板)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강당 뒤편 삼문내의 묘우(廟宇)에는 정문충공(정몽주), 우문정공(우현보), 서문강공(서경덕), 김문정공(김상헌), 김문정공(김육), 조문효공(조익)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우측의 별실에는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수직의 집에서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고려시중 우현보의 유허비각이 있고, 언덕 위의 두 동의 단청 건물은 박물관으로서 서화, 도자, 불상, 금속 등 고려의 옛 물건들을 진열하였다.
정오경에 기차로 출발하여 토성(土城)역에서 해주행 기차로 갈아타고 연백 등을 거쳐서 밤 9시 경에 해주에 도착하였다. 소지한 요깃거리로 저녁을 대신하고 대양여관(大洋旅館)에 숙박하니 오늘의 행정(行程)은 보행 20리, 차행 3백 3십리였다.

4월 21일(월요일) 양력 5월 24일 맑은 후 흐림
오전 9시에 신천(信川)행 자동차를 타고 석담(石潭)을 향해 가면서 좌우의 들판을 바라보니 황해도는 연로(沿路)의 다른 곳에 비해 극히 풍요롭고 윤택하여 각종 곡식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부녀자들이 집밖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며 늙은 부녀자들이 어린 손자를 업고 전답 사이를 배회하는 모습이 고대의 순박한 풍습이 아니라면 신사조(新思潮)일 터인데 여하간 볼만한 광경이었다.
고산면 연당리에서 하차하였는데 곧 송애(松涯) 박공의 자손이 세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리쯤 가면 은병정사(隱屛精舍)의 입구이니 떡 한 그릇을 사서 점심을 대신하고 소주 한 되는 9곡(九曲)행에 필요하므로 미리 사서 구곡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계곡을 건너니 경관이 그윽하여 경건한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은병정사 앞 5곡(五曲) 돌다리를 다시 건너니 이곳이 바로 선생의 고택이었다. 문을 들어서니 한 노인이 단정히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교리 어른이 집에 계신가를 물으니 출타하여 부재중이라 하면서 우리 두 사람의 사는 곳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자신은 옥산(玉山)의 자손으로 서울에 사는 이종배(李鍾培)라고 하는데, 행동이 방정하여 가히 현사(賢士)의 자손이라 할 만 하였다.
잠시 한담을 나눈 후 혼잣말로 교리 어른이 어찌 아직도 오지 않을까 하더니 곧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종배씨가 한 노인을 모시고 왔는데, 의관이 정숙함은 물론이요 행전을 아울러 착용하고 있으니 이 어른이 곧 선생의 13세손으로 당년 70여 세의 종문(鍾文)씨였다. 절을 하여 뵙고 온 이유를 고하니 주인어른이 답하기를, 작년에 강릉에 갔다가 활래정을 지나면서 주인이 부재중이란 말을 들어 면회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잠시 후 국수를 대접하여 두 사람이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오후가 지나 물러갈 것을 고하니 주인어른이 힘써 만류하며 말하기를, 천리 먼 길을 오셨는데 총총히 이별함은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하인에게 명하여 행구(行具)를 옮겨오게 하고 3남 인희(璘熺)군으로 하여금 9곡을 안내하도록 하니 그 성의에 감격스러웠다. 선현의 고택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 본래의 뜻이어서 사양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인희군과 동반하여 먼저 은병정사로 갔는데 정문의 좌측에 요금정(瑤琴亭)이 있고 후면에 있는 고산구곡담기실비(高山九曲潭紀實碑)는 한산(韓山) 이희현(李羲玄)이 쓴 것이다. 좌측에 풍영정(楓咏亭) 세 글자를 바위에 새겨 놓았고, 그 옆의 소현서원중건기실비(紹賢書院重建紀實碑)는 이교리가 찬하고 연안(延安) 차봉대(車鳳大)가 전(篆)하였는데 임오년 8월에 세웠다. 비의 후면에 의연인(義捐人)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 공경하는 예에 흠결로 여겨졌다.
정문 안에는 은행나무와 노송나무가 좌우에 서있고 정면 문미(門楣)에 있는 은병정사의 현판은 선생이 강학하던 당시의 정사를 소현서원으로 개칭하였다가 무진년에 철폐된 후 중건시에 옛 현판을 다시 건 것이다. 강당 앞의 묘정비 기문은 강재(剛齋) 송공이 찬하고, 고동(古東) 이판서가 쓴 것이다.
묘내에 들어가 율곡 등 여러 선생의 위패를 참배한 후 요금정에 올라 바라보니 십여 칸의 수직가(守直家)와 4~5동의 초가, 그리고 수백년된 느릅나무가 맑은 계곡 주위에 둘러 서 있으며 개울 건너편에는 5곡(五曲) 은병이 서있으니 맑은 계곡과 흰 바위 등의 시원한 풍광이 진실로 지극히 아름다웠다. 이 정자는 이지촌(李芝村) 선생이 창건한 곳으로 제현의 시문판이 줄지어 걸려 있다.
세 사람이 가져간 소주로 대작하고 산기슭을 끼고 개울가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곧 청계당(聽溪堂)이었다. 두 그루 은행나무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이는 선생이 당시에 손수 심었으니 3백여 년간을 수호한 것이다. 4곡(四曲)의 맑은 계류가 앞에 있고 무수한 봉우리는 뒤에 펼쳐져 있다. 강당으로 올라가니 선생의 시판이 중청(中廳)에 걸려 있고, 좌우의 각 1칸 방은 창문과 벽이 낡고 헐었으며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였다.
강당 서쪽에 석정(石井)이 하나 있는데 한줄기 맑은 샘이 석벽으로부터 솟아나오니 곧 선생이 늘 마시던 샘이다. 우암(尤菴)이 쓴 ‘수불인황 지불인폐(水不忍荒地不忍廢)’ 8자를 8분하여 해서(楷書)로 새겼으며, 그 곁에는 강재(剛齋) 송공의 석정명(石井銘)이 있으나 글자가 작고 오래되어 이끼가 끼어 자획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험한 바위 길을 올라 수백 보를 나아가니 우암이 쓴 ‘고산청허대(高山淸虛臺)’라는 각석(刻石)이 있고, 여기서부터 등나무 줄기를 잡고 올라가면 곧 가공암(架空庵) 유지(遺趾)가 나오는데 그 터는 수십 칸에 불과하나 경치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1곡(一曲)과 2곡(二曲)은 수리조합 저수지에 편입되어 큰 호수로 변하여서 당시의 유적을 다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탄하며 교리댁에 돌아와 선생의 수찰(手札) 여러 편과 사임당 초충화 한 폭, 구곡병풍 한 좌를 차례로 봉람(奉覽)하고 가져간 석우(石友) 박부현(朴富鉉)이 그린 구곡화본과 비교하여 살펴보니 대동소이하였다. 원래의 그림과 병풍은 정조(正祖)의 명으로 도신(道臣)이 실사(實寫)하여 진상한 것이라 하였다.
현 가옥은 선생의 현손(玄孫)인 첨지공(僉知公) 정이 중건한 것으로 내외재(內外齋) 및 행랑채가 근 60칸으로 태반이 퇴락한 느낌이었다. 대청에는 ‘무이석담(武夷石潭)’, 그리고 대청 기둥에는 퇴계가 쓴 ‘고거문장(高居文章)’, 우암이 쓴 ‘은귀정(恩歸亭)’ 등의 여러 현판이 걸려 있으며 대청의 유리장 안에는 수천 권의 서책이 소장되어 있다. 동쪽 헌가(軒架) 위에는 격몽요결의 각판(刻板)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집 뒤의 산으로 올라가 살펴보니 오좌자향(午坐子向)에 배산임류(背山臨流)여서 가히 웅려(雄麗)한 집터라 할 만하였다.
교리어른이 저녁을 함께 들고 우리들의 침구를 비치하도록 한 후 별가(別家)로 간 뒤 조금 있다가 장손인 27살의 재능(載能)군이 출타했다가 돌아와서 종배(鍾培) 노인과 더불어 선생의 유사(遺事) 및 경향의 학문에 대해 밤늦도록 토론하다가 취침하였다. 오늘의 여행거리는 차행 50리, 도보 10리였다.

4월 22일(화요일) 양력 5월 25일 맑음
이종배씨에게 고별하고 인희, 재능 두 사람과 함께 교리어른의 별가에 가서 고별하니, 우리들의 여정을 염려하여 구곡 가운데 4, 5곡의 경치가 뛰어나고 그 외는 별로 볼 것이 없으므로 구곡을 보러 문산으로 가면 30리를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여행 말고는 다시 오기가 어렵고 천리행정을 하는 터에 어찌 반나절의 수고를 꺼리겠는가.
은병정사의 직자(直子)가 대신 짐을 매고 동북방의 계류를 따라 몇 리를 가니 곧 6곡(六曲) 조계(釣溪)가 나왔다. 평야의 전답과 옹립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보이는데 수목은 울창하고 계곡의 돌들은 겹겹이 쌓여 있으며, 골짜기의 시내에는 작은 물고기가 무리를 이뤄 유영하고 있었다. 개울가 반석 위에서 한 잔 술을 대작하였다.
계곡을 따라 몇 리를 가니 곧 7곡(七曲) 풍암(楓岩)이었다. 층층한 절벽이 맑은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있고 단풍나무 사이로 방초(芳草)가 우거져 있어 한 폭의 화병(畵屛)이 천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풍암이란 두 글자가 바위에 새겨진 것은 아니지만 여행객을 안내하기에 족하였다. 풍암은 원래 가을 경치가 뛰어난 곳이지만 여름 경치도 또한 아름다웠다. 다시 한잔 술을 마시고 한 구절 시를 읊었다.
풀이 우거진 곳과 논밭 사이를 걸어서 4, 5리를 가니 곧 8곡(八曲) 금탄(琴灘)이었다. 높은 산과 맑은 계류가 스스로 거문고의 곡을 이루니, 시인이나 문사라면 어찌 한 두 수의 시를 읊지 않으리오.
다시 큰 길을 향하여 평야와 촌락을 지나 6, 7리를 가니 한줄기 맑은 계류가 층층한 바위와 나무숲 사이를 졸졸 흐르고 이상한 짐승이 토끼를 쫓는 모습이 마치 우리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이쪽이 통하면 저쪽이 막히는 것이 이치의 상궤이니, 풍암에서 보지 못한 좋은 경치를 문산(汶山)의 진경(眞境)으로 대신하였다. 구곡을 차례로 지나며 술잔을 든 것은 선배들도 반드시 미치지 못한 것일 것이다 하며 서로 호탕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구곡을 다 보고나니 만약 한가한 때가 있으면 다시 찾아와 상세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여의치 않은 것이 진실로 유감이었다. 30리 긴 계곡이 모두 석산(石山)이면 더욱 좋을 것 같은데 한쪽이 산이면 한쪽은 평야인 것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4, 5 양곡(兩曲)의 뛰어난 경치는 과연 교리어른이 말한 바와 같았지만, 그 외는 평범한 산천이라 우리 고향의 청학(靑鶴)이나 보현(普賢)의 경치가 이곳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선현이 장수(藏修)하던 옛 터이니 경모하는 마음이야 어찌 다른 경치와 비교하겠는가.
율미면(栗彌面) 도현리(道峴里)의 도로에서 해주행 차를 기다리다 시간이 일러 걸어서 예당동(禮堂洞) 주점에 가 떡을 사서 점심을 대신하였다. 서석역(西席驛)에 도착해서는 주점을 찾아 두 사람이 방원주(芳元酒)를 통음하고 백반으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집을 떠나 온 후 처음 보는 물건이라 배부르게 먹고 마셨으니 잠시 여행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10시에 기차로 해주에 도착하여 연해여관(延海旅館)에 숙박하니 오늘의 여행거리는 보행 50리, 기차 30리였다.


1) 서울~신의주간을 연결하는 경의선(京義線)은 총연장 499km로 서울을 기점으로 개성-사리원-평양-신안주를 거쳐 신의주에 이르렀다. 경의선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로 연결되었는데, 즉 1911년 압록강철교의 개통으로 열차의 운행을 만주 안동(安東)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2)송치규(宋穉圭) 1759(영조 35)~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 송시열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黙)의 문인이다.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3)이희조(李喜朝) 1655(효종 6)~1724(경종 4)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송시열의 제자. 해주목사로 있을 때 율곡의 유적인 석담을 찾고, 요금정(瑤琴亭)을 세웠다.

율곡, 소녀 유지(柳枝)를 만나다


율곡, 소녀 유지(柳枝)를 만나다.

 

녀린 몸 부끄러워 고개 숙이고
그 고운 눈길 한번 아니 주노라
부질없이 파도 소리 듣고 있을 뿐
운우대에 오르는 꿈 아직 못 꿨네.

너 자라면 응당 이름 떨치련마는
나 쇠약해 널 가까이 할 수 없다네.
이 나라 제일 미녀 주인도 없이
기생되어 살다니 가련하구나.

율곡은 1574년(선조 7) 10월, 39세의 나이로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황주에 순시차 갔다가 그곳에서 평소 자신을 존경해왔다는 16세의 어린 소녀 유지(柳枝)를 만난다. 율곡과 유지의 만남에 대한 최초의 자료는 율곡이 40세 되던 1575년 정월 초이튿날 유지에게 준 시와 그 서문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집에 실려 있는 이 글에 의하면, “어린 기생 유지가 있었는데 자태가 매우 아름다웠다. 앞으로 다가 오라고 불렀더니,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물어보았더니 선비의 딸이었으나 그 어머니가 기적(妓籍)에 있었기 때문에 황주(黃州) 소속의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가엾게 여겨 시를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이때 지은 시가 위에서 인용한 시다.
율곡은 1575년 3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파주 율곡리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된다. 율곡이 유지를 다시 만난 것은 1582년(선조 15) 10월이었다. 율곡은 명의 사신 황홍헌과 왕경민을 맞이하는 원접사가 되어 의주로 가는 길에 황주를 지나게 되었고, 11월에는 이들 사신의 귀국을 배웅하게 되었다. 유지는 율곡이 오가는 길에 묵는 지방 관아의 숙소에서 시중을 들었다. 유지와 율곡이 함께한 기간은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느라 관서지역에 머무는 기간 동안이었을 것이니 길게 잡아야 한 달 남짓이었을 것이다. 이해 12월에 율곡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583년 9월 하순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해주에 물러나 있던 율곡은 황주에 있는 누이 집에 문안을 갔다가 유지를 만나게 되었으니 거의 10개월 만이다. 그 둘은 여러 날 동안 주변의 풍광 수려한 지역을 유람하며 함께 술도 마시고 다정하게 지냈다. 애초에 율곡의 이번 황주 여행은 그곳에 사는 누님을 찾아뵙는 목적으로 나선 것이어서 마냥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율곡이 해주로 돌아가야 했기에 유지는 어느 절까지 따라와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길을 떠난 율곡은 그날 저녁 무렵 재령의 밤곶[栗串] 나루터 강마을에 숙소를 정했다. 그런데 밤중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뜻밖에 아까 절에서 작별했던 유지였다. 웬일인지 묻는 율곡에게 유지는 다시 뵙지 못할 것 같아 찾아왔노라고 대답했다. 율곡은 순간 갈등했다. 깊어 가는 밤에 도학자의 방에 처첩 아닌 젊은 여인을 맞아들이는 것은 의에 어긋나고, 문을 닫고 돌려보내는 것은 인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도 잠깐, 율곡은 유지를 안으로 받아들였다.
촛불을 켜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병풍은 걷어냈지만 각각 다른 이불과 다른 요를 깔고 덮고 잠을 청했다. 제대로 잠을 자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새벽에 율곡은 지필묵을 준비하여 그 밤에 있었던 일을 적어 유지에게 주었다. 이 글이 〈유지사(柳枝詞)〉다. 현재 이화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문서는 〈유지사〉를 짓게 된 경위를 적은 서문과 〈유지사〉, 그리고 유지사 뒤에 부록처럼 첨부된 3편의 7언절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지는 선비의 딸인데, 황주의 기생이 되어 있었다. 내가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 어린 소녀로서 나에게 시중드는 기생이 되었다. 날렵한 몸매에다 아리땁고 세련되어 모습이 빼어난데다 생각이 지혜로웠다. 그러므로 내가 어루만지면서 어여쁘게 여기기는 했으나 애초부터 정욕을 품지는 않았다. 그 후 내가 원접사로서 관서 지방을 왕래할 때도 유지가 언제나 안방에 있었으나 단 하루도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계미년(1583년)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에 계시는 누나에게 문안을 갔을 때도 유지와 술잔을 함께한 것이 여러 날이었고, 해주로 돌아갈 때는 절까지 따라 와서 나를 전송해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별을 하고 밤곶이 강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밤중에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기에 나가 보니 바로 유지였다. 방실방실 웃으면서 방으로 들어오기에 이상해서 그 연유를 물었더니 유지가 하는 말이 이러했다. “선생님의 명분과 의리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는데, 하물며 저같이 시중이나 드는 기생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나이까. 게다가 예쁜 여자를 보고도 무심하시니 더욱더 탄복하는 바이옵니다. 이번에 이별하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가 어렵기에 감히 이렇게 멀리 찾아왔사옵니다.” 드디어 촛불을 밝히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아! 기생들은 다만 다정하게 구는 뜨내기 건달들만 좋아하는 법이니, 그 가운데 어느 누가 명분과 의리를 사모할 줄을 알겠는가. 더구나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감복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다. 아, 이 여자 선비가 천한 사람들에게 곤욕을 받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애석하기만 하다. 또 지나가는 길손들이 내가 유지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을까 의심하여 유지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면, 나라 제일의 미인에게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유지사’를 지어 유지와의 인연이 정에서 시작되어 예의에서 그쳤음을 서술해놓았으니, 읽는 분들은 이점을 자세하게 헤아려주시라.

유지에 대한 율곡의 사랑은 유지에게 〈유지사〉를 친필로 써 준 데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순수한 사랑이라 하더라도 율곡 같은 저명 학자가 기생과의 일화를 친필로 남길 경우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유지사〉는 결과적으로 율곡의 이미지에 손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이 구태여 친필의 〈유지사〉를 남긴 것은 유지와 자신이 아무런 육체적 관계가 없었음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자신으로 인하여 유지의 명예를 손상하거나 앞날을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사랑과 배려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밤곶 강마을에서의 일이 있은 지 넉 달이 지나지 않아 율곡이 세상을 떠났다. 이때 유지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하며, 이후에도 율곡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어나갔다. 그녀는 율곡이 직접 써준 〈유지사〉를 첩(帖)으로 만들어 황주를 지나가는 지체 높은 사대부들을 애써 찾아다니면서 화답시를 얻어 보관하곤 했다는 것이다. 신흠(申欽)의 《상촌고(象村稿)》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유지는 황주의 기생이다. 일찍이 기생이 되었는데 재주와 용모가 빼어났다. 율곡 이선생이 원접사로서 황주를 지날 때 황주 고을의 원이 유지에게 선생을 모시게 했다. 선생이 그 재주와 용모를 어여삐 여겨 더불어 거처하면서도 어지럽힘이 없었으며, 사(詞) 한편을 지어주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유지가 선생을 추모하기를 마지 아니 하면서, 이 사(詞)를 첩(帖)으로 만들고 황주를 지나 서쪽으로 가는 지체 높은 사대부들을 찾아가 화답을 요청하지 않음이 없었다. 기유년(1609년) 겨울에 내가 북경으로 가다가 황주를 지날 때 유지가 또다시 찾아와서 화답을 청했으므로 내가 절구를 지었다.

이처럼 유지의 요청을 받고 화답을 한 사대부의 작품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수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흠이 화답시를 지었다는 해가 1609년이니 이미 율곡이 죽은 지 2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유지는 여전히 첩으로 만든 〈유지사〉를 들고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면서 화답을 요청하고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에게 두 번 이상 찾아가서 화답시를 받기도 했던 셈이다.
율곡과 성혼을 종유했고 직접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은 최립(崔岦)도 율곡이 유지에게 써준 시에 대한 차운시를 남기고 있다.

어찌 문자로 미인을 중히 여겼을까
한 번 웃는 자리 얼마큼에 해당할까
중요한 것은 선생의 명의(名義)에 감동하여
청동거울 들고 다시는 화장하지 않았으리.

이처럼 유지가 율곡이 별세한 이후에 〈유지사〉를 첩으로 만들고 지속적으로 화답시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유지가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저명 인사들의 시들을 받아 시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다. 당대의 명유였던 율곡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증명서인 〈유지사〉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저명 인사들의 화답시를 두루 받아둠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한 율곡을 사랑한 유지가 율곡이 별세한 후 자신에게 접근하는 뭇남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로 〈유지사〉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때 화답시를 청했던 대상은 주로 율곡의 지인이나 문인이었을 것이다. 유지가 지혜롭다고 율곡이 말했으니 율곡이 생전에 정적들의 혹독한 모함에 시달렸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율곡에게 흠이 될 수도 있을 〈유지사〉를 아무에게나 보여주었을 리 없다. 그녀는 율곡에게 사랑받은 여자임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며, 그것으로 일생의 보람을 삼았을 것이다. 이것이 그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삶을 소중히 보존하는 지혜로운 방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율곡과 유지의 애틋한 사연은 당시 호사가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이 밝혔듯이 그가 〈유지사〉를 쓴 이유는 이러한 세간의 억측으로부터 유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이 일화에 대한 논란이 문하에서 있었다. 유지에 대한 율곡의 처신이 문인들과 후학들 사이에서 시비의 논란이 되었다.
이희조는 〈유지사〉를 비롯한 율곡의 시고(詩稿)는 간행하여 후세에 전하더라도 선생에게 누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드높은 경지를 더욱더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유지사〉에서 ‘문을 닫아걸면 인을 상하고 함께 자면 의를 해친다.’는 구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유경(李有慶) 또한 이 일을 ‘조화를 이루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음[和而不流]’이라고 평가하였다.
반면에 이지렴(李之濂)은 박세채가 율곡집을 재편집할 때 유지와의 관련 시고(詩稿)는 빼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이러한 글들이 율곡의 성대한 덕에 누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또한 후세에 가르침을 남길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결국 박세채는 이지렴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주목할 것은 김장생, 송시열, 그리고 권상하의 문집에는 유지와의 일화나 〈유지사〉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황상 이들이 유지의 일화를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언급이 없음은 이를 논란하는 것을 피했다고 할 수 있다.

율곡과 계미삼찬


율곡과 계미삼찬.

 

1575년(선조 8)의 동서 분당 이후 조정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578년(선조 11)에는 운두수·윤근수·윤헌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뇌물 수수 혐의로 파직되었다. 김성일이 경연에서 진도군수 이수가 윤두수·윤근수 형제와 그들의 조카 윤현에게 쌀 수백 석을 뇌물로 바친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3윤(三尹)은 서인의 맹장이고, 이들의 파직을 주장한 김성일은 동인의 맹장이었다. 이처럼 동인·서인은 상대방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직 율곡 한 사람만이 양자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비록 서인으로 지목 받았지만 논의가 공정하고 행동에 치우침이 적었다. 그러나 1579년(선조 12) 7월, 백인걸의 상소를 계기로 그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의 상소문에는 동·서인의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동인을 비난한 구절이 많았다. 그런데 이 상소문의 초고를 수정한 사람이 바로 율곡이었다. 이에 동인들은 율곡이 백인걸을 사주한 것으로 여겨 심하게 공격했다. 당론의 조정자가 도리어 당론을 격화시켰다고 공격받게 된 것이다.
1581년(선조 14) 6월, 선조는 율곡을 대사헌에 임명했다. 이 때 항간에는 모종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그 골자는 심의겸이 누이 인순대비에게 출사를 주선하게 해 권세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상중에 있었다. 따라서 기복(起復)이 되어야 벼슬할 수 있었다. 소문이 퍼지자 정인홍이 이를 탄핵하려고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율곡은 정인홍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자신이 불러 주는 대로 상소문을 작성하도록 하고 더 이상 강경한 말을 못하게 했다.

청양군 심의겸은 일찍이 외척으로서 오래도록 국론을 잡아 권세를 탐하고 이(利)를 즐겨해 사류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조정 의논이 풀어지고 흩어져서 보전·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 사람의 소치입니다. 날이 갈수록 공론의 불평이 더욱 심해지는데, 지금까지는 현저히 배척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못해 인심이 의혹하니, 청컨대 파직시켜 좋아함과 미워함을 분명히 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석담일기』)

그러나 정인홍은 심의겸이 사류를 규합해 세력을 양성한다는 과격한 말을 추가했다. 그리고 심의겸에게 아부한 자로 윤두수·윤근수·정철 등을 지목했다. 정철은 율곡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동인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선조는 내심 심의겸을 미워하고 있었다. 선조가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심의겸이 누이 인순왕후에게 선조에 대한 통제를 종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기 위해 심의겸을 두둔했다. 이것은 동인의 불만을 가중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율곡과 동인 사이의 충돌은 빈번하게 되었다. 1583년(선조 16) 3월에는 선조에게 수시로 왕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가 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그 해 4월에는 유성룡·이발·김효원·김응남을 동인의 괴수로 비판한 경안군 요(瑤)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율곡이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그 해 여름, 니탕개(泥湯介)가 함경도 종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병조판서 주관 하에 출전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서는 율곡이 병권을 마음대도 주무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공격했다. 율곡은 사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고, 율곡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더욱 격화되었다. 율곡에 대한 공격은 박근원·송응개·허봉 등이 주도했는데, 특히 대사간 송응개의 공격이 가장 맹렬했다. 공격의 화살은 박순·성혼 등 서인의 중진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동인들이 율곡은 물론 박순·성혼을 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는 율곡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을 두둔하는가 하면 선조도 율곡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동인인 김우옹도 율곡을 변호했다. 1583년(선조 16) 선조는 조신과 유생들의 여론을 반영해 송응개·박근원·허봉을 각기 회령·강계·갑산으로 유배시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선조는 끝까지 동·서인을 조정하려는 율곡과 성혼의 편을 들었다. 다음과 같이 주자의 인군위당설(人君爲黨說)을 인용하여 율곡과 성혼을 적극 지지한 것이다.

이이에게 편당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 말로써 나의 뜻을 움직이려 하느냐? 아! 진실로 군자라면 그들끼리 당을 만드는 것이 걱정이 되기는커녕 그 당이 작은 것이 걱정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기를 원한다. 지금 이후로는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좋다. 만일 이이와 성혼을 훼방하고 배척하는 자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기사』)

계미삼찬 이후 율곡은 이조판서에, 성혼은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 1월 16일, 율곡 이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율곡은 부단히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려고 애썼으나, 교우 관계 때문에 서인의 지지를 받은 반면에 동인의 배척을 받았다. 결국 율곡은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뒤에 서인의 종장(宗匠)으로 추대되었다. 율곡의 이러한 처지를 이원익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두 사람이 술이 취해 언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때 한 사람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두 사람이 듣지 않자 언덕에서 내려와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 했는데,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연려실기술』 권13, 「선조조고사본말」 이이졸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조정하려던 율곡이 죽자, 선조는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 2월에 박근원·송응개·허봉을 풀어주었다. 선조는 갈등을 조정할 율곡이 없는 상황에서 이제 두 당파를 저울질하면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영광의 이름, 문묘 배향


영광의 이름, 문묘 배향.

 

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조선 왕조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성균관은 학궁(學宮) 혹은 반궁(泮宮)이라고도 한다. 돌계단을 올라 작은 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뚝 선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그 남쪽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이 있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유생을 길러내던 국립대학이었으므로, 이곳에는 반드시 공자와 중국과 한국의 유교 성현 위패를 모신 신성한 공간인 문묘(文廟)가 설치됐는데 문묘의 정전(正殿)이 바로 대성전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자(子思子),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등 21위를 좌우로 배열하고 이보다 한 단계 급이 낮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중국 유현(儒賢) 94위, 우리나라 위인 동국 18현을 각각 봉안했다. 이들에 대한 제사는 매년 봄가을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봉행한다.

문묘 종사는 유학의 도통과 관련되어 있는데, 도통론은 도(道)가 계승되어 내려간 정통을 밝히는 논리이다. 유학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원리이자 질서인 도가 선택 받은 성인에 의해 현실 사회에서 구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시대를 이어 가며 등장하여 도의 명맥이 끊어지지 않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유학에서 도통론이 본격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송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송과 남송, 원을 거치면서 조선에 유입된 주자학은 국가 이데올로기로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도통론은 그 일부로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 우리나라 지식인들인 ‘동국 18현’은 누구이며 어떤 사유로 문묘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은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년 때 설립된 태학이다. 태학에도 문묘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이 고구려 문묘가 우리나라 문묘의 시초로 본다. 그 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714년 신라 성덕왕 13년에 왕자 김수충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공자와 10철, 그리고 공문(孔門) 72제자의 화상을 가져와 왕명에 의해 국학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우리나라 사람을 처음으로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려 시대 때인 1020년(현종 11)이었다.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유교 실력으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이 그 주인공이다. 2년 후인 현종 13년에는 불교가 성행하던 신라에서 유교를 학습하고 실천한 설총을 향사(享祀)했다. 이어 1319년(충숙왕 6)에는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안향이 포함됐다. 고려 말의 대학자이며 충신이었던 정몽주는 조선 왕조에 들어와 100여 년이 지난 1517년(중종 12)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전 왕조의 충신을 표창하여 배향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그가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창시자이며 강상의 표상으로 추앙되어 성균관 학생들과 관료들의 끈질긴 요청으로 실현되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따라서 인재양성의 요람인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문묘를 설치해 주자학의 발전에 기여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명 학자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학생들의 사표로 삼았다. 성균관과 향교에 모셔지는 학자들을 ‘문묘해향공신’이라고 부르며 최고의 영예와 권위를 부여했다.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국가에서도 그 후손들을 특채하는 등 특별하게 대접했다.

따라서 문묘에 어떤 인물을 올릴지 결정하는 향사의 문제는 늘 국가의 중대사가 됐다. 문묘배향공신은 성인의 경지에 올랐거나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도달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이었다. 조선조 전반에 걸쳐 향사의 대원칙은 도학 즉, 성리학의 정통성에 있었다. 이것은 여러 성향을 지닌 다양한 유현들이 배향된 중국과는 대조를 이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를 두고 학파, 정파 간 대립이 결부되면서 적잖은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서 문묘종사 논의가 처음 진행된 시기는 세종 대이다. 당시 문묘 종사 대상자로 논의된 인물은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권근(權近)이다. 태종이 즉위한 뒤, 제거된 정도전(鄭道傳)의 공백을 메우면서 권근이 학문적 주도권을 갖게 되자 성균관을 중심으로 권근 계열의 문묘 종사가 논의된 것이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태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권근 계열이 왕조의 건국 시기 정권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였다. 이들이 비록 태종 대 국가의 학문적·이념적 측면을 관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더라도 그들의 역할은 왕권의 통제 안에 머물러야만 했다.

문묘 종사가 다시 주장된 것은 중종반정 이후 조광조 세력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들은 정몽주-김굉필(金宏弼)의 문묘 종사를 요구하였다. 정몽주는 태종 이래 전조(前朝)의 충신이란 명분으로 국가적인 추승 사업의 대상이었다. 중종 대의 사림은 국가가 인정한 충신의 전범인 정몽주의 이미지에 도학의 전승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김굉필과 함께 문묘 종사를 추진하였다. 김굉필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이며 무오사화의 희생자였다. 그를 문묘에 종사하여 성현의 지위에 올리면 세조와 연산군의 자의적 왕권 행사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광조 세력에게 이념적 정통의 권위까지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사림은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에도 사림은 자신들의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해 줄 뿐만 아니라 왕권의 독단을 견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이념인 문묘 종사를 포기하지 않고 정몽주-김굉필로 이어졌던 도통의 계보를 발전시켜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도학 계보’를 창출하였다. ‘조선 도학 계보’는 선조 초년에도 상당히 유포되어 조광조의 추증 및 문묘 종사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 시기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김굉필-정여창(鄭汝昌)-조광조, 이언적(李彦迪)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4현’이다. 이들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인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선조 대에 사림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사림은 선조에게 끊임없이 4현의 문묘 종사를 요구하였다. 이는 명종 말기 이황(李滉)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선조 원년 이미 4현의 문묘 종사가 요청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포함한 ‘5현’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1604년(선조 37) 이후 왜란으로 불탔던 문묘가 재건되는 것을 계기로 5현의 문묘 종사가 다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에 선조는 오히려 주자학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용인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5현 종사를 좌절시키려 하였다. 선조에 의해 거부된 문묘 종사는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요구되었다. 이때는 성균관 유생뿐 아니라 지방의 유생들도 조직적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예조, 대간, 대신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였다. 결국 1610년(광해군 2) 국왕의 결정에 따라 5현 종사가 결정되었다. 즉위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국왕으로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던 광해군은 5현 종사 결정을 통해 사림 세력 전반의 지지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한편 1611년(광해군 3)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제자인 정인홍을 중심으로 남인인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에서 퇴출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해 큰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이른바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정인홍이 스승 조식이 이황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이언적의 과오까지 지적하면서 발단되었다. 이 사건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인 조식이 5현에 포함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그러나 오히려 유생들의 비난과 저항을 받아 정인홍 자신은 청금록에서 이름이 삭제되었고, 조정은 한동안 혼란에 빠져 대북 정권에 큰 타격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의 당파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문묘에 배향시키려고 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 세력이 집권하자 그들의 사상적 지주인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올리자는 논의가 제기됐다. 서인들의 빗발치는 요청에도 인조는 서인의 독주를 막을 속셈으로 영남사림을 이용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숙종은 남인 집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경신환국을 단행해 남인을 몰아내고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가 완결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6년 뒤인 1689년(숙종 15)에 문묘에서 출향(黜享: 위판을 퇴출하고 제사에서 제외하는 일)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다시 종사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우리나라 인물로는 유일하게 이름에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로까지 불리면서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宋時烈)의 역할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이이와 성혼의 추봉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1681년(숙종 7)에는 자신의 스승인 김장생(金長生)의 종향을 청원해 오랜 논쟁 끝에 비록 자신의 사후이기는 하지만 결국 1717년(숙종 43)에 성사시켰다. 김장생이 배향된 그해, 전라도 유생들이 김장생의 제자인 동시에 ‘양송(兩宋)’으로 불렸던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의 배향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노론계의 지지로 즉위한 영조 32년(1756년) 양송의 종사도 최종 승인되었다.
결과적으로 인조대 이후 비집권층이 된 영남의 남인 계열에서는 단 한 명의 배향공신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나마 영조 대부터는 1764년(영조 40)에 종사된 박세채(朴世采)를 제외하면 전부 노론 계열이다. 소론인 박세채는 탕평론을 주장한 것이 왕에게 높게 평가받아 가까스로 추봉됐다.

18현의 면면을 살펴보면, 신라의 2현인 설총과 최치원, 고려 2현인 안향과 정몽주, 그리고 조선에서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이다. 이중 선조대의 문인인 김인후는 1796년(정조 20)에, 임진왜란 때 전사한 조헌과 인조대 문인인 김집은 1883년(고종 20)에 각각 향사됐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관계로 송시열의 스승이라는 이유에서 종향됐다. 이들의 집안인 광산 김씨는 한 가문에서만 2명의 배향공신을 배출함으로써 조선후기 최고의 명문가로 크게 주목받았다.

18현에 선정된 인물들은 모두 가문이 좋다거나 벼슬이 높아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벼슬과 출세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해 역사책에서조차 흘려버리는 당대 석학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느냐, 누가 더 유명하냐가 아니다.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했다. 그래서 옛말에 “정승 10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 종사 현인(賢人) 1명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18현 중에는 화려한 삶보다는 불우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이 많다. 사화나 정변에 휘말려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거나, 초야에 묻혀서 학문에만 전념해 존재와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들의 사상과 학문의 세계를 알고, 삶을 들여다보고 본받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신문화를 살찌우는 길일 것이다.

송시열의 수제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송시열의 수제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북 제천은 물의 도시다. 제천(堤川)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저수지[堤]와 여러 물줄기[川]가 있는 곳이다. 물줄기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충북으로 흘러들어 서남쪽으로 흐르다 단양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바꾸고, 한수면(寒水面) 황강리(黃江里)에서 제천천(堤川川)과 합쳐져 제천시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른다.

바로 이곳 한강 상류의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한수면 황강은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를 길러낸 권상하(權尙夏)가 1675년(숙종 1) 35세의 나이로 이곳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44년을 살았던 곳이다. 황강은 권상하를 낳았고, 권상하는 황강을 후대에까지 이름나게 하였다. 권상하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또는 황강거사(黃江居士)라는 호를 썼는데 한수재와 황강거사는 한수면과 황강에서 나온 이름이다.

권상하의 집안은 본관인 안동에서 세거하다가 증조부 때부터 제천의 황강으로 선영을 옮겼다. 권상하는 한양 동현(銅峴)의 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부터 조부 권성원(權聖源)의 임지를 따라 여산(礪山)과 영주(榮州) 등지를 다니다가 조부가 세상을 떠난 후 스무 살 무렵이 되어서야 서울로 돌아와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1662년(현종 3) 제천에서 스승 송시열을 뵙게 되었는데 권상하의 선영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권상하는 송시열의 적통을 이어받은 제자가 되었다.

원래 황강은 권상하의 부친인 권격(權格)이 은거의 땅으로 점지한 곳이었다. 강릉부사,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낸 권격은 당시 직간을 잘하기로 소문난 민응형(閔應亨)으로부터 간신(諫臣)의 풍모를 지녔다는 평을 들었고 송시열, 송준길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권격은 점차 벼슬에 뜻을 잃어 고향 제천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1671년(현종 12) 아들 권상하로 하여금 먼저 내려가 은거를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일을 처리하고 내려가려던 순간 갑자기 병이 생겨 그는 결국 죽은 후에야 고향땅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권상하는 1675년(숙종 1) 스승이 진천(鎭川)의 유배지에서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옮겨가자, 마침내 한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황강으로 내려갔다. 황강에 도착한 그는 임시로 선영 아래 고산촌(孤山村)에 우거하였다. 얼마 후 권상하는 황강촌(黃江村)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덕원의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스승은 그의 새로운 거처 이름을 ‘수암(遂菴)’이라 지어주었다. ‘내 마음이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내 소원을 이루어준다[吾心誠有志於學 天其遂吾願]’는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글에서 딴 것이다.

큰 학자 권상하가 황강에 칩거하자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았고, 이로 인해 황강은 더욱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스승이 화양동으로 돌아왔다. 권상하는 즉시 화양동으로 들어가 스승을 알현하였고, 이후 그의 삶은 화양동, 청주 묵방(墨坊), 여강(驪江), 판교(板橋), 지평(砥平), 청안(淸安) 등지로 송시열을 찾아가는 일로 채워졌다.
권상하는 철저하게 스승인 송시열을 좇았다. 1685년 회덕(懷德)에 살던 송시열과 이산(尼山)에 살던 윤증(尹拯) 사이에 큰 다툼이 생겨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일어났다. 원래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일을 비난하였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무성의하게 지음으로써 제자 윤증과 갈등을 빚었다. 이에 윤증은 송시열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이 편지가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회니시비가 일자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권상하는 그동안 절친하게 지내던 나양좌, 윤증과 단숨에 절교를 선언하고, 율곡학파의 적통인 김장생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찾는 일을 제외하고는 황강에서 강학에 몰두하였다.

1686년(숙종 12) 10월 권상하는 한수재(寒水齋)를 지었다. 그러자 송시열이 이름을 짓고 직접 편액을 써주었는데, 이로 인해 한수재는 권상하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이 지은 「한수재 편액의 뒤에 쓰다[書寒水齋扁額後]」에 따르면, 한수재라는 이름은 주자(朱子)의 “삼가 천년의 한결같은 마음, 가을달이 찬 물을 비추는 듯하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라 하였다.

1689년(숙종 15)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昭儀張氏)의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국을 장악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했던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권상하는 유배를 떠나는 스승을 모시고 태인(泰仁)까지 내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스승으로부터 이이와 김장생의 수적(手蹟)과 유고를 받음으로써, 율곡학파의 적통을 전수받았다. 송시열이 완성하지 못한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典箚疑)』를 완성하라는 부탁도 함께 받았다. 아울러 만동묘(萬東廟)의 건립도 유언으로 당부 받았다.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기 직전 권상하가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하자, 송시열은 그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直)’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권상하는 정읍에서 사약을 받은 스승의 최후를 지켜보고, 다시 황강으로 돌아갔다.

권상하는 스승이 떠난 후 사문(斯文)의 맹주가 되었다. 권상하가 황강에 눌러앉자 수많은 벗과 제자들이 그의 처소를 찾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가 유명하였다. 벗으로서는 권상하보다 한 살 위인 임방(任埅)이 특히 그의 집을 자주 찾았다. 임방은 1676년 권상하가 새로 집을 짓자 축하하는 시를 보냈고, 그 뒤로는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다 20여 년이 지난 1694년 그의 집을 방문하고는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푸른 강 파란 돌 가을 국화를 비추는데
말 가는 대로 가노라니 길은 울퉁불퉁
물가에 찌그러진 집 문도 걸지 않았구나.
멀리서 보아도 옛 벗의 집임을 알아보겠네.

이 무렵 임방은 단양과 제천 일대를 유람하면서 권상하의 아들, 조카 등과 시를 수창하였고, 권상하와도 선암동을 유람하였다. 또한 가끔 권상하의 집에 들러 함께 묵기도 하면서 몇 년간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다.
노인이 된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강학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1704년(숙종 30) 만동묘를 세우고 화양서원을 그 곁으로 옮겨 스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 해에 호조참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고, 1705년에는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이 되었고 이후 1716년까지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12년 한성부 판윤에 이어 이조판서, 1717년(숙종 43) 의정부 좌찬성에 이어 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스승을 배신한 윤증의 학설을 비판하고, 성리학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으며 스승의 뜻을 잇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 1721년 8월 29일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모두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달려가 곡(哭)하였고, 상복을 입은 문인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봄을 함께 하는 집,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봄을 함께 하는 집,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인 옛 회덕(懷德)은 조선 후기 사상계의 태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이 세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회덕(懷德)’은 글자 그대로 덕을 품었다는 뜻이니, 덕이 높은 선비의 땅이라 하겠다.
은진 송씨는 송준길의 8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를 들면서 회덕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회덕이 은진 송씨의 터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송명의의 손자인 세종 때의 학자 송유(宋愉)에서 비롯된다. 은진 송씨의 중시조인 송유는 세종 때에 부사정을 지내다가 1432년(세종 14)에 낙향하여 회덕의 백달촌(白達村)에 집을 정하고 살았다.
당시 회덕은 회천(懷川)이라 불렸는데, 회천의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백달촌은 후에 송씨들이 집중적으로 살게 되면서 송촌(宋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다. 비래암(飛來菴) 옆의 물줄기가 동쪽 담산(澹山)에서 흘러나와 서쪽으로 흘러 갑천(甲川)으로 들어가는데, 송유는 그 한가운데 북쪽에 쌍청당(雙淸堂)을 지었다. 쌍청당이란 당호는 평소 송유와 교분이 두터웠던 난계(蘭溪) 박연(朴堧)이 ‘천지간에 바람과 달이 가장 밝은데……,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것을 쓸어내고 밝은 달이 떠오르면 위아래가 투명하게 맑아져서 티끌만큼도 흐트러짐이 없게 된다.’고 한데서 따온 것으로 바람과 달이 모두 맑은 집이라는 뜻이다. 앞에는 느릅나무와 버들,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계단과 뜰에는 여러 가지 나무를 심어 꽃과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가 한가롭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현달한 인물은 없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뛰어난 후손들이 배출되면서 쌍청당의 영예는 더욱 빛을 발하였다. 송여림(宋汝霖)의 현손이 송규연(宋奎淵)·송규렴(宋奎濂)이며, 송규렴의 아들이 송상기(宋相琦)다. 송여림의 아우 송여즙(宋汝楫)의 고손자가 송준길이고, 송여림의 사촌인 송여해(宋汝諧)의 손자가 송기수(宋麒壽)·송구수(宋龜壽)·송인수(宋麟壽)이며, 송구수의 증손자가 송시열이다.
송준길은 자가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송준길은 1606년(선조 39) 12월 28일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우선 태어난 장소가 김계휘(金繼輝)의 옛집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등 예학의 3대가 이 집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특이한 일로 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송준길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예학의 정통을 이었음을 강조하는 후대인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람의 꿈에, 어떤 사람이 산구(産具)를 손에 들고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 사람인데, 오늘 송이창(宋爾昌)이 아들을 낳을 것이므로 이것을 주려고 왔다.”하였다. 송이창의 연세는 많은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자 종족과 이웃이 모두 “우리 청좌공처럼 덕을 쌓으신 분이 어찌 끝내 후손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선생이 출생함에 이르러서는 또 서로 축하며 “덕을 쌓은 보답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태어나서부터 외모가 수려하고 용모가 특이하며, 피부가 깨끗하고 정신이 맑으니 사람들은 ”정신은 가을 물처럼 맑고 골격은 옥처럼 아름답다.“라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송준길은 부친 송이창을 따라 진안(鎭安), 신녕(新寧) 등의 임지에서 생활하다가 아홉 살 무렵 고향인 송촌으로 돌아가 송시열과 함께 기거하며 학업을 익혔다. 송준길의 졸기에 의하면 송시열과는 동종(同宗)인데다 또 중표형제(中表兄弟:외종·고종·이종사촌)가 되고 함께 김장생·김집 부자를 스승으로 섬겨서 덕망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양송(兩宋)’이라 칭하였다. 어린 시절 집안이 어려웠던 송시열은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형제, 동학, 정치적 동지로서의 관계를 자리매김하였다.

1623년(인조 1) 송준길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준길의 부친인 송이창이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2대가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셈이다. 송준길은 김장생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예서에 정통하고 예서의 말들은 자기 말처럼 외웠다고 한다. 김장생도 송준길을 두고 “이 얘가 장차 예가(禮家)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송준길은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통의 맥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역시 송시열과 김집에게 수학하게 함으로써 서인 학통의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였다. 또한 그는 장인이자 예학가였던 정경세(鄭經世)에게도 학문을 배워 남인 학풍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1630년(인조 8)에 송준길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고, 1636년(인조 14) 예산현감에 제수하였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송준길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은 효종대였는데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영향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송준길은 이시백과 사이가 좋았는데, 인조가 시백을 불러 주연을 벌일 때, 세자(후의 효종)에게도 대신으로서 이시백을 깍듯이 대우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인조가 이시백에게 “지금 세상에 독서인이 누구냐?”하고 물으면 이시백은 그 기회를 이용해 송준길을 추천하였고, 세자는 그러한 일을 기화로 송준길을 늘 염두에 두었다. 실제로 1649년(효종 1)에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준길을 기용해 사헌부 집의로 삼았다. 이외에도 효종대 그의 정계 진출은 효종이 친청파를 몰아내고, 산림을 등용하는 정치적 시점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송준길은 친청파인 김자점과 그 무리를 논핵하여 미움과 원망을 받았으나 이후 효종이 그들을 몰아내고 역모 죄로 처벌되자 왕의 예우가 다시 융숭해지고 정계로 불러들이는 일이 계속 잇따랐으며 교자(轎子)를 타고서 나오라고 명할 만큼 우대하였다.

1643년(인조 21) 송준길은 회덕의 송촌에 동춘당을 세웠다. 그로부터 10년 후 조익(趙翼)이 송준길의 청으로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이름난 산이 눈길 안에 있고 흐르는 물이 집 아래에 있다. 산은 사계절과 아침저녁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화하고 한 줄기 물길이 마을을 감싸고 맑게 굽이돈다. 이 모든 것을 즐길 만하다. 이에 그 이름을 동춘(同春)이라 하였는데, ‘사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한다[與物同春]’는 뜻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다. 조익은 봄이 인(仁)에 해당되므로 송준길의 뜻이 인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하며, 송준길이 이곳에서 큰 학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숙종대에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이곳 동춘당에 들러 하루를 유숙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동춘당 아래 봄옷을 입어보니
춘흥이 일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는 듯.
작은 뜰의 고운 풀에서 물성(物性)을 살피고
성긴 비 살구꽃에서 천기(天璣)를 찾으시네.
샘물은 콸콸 수맥이 처음부터 우렁찬데
어린 새 파닥파닥 날갯짓을 배우네.
가는 곳마다 똑같은 흥취가 있으니
놀러 온 이로 하여금 돌아갈 것 잊게 하네.

송준길은 동춘당에 기거하면서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사헌부에서 장령과 집의, 세자시강원에서 진선(進善) 등을 지냈으나 곧바로 그만두고 물러나 강학과 저술을 업으로 삼고 간혹 계룡산이나 백마강 등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흥을 풀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송준길이 지방에서 한가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찬선(贊善), 대사헌, 판서, 참찬(參贊) 등 벼슬을 높여가면서 계속 그를 불러들였다. 간혹 대궐로 나아가 경연(經筵)에 입시하거나 다른 직무를 본 때도 있었지만 송준길이 실제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다가 1672년(현종 13) 12월 2일 향년 67세로 동춘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조선을 대표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

 

암 송시열(尤菴 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송시열 관련 기사는 생전에 2,000회, 사후에 1,000회에 육박해서 그는 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송시열이 받는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은 송시열이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인물이라며 비난을 퍼붓고, 누군가는 그가 조선을 ‘친명사대주의’의 나라로 만들어 멸망의 길을 걷게 했다며 개탄한다. 심지어 한편에서는 그를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 우리 동방)의 주자(朱子)’라며 우리나라 인물로는 유일하게 이름에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로 극존칭을 쓰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당쟁의 화신’, ‘사대주의의 골수 신봉자’라며 ‘송자(宋者)’라고 낮추어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게 평가되는 문제적 인물 송시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퇴계 이황은 16세기가 열리던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타계했고, 율곡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타계했다. 퇴계와 율곡이 16세기를 대표하는 선비였다면 17세기를 대표하는 선비는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은 선조 말년에 태어나 광해군과 인조, 효종과 현종대를 거쳐 숙종대에 죽었으므로 무려 여섯 왕과 인연을 맺었다. 퇴계와 율곡의 초상이 단아한 선비의 모습이라면, 송시열의 초상은 강직하다. 굳게 다문 입술, 깊게 팬 주름, 흰 수염, 당당한 풍채가 사람을 압도한다. 49세의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아깝게 유명을 달리한 율곡과 달리 송시열은 83세에 타계했으므로 드물게 장수한 선비다. 하지만 매화에 물을 주라는 부탁을 하고 명을 달리한 퇴계와 달리 송시열은 임금이 주는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문하에 들어가 배울 스승이 없었던 퇴계나 율곡과 달리 송시열은 스승 복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12세의 송시열에게 부친 송갑조(宋甲祚)는 “주자(朱子)는 후세의 공자이고 율곡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율곡이 지은 《격몽요결》을 가르쳤다. 이를 다 배운 송시열은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비록 어리지만 강직하고 단호한 언명이 인상적이다. 부친의 훈계는 일생 학문의 정초(定礎)가 되었다.

24세의 청년 송시열은 율곡의 수제자로 명성이 자자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었다. 80세가 넘는 노선생 김장생은 말년에 자신의 명성을 넘게 될 후계자를 만난 셈이다. 송시열이 그에게 배운 기간은 1년 남짓, 스승이 타계한 후에는 그의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김장생은 율곡에게 공부한 서인의 대표 주자이고, 송시열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공부했으니 당대 최고의 학맥을 쌓은 셈이었다. 송시열이 17세기를 대표하는 서인의 영수로 부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차지한 비중을 견주어 보면 송시열이 조정에 머문 실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문과를 통하지 않고 학식으로 봉림대군(효종)의 사부(師傅)에 임명된 것이 그의 첫 출사였다. 그때가 1635년(인조 13)이었는데 29세의 송시열은 열두 살 연하의 대군을 약 8개월 정도 가르쳤다. 그러나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그는 병자호란의 충격을 ‘머리에 신발을 쓰고 발에 모자를 쓰게 된 사건’, 즉 기존 질서가 완전히 뒤집힌 사건으로 생각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르친 봉림대군은 심양에 인질로 끌려갔기에 그의 자책과 좌절은 더욱 심했다. 송시열은 낙향하여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인조가 붕어하고 효종이 즉위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였다.

효종은 사부 송시열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효종은 즉위하자 원로들을 초빙했고 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의 뜻을 밝혔다. 송시열은 그 유명한 〈기축봉사〉로 화답했다. 북벌이야말로 국가의 대의라고 천명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오랑캐의 나라 청을 배격하며 인조가 당한 치욕을 복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효종과의 인연은 짧았다. 스승 김집과 함께 출사했던 송시열은 조선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압박하는 청나라와 국내 친청파의 준동을 목격하고는 8개월여 만에 다시 낙향했다. 효종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불렀지만 출사를 사양하고 학문에 열중하면서, 서인학맥의 도통을 정리하는 등 서인의 이념적 결집을 위해 노력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극진했다. 왕이 사관을 멀리한 채 독대한 신하가 송시열이었다. 한번 낙향한 송시열은 한사코 임금의 부름을 거절했다. 이유는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구애는 계속되었다.

1658년(효종 9)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마침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담비로 만든 털옷을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신임했다. 은밀히 독대한 일도 그 시기였다. 효종은 일편단심 북벌이었다. 북벌만이 아버지의 치욕을 갚는 효행이었다. 북벌만이 인질 생활 9년 동안 형과 동생이 겪었던 모욕에 대한 복수였다. 효종은 즉위 원년에 와신상담할 것을 포고했고 약속을 지켰다. 효종은 군대를 확대했고, 군사 훈련을 다그쳤다. 북벌의 그날만 기다린 왕이 효종이었다. 효종이 송시열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낸 것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추진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실상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 관계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명과 조선의 군신 관계는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국시로 정해진 명분이었고, 임진왜란 때 명의 구원병 파견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므로 송시열에게 있어 명을 멸망시킨 청은 한 하늘 밑에서 같이 살 수 없는 군부(君父)의 원수였다. 그러나 송시열의 존명배청 감정은 《춘추(春秋)》의 원리에 의해 관념적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송시열은 “아픔을 참고 억울함을 머금지만 사세가 절박해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자의 입장을 늘 강조했다. 즉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적인 부국강병책으로 군사를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유교정치의 보편적인 이념 같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효종의 북벌론은 양병(養兵)에 치중되어 있었고, 송시열의 북벌론은 양민(養民)에 치중되어 있었다. 송시열은 군사 양병과 군비 확장을 추구하는 효종에게 양병보다는 민생 안정을, 무력보다는 군덕을 닦을 것을 종용했다. 효종과 송시열은 이렇듯 ‘북벌’이라는 이념에서는 생각이 일치했지만 방법론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니 동상이몽일 뿐이었다. 게다가 효종이 얼마 안 가 갑자기 죽었고 결국 북벌론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현종이 즉위하고 1차 예송(기해예송)이 일어나 남인과의 예론이 격화하자 송시열은 1661년(현종 2)에 다시 낙향했다. 현종 대에도 그는 거의 정계에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1668년(현종 9)과, 1673년 좌의정으로 임명되어 잠시 출사했을 따름이었다. 현종이 죽고 2차 예송(갑인예송)이 일어나자 그는 예를 그르쳤다는 공격을 받아 1675년(숙종 1)에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어 약 5년을 보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 정권이 성립되자 송시열은 적극적으로 출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서 많은 논쟁에 관여했는데, 특히 스승 김장생의 손자인 김익훈을 옹호한 일로 서인 소장파의 불만을 샀다. 또 자신의 수제자 윤증과 여러 가지 문제가 얽혀 장기간 논쟁했는데, 두 사건을 계기로 서인은 결국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숙의 장씨(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일에 반대한 서인을 내치고 남인을 등용했다. 당시 서인 영수였던 송시열은 원자의 정호(定號)를 미루자고 상소했다가 유배당하고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송시열의 행적과 공과에 대한 논쟁은 사후에도 생전처럼 뜨거웠다. 1689년(숙종 20) 서인이 집권하자 그는 바로 복관(復官)되었고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를 제사하는 서원이 각처에 건립되었고 1756년(영조 32)에 드디어 문묘에 종사되었다. 남인이나 소론 일각에서의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으나 점차 그의 공적이 인정되는 형편이었다.
송시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정조대가 절정이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송시열이 공자, 주자의 의리 정신을 계승했다고 평가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추승사업을 펼쳤다. 그에 힘입어 노론 측에서는 1787년(정조 11)에 기존의 문집과 별집 등을 망라한 234권의 거질 《송자대전(宋子大全)》을 간행했다. 《송자대전》은 분량뿐만이 아니라 명칭과 체제부터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유학의 성인(聖人), 현인(賢人)에 붙는 ‘자(子)’라는 영예로운 호칭에 《주자대전》을 본뜬 편집이었기 때문이다.

방대한 《송자대전》을 관통하는 핵심은 주자의 학문 완성과 그 지향하는 바의 실현이었다. “주자의 일점일획도 고치면 안 된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송시열은 주자를 철저히 존숭했다. 그에게 주자의 언설은 시대에 맞추어 재해석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그대로 적용해야 할 교리에 가까웠다. 주자학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봉은 주자에 대한 흠모로 이어졌다. 어느 날 송시열이 안질과 각질에 걸렸는데, 그는 주자도 같은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병을 번거로워하기보다는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생일날 받은 선물을 상대에게 다시 돌려준 것도 주자를 따른 것이었으며, 약혼한 손녀가 혼사 전에 죽은 것 역시 슬퍼하는 한편으로 주자에게 비슷한 예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을 정도로 송시열의 주자와 주자학에 대한 존숭은 맹목적이었다.

송시열이 후대에 더욱 인정받은 근거는 ‘의리 정신을 계승’한 삶 자체였다. 의리가 전도(顚倒)된 현실에서 ‘세상의 도리[世道]’를 지켰다는 평가가 있었기에 그는 공자, 주자를 잇는 후인(後人)이 될 수 있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정통인 주(周) 왕실이 추락하고 힘을 앞세운 패자(覇者)들이 천하를 좌우했다. 그가 인(仁)을 강조했던 것은 정통에 의한 질서를 회복하자는 현실성 있는 외침이기도 했다. 공자는 비록 생전에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유학자들은 공자의 외침이 있는 한 세상의 바른 질서는 언제든 회복될 수 있다고 여겼다.
주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자는 금(金)에 의해 송(宋)이 남쪽으로 밀린 시대에 살았다. 정통인 송은 쇠퇴하고, 오랑캐인 금이 패권을 쥐었다. 하지만 주자는 희망을 가졌다. 가치가 전복된 세상에서는 공자처럼 도리를 보전해야 한다. 현실은 가변적이기에 세상은 언젠가는 불변의 도리에 힘입어 다시 밝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 주자는 어지러운 시대에 유교문화의 정수를 창달하거나 계승했다. 정통이 뒤바뀌거나 국가가 멸망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밝힌 문화와 이념이 있는 한 세상은 다시 밝아진다. 그것이 유학자들의 세도관이었다.
송시열이 후대에 높이 평가받은 것은 그 정신을 계승, 실천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조선이 청에게 무릎 꿇고 명이 망해버린 시대를 살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교 국가인 조선은 유교문화의 명맥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송시열이 주자와 책임감을 동일하게 느끼고, 주자의 말 하나하나를 실천하려 한 데는 그런 절박함이 있었다. 그는 무너진 세도를 지킨다는 원칙을 평생 견지했고 결국 조선은 그것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송시열의 후인들,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붕당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집권 주류로 부상했고, 그의 행적은 국가를 지탱한 일로 칭송받았다. 영조대의 문묘 배향과 그를 주자의 후인으로 인정한 정조 대의 평가가 그 절정이었다.

송시열은 이념의 실천자였고, 단연 최고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자 방식대로’를 외치며 사문시비(斯文是非)를 벌였던 그의 노력이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고 거북살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송시열의 죽음도 일면 억울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원칙과 고집을 내세우며 극단을 치닫는 성격 때문에 정쟁의 비극에 휘말린 것이니 그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민하고 과단성 있으며 기력이 뛰어났던 유림의 종사(宗師) 송시열. 현재에 이르러서도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그가 조선 후기의 정치 사상계를 휘어잡았던 인물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암능양(思庵能讓)의 맑은 선비, 사암(思庵) 박순(朴淳)


사암능양(思庵能讓)의 맑은 선비, 사암(思庵) 박순(朴淳).

 

《논어》태백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백은 지극한 덕을 지닌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끝내 천하를 양보하였지만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길이 없었다.” 태백(泰伯)은 주나라의 선조인 태왕의 맏아들이다. 태왕이 세 아들 중 현명한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자 둘째 동생을 데리고 집을 떠나 숨었다. 왕이 된 계력이 낳은 아들이 뒤에 문왕이 되었고 문왕의 아들 무왕은 은나라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공자는 더 덕이 높은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한 태백의 덕을 ‘지덕(至德)’이라고 칭찬하였다. 왕위에 오르라는 세 차례의 권고까지 끝내 뿌리치고 왕위를 양보한 태백의 행위는 동양의 역사에서는 최고의 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배경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다. 태종이 영민한 충렬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보이자 양녕대군은 미친 척하며 세자 자리를 포기하였으며 효령대군 또한 양보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세종대왕이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왕위와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일화는 또 있었다.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일이다. 1568년(선조 1) 이황이 예문관의 제학에 임명되자 대제학 박순이 아뢰기를 “신이 나라의 문장을 주도하는 자리(대제학)에 있는데, 이황이 제학에 제수되었습니다. 나이 많고 큰 덕을 지닌 학자가 도리어 낮은 지위에 있는데 초학자인 후배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사람을 쓰는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청컨대 직임을 바꾸어 제수하소서.”라고 하였다. 박순의 권고를 받은 선조는 대신들과 논의하여 박순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이황을 대제학, 박순을 제학으로 다시 제수하였다.
이를 두고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에서 ‘사암능양(思庵能讓:사암(박순)이 겸양에 능하다)’이란 제목으로 이 일을 기록하기를 “아름다워라! 사암의 어짊이여! 세속에 모범이 될 만하도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욕만 멋대로 부리며 이런 일을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박순이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라고 칭송하면서 사리사욕에만 급급했던 당시 세태를 한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후대에까지 맑은 선비로 칭송을 받은 박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박순은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이다. 아버지는 개성 유수와 전주 부윤을 지낸 박우(朴祐)이고 큰 아버지는 기묘명현 박상(朴祥)이다. 할아버지 박지흥(朴智興)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자 충청도 회덕에서 살다가 광주로 은거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은 박지흥의 처가인 계성 서씨(桂城徐氏) 마을 근처였다. 박우는 분가하여 부인 당악 김씨의 향리인 나주 공산에 기거하였고, 박순은 1523년(중종 18) 10월에 나주에서 태어났다.
박순은 18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1553년(명종 8)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과 홍문관 등에 두루 근무하였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등의 청직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박순은 절개 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1556년(명종 11) 그가 중국 사행길의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로 있을 때, 적발한 밀수품이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건인줄 알면서도 가차 없이 압수해 버렸다. 대부분의 어사들이 왕실과 권신의 위세에 눌려 직무를 소홀히 하던 상황에서 박순은 엄격함과 과단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박순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시 때문이다. 박순은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 등의 삼당시인(三唐詩人)에게 당시(唐詩)를 가르친 이후 학당(學唐)의 흐름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박상과 함께 조선 중기 호남시단을 개창한 시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영평 백운동에 근거하고 있던 조준룡(曹駿龍)을 찾아가 지은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訪曹處士山居]」라는 시는 특히 절창으로 꼽힌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의 새가 알아듣네.

이중에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의 새가 알아듣네.[石逕笻音宿鳥知]”라 한 구절이 널리 알려져 ‘박숙조(朴宿鳥)’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순탄한 벼슬길을 걸어 1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영의정을 지낸 박순은 1586년(선조 19) 8월 이이의 탄핵에 반대하다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게 된다. 박순은 만년에 이이·성혼과 깊이 사귀어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는 반대파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이에 박순은 선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관직에서 물러나 도성 안의 집을 떠나 영평으로 들어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백운계곡(白雲溪谷) 창옥병(蒼玉屛)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조정을 떠날 때 선조가 내시를 파견하여 동대문 바깥 보제원(普濟院)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전송하였는데, 박순은 다음과 같은 시를 부채에 써 임금께 보내었다.

은혜에 보답할 재주 없음이 마음에 거리껴
늙은 몸 추슬러 시골집에 돌아가네.
한 점 남산은 볼수록 점점 멀어져 가는데
가을바람에 눈물이 은자의 옷을 적시네.

이 시를 본 선조는 박순의 뜻이 굳음을 알고 더 붙잡지 않았다 한다. 멀어져 가는 남산을 바라보고 눈물을 뿌리는 늙은 신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 작품이다.
박순이 물러난 곳은 창옥병 근처였다. 이곳을 택한 까닭은 영평 보장산(寶藏山)에 살던 천연(天然)이라는 스님이 아름다운 우두연(牛頭淵)에 있던 양씨(楊氏)의 정자를 사라고 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다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를 짓고, 언덕 높은 곳에는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도 지었다. 이에 대해 박순은 〈이양정기(二養亭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략) 큰 벼랑이 하늘에 기대 있고 그 뿌리가 장탄(長灘)과 청령담(淸泠潭)으로 파고들어 조물주가 깎고 다듬은 솜씨를 지극히 한 것이 창옥병(蒼玉屛)이다. 청령담 서쪽에 지은 초가가 배견와(拜鵑窩)다. 매번 창옥병에 봄여름 두견새가 와서 울면 산이 텅 비어 소리가 울려 퍼지는 데 듣는 사람들이 감개하게 된다. 또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초가 정자를 짓고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과 몸 두 가지를 기른다는 이천(伊川) 선생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왼쪽을 보면 큰 벽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네 개의 둔대가 이어져 있는데 모두 높은 산을 등지고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다.(후략)

박순은 창옥병 앞의 아름다운 청령담에 있는 여러 바위와 벼랑에 이름을 붙이고 한석봉의 글씨를 받아 일일이 새겨두었다. 청학대(靑鶴臺)·백학대(白鶴臺)·산금대(散襟臺)·수경대(水鏡臺)·토운상(吐雲床)·와존(窪尊) 등이 그것이다.
박순은 한 해 남짓 이곳에서 시인으로, 농부로 살다가 조용히 죽었다. 죽는 날도 베갯머리에 기대어 종일 시를 지었다. 그리고 “내가 가는구나.”하고 담담히 돌아갔다. 염하는 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우레가 쳤으며 밤에는 흰 기운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해와 달 같은 빛이 나타나 땅을 비추어 큰 인물이 돌아감을 알렸다 한다. 박순은 창옥병과 금수정이 바라다 보이는 뒷산 종현산에 묻혔다.
박순과 절친하였던 이이와 더불어 몸은 셋이지만 마음은 하나라는 말까지 들었던 성혼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세상 밖 구름 덮인 산은 깊고 또 깊어
시냇가 초가집은 벌써 찾기 어렵구나.
배견와(拜鵑窩) 위에 뜬 한밤의 달은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리.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박순이 돌아가시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특히 성혼의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라고 하면서 “무한한 감상의 뜻을 말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시를 지을 수 있으랴.”라고 평했다.
담양 송강정에서 지내고 있던 송강 정철도 박순의 부음을 듣고 이렇게 통곡하였다.

나는 떼를 잃은 기러기 같네
이 몸을 어느 곳에 의탁하리오.
외로이 나는 갈대밭 사이에
그림자 찬 구름과 함께 사라지도다.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근처의 옥병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옥병서원 앞 신도비의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선조 시절 14년간 내리 재상을 한 박순. 너무 겸손하여 성호 이익으로부터 ‘사암능양’이란 명성을 얻은 절창의 시인 박순. 창옥병에 새겨져 있는 선조가 내린 여덟 글자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 곧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조, 물과 달빛 같은 정신은 박순의 삶을 단적으로 말한 것이다.

문묘에 배향된 아버지와 아들,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문묘에 배향된 아버지와 아들,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가 정동길이 만나는 사거리 지점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인다. 그 입구를 따라 정다움이 느껴지는 좁다란 숲길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작은 표지석 하나가 나타난다. 표지석에는 ‘김장생, 김집 선생 생가터’라고 되어 있고, 그 설명에 ‘조선시대 5현의 한 사람으로 예학(禮學)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과 그의 아들로 예학의 대가인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1574~1656)이 태어나신 곳이다.’라고 쓰여 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보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김장생은 그 시대 최고의 석학으로 꼽혔던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에게서 예학을 배우고, 율곡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특히 성리학의 중추를 이루는 예학의 깊이가 깊어 예학의 태두로 칭송받았다. 그의 아들 김집은 부친의 학문을 이어받아 예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 추앙받았다.
문묘에 모신 여러 성현 가운데 ‘동국 18현’이 있다. 신라시대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시대의 안향, 정몽주, 그리고 조선시대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학문과 도덕의 수준이 깊고 높아 백성들이 하나같이 스승으로 우러러 받드는 인물들이다. 그들 가운데 부자가 함께 배향된 경우는 김장생, 김집 부자가 유일하다. 조선시대 문묘에 배향되는 것은 대대손손 가문의 자랑이었는데 김장생, 김집 부자는 함께 배향되는 더 할 수 없는 큰 영광을 누린 것이다.
그들 부자는 충청도 연산(논산)의 향리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아버지 김장생은 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해, 그의 거처는 이름난 연산서당(連山書堂)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했다. 선비들의 눈에는 아버지의 곁을 조용히 지키는 아들 김집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1606년(선조 39) 전라도 고부 출신의 선비 권극중(權克中)은 두 달 동안 연산서당에서 머물면서 김장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때 그는 스승 부자의 조화로운 삶을 목격하고 감동을 받아서,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글로 정리하여 후세에 남겼다.(〈유사(遺事)〉, 《신독재전서》제20권)

침실이나 서재에 훼손된 곳이 있으면, 신독재 선생이 손수 살펴보고 수리하였는데 흙손질도 직접 하였다……선생(김장생)께서는 준치[眞魚], 식혜, 메밀국수를 즐기셨다. (김집은) 식혜를 끼니마다 챙겨 그릇에 가득 담아 올리고, 국수는 사흘마다 한 번 올리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당시 선생의 집이 매우 가난했다. 그러나 신독재가 음식 일체를 미리미리 준비하여 부족하지 않게 하였다. 만일 상에 올릴 고기가 없으면 몸소 그물을 들고 서당 앞 시냇가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왔다. 밭 갈고 김매고 수확하는 일이며 요역(徭役)을 바치는 일 등 집안의 모든 일을 손수 다 맡아서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선생이 타시는 말도 살찌게 잘 보살폈고, 안장과 굴레 등도 항상 빈틈없이 손질하였다. 다니시는 길까지도 항상 깨끗이 쓸었다. 울타리 밑까지도 항상 손을 보았다. 이처럼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온갖 일을 묵묵히 차분하게 다 하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아들 김집은 효자였다.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 역시 권위를 부리거나 독선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권극중은 김장생의 사람됨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였다.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사계 선생은 덕성이 얼굴에 넘치고, 기상이 온화하고 단아하셨다. 가까이 모시고 있노라면, 마치 봄바람 속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런 김장생과 김집 부자가 함께하는 공간은 화기애애했다. 김장생과 김집의 수제자였던 송시열의 회고담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송시열, 〈어록〉, 《신독재선서》제18권)

선생(김집)이 서제(庶弟, 배다른 동생)와 함께 노선생(김장생)을 모시고 계셨다. 마침 서제는 참봉 윤재(尹材)에게 답장을 쓰고 있었는데, 상대를 ‘존형(尊兄)’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선생은 ‘세상 풍속이 그렇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다. 서제가 고쳐 쓸 때까지 (선생은) 온화한 말로 거듭 타이르셨다. 노선생께서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당시 선비들은 아들 김집을 선생, 아버지 김장생을 노선생이라고 불렀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 김장생은 매사에 개입을 자제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두 아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면서 김장생은 아들에게도 예를 다하였다. 아들이 질문하면 병상에 누워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리 가까운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고 해도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러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김집은 40여 년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크고 작은 예법을 철저히 배웠다. 윗방의 아버지와 밥상을 따로 했지만 아랫방의 김집은 윗방에서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결코 밥상을 물리지 않았다.
이처럼 평화롭고 정겨운 연산서당의 풍경과 달리 김장생 부자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김장생은 본래 병약했다. 1558년(명종 13)에 김장생은 열한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 김계휘(金繼輝)는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시골로 쫓겨난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 김호(金鎬)의 슬하에서 외롭게 자라야 했다.
김장생은 13세에 송익필에게 배웠다. 송익필은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어, 학문이 고명했던 이이와 성혼도 예에 관한 문제는 그에게 물었을 정도로 대가였다. 그리고 김장생이 이이를 찾아 배움을 청했을 때 나이가 스물이었다. 이이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고 스스로 회고할 정도로 그의 영향은 컸다. 또 33세에는 성혼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이로서 김장생은 서인 학문의 기초를 세운 세 사람의 학문을 고루 섭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1575년(선조 8)에 후배 사림이 동인(東人)을 형성하고 선배 사림이 서인(西人)을 형성하여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된 이후, 그의 스승 이이, 성혼, 송익필 등이 서인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동인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송익필은 서출(庶出, 서자 출신)이었던 부친 송사련이 안당(安塘) 부자를 고변하여 멸문시킨 신사무옥(辛巳誣獄) 때문에 사대부, 특히 동인에게 질시 받았다. 1586년(선조 19)에 동인은 그의 집안을 도로 천인으로 만들어버렸다. 기축옥사(己丑獄死)로 그는 신분을 회복했으나, 그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정쟁의 중심에 섰다. 이후 송익필은 유배와 사면을 거듭하다 말년에는 불우하게 여생을 마쳤다. 김장생은 스승의 집안이 선비에게 죄를 끼쳤다는 하자는 인정했지만, 법을 어기면서까지 가해지는 무고한 핍박에는 반대해 말년까지 스승의 뒤를 돌봐주었다.
동인들은 이미 작고한 김장생의 아버지까지 탄핵했다. 그는 참혹한 정치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현실정치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이후 몇 차례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미처 난을 피하지 못한 김장생의 장남 김은(金檃) 내외와 손자가 모두 실종되었다. 또한 서제(庶弟) 김연손(金燕孫)은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김장생 집안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둘째 아들 김집이 곁에 머물렀지만, 김집의 아내는 병이 심해 집안의 대소사를 조금도 돌보지 못했다.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장생은 이미 큰아들과 큰손자를 잃었기 때문에 김집이 새장가를 들었으면 했다. 그러나 김집은 재혼을 거부하고 앞서 첩으로 맞이한 이씨(이이의 서녀)와 해로할 생각이었다. 김장생은 아들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김장생 일가는 더 큰 위기를 맞았다. 문경 새재에서 일어난 강도사건을 계기로 집권층인 대북파는 일곱 명의 서자를 강도 혐의로 체포해서 고문을 가하고, 그들이 영창대군을 추대할 음모를 꾸몄다며 역모죄로 몰았다. 김장생의 서제 김경손(金慶孫)과 김평손(金平孫)도 이 사건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김장생에게도 역모 혐의가 씌여졌지만, 천신만고 끝에 풀려났다. 그러자 그는 연산으로 내려가 ‘시골집에 숨어 살며 문을 닫아걸고 외부인의 방문을 사절하고, 오직 경서(經書)만을 쌓아두고 읽는’(김집, 〈연보〉) 생활을 하였다. 김집도 그 곁을 지키며 평생 아버지를 봉양하며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김장생은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까지 10여 년간 학문 연마에 몰두했고, 강학을 통해 수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훗날 강학을 하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돈암서원이 세워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사정은 조금 달라졌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길에 올랐는데, 고령의 김장생은 나아가 인조를 뵈었다. 김장생의 나이 어언 75세, 아들 김집도 50세였다. 얼마 뒤 인조는 김장생 부자에게 관직을 내렸다. 김장생은 학자로서 고명했기에 실권은 없지만 명예로운 자리에 등용되었고, 김집에게도 부여 현감 자리가 주어졌다.
1627년(인조 5) 가을, 김집은 벼슬을 내려놓았다. 그 뒤 전라도 임피(군산)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금방 사직했고, 전라도사에 임명되었을 때는 부임조차 하지 않았다. 김장생 부자는 인조 초기부터 반정공신들과는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인조반정을 통해 서인이 집권 주류가 되었다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반정에 참가한 서인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들이 비록 ‘산림을 받들어 중용한다.(즉, 재야에 있는 선비들을 중요한 자리에 임명한다.)’고 내세웠지만, 그 말에는 산림은 객체이고 권신인 그들이 여전히 정국을 주도한다는 의미도 깔려 있었다. 그들은 이내 크고 작은 정파로 분열했는데 공신 대 비공신(功西와 淸西), 세대간 대립(老西와 少西) 등이 그것이었다.
청서(淸西)에 속했던 김장생은 인조와도 정면충돌했다. 1631년(인조 9) 인조는 자신의 생부 정원대원군을 추숭하여 왕호(王號)를 부여하려 했다. 인조가 생부를 높이고자 한 데는 그의 효심도 있었겠지만, 정치적 계산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생부의 권위를 높여 ‘반정’으로 집권한 자신의 허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조를 도와 반정을 일으킨 공신들은 대부분 추숭에 찬성했다. 그들과 인조는 정치적으로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은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예학의 태두로 손꼽히던 김장생은 끝까지 반대했다. 왕의 생부를 높여 ‘대원군’이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왕호까지 부여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요, 학문적으로는 마땅한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인조는 김장생이 학문을 빌려 왕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판단했다. 격노한 인조는 교서를 내려 김장생의 불충함을 꾸짖었다. 조정의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장생은 1631년 8월 8일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김장생을 성덕군자(成德君子)라 불렀고,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차마 직접 부르지 못하고 그가 살던 지명을 따서 ‘사계선생(沙溪先生)’이라 부르며 우러렀다.
김장생이 죽은 후에는 아들 김집이 그의 역할을 계승했다. 김집은 아버지의 《의례문해》를 교정하고 《상례비요》를 중간했다. 그리고 《상례문해속(喪禮問解續)》과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를 저술해 예학을 더욱 발전시겼다. 교육도 꾸준히 진행했다. 그의 문인은 송시열·송준길을 비롯해 이유태·윤선거 등인데 부친과 많이 겹친다. 사실 김장생 말년의 제자는 김집이 가르친 경우가 많았다.
김집은 아버지처럼 문과를 통하지 않고 천거로 관직에 올랐지만 실제 그 기간은 아주 짧았다. 병자호란 이후 산림으로서 잠시 경연(經筵)에 참여했지만, 그 비중은 미미했다. 그가 정계에서 의미 있게 활동한 시기는 효종이 즉위하고부터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산림을 대거 등용하자, 이미 70대 중반에 접어든 김집은 ‘대로(大老)’로 불리며 큰 기대 속에 출사했다. 당시 대로로 불린 사람은 김집 말고도 김상헌(金尙憲)이 있었다.
김장생, 김집 부자는 율곡 이이의 학맥을 공고히 하고 예학의 태두로 한 시대와 산림정치를 열었다. 그들 대에 체질이 바뀐 서인의 일부는 17세기 후반 노론으로 이어졌고, 18, 19세기에도 사대부층의 주류를 이어갔다. 김장생 부자에 대한 존숭이 높아감은 불문가지다. 김장생은 1717년(숙종 3), 김집은 1883년(고종 20)에 각각 문묘에 배향되었으니, 부자의 문묘 배향은 한국 역사상 그들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