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함께 하는 집,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봄을 함께 하는 집,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동인 옛 회덕(懷德)은 조선 후기 사상계의 태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이 세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회덕(懷德)’은 글자 그대로 덕을 품었다는 뜻이니, 덕이 높은 선비의 땅이라 하겠다.
은진 송씨는 송준길의 8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를 들면서 회덕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회덕이 은진 송씨의 터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송명의의 손자인 세종 때의 학자 송유(宋愉)에서 비롯된다. 은진 송씨의 중시조인 송유는 세종 때에 부사정을 지내다가 1432년(세종 14)에 낙향하여 회덕의 백달촌(白達村)에 집을 정하고 살았다.
당시 회덕은 회천(懷川)이라 불렸는데, 회천의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백달촌은 후에 송씨들이 집중적으로 살게 되면서 송촌(宋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다. 비래암(飛來菴) 옆의 물줄기가 동쪽 담산(澹山)에서 흘러나와 서쪽으로 흘러 갑천(甲川)으로 들어가는데, 송유는 그 한가운데 북쪽에 쌍청당(雙淸堂)을 지었다. 쌍청당이란 당호는 평소 송유와 교분이 두터웠던 난계(蘭溪) 박연(朴堧)이 ‘천지간에 바람과 달이 가장 밝은데……, 대개 연기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천지가 침침하게 가려졌다가도 맑은 바람이 이것을 쓸어내고 밝은 달이 떠오르면 위아래가 투명하게 맑아져서 티끌만큼도 흐트러짐이 없게 된다.’고 한데서 따온 것으로 바람과 달이 모두 맑은 집이라는 뜻이다. 앞에는 느릅나무와 버들, 뒤에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계단과 뜰에는 여러 가지 나무를 심어 꽃과 소나무 그리고 대나무가 한가롭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현달한 인물은 없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뛰어난 후손들이 배출되면서 쌍청당의 영예는 더욱 빛을 발하였다. 송여림(宋汝霖)의 현손이 송규연(宋奎淵)·송규렴(宋奎濂)이며, 송규렴의 아들이 송상기(宋相琦)다. 송여림의 아우 송여즙(宋汝楫)의 고손자가 송준길이고, 송여림의 사촌인 송여해(宋汝諧)의 손자가 송기수(宋麒壽)·송구수(宋龜壽)·송인수(宋麟壽)이며, 송구수의 증손자가 송시열이다.
송준길은 자가 명보(明甫)이며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송준길은 1606년(선조 39) 12월 28일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우선 태어난 장소가 김계휘(金繼輝)의 옛집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등 예학의 3대가 이 집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특이한 일로 전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송준길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예학의 정통을 이었음을 강조하는 후대인의 의도와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람의 꿈에, 어떤 사람이 산구(産具)를 손에 들고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 사람인데, 오늘 송이창(宋爾昌)이 아들을 낳을 것이므로 이것을 주려고 왔다.”하였다. 송이창의 연세는 많은데, 뒤를 이을 아들이 없자 종족과 이웃이 모두 “우리 청좌공처럼 덕을 쌓으신 분이 어찌 끝내 후손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선생이 출생함에 이르러서는 또 서로 축하며 “덕을 쌓은 보답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태어나서부터 외모가 수려하고 용모가 특이하며, 피부가 깨끗하고 정신이 맑으니 사람들은 ”정신은 가을 물처럼 맑고 골격은 옥처럼 아름답다.“라고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송준길은 부친 송이창을 따라 진안(鎭安), 신녕(新寧) 등의 임지에서 생활하다가 아홉 살 무렵 고향인 송촌으로 돌아가 송시열과 함께 기거하며 학업을 익혔다. 송준길의 졸기에 의하면 송시열과는 동종(同宗)인데다 또 중표형제(中表兄弟:외종·고종·이종사촌)가 되고 함께 김장생·김집 부자를 스승으로 섬겨서 덕망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양송(兩宋)’이라 칭하였다. 어린 시절 집안이 어려웠던 송시열은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형제, 동학, 정치적 동지로서의 관계를 자리매김하였다.

1623년(인조 1) 송준길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준길의 부친인 송이창이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2대가 같은 문하에서 수학한 셈이다. 송준길은 김장생에게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예서에 정통하고 예서의 말들은 자기 말처럼 외웠다고 한다. 김장생도 송준길을 두고 “이 얘가 장차 예가(禮家)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고 극찬하였다. 송준길은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통의 맥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역시 송시열과 김집에게 수학하게 함으로써 서인 학통의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였다. 또한 그는 장인이자 예학가였던 정경세(鄭經世)에게도 학문을 배워 남인 학풍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1630년(인조 8)에 송준길은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고, 1636년(인조 14) 예산현감에 제수하였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송준길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한 것은 효종대였는데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의 영향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송준길은 이시백과 사이가 좋았는데, 인조가 시백을 불러 주연을 벌일 때, 세자(후의 효종)에게도 대신으로서 이시백을 깍듯이 대우할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인조가 이시백에게 “지금 세상에 독서인이 누구냐?”하고 물으면 이시백은 그 기회를 이용해 송준길을 추천하였고, 세자는 그러한 일을 기화로 송준길을 늘 염두에 두었다. 실제로 1649년(효종 1)에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준길을 기용해 사헌부 집의로 삼았다. 이외에도 효종대 그의 정계 진출은 효종이 친청파를 몰아내고, 산림을 등용하는 정치적 시점과도 맞물린 것이었다. 송준길은 친청파인 김자점과 그 무리를 논핵하여 미움과 원망을 받았으나 이후 효종이 그들을 몰아내고 역모 죄로 처벌되자 왕의 예우가 다시 융숭해지고 정계로 불러들이는 일이 계속 잇따랐으며 교자(轎子)를 타고서 나오라고 명할 만큼 우대하였다.

1643년(인조 21) 송준길은 회덕의 송촌에 동춘당을 세웠다. 그로부터 10년 후 조익(趙翼)이 송준길의 청으로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이름난 산이 눈길 안에 있고 흐르는 물이 집 아래에 있다. 산은 사계절과 아침저녁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화하고 한 줄기 물길이 마을을 감싸고 맑게 굽이돈다. 이 모든 것을 즐길 만하다. 이에 그 이름을 동춘(同春)이라 하였는데, ‘사물과 더불어 봄을 함께한다[與物同春]’는 뜻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다. 조익은 봄이 인(仁)에 해당되므로 송준길의 뜻이 인을 구하는 데 있다고 하며, 송준길이 이곳에서 큰 학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숙종대에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이곳 동춘당에 들러 하루를 유숙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동춘당 아래 봄옷을 입어보니
춘흥이 일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는 듯.
작은 뜰의 고운 풀에서 물성(物性)을 살피고
성긴 비 살구꽃에서 천기(天璣)를 찾으시네.
샘물은 콸콸 수맥이 처음부터 우렁찬데
어린 새 파닥파닥 날갯짓을 배우네.
가는 곳마다 똑같은 흥취가 있으니
놀러 온 이로 하여금 돌아갈 것 잊게 하네.

송준길은 동춘당에 기거하면서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사헌부에서 장령과 집의, 세자시강원에서 진선(進善) 등을 지냈으나 곧바로 그만두고 물러나 강학과 저술을 업으로 삼고 간혹 계룡산이나 백마강 등 인근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흥을 풀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송준길이 지방에서 한가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찬선(贊善), 대사헌, 판서, 참찬(參贊) 등 벼슬을 높여가면서 계속 그를 불러들였다. 간혹 대궐로 나아가 경연(經筵)에 입시하거나 다른 직무를 본 때도 있었지만 송준길이 실제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게 살다가 1672년(현종 13) 12월 2일 향년 67세로 동춘당에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