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수제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송시열의 수제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북 제천은 물의 도시다. 제천(堤川)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많은 저수지[堤]와 여러 물줄기[川]가 있는 곳이다. 물줄기는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충북으로 흘러들어 서남쪽으로 흐르다 단양에서 서쪽으로 물길을 바꾸고, 한수면(寒水面) 황강리(黃江里)에서 제천천(堤川川)과 합쳐져 제천시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지른다.

바로 이곳 한강 상류의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한수면 황강은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를 길러낸 권상하(權尙夏)가 1675년(숙종 1) 35세의 나이로 이곳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44년을 살았던 곳이다. 황강은 권상하를 낳았고, 권상하는 황강을 후대에까지 이름나게 하였다. 권상하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또는 황강거사(黃江居士)라는 호를 썼는데 한수재와 황강거사는 한수면과 황강에서 나온 이름이다.

권상하의 집안은 본관인 안동에서 세거하다가 증조부 때부터 제천의 황강으로 선영을 옮겼다. 권상하는 한양 동현(銅峴)의 집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부터 조부 권성원(權聖源)의 임지를 따라 여산(礪山)과 영주(榮州) 등지를 다니다가 조부가 세상을 떠난 후 스무 살 무렵이 되어서야 서울로 돌아와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1662년(현종 3) 제천에서 스승 송시열을 뵙게 되었는데 권상하의 선영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권상하는 송시열의 적통을 이어받은 제자가 되었다.

원래 황강은 권상하의 부친인 권격(權格)이 은거의 땅으로 점지한 곳이었다. 강릉부사, 사헌부 장령 등을 지낸 권격은 당시 직간을 잘하기로 소문난 민응형(閔應亨)으로부터 간신(諫臣)의 풍모를 지녔다는 평을 들었고 송시열, 송준길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권격은 점차 벼슬에 뜻을 잃어 고향 제천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1671년(현종 12) 아들 권상하로 하여금 먼저 내려가 은거를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일을 처리하고 내려가려던 순간 갑자기 병이 생겨 그는 결국 죽은 후에야 고향땅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권상하는 1675년(숙종 1) 스승이 진천(鎭川)의 유배지에서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옮겨가자, 마침내 한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가족들을 이끌고 황강으로 내려갔다. 황강에 도착한 그는 임시로 선영 아래 고산촌(孤山村)에 우거하였다. 얼마 후 권상하는 황강촌(黃江村)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덕원의 유배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스승은 그의 새로운 거처 이름을 ‘수암(遂菴)’이라 지어주었다. ‘내 마음이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고 있으면, 하늘이 반드시 내 소원을 이루어준다[吾心誠有志於學 天其遂吾願]’는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글에서 딴 것이다.

큰 학자 권상하가 황강에 칩거하자 사람들이 그의 집을 찾았고, 이로 인해 황강은 더욱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유배에서 풀려난 스승이 화양동으로 돌아왔다. 권상하는 즉시 화양동으로 들어가 스승을 알현하였고, 이후 그의 삶은 화양동, 청주 묵방(墨坊), 여강(驪江), 판교(板橋), 지평(砥平), 청안(淸安) 등지로 송시열을 찾아가는 일로 채워졌다.
권상하는 철저하게 스승인 송시열을 좇았다. 1685년 회덕(懷德)에 살던 송시열과 이산(尼山)에 살던 윤증(尹拯) 사이에 큰 다툼이 생겨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일어났다. 원래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김장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일을 비난하였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무성의하게 지음으로써 제자 윤증과 갈등을 빚었다. 이에 윤증은 송시열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이 편지가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회니시비가 일자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권상하는 그동안 절친하게 지내던 나양좌, 윤증과 단숨에 절교를 선언하고, 율곡학파의 적통인 김장생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찾는 일을 제외하고는 황강에서 강학에 몰두하였다.

1686년(숙종 12) 10월 권상하는 한수재(寒水齋)를 지었다. 그러자 송시열이 이름을 짓고 직접 편액을 써주었는데, 이로 인해 한수재는 권상하의 또 다른 호가 되었다. 이때 송시열이 지은 「한수재 편액의 뒤에 쓰다[書寒水齋扁額後]」에 따르면, 한수재라는 이름은 주자(朱子)의 “삼가 천년의 한결같은 마음, 가을달이 찬 물을 비추는 듯하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라 하였다.

1689년(숙종 15)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昭儀張氏)의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국을 장악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했던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권상하는 유배를 떠나는 스승을 모시고 태인(泰仁)까지 내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스승으로부터 이이와 김장생의 수적(手蹟)과 유고를 받음으로써, 율곡학파의 적통을 전수받았다. 송시열이 완성하지 못한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典箚疑)』를 완성하라는 부탁도 함께 받았다. 아울러 만동묘(萬東廟)의 건립도 유언으로 당부 받았다.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기 직전 권상하가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하자, 송시열은 그의 손을 잡고 존주대의를 실천하고 도를 밝힐 것과 항상 ‘곧을 직(直)’을 행실의 사표로 삼아야 된다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권상하는 정읍에서 사약을 받은 스승의 최후를 지켜보고, 다시 황강으로 돌아갔다.

권상하는 스승이 떠난 후 사문(斯文)의 맹주가 되었다. 권상하가 황강에 눌러앉자 수많은 벗과 제자들이 그의 처소를 찾았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의 강문팔학사가 유명하였다. 벗으로서는 권상하보다 한 살 위인 임방(任埅)이 특히 그의 집을 자주 찾았다. 임방은 1676년 권상하가 새로 집을 짓자 축하하는 시를 보냈고, 그 뒤로는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러다 20여 년이 지난 1694년 그의 집을 방문하고는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푸른 강 파란 돌 가을 국화를 비추는데
말 가는 대로 가노라니 길은 울퉁불퉁
물가에 찌그러진 집 문도 걸지 않았구나.
멀리서 보아도 옛 벗의 집임을 알아보겠네.

이 무렵 임방은 단양과 제천 일대를 유람하면서 권상하의 아들, 조카 등과 시를 수창하였고, 권상하와도 선암동을 유람하였다. 또한 가끔 권상하의 집에 들러 함께 묵기도 하면서 몇 년간 두 사람은 친하게 지냈다.
노인이 된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강학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1704년(숙종 30) 만동묘를 세우고 화양서원을 그 곁으로 옮겨 스승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 해에 호조참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고, 1705년에는 이조참판에 이어 찬선이 되었고 이후 1716년까지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1712년 한성부 판윤에 이어 이조판서, 1717년(숙종 43) 의정부 좌찬성에 이어 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스승을 배신한 윤증의 학설을 비판하고, 성리학을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으며 스승의 뜻을 잇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다 1721년 8월 29일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모두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달려가 곡(哭)하였고, 상복을 입은 문인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