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유림, 해주 율곡 종택에 가다


강릉 유림, 해주 율곡 종택에 가다.

 

서남기행(西南紀行)』은 두 사람의 강릉 유림이 계미년(1943년) 4월 18일(양력 5월 21일)부터 5월 5일(양력 6월 7일)까지 17일간 한반도 서쪽의 해주에서 남쪽의 안동에 이르는 지역을 여행하면서 선현들의 유적지를 답사한 기행문이다.
여기서 소개하는 『서남기행』은 강릉시 운정동 조옥현가의 소장본으로 가로 14.6cm×세로 24.6cm의 크기에 총 42장, 84면으로 한지(韓紙)에 청색 세필로 쓴 필사본이다. 『서남기행』을 쓴 사람은 선교장주(船橋莊主)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의 아들인 경미(鏡湄) 이돈의(李燉儀)이다. 그리고 여행에 동행한 사람은 성균관 전적을 지낸 심의섭(沈儀燮)이었다.
필자는 여행에 나서게 된 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함은 성인의 가르침인데, 나는 본래 산수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어 가까운 명승지는 거의 다녀보았지만 선현(先賢)의 고택과 유적은 한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이는 비단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재주가 본래 노둔(魯鈍)하여 6세에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나 겨우 통감(通鑑) 3권도 다 마치지 못하였고 매일 3~4행의 과정(課程)도 암기하지 못하였다. 12세에 동진학교(東進學校)에 입학하였지만 멀지 않아 폐교됨으로써 신구(新舊)의 학문을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혹 여가가 있더라도 용맹정진하는 힘이 없었고 다만 향하여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이었다. 다행히 오늘 나의 동지 오헌(梧軒) 심의섭 형이 기어이 함께 동행 하고자 하니 가히 이난(二難: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사람)의 어울림이라 하겠다.

『서남기행』 중에서 해주 율곡 선생의 종택을 방문하고 석담구곡을 유람한 내용까지 만을 발췌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계미년(1943년) 4월 18일(금요일) 양력 5월 21일 맑음
바야흐로 출발하고자 할 때 마침 오늘이 읍면협의원 총선거일이어서 출발 예정시각을 변경하고 먼저 면사무소에 가서 투표를 한 후, 친우 심의섭과 함께 자동차부로 갔다. 발차 시간이 아직 멀었으므로 상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0시에 자동차를 타고 4시에 양양역에 도착하였는데 기차는 5분전에 이미 출발하여서 부득이 역 앞의 양양여관에서 숙박하였다. 오늘의 행정(行程, 여행 길)은 도보(徒步) 10리, 자동차 130리였다.

4월 19일(토요일) 양력 5월 22일 맑음
해주행 2등 열차표를 사서 원산행 기차에 승차한 것이 오전 6시였다. (기차에서 내뿜는)검은 연기는 하늘에 가득한데 시험삼아 앞으로 나가 바라보니 끝없는 동해 바다와 설악산과 금강산이 숲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오후 3시에 안변역에 도착하여 경성행 기차로 갈아타고 10시에 경성에 도착하였는데, 수많은 전등은 별들과 그 밝음을 다투고 있고 오르고 내리는 승객이 가히 인산인해였다. 안동행 기차는 10시에 출발하나 2~3등 열차표는 물론이고 전 좌석이 만원이라 밤새도록 서서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중도의 수색역에서 하차하여 반야(半夜)라도 편히 잘 생각으로 수색역에서 내렸으나 여관은 물론 음식점도 없었다. 밤은 이미 깊었는데 두 사람이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김천대식당(金千代食堂)으로 안내해주었으나, 이 곳 역시 영업시간이 넘었다고 하면서 재삼 간청하였으나 불허하므로 어쩔 수 없이 역 대합실에서 묵었다. 오늘 기차로 간 거리가 1천리였다.

4월 20일(일요일) 양력 5월 23일 맑음
오전 6시에 안동행 기차를 타고 장단역에 도착하니 여기서부터는 개성이 가까워서 종종 삼포(蔘圃)가 바라다 보였다. 개성역에 도착하여 대성여관(大成旅館)에서 아침을 먹고 안내자 한 사람을 구하여 고적(古跡)을 찾아 나섰는데, 먼저 옛 궁궐터 만월대(滿月臺)와 인삼관(人蔘館)을 관람하였다. 인삼관은 특별히 서양식으로 새로 지은 건물인데 기문(記文)은 경학원 제학 공성학(孔聖學)이 찬(撰)하였다. 1년근에서부터 5년근까지 건삼을 진열하고 생삼(生蔘)을 약수에 담가 유리병에 넣은 것 등을 감상하였다. 개성에 온 것이 이번까지 세 번이나 왕씨 후예는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다행이련가 불행이련가.
인삼관에서 북쪽으로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옛 궁궐터 만월대가 바라보인다. 만월교(滿月橋)를 지나 신봉문(神鳳門) 옛 터를 찾아보고 수십 보 앞으로 나가면 고색창연한 십 수개 층의 돌 계단이 나오고 이를 오르면 경회(慶會)․장화(長和)․원덕(元德) 등의 여러 궁전과 전문(殿門)의 초석(礎石)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옛날의 문물제도를 미루어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궁궐터가 다른 곳과 다른 점은 남북은 장방형이고 동서는 협소한데, 그 산세를 살펴보면 송악 높은 봉우리가 북방을 누르고 주맥(主脈) 일룡(一龍)이 굼틀거리며 이어져 만월대에 이르렀다.
만월대 위에서 굽어보니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데 가옥제도도 다른 곳과 달라 좌우는 초옥(草屋)이 조밀하고 와옥(瓦屋)이나 돌로 지붕을 이은 집들은 중부에 많이 있어서 아직도 옛날의 규모를 보이고 있었다. 언어 또한 달라서 한양은 내려간다고 칭하고, 송경(松京:개성)은 올라간다고 칭하였다.
만월대 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선죽교를 찾아서 계곡을 따라 가다보니 시가지 동남쪽 5리쯤 되는 곳에 두 개의 석교(石橋)가 나왔다. 그 중 한 곳은 돌 난간을 두르고 있으니 이 곳이 곧 포은 정선생이 성인(成仁)한 다리였다. 혈흔은 완연히 변하지 않았으나 냇물이 말라 있어 물에 깨끗이 씻긴 선홍색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며 비각(碑閣)을 찾아뵈니 ‘고려충신 포은 정선생 성인비(高麗忠臣圃隱鄭先生成仁碑)’라고 크게 써 있고, 좌우변에는 ‘일대충의 만고강상(一代忠義萬古綱常)’ 8자가 나누어 새겨져 있는데 늘 습기를 머금고 있으므로 세칭 읍비(泣碑)라 한다고 하였다. 다리 북쪽 아래에 비각이 있으니 영묘 고묘 양조 어제비(英廟高廟兩朝御製碑)가 나란히 서있는데 단청이 아직도 새것 같았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선생의 유허(遺墟)인 숭양서원(崧陽書院)이 나온다. 수직(守直)의 안내로 정문을 들어서면 동서재가 좌우로 나뉘어 있고 정면 강당의 좌우에는 온돌방이 각 2칸씩 있으며 중앙의 6간 대청에는 시문 현판(懸板)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강당 뒤편 삼문내의 묘우(廟宇)에는 정문충공(정몽주), 우문정공(우현보), 서문강공(서경덕), 김문정공(김상헌), 김문정공(김육), 조문효공(조익)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우측의 별실에는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수직의 집에서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고려시중 우현보의 유허비각이 있고, 언덕 위의 두 동의 단청 건물은 박물관으로서 서화, 도자, 불상, 금속 등 고려의 옛 물건들을 진열하였다.
정오경에 기차로 출발하여 토성(土城)역에서 해주행 기차로 갈아타고 연백 등을 거쳐서 밤 9시 경에 해주에 도착하였다. 소지한 요깃거리로 저녁을 대신하고 대양여관(大洋旅館)에 숙박하니 오늘의 행정(行程)은 보행 20리, 차행 3백 3십리였다.

4월 21일(월요일) 양력 5월 24일 맑은 후 흐림
오전 9시에 신천(信川)행 자동차를 타고 석담(石潭)을 향해 가면서 좌우의 들판을 바라보니 황해도는 연로(沿路)의 다른 곳에 비해 극히 풍요롭고 윤택하여 각종 곡식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부녀자들이 집밖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며 늙은 부녀자들이 어린 손자를 업고 전답 사이를 배회하는 모습이 고대의 순박한 풍습이 아니라면 신사조(新思潮)일 터인데 여하간 볼만한 광경이었다.
고산면 연당리에서 하차하였는데 곧 송애(松涯) 박공의 자손이 세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리쯤 가면 은병정사(隱屛精舍)의 입구이니 떡 한 그릇을 사서 점심을 대신하고 소주 한 되는 9곡(九曲)행에 필요하므로 미리 사서 구곡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계곡을 건너니 경관이 그윽하여 경건한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은병정사 앞 5곡(五曲) 돌다리를 다시 건너니 이곳이 바로 선생의 고택이었다. 문을 들어서니 한 노인이 단정히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우리 두 사람을 보고 반가이 맞아 주었다. 교리 어른이 집에 계신가를 물으니 출타하여 부재중이라 하면서 우리 두 사람의 사는 곳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자신은 옥산(玉山)의 자손으로 서울에 사는 이종배(李鍾培)라고 하는데, 행동이 방정하여 가히 현사(賢士)의 자손이라 할 만 하였다.
잠시 한담을 나눈 후 혼잣말로 교리 어른이 어찌 아직도 오지 않을까 하더니 곧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종배씨가 한 노인을 모시고 왔는데, 의관이 정숙함은 물론이요 행전을 아울러 착용하고 있으니 이 어른이 곧 선생의 13세손으로 당년 70여 세의 종문(鍾文)씨였다. 절을 하여 뵙고 온 이유를 고하니 주인어른이 답하기를, 작년에 강릉에 갔다가 활래정을 지나면서 주인이 부재중이란 말을 들어 면회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잠시 후 국수를 대접하여 두 사람이 맛있게 먹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오후가 지나 물러갈 것을 고하니 주인어른이 힘써 만류하며 말하기를, 천리 먼 길을 오셨는데 총총히 이별함은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하인에게 명하여 행구(行具)를 옮겨오게 하고 3남 인희(璘熺)군으로 하여금 9곡을 안내하도록 하니 그 성의에 감격스러웠다. 선현의 고택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 본래의 뜻이어서 사양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인희군과 동반하여 먼저 은병정사로 갔는데 정문의 좌측에 요금정(瑤琴亭)이 있고 후면에 있는 고산구곡담기실비(高山九曲潭紀實碑)는 한산(韓山) 이희현(李羲玄)이 쓴 것이다. 좌측에 풍영정(楓咏亭) 세 글자를 바위에 새겨 놓았고, 그 옆의 소현서원중건기실비(紹賢書院重建紀實碑)는 이교리가 찬하고 연안(延安) 차봉대(車鳳大)가 전(篆)하였는데 임오년 8월에 세웠다. 비의 후면에 의연인(義捐人)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 공경하는 예에 흠결로 여겨졌다.
정문 안에는 은행나무와 노송나무가 좌우에 서있고 정면 문미(門楣)에 있는 은병정사의 현판은 선생이 강학하던 당시의 정사를 소현서원으로 개칭하였다가 무진년에 철폐된 후 중건시에 옛 현판을 다시 건 것이다. 강당 앞의 묘정비 기문은 강재(剛齋) 송공이 찬하고, 고동(古東) 이판서가 쓴 것이다.
묘내에 들어가 율곡 등 여러 선생의 위패를 참배한 후 요금정에 올라 바라보니 십여 칸의 수직가(守直家)와 4~5동의 초가, 그리고 수백년된 느릅나무가 맑은 계곡 주위에 둘러 서 있으며 개울 건너편에는 5곡(五曲) 은병이 서있으니 맑은 계곡과 흰 바위 등의 시원한 풍광이 진실로 지극히 아름다웠다. 이 정자는 이지촌(李芝村) 선생이 창건한 곳으로 제현의 시문판이 줄지어 걸려 있다.
세 사람이 가져간 소주로 대작하고 산기슭을 끼고 개울가를 따라 서쪽으로 가니 곧 청계당(聽溪堂)이었다. 두 그루 은행나무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이는 선생이 당시에 손수 심었으니 3백여 년간을 수호한 것이다. 4곡(四曲)의 맑은 계류가 앞에 있고 무수한 봉우리는 뒤에 펼쳐져 있다. 강당으로 올라가니 선생의 시판이 중청(中廳)에 걸려 있고, 좌우의 각 1칸 방은 창문과 벽이 낡고 헐었으며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였다.
강당 서쪽에 석정(石井)이 하나 있는데 한줄기 맑은 샘이 석벽으로부터 솟아나오니 곧 선생이 늘 마시던 샘이다. 우암(尤菴)이 쓴 ‘수불인황 지불인폐(水不忍荒地不忍廢)’ 8자를 8분하여 해서(楷書)로 새겼으며, 그 곁에는 강재(剛齋) 송공의 석정명(石井銘)이 있으나 글자가 작고 오래되어 이끼가 끼어 자획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다시 험한 바위 길을 올라 수백 보를 나아가니 우암이 쓴 ‘고산청허대(高山淸虛臺)’라는 각석(刻石)이 있고, 여기서부터 등나무 줄기를 잡고 올라가면 곧 가공암(架空庵) 유지(遺趾)가 나오는데 그 터는 수십 칸에 불과하나 경치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1곡(一曲)과 2곡(二曲)은 수리조합 저수지에 편입되어 큰 호수로 변하여서 당시의 유적을 다시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탄하며 교리댁에 돌아와 선생의 수찰(手札) 여러 편과 사임당 초충화 한 폭, 구곡병풍 한 좌를 차례로 봉람(奉覽)하고 가져간 석우(石友) 박부현(朴富鉉)이 그린 구곡화본과 비교하여 살펴보니 대동소이하였다. 원래의 그림과 병풍은 정조(正祖)의 명으로 도신(道臣)이 실사(實寫)하여 진상한 것이라 하였다.
현 가옥은 선생의 현손(玄孫)인 첨지공(僉知公) 정이 중건한 것으로 내외재(內外齋) 및 행랑채가 근 60칸으로 태반이 퇴락한 느낌이었다. 대청에는 ‘무이석담(武夷石潭)’, 그리고 대청 기둥에는 퇴계가 쓴 ‘고거문장(高居文章)’, 우암이 쓴 ‘은귀정(恩歸亭)’ 등의 여러 현판이 걸려 있으며 대청의 유리장 안에는 수천 권의 서책이 소장되어 있다. 동쪽 헌가(軒架) 위에는 격몽요결의 각판(刻板)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집 뒤의 산으로 올라가 살펴보니 오좌자향(午坐子向)에 배산임류(背山臨流)여서 가히 웅려(雄麗)한 집터라 할 만하였다.
교리어른이 저녁을 함께 들고 우리들의 침구를 비치하도록 한 후 별가(別家)로 간 뒤 조금 있다가 장손인 27살의 재능(載能)군이 출타했다가 돌아와서 종배(鍾培) 노인과 더불어 선생의 유사(遺事) 및 경향의 학문에 대해 밤늦도록 토론하다가 취침하였다. 오늘의 여행거리는 차행 50리, 도보 10리였다.

4월 22일(화요일) 양력 5월 25일 맑음
이종배씨에게 고별하고 인희, 재능 두 사람과 함께 교리어른의 별가에 가서 고별하니, 우리들의 여정을 염려하여 구곡 가운데 4, 5곡의 경치가 뛰어나고 그 외는 별로 볼 것이 없으므로 구곡을 보러 문산으로 가면 30리를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번의 여행 말고는 다시 오기가 어렵고 천리행정을 하는 터에 어찌 반나절의 수고를 꺼리겠는가.
은병정사의 직자(直子)가 대신 짐을 매고 동북방의 계류를 따라 몇 리를 가니 곧 6곡(六曲) 조계(釣溪)가 나왔다. 평야의 전답과 옹립한 산봉우리들이 좌우로 보이는데 수목은 울창하고 계곡의 돌들은 겹겹이 쌓여 있으며, 골짜기의 시내에는 작은 물고기가 무리를 이뤄 유영하고 있었다. 개울가 반석 위에서 한 잔 술을 대작하였다.
계곡을 따라 몇 리를 가니 곧 7곡(七曲) 풍암(楓岩)이었다. 층층한 절벽이 맑은 계곡을 따라 늘어서 있고 단풍나무 사이로 방초(芳草)가 우거져 있어 한 폭의 화병(畵屛)이 천연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풍암이란 두 글자가 바위에 새겨진 것은 아니지만 여행객을 안내하기에 족하였다. 풍암은 원래 가을 경치가 뛰어난 곳이지만 여름 경치도 또한 아름다웠다. 다시 한잔 술을 마시고 한 구절 시를 읊었다.
풀이 우거진 곳과 논밭 사이를 걸어서 4, 5리를 가니 곧 8곡(八曲) 금탄(琴灘)이었다. 높은 산과 맑은 계류가 스스로 거문고의 곡을 이루니, 시인이나 문사라면 어찌 한 두 수의 시를 읊지 않으리오.
다시 큰 길을 향하여 평야와 촌락을 지나 6, 7리를 가니 한줄기 맑은 계류가 층층한 바위와 나무숲 사이를 졸졸 흐르고 이상한 짐승이 토끼를 쫓는 모습이 마치 우리들을 환영하는 것 같았다. 이쪽이 통하면 저쪽이 막히는 것이 이치의 상궤이니, 풍암에서 보지 못한 좋은 경치를 문산(汶山)의 진경(眞境)으로 대신하였다. 구곡을 차례로 지나며 술잔을 든 것은 선배들도 반드시 미치지 못한 것일 것이다 하며 서로 호탕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구곡을 다 보고나니 만약 한가한 때가 있으면 다시 찾아와 상세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여의치 않은 것이 진실로 유감이었다. 30리 긴 계곡이 모두 석산(石山)이면 더욱 좋을 것 같은데 한쪽이 산이면 한쪽은 평야인 것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4, 5 양곡(兩曲)의 뛰어난 경치는 과연 교리어른이 말한 바와 같았지만, 그 외는 평범한 산천이라 우리 고향의 청학(靑鶴)이나 보현(普賢)의 경치가 이곳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은 선현이 장수(藏修)하던 옛 터이니 경모하는 마음이야 어찌 다른 경치와 비교하겠는가.
율미면(栗彌面) 도현리(道峴里)의 도로에서 해주행 차를 기다리다 시간이 일러 걸어서 예당동(禮堂洞) 주점에 가 떡을 사서 점심을 대신하였다. 서석역(西席驛)에 도착해서는 주점을 찾아 두 사람이 방원주(芳元酒)를 통음하고 백반으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집을 떠나 온 후 처음 보는 물건이라 배부르게 먹고 마셨으니 잠시 여행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10시에 기차로 해주에 도착하여 연해여관(延海旅館)에 숙박하니 오늘의 여행거리는 보행 50리, 기차 30리였다.


1) 서울~신의주간을 연결하는 경의선(京義線)은 총연장 499km로 서울을 기점으로 개성-사리원-평양-신안주를 거쳐 신의주에 이르렀다. 경의선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 만주로 연결되었는데, 즉 1911년 압록강철교의 개통으로 열차의 운행을 만주 안동(安東)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2)송치규(宋穉圭) 1759(영조 35)~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 송시열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黙)의 문인이다.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3)이희조(李喜朝) 1655(효종 6)~1724(경종 4) 자는 동보(同甫), 호는 지촌(芝村). 송시열의 제자. 해주목사로 있을 때 율곡의 유적인 석담을 찾고, 요금정(瑤琴亭)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