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암능양(思庵能讓)의 맑은 선비, 사암(思庵) 박순(朴淳)


사암능양(思庵能讓)의 맑은 선비, 사암(思庵) 박순(朴淳).

 

《논어》태백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태백은 지극한 덕을 지닌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끝내 천하를 양보하였지만 백성들은 그를 칭송할 길이 없었다.” 태백(泰伯)은 주나라의 선조인 태왕의 맏아들이다. 태왕이 세 아들 중 현명한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자 둘째 동생을 데리고 집을 떠나 숨었다. 왕이 된 계력이 낳은 아들이 뒤에 문왕이 되었고 문왕의 아들 무왕은 은나라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공자는 더 덕이 높은 사람에게 왕위를 양보한 태백의 덕을 ‘지덕(至德)’이라고 칭찬하였다. 왕위에 오르라는 세 차례의 권고까지 끝내 뿌리치고 왕위를 양보한 태백의 행위는 동양의 역사에서는 최고의 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배경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다. 태종이 영민한 충렬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는 기색이 보이자 양녕대군은 미친 척하며 세자 자리를 포기하였으며 효령대군 또한 양보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세종대왕이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왕위와 관련된 일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일화는 또 있었다. 조선 선조 임금 때의 일이다. 1568년(선조 1) 이황이 예문관의 제학에 임명되자 대제학 박순이 아뢰기를 “신이 나라의 문장을 주도하는 자리(대제학)에 있는데, 이황이 제학에 제수되었습니다. 나이 많고 큰 덕을 지닌 학자가 도리어 낮은 지위에 있는데 초학자인 후배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사람을 쓰는 것이 뒤바뀌었습니다. 청컨대 직임을 바꾸어 제수하소서.”라고 하였다. 박순의 권고를 받은 선조는 대신들과 논의하여 박순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이황을 대제학, 박순을 제학으로 다시 제수하였다.
이를 두고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성호사설》 〈인사문(人事門)〉에서 ‘사암능양(思庵能讓:사암(박순)이 겸양에 능하다)’이란 제목으로 이 일을 기록하기를 “아름다워라! 사암의 어짊이여! 세속에 모범이 될 만하도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욕만 멋대로 부리며 이런 일을 본받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랴. 아,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박순이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것은 겸양의 극치라고 칭송하면서 사리사욕에만 급급했던 당시 세태를 한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후대에까지 맑은 선비로 칭송을 받은 박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박순은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이다. 아버지는 개성 유수와 전주 부윤을 지낸 박우(朴祐)이고 큰 아버지는 기묘명현 박상(朴祥)이다. 할아버지 박지흥(朴智興)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임금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빼앗자 충청도 회덕에서 살다가 광주로 은거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마을은 박지흥의 처가인 계성 서씨(桂城徐氏) 마을 근처였다. 박우는 분가하여 부인 당악 김씨의 향리인 나주 공산에 기거하였고, 박순은 1523년(중종 18) 10월에 나주에서 태어났다.
박순은 18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1553년(명종 8) 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과 홍문관 등에 두루 근무하였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등의 청직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박순은 절개 있고 강직한 선비였다. 1556년(명종 11) 그가 중국 사행길의 밀수품을 단속하는 수은어사로 있을 때, 적발한 밀수품이 문정왕후 소생인 의혜공주의 물건인줄 알면서도 가차 없이 압수해 버렸다. 대부분의 어사들이 왕실과 권신의 위세에 눌려 직무를 소홀히 하던 상황에서 박순은 엄격함과 과단성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박순이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시 때문이다. 박순은 백광훈(白光勳), 최경창(崔慶昌), 이달(李達) 등의 삼당시인(三唐詩人)에게 당시(唐詩)를 가르친 이후 학당(學唐)의 흐름을 연 인물로 평가되며, 박상과 함께 조선 중기 호남시단을 개창한 시인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영평 백운동에 근거하고 있던 조준룡(曹駿龍)을 찾아가 지은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訪曹處士山居]」라는 시는 특히 절창으로 꼽힌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의 새가 알아듣네.

이중에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의 새가 알아듣네.[石逕笻音宿鳥知]”라 한 구절이 널리 알려져 ‘박숙조(朴宿鳥)’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순탄한 벼슬길을 걸어 14년이란 긴 세월 동안 영의정을 지낸 박순은 1586년(선조 19) 8월 이이의 탄핵에 반대하다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게 된다. 박순은 만년에 이이·성혼과 깊이 사귀어 “박순이 바로 이이요, 이이가 바로 성혼이라, 이 세 사람은 모습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라는 반대파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이에 박순은 선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관직에서 물러나 도성 안의 집을 떠나 영평으로 들어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백운계곡(白雲溪谷) 창옥병(蒼玉屛)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조정을 떠날 때 선조가 내시를 파견하여 동대문 바깥 보제원(普濟院)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전송하였는데, 박순은 다음과 같은 시를 부채에 써 임금께 보내었다.

은혜에 보답할 재주 없음이 마음에 거리껴
늙은 몸 추슬러 시골집에 돌아가네.
한 점 남산은 볼수록 점점 멀어져 가는데
가을바람에 눈물이 은자의 옷을 적시네.

이 시를 본 선조는 박순의 뜻이 굳음을 알고 더 붙잡지 않았다 한다. 멀어져 가는 남산을 바라보고 눈물을 뿌리는 늙은 신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 작품이다.
박순이 물러난 곳은 창옥병 근처였다. 이곳을 택한 까닭은 영평 보장산(寶藏山)에 살던 천연(天然)이라는 스님이 아름다운 우두연(牛頭淵)에 있던 양씨(楊氏)의 정자를 사라고 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다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를 짓고, 언덕 높은 곳에는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정자도 지었다. 이에 대해 박순은 〈이양정기(二養亭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략) 큰 벼랑이 하늘에 기대 있고 그 뿌리가 장탄(長灘)과 청령담(淸泠潭)으로 파고들어 조물주가 깎고 다듬은 솜씨를 지극히 한 것이 창옥병(蒼玉屛)이다. 청령담 서쪽에 지은 초가가 배견와(拜鵑窩)다. 매번 창옥병에 봄여름 두견새가 와서 울면 산이 텅 비어 소리가 울려 퍼지는 데 듣는 사람들이 감개하게 된다. 또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초가 정자를 짓고 이양정(二養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덕과 몸 두 가지를 기른다는 이천(伊川) 선생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왼쪽을 보면 큰 벽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네 개의 둔대가 이어져 있는데 모두 높은 산을 등지고 맑은 물을 바라보고 있다.(후략)

박순은 창옥병 앞의 아름다운 청령담에 있는 여러 바위와 벼랑에 이름을 붙이고 한석봉의 글씨를 받아 일일이 새겨두었다. 청학대(靑鶴臺)·백학대(白鶴臺)·산금대(散襟臺)·수경대(水鏡臺)·토운상(吐雲床)·와존(窪尊) 등이 그것이다.
박순은 한 해 남짓 이곳에서 시인으로, 농부로 살다가 조용히 죽었다. 죽는 날도 베갯머리에 기대어 종일 시를 지었다. 그리고 “내가 가는구나.”하고 담담히 돌아갔다. 염하는 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우레가 쳤으며 밤에는 흰 기운이 하늘에 가득하였다. 그리고 하늘에서 해와 달 같은 빛이 나타나 땅을 비추어 큰 인물이 돌아감을 알렸다 한다. 박순은 창옥병과 금수정이 바라다 보이는 뒷산 종현산에 묻혔다.
박순과 절친하였던 이이와 더불어 몸은 셋이지만 마음은 하나라는 말까지 들었던 성혼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세상 밖 구름 덮인 산은 깊고 또 깊어
시냇가 초가집은 벌써 찾기 어렵구나.
배견와(拜鵑窩) 위에 뜬 한밤의 달은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리.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박순이 돌아가시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특히 성혼의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라고 하면서 “무한한 감상의 뜻을 말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니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시를 지을 수 있으랴.”라고 평했다.
담양 송강정에서 지내고 있던 송강 정철도 박순의 부음을 듣고 이렇게 통곡하였다.

나는 떼를 잃은 기러기 같네
이 몸을 어느 곳에 의탁하리오.
외로이 나는 갈대밭 사이에
그림자 찬 구름과 함께 사라지도다.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근처의 옥병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옥병서원 앞 신도비의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선조 시절 14년간 내리 재상을 한 박순. 너무 겸손하여 성호 이익으로부터 ‘사암능양’이란 명성을 얻은 절창의 시인 박순. 창옥병에 새겨져 있는 선조가 내린 여덟 글자 “송균절조(松筠節操) 수월정신(水月精神)”, 곧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조, 물과 달빛 같은 정신은 박순의 삶을 단적으로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