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보여준 선비의 길


율곡이 보여준 선비의 길.

 

선의 선비 정신은 단아하고 고결했으나 선비들 모두가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대다수의 선비가 그 반대의 삶을 살았다. 젊은 나이에 뜻을 세우고 공부를 하는 혈기왕성한 시절에는 임금의 녹을 먹으면서 바른 소리 한 번 못하고 주어진 현실에 안주한다고 틈만 나면 목소리 높여 선배들을 비판하던 시절이 있다. 그러나 대과에 급제하고 나서 임금에게 영광의 홍패를 받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신고식을 치르는 그날부터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보아도 보지 않은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하면서 입 조심하는 것이 보신의 길임을, 선배들은 신고식을 치르는 그날 밤부터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연산군대의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대의 기묘사화, 명종대의 을사사화, 네 차례의 피바람이 불자 이 땅에 공자의 이상을 구현해 태평성대, 대동세상을 만들려던 선비들이 자취를 보이지 않게 되었다.
1564년 문과에 급제한 율곡이 정6품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관료 생활을 시작하던 때가 그랬다. 1545년 을사사화로 젊은 선비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틀어쥔 능구렁이 윤원형이 여전히 경복궁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율곡은 이때 벼슬살이를 시작한지 1년도 지나지 않은 때였지만,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원흉이 윤원형이라고 직소했다.

원형의 죄는 머리털을 뽑아서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전하께서는 시종 그를 두둔하여 기어이 그를 보존케 하려 하시면서 언제나 옥체의 불편하심을 간언을 막는 구실로 삼고 계십니다. (중략) 예부터 간언을 거절한 임금은 한 둘이 아니었지만 병환으로 핑계를 댄 임금이 계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율곡전서』 윤원형을 논박하는 상소(論尹元衡疏)

이러한 율곡의 상소를 전후해 양사(兩司)와 홍문관이 윤원형의 처벌을 요구했고, 결국 윤원형은 강음으로 유배형에 처해져 1565년 11월 죽음을 맞았다.
율곡은 서경덕의 은일을 흠모했으나 서경덕과 달리 개혁의 길을 걸었고,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흠모했으나, 조광조와 달리 개혁의 대안을 제시했다. 율곡의 모든 상소는 현실의 문제를 고쳐나가려는 열정과 고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안으로 가득 찼다.
1567년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보위에 올랐을 때 율곡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찬 32세의 젊은 개혁가였다. 1569년 율곡이 선조에게 지어 올린 『동호문답』은 율곡의 야심만만한 개혁 강령을 담았다.

동호의 손님이 주인에게 물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하면 다스려지고 어떻게 하면 어지러워집니까?”

율곡은 단도직입적으로 치국평천하의 방도를 묻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 선비들은 먼저 자신들부터 성학을 닦고 마음을 닦은 다음에 왕을 잘 보살펴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였다. 철인왕(哲人王)을 만드는 것, 이것이 조광조와 율곡을 비롯한 선비들이 세상을 바로잡고 대동세상을 실현하는 전략이었다.

주인이 답했다. “임금의 재주와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서 호걸들을 잘 부린다면 세상은 다스려질 것이고, 임금의 재주는 부족하여도 어진 자에게 나라를 맡긴다면 세상은 다스려질 것입니다. 반대로 임금이 자신의 총명을 과신해서 신하들을 믿지 않으면 세상은 어지러워질 것이고, 간사한 아첨꾼을 과신하여 임금의 눈과 귀가 가려지면 세상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임금의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경우는 태종과 세종을 말한다. 임금의 재주는 부족하여도 어진 자에게 나라를 맡기면 된다고 했는데, 재주가 부족한 임금은 선조이고 어진 자는 율곡이다. 신하를 믿지 않은 왕은 연산군이고, 간사한 아첨꾼은 윤원형이다. 선조가 치국평천하를 이루는 길은 무엇일까? 간단하다. 율곡과 같은 검증된 인재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이다.

손님이 물었다. “하은주 삼대의 태평성대를 오늘날 실현할 수 있습니까?” 주인이 답했다. “실현할 수 있고말고요.” 손님이 입을 크게 벌리며 웃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주인이 답했다. “오늘 왕도 정치를 행할 수 있는 유리한 두 가지 조건이 있고, 불리한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리한 조건은 성스럽고 밝은 임금이 있다는 것이요, 두 번째 유리한 조건은 권력을 남용하는 간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불리한 조건은 선비들의 정신이 침체되어 있다는 것이요, 두 번째 불리한 조건은 선비의 사기가 심하게 꺾여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선조를 띄우고 동료 선비들을 고무하는 계산된 발언이다. 첫 번째 유리한 조건인 성스럽고 밝은 임금은 선조를 말하고, 두 번째 유리한 조건인 권력을 남용하는 간신이 없다는 것은 윤원형을 말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불리한 두 가지 조건이다. 몇 차례의 사화로 선비 정신이 너무 침체되어 있고 세상을 개혁하고자 분투하는 기상이 꺾여 있다는 것이다. 개혁의 객관적 조건은 유리한데, 개혁의 주체가 무너져버린, 바로 율곡이 물려받은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손님이 물었다. “불리한 조건이 이러한데 선생은 무얼 믿고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 장담하는 겁니까?” 주인은 답했다. “변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때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때는 군주가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임금께서 떨쳐 일어나 도를 회복한다면, 침체된 선비 정신도 되살아나고 선비의 사기도 회복될 겁니다.”

조선은 왕의 나라다. 왕이 결심하면 신하들도 결심할 것이다. 왕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겠다고 뜻을 세우면 신하들도 모두 왕을 따라 위민(爲民) 정치를 펼칠 것이다. 율곡이 보기에 개혁은 간단했다. 왕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왕이 바람을 일으키면 풀은 따라 눕는 법이다. 왕이 앞장서서 선비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도학을 숭상하기를 지성으로 한다면 신은 하늘에서 감동하고, 백성은 땅에서 따를 것이다.

손님이 물었다. “선생은 잘못된 법을 혁파하여 백성을 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법을 고쳐야 합니까?” 주인은 답했다. “첫째, 백성들은 군역이 무거워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수령들은 그 일가 친족들을 연좌제로 묶어 괴롭히고 있습니다. 연좌의 폐해를 없애야 합니다. 둘째, 백성들은 공물 때문에 뼈골이 빠지고 있습니다. 공물의 폐해를 잡아야 합니다. 셋째, 백성들은 공물을 구하지 못하여 업자들을 통해 대신 공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방납의 폐해를 없애야 합니다. 넷째, 백성들 간에 신역(身役)이 불공평합니다. 신역의 불공정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섯째, 뇌물로 관직을 사고 뇌물로 옥사를 농간하는 폐를 없애야 합니다.”

선조를 향한 율곡의 충정은 대답 없는 짝사랑이었다. 선조는 영특한 왕이었다. 율곡 만큼 총명하지 못해도 율곡의 진언을 알아들을 정도의 학식을 구비한 왕이었다. 율곡이 진언을 하면 선조는 말로는 “그대의 충정에 매우 감사하오. 깊이 유념하겠소.”하였지만, 선조의 대답엔 진정성이 없었다. 율곡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가 없는 왕이었다.
반면에 선조는 선조 나름대로 율곡이 임금을 쉽게 버리고 시골로 떠나고, 또 옆에 있으면 직설적으로 임금을 비판하는 태도에 서운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연에서 정승 박순이 율곡을 칭찬하면서 물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하자, 선조는 “그 사람은 과격하고 교만한 것 같으니 인격이 성숙된 뒤에 쓰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나를 섬길 생각이 없다. 내가 어찌 억지로 머물게 하겠는가?” 하였다.
선조는 율곡이 조급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너무 급진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너무 진지하고 너무 엄격한 선비라고 여겼을 것이다. 뜻대로 세상이 굴러가지 않으며 말대로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이치를 모르는 요령 없는 개혁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율곡은 10년 동안 줄기차게 간언했지만 선조는 단 한 건의 개혁도 추진하지 않았다. 선조로서는 가장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였으나, 무사안일과 수구로 일관하여 율곡의 가슴을 애타게 만들다가 서로의 인연이 끝나고, 결국 8년 뒤에 왜란의 참화를 만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