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계미삼찬


율곡과 계미삼찬.

 

1575년(선조 8)의 동서 분당 이후 조정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1578년(선조 11)에는 운두수·윤근수·윤헌이 동인의 공격을 받아 뇌물 수수 혐의로 파직되었다. 김성일이 경연에서 진도군수 이수가 윤두수·윤근수 형제와 그들의 조카 윤현에게 쌀 수백 석을 뇌물로 바친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3윤(三尹)은 서인의 맹장이고, 이들의 파직을 주장한 김성일은 동인의 맹장이었다. 이처럼 동인·서인은 상대방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오직 율곡 한 사람만이 양자의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비록 서인으로 지목 받았지만 논의가 공정하고 행동에 치우침이 적었다. 그러나 1579년(선조 12) 7월, 백인걸의 상소를 계기로 그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의 상소문에는 동·서인의 화해를 요구하면서도 동인을 비난한 구절이 많았다. 그런데 이 상소문의 초고를 수정한 사람이 바로 율곡이었다. 이에 동인들은 율곡이 백인걸을 사주한 것으로 여겨 심하게 공격했다. 당론의 조정자가 도리어 당론을 격화시켰다고 공격받게 된 것이다.
1581년(선조 14) 6월, 선조는 율곡을 대사헌에 임명했다. 이 때 항간에는 모종의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그 골자는 심의겸이 누이 인순대비에게 출사를 주선하게 해 권세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상중에 있었다. 따라서 기복(起復)이 되어야 벼슬할 수 있었다. 소문이 퍼지자 정인홍이 이를 탄핵하려고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율곡은 정인홍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자신이 불러 주는 대로 상소문을 작성하도록 하고 더 이상 강경한 말을 못하게 했다.

청양군 심의겸은 일찍이 외척으로서 오래도록 국론을 잡아 권세를 탐하고 이(利)를 즐겨해 사류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조정 의논이 풀어지고 흩어져서 보전·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 사람의 소치입니다. 날이 갈수록 공론의 불평이 더욱 심해지는데, 지금까지는 현저히 배척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못해 인심이 의혹하니, 청컨대 파직시켜 좋아함과 미워함을 분명히 해 인심을 진정시키소서(『석담일기』)

그러나 정인홍은 심의겸이 사류를 규합해 세력을 양성한다는 과격한 말을 추가했다. 그리고 심의겸에게 아부한 자로 윤두수·윤근수·정철 등을 지목했다. 정철은 율곡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동인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선조는 내심 심의겸을 미워하고 있었다. 선조가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 심의겸이 누이 인순왕후에게 선조에 대한 통제를 종용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은 그런 사실도 모르고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기 위해 심의겸을 두둔했다. 이것은 동인의 불만을 가중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율곡과 동인 사이의 충돌은 빈번하게 되었다. 1583년(선조 16) 3월에는 선조에게 수시로 왕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가 동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그 해 4월에는 유성룡·이발·김효원·김응남을 동인의 괴수로 비판한 경안군 요(瑤)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기까지 했다.
율곡이 병조판서로 재직하던 그 해 여름, 니탕개(泥湯介)가 함경도 종성을 공격한 일이 있었다. 상황이 급박한지라 병조판서 주관 하에 출전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에서는 율곡이 병권을 마음대도 주무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공격했다. 율곡은 사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선조는 허락하지 않았고, 율곡에 대한 동인의 공격은 더욱 격화되었다. 율곡에 대한 공격은 박근원·송응개·허봉 등이 주도했는데, 특히 대사간 송응개의 공격이 가장 맹렬했다. 공격의 화살은 박순·성혼 등 서인의 중진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동인들이 율곡은 물론 박순·성혼을 심하게 공격하자, 조정에는 율곡에 대한 동정론이 확산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을 두둔하는가 하면 선조도 율곡의 편을 들었다. 심지어 동인인 김우옹도 율곡을 변호했다. 1583년(선조 16) 선조는 조신과 유생들의 여론을 반영해 송응개·박근원·허봉을 각기 회령·강계·갑산으로 유배시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이를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한다.
선조는 끝까지 동·서인을 조정하려는 율곡과 성혼의 편을 들었다. 다음과 같이 주자의 인군위당설(人君爲黨說)을 인용하여 율곡과 성혼을 적극 지지한 것이다.

이이에게 편당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 말로써 나의 뜻을 움직이려 하느냐? 아! 진실로 군자라면 그들끼리 당을 만드는 것이 걱정이 되기는커녕 그 당이 작은 것이 걱정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기를 원한다. 지금 이후로는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고 해도 좋다. 만일 이이와 성혼을 훼방하고 배척하는 자라면 반드시 죄 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계미기사』)

계미삼찬 이후 율곡은 이조판서에, 성혼은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584년(선조 17) 1월 16일, 율곡 이이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율곡은 부단히 동인과 서인을 조정하려고 애썼으나, 교우 관계 때문에 서인의 지지를 받은 반면에 동인의 배척을 받았다. 결국 율곡은 서인으로 지목되었고, 뒤에 서인의 종장(宗匠)으로 추대되었다. 율곡의 이러한 처지를 이원익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두 사람이 술이 취해 언덕 아래서 싸움을 하고 있다. 그 때 한 사람이 언덕 위에서 타일러 말리다가 두 사람이 듣지 않자 언덕에서 내려와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리려 했는데, 결국 같이 끌리고 밀리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연려실기술』 권13, 「선조조고사본말」 이이졸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조정하려던 율곡이 죽자, 선조는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 2월에 박근원·송응개·허봉을 풀어주었다. 선조는 갈등을 조정할 율곡이 없는 상황에서 이제 두 당파를 저울질하면서 국왕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