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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과 현종

예송과 현종.

 

종(顯宗, 1641-1674)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왕은 아니다. 태종, 태조, 세조처럼 흥밋거리가 많은 왕도 아니고, 세종, 정조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도 아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선조나 인조처럼 국난에 맞선 왕도 아니었다.

현종 때에 두 번의 예송(기해예송,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본 예송은 조선유학사, 정치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예송은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 사건 전말을 숙지하기 어렵다. 일반인들이 현종이 낯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김우명이 국구로서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우는 장면이 <실록>에 자주 보인다.

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고 중국에서 태어났다. 출생이 특별하다.

9세(1649, 인조 27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앞서 1645년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자 이어서 봉림대군이 세자에 오른다. 봉립대군이 바로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다. 19세(1659)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업적으로는 1662년(현종 3년)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1668년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했고,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현종은 효종대에 은밀히 계획해 놓은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을 국제관계와 국내 사정으로 중단하는 대신 군비(軍備)에 힘써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현실적인 국제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실제적인 군사 행동을 준비하는 대신 명나라를 숭모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숭명활동은 다음의 숙종 때에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송이 현종의 즉위년 시작과 대미를 장식한다. 현종은 즉위하자 기해복제(己亥服制) 문제라는 예론에 부딪혔다.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趙氏)가 효종을 위해 무슨 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였다. 이후 복제문제는 정쟁으로 번졌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한 사례(四禮)의 준칙을 따랐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五禮儀)>를 따르고 있었다.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책립되었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 복으로 삼년상을 이미 치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효종의 상을 당해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다.

서인측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인측의 윤휴(尹鑴)하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고 해도 왕위를 이어받았으므로 삼년상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왕위를 계승한 왕으로의 권위와 둘째 아들이라는 인륜의 법도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지 문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인은 왕권을 높였다면 서인은 왕이라고 할지라도 인륜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후에 송시열을 두고 효종의 특별한 후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여 왕을 높이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맥락이다.

당시 정치계는 1575년(선조 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되돌아온 서인과, 동인 계열이지만 북인·남인으로 갈라진 뒤 북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역시 인조 때 조정에 복귀한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인조·효종 때는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서 특히 학문에서는 교섭이 원활하였다.

예론 과정에서 당론이 극단적 대립을 보이자 서인측의 주장대로 기년복이 조정에서 일단 결정되었다. 효종이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승중이기 때문에 장자로서의 권위를 가지지만 현실을 고려하여 기년복으로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렇지만 예론이 지방으로 번져 그 시비가 더욱 확대되었다. 1666년 조정에서 기년복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이에 항의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1674년 왕대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다시 거론되었다. 서인측의 대공설(9개월복)과 남인측의 기년설이 대립했다. 그 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이 때 서인측이 많이 배척되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기해예송 당시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는 이유로는 자의대비가 이미 소현세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었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승중이기 때문에 장자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다만 현실상황을 고려하여 기년복으로 한다는 명분이었다. 여기에는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는가의 문제가 표면화 되지 않고 기술적으로 넘어 갔다.

그러나 효종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무슨 복을 입어야 하는가는 효종이 장자냐 서자냐 하는 문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자의대비는 소현세자비를 위해 복을 입지 않았고, <경제육전>에 장자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한 데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인예송의 사건 전말을 조금 소상히 살펴보자.

“갑인년(1674) 2월에 인선왕대비(仁宣王大妃)를 성복하기 하루 전 날 예조 판서 조형(趙珩), 참판 김익경(金益炅), 참의 홍주국(洪柱國)이 아뢴다. ‘신 등이 어제 복제의 절목 중에서 인선왕대비의 시모인 대왕대비전께서 입으실 복을 기년으로 마련해서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가례복도(家禮服圖) 및 명나라의 제도에 자부(子婦)의 복에 큰며느리의 기년과 작은며느리의 대공(大功)의 차별이 있습니다. 기해년의 효종대왕 국상 때 대왕대비전께서 이미 작은아들 의복인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이를 보건대 지금의 이 복제는 대공이라는 것이 의심이 없거늘 급한 사이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이와 같이 경솔하게 기년으로 정하는 그릇된 실수가 있었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고, 절목 중에 대공으로 고쳐서 표지를 붙여 드렸다.”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기는 했지만 현실을 고려하여 선택한 것이지, 결코 효종이 차자여서 기년복을 입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왕가의 견해였다. 그런데 서인측 신료들은 효종비를 위해 자의대비가 입을 복을 정하면서 대공복으로 하자고 하면서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은 점을 든다. 이는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은 것이 효종이 차자였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7월 6일에 대구(大丘)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소를 올렸다. ‘대왕대비께서 인선(仁宣)을 위하여 입으실 복을 기년으로써 정했는데 나중에 다시 대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에 의거한 것입니까? 장자와 장부(長婦)의 복이 모두 기년이라는 제도는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실려 있습니다. 기해년의 국상 때에 대왕대비께서 효종대왕을 위하여 입으신 기년복 제도를 이미 장자 기년(長子朞年)이라는 국가의 제도로써 거행하였는데, 이제 국가의 제도가 아닌 대공이라는 복제가 갑자기 나왔으니 기해년에는 효종을 장자 복으로 기년을 입고 이번의 효종 비에 대해서는 작은며느리 복을 대공으로 입는 일이 어찌 그 전후가 각각 다릅니까?’ 했다.”

‘장자 기년’은 기해복제에 대한 왕가의 입장이자 당시 기년복을 관철시킨 서인의 명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효종비를 위해서는 대공을 입는다니 그렇다면 효종은 차자라는 말인가? 하고 도신징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도신징이 소를 올린 지 13일 만에 현종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소를 내어 보이면서 말했다. ‘기해년의 복제는 대개 시왕(時王)의 제도를 쓴 것인데 이번 9월의 복제가 기해년과 닮고 같은 여부를 아울러 캐내게 하되 원임 대신과 육경 판윤ㆍ정부 동서벽ㆍ삼사 장관을 곧 불러서 회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현종은 도신징이 소에서 밝힌 것처럼 기해년의 상례가 ‘장자 기년’에 근거한 것이 틀림없으므로 자의대비가 효종비를 위해 대공복을 입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판단하고 이를 다시 상의하도록 하명했다. 여기서 현종의 의사가 무엇인지 이미 명확해진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형조 판서 이은상, 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 판서 조형,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耈), 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 등이 빈청에 모인 후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 등이 기해년의 대왕대비 복제를 의논하여 정할 때에 전후 문서를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조의 아룀으로 인해서 대신들이 수의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로써 시행했습니다. 경자년에 허목이 소를 올려 3년 제도를 행하자고 청하므로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여 《실록》을 가지고 상고해 보았습니다. ……”

“신 등이 이제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보니, <대전(大典)>의 복제조(服制條)에는 다만 ‘아들 복은 기년이다.’고만 썼을 뿐이요 따로 장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습니다. 기해년 국상을 처음 의논하여 정할 때에도 대신과 유신들이 헌의한 중에는 역시 시왕의 제도라고만 일컬었지 장자와 중자를 논변한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3년의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비로소 장자와 차장자(次長子)의 설이 생겨서 논의가 분분하니 여러 번 수의하여 마침내 기년복으로 정해서 시행했던 것입니다.”

“최후에 여러 신하가 헌의한 중에 비록 3년 제도라는 말은 했으나 장(長)과 중(衆)의 한 조목은 모두 들어서 의논하지 않았으니 이는 장자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고 중자에게는 기년을 입는 것은 즉 고례(古禮)요 장과 중을 분별하지 않고 모두 기년을 입는 것은 이것이 국가의 제도인 것입니다. 당초에 비록 국가의 제도를 쓰기로 정하였으나 그 후에 고례를 주장하는 여러 신하들이 다투었기 때문에 기년의 제도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3년을 행하지 않고 기년을 행한 것은 고례의 중자복을 입는 제도에서 나왔다.’ 하였고 이번 복제를 개정하는 날에 예조에서 상고해 올린 것도 역시 여기에서 나온 것이며, 그 밖에는 다른 상고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신들의 답변은 교묘하다. 애초 서인측이 주장한 기년복은 <대전>에 있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제도에 근거했다. 후에 남인측이 고례에 근거를 두고 장자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중자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며 삼년복을 주장했다. 결국 기년복으로 낙착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남인측 인사들이 효종을 중자로 봤기 때문에 기년복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서인측은 당초의 국가의 제도를 따라 장자와 중자의 구분을 두지 않고 기년복을 주장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효종비를 위해서는 자의대비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가,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했을 때, 서인측은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기 때문에 대공복을 입자는 것이지 효종이 장자니 중자니 구분을 둔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다.

말이 참 교묘하다. 현종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임금이 다시 전교하기를, ‘아뢴 말이 분명치 못하여 대왕대비전께서 마땅히 기년을 입어야 할 것인지, 대공(大功)을 입어야 할 것인지 한 가지로 결정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이냐.’ 하였다.”

현종이 ‘말이 분명하지 않다’고 비답을 내렸다. 상의할 여지를 둔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생각과는 다르므로 이렇게 말한다.

“임금(현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오늘 대신 이하로 하여금 회의를 하게 한 것은 기해년 복제에 관하여 수의할 때에 결정한 문자를 상고해서 오늘 대왕대비가 입을 복을 마땅히 기년으로 할 것인지 대공으로 할 것인지의 두 조목에서 정할 따름이었는데 종이에 가득히 쓰인 것이 다만 기해년 <등록(謄錄)>에서 상고해 낸 말뿐으로서 이 밖에는 달리 상고할 일이 없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으니, 등록을 고출하는 일이라면 한 해방 승지의 직책이라 어찌 대신과 육경과 삼사들로 하여금 와서 모이게 했겠는가.”

현종의 불만이 드러난다. 대공복인지 기년복인지 분명하게 말하면 될 것을 왜 빙빙 돌리느냐는 것이다. 하긴 대신들의 처사도 이해가 간다. 현종이 기년복을 원하는 것을 모를 리 없으나, 애초 서인측 대신들이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 것은 효종이 차자라는 의리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지금 효종비를 위해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는다면 자신들이 기해예송에서 내세운 의리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연유로 말을 돌리며 상황을 관망한 것이다.

“나(현종)는 기해년 복제를 국가의 제도를 쓴 것으로 보는데 여러 신하들은 고례를 쓴 것이라고 대답하는 자가 많구나. 기해년 복제를 의논하여 정할 때 대신과 유신들이 모두 국가의 제도라고 주장을 했는데, 경자년 이후에 비로소 삼년이란 의논이 나왔으니 말이 심히 번거로웠으나 모두 피차의 의견을 진술한 것이지 국가에서 정한 제도에는 상관이 없으므로 당시의 <수의등록(收議謄錄>》과 <승정원일기>를 상고하여 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 현종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다.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은 것은 ‘장자 기년’이다. 기년복을 입기는 했지만 효종은 엄연히 장자다.

현종이 자신의 심사를 총정리한다.

“이제 빈청에서 상고해 낸 것을 보면 그때 시왕의 제도를 쓴 것이 심히 분명한데 아뢴 말의 결론에 쓰기를, ‘비록 국가의 제도대로 하여 장자에 대한 기년복을 썼으나 중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중자(衆子)의 복으로 기년을 입는 고례를 썼다 하므로 예관이 상고하여 아뢴 것도 역시 이에서 나온 말이다.’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한 일은 가볍게 여기고 신하들이 다투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 예조에서 상고하여 아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니 이 무슨 도리이며 대공이 옳다고 하는 자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가.”

“기해년 복제는 이미 시왕의 제도를 썼고 장(長)과 중(衆)의 구별이 있지 않았던 것인데 기해년에 있지 않았던 예가 오늘에 와서 비로소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일찍이 대왕대비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내인 강(姜)씨에게 장부(長婦)의 복을 입지 않았으니 장부에 대한 기년복은 돌아갈 데가 없다는 말인가? 장과 중의 설은 기해년의 복제를 의논할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삼년의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소장에 비로소 이 의논이 있었으나 국가에서 이것을 채용하지 않았거늘 이제 와서 예를 의논하는데 어찌 감히 중서(衆庶)의 말로써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가.”

“복제를 비록 국가의 제도대로 하였으나 장과 중의 구별은 국가의 제도에 이미 증거가 없으니 이는 국가 제도의 미비한 바라 어찌 고례를 참고로 하지 않는단 말인가. 회의한 지 이틀이 되었는데도 아뢰는 바가 이와 같으니 내 심히 타당치 않게 여기며 어제 불러 보았을 때 역시 대공은 온당치 않다는 뜻을 나타내었는데 기어코 대공의 복제를 고수하려 하는 자는 또한 무슨 뜻이며, 또한 무엇이 마음에 유쾌하단 말인가.’ 하였다.”

현종이 서인측 인사에 대한 매서운 탄핵을 시작한다.

예송으로 얼룩진 현종 재위는 현종이 죽은 뒤에 찬수된 <현종실록>도 반영된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에 편찬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이 <현종실록> 편찬에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했으므로 서인측은 불만이 많았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였다.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수정 실록(修正實錄)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고, 개수실록은 이 <현종실록>이다. 이 모두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의 성격과 당시의 당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종(顯宗)>
<연려실기술>

이시백, 혁명가의 소양

이시백, 혁명가의 소양 .

 

시백(李時白, 1581-1660)은 이귀(李貴)의 아들이다.

이귀가 누군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다. 일찍이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다. 1592년 강릉참봉으로 있다가 왜적의 침입으로 선조가 피신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던 이다. 광해조의 실정을 보고 두 아들과 함께 반정을 도모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진 이다. 그의 두 아들이 이시백과 이시방이다.

이시백의 기상과 반정에 참여한 내력을 <연려실기술>에서 적고 있다.

“기상이 씩씩하고 원대하였으며 체격이 크고 훌륭하였다. 힘이 뛰어나게 세었으나 항상 깊이 감추어 비록 남에게 곤욕을 당하여도 겨루지 않았다. 이항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시백은 포의로서 사귀어 노는 자는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며 그를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닦아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임술년에 어머니가 별세하여 겨우 성복을 마쳤을 때 신경진이 찾아와 조상했다.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가 시사(時事, 반정)를 언급하자 첫마디에 서로 뜻이 맞았다. 신경진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맏상제와 의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마침 애통 중에 있으니 뒷날을 기다려야겠다.’ 하였다. 김귀가 말하기를, ‘이는 대의에 관한 일이니 상주가 일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적인 관례대로 논할 수 없다.’ 하고 공(이시백)을 불러내어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43세(1623)때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44세(1624)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해 길목을 지켰다. 그러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해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에서 정충신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켰다.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였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송준길의 <동춘집>에 실린 글이다.

“공(이시백)이 수원부사로 있을 때 수천 명의 군사와 말이 각 마을에 흩어져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생겨도 쉽사리 모을 수 없다 하여 열 길 되는 깃대를 높은 언덕 곳곳에 세워 놓고 모든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위급하면 내가 꼭 깃대에 방색기(方色旗)를 달고 자호포(子號砲 신호탄)를 세 번 쏠 터이니 깃발을 보거나 포성을 듣거든 서로 알려서 어떤 사람도 시간을 넘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묘호란의 보고가 오자 공은 즉시 갑옷을 입고 정문에 앉아서 깃발을 달고 포를 쏘았다. 날이 겨우 오(午)시 경에 모든 군사가 모두 기약대로 모였으므로 공이 즉시 거느리고 동작나루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임금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어찌 귀신처럼 빠른가?’ 하였다.”

49세(1629)때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했다는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 강화유수가 되었다. 53세(1633)때 병조참판, 56세(1636)때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 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병자년 수어사로 남한산성을 지키던 시절의 일화가 <시장>에 나온다.

“병자년 수어사로 남한산성의 일을 주관했다. 임금(인조)이 남한산성으로 행차하자 공을 불러 이르기를, ‘성중에 여러 가지 미비한 것이 많은데 어찌 경이 수어사의 임명을 받은 후에도 미비한 것이 있는가.’ 하였다. 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임명을 받았을 당초에 오늘의 환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체찰부(體察府)에 청하기를 ‘일이 급작스레 일어나면 먼 고을의 군사는 형편상 미처 모이지 못할 것이므로 원컨대 가까운 고을의 군사를 나누어 배속시켜 주시오.’ 하였으나, 체찰부에서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5월에 청하기를, ‘합동 훈련을 시키고 그 지역을 정하여 병기를 수선하게 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자.’고 했으나 체찰부에서 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7월에 다시 합동 훈련을 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부득이 어전에 직접 아뢰기를 청하여 겨우 경기도 내에 소속된 군사를 한 번 야간 훈련을 시키고 약간의 움막을 지어 땔감을 조금 쌓아 놓고 돌아갔는데 금일에 이르러 이 모양이오니, 신 또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했다. 체찰부에서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다른 일로 핑계하여 공을 잡아다 특별한 곤장으로 피가 흐르도록 때리니 해괴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분하게 여기거나 한탄하는 빛이 거의 없었다.”

58세(1638)때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 이겨 심양에 아들 이유 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에 중도부처 되었다. 다음 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었다.

64세(1644)때 심기원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았따. 이어 한성판윤,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66세(1646)때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토벌을 자원해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69세(1649)때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했다.

이시백의 <시장>에 실린 내용이다.

“기축년에 임금(인조)이 어수당에 나와서 공 등 두어 사람을 입시하게 하였다. 술과 찬이 모두 안으로부터 나왔다. 임금이 친히 잔을 잡고 묻기를, ‘병조 판서는 주량이 얼마나 되오.’ 하자, 공이 답하기를, ‘신은 본래 술을 마실 줄 모르는데다가 항상 병을 앓고 있어 더욱 마시지 못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병은 남한산성에서 너무 애써서 생겼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자손은 몇이나 되는가.’ 하여, 공이 수를 들어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많은데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음은 웬 까닭인가. 만약 나라 일을 담당하고자 하려면 비록 무과(武科)라도 좋다. 경의 선친이 나라 일에 충성을 극진히 바쳤으므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수원(水原)을 맡았을 때 집에 돌아와 선신(先臣, 이귀)을 뵈었더니, 선신이 어떻게 다스리려 하느냐 물었습니다. 신이 대답하길, 누가 아버지에게 수원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준비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다 하였다니 인심이 이 지경이니 비록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여도 그 사세가 또한 어렵습니다, 했습니다. 선신이 그 말을 듣고 일어나서 신을 뜰아래에 잡아 놓고 말하기를, 임금께서 너의 무능함을 살피지 않고 너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으니 네 분수에 맞게 오직 성의를 다할 뿐이지 너의 몸을 어찌 돌아보며 남의 말을 어찌 염려할 것이냐. 남의 허망한 말을 듣고 장차 네 직책을 폐하려 하느냐, 하고 격노하여 매를 때리려 하다가 친척들의 만류로 그만두었습니다. 선신이 죽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받사오니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탄식하다가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들을 보기를 팔다리[股肱]처럼 하니 너도 뒷날 대접하기를 나와 같이 하라.’ 했다.”

70세(1650, 효종 1년)때 우의정에 올랐다. 71세(1651)때 김자점의 모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이시방이 김자점과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72세(1652)때 사은사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 등을 신구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에 봉해졌다.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에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이시백이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끝으로 이시백의 충정과 검소한 삶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공이 살던 집은 충정공(이귀)이 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으로 뜰 위에 전부터 한 그루의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그 이름은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하였고 세상에 전하기는 그 꽃나무가 중국으로부터 왔다 하였다. 갑자기 어느 사람이 일군을 데리고 찾아왔으므로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대전별감(大殿別監)으로 임금의 명을 받고 그 꽃나무를 캐어 가려는 것이었다. 공이 꽃나무에 가서 그 뿌리까지 뽑아 부수어 뜨리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 모름지기 이 뜻을 아뢰라.’ 하였다. 그 후 임금이 공을 대접함이 더욱 두터웠는데 그 충성스럽게 간한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의 집이 대대로 청렴과 검소함을 지켜왔다. 어느 날 자기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뜰아래 부들자리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옛날부터 깔던 것이오. 내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의 자리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기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써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오히려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방석이겠소.’ 하고 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부인이 부끄러워 사과하고 곧 뜯어버렸다.”

대전별감 앞에서 꽃나무를 파헤쳐 버리는 과감함이 멋지다. 이시백의 삶을 보건대 충분히 그럴 만하다. 부인에게 청렴과 검소할 것을 조언하는 자세는 사뭇 정중하면서도 지혜롭다. 이시백이 혁명가로 시작하여 현달한 관직에 올라 국정을 담당할 수 있던 평소의 소양이 느껴진다.

참고 자료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시백(李時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귀(李貴)>

김육,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남자!

김육,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는 남자!.

 

육, 그 이름을 부르면 대동법이 떠오른다. 대동법 하면 김육이 튀어 나온다. 입시 교육의 학습효과다.
그런 대동법만큼은 아니지만 풍류를 아는 애주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김육의 시조가 있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옴세,
백년 덧 시름 잊을 일 의논코자 하노라.”

고단한 노정객의 운치가 느껴진다. 소소한 즐거움을 잊지 않는 소박함도, 백년 덧 시름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을 수 없는 벼슬아치의 운명도 보인다.

김육(金堉, 1580-1658)은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판관 김비(金棐)이고 아버지는 참봉 김흥우(金興宇)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피난길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 김흥우가 사망하여 15세에 가장이 되었다.

26세(1605, 선조 38년)때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30세(1609, 광해군 1년)때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한다.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 이 때부터 스스로 호를 잠곡(潛谷)이라 했다.

44세(1623)때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했다. 45세(1624)때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해 10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54세(1633)때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 온 뒤 예조참의,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가 되었다.

59세(1638)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고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다.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 등을 편찬하여 간행했다. 이때는 호란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던 시절이다.

60세(1639)때 동부승지, 대사성, 부제학을 지냈다. 이후 대제학, 대사간, 도승지 겸 원손보양관, 병조참판, 이조참판,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등 현직(顯職)을 지냈다.

70세(1649)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1650)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실록청총재관을 겸하였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75세(1654)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김육은 경세의 뜻을 어려서부터 간직했다.

“공은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졌다. 12살 때 <소학>을 읽다가, ‘일명(一命: 처음 받는 하급 관직)의 선비라도 진실로 남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면 사람에게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구절에 이르러서는 문뜩 깨달고서 ‘반드시 일명의 선비만이 그러할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진실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고, 남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일명 이상의 것이다.’ 했다.”

사람을 구제하는 뜻, 경세의 웅지는 대동법을 통해 역사에 찬란히 전해진다.

“충청 감사가 되자 소를 올려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 법은 토지의 면적을 계산하여 나라에 바칠 것을 비교하고 관청의 지출을 예산하되, 세금 부과가 고르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하고, 부역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공평하게 하고, 균등하지 않은 것을 균등히 하여, 덜 것은 덜고 보탤 것은 보태어 조절하여, 모두 대동(大同)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소를 비변사에 내려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더니 호조에서 어려운 일이라고 고집하였다.”

“정승에 임명되자 상소문을 올려 대동법을 시행하기를 청하고 2책의 안을 만들어서 올렸더니, 조정의 이의가 위로는 중신으로부터 아래로는 대관에 이르기까지 떼를 지어 일어났다. 안방준(安邦俊) 같은 자는 나라를 그르친다고 공을 배척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았다.”

“임금이 호조에 재촉하여 우선 호서(湖西)에서 시행토록 하였더니 호서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전날 불편할 것이라고 말하던 자들도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김육은 일평생 경세의 꿈을 대동법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새로운 길은 힘들다. 낯설어서 다른 사람들이 섣불리 찬동하기 어렵다. 기성 이해관계에 맞서며 부수는 길이라면 오늘날 카르텔이라고 하는 기성 기득권 세력의 반발은 더욱 거세진다. 김육은 이 험난한 시도를 어떻게 밀어붙였을까?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승평부원군 김류가 공이 일찍 출근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내 평생에 일찍 출근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더니, 이제 김정승에게는 한 걸음 양보해야겠다.’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긍정적인 의미에서 워커홀릭이다. 이 부지런함이 김육이 평생 대동법을 밀어붙일 수 있던 힘이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육(金堉)>
<연려실기술>

심총, 역사의 진실은?

심총, 역사의 진실은?.

 

총(沈棇)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실록>에 실린 심총 기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총이 전라도에도 대동법 실시를 상소한 일이다.

심총은 효종 4년(1653) 11월에 정언으로 발탁되었다가 그해 12월에는 장령이 된다. 효종 5년(1654년) 5월에 심총이 상소를 올려,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사대부의 자제로서 부역이 없는 사람은 해마다 베 1필씩을 징수할 것을 청했다.

소가 올라오자 효종은 비국의 여러 대신들과 의견을 나눈다. 영의정 정태화는 심총이 올린 상소 중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자는 말은 비록 균역(均役)의 뜻에서 나왔지만 만일 형세가 곤란하다면 애당초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의견을 올린다. 좌의정 김육은 “신이 호서(湖西)의 대동법 때문에 많은 훼방이 몸에 집중되었으므로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으로는 여러 도에 균일하게 시행하는 것이 사체상 대단히 좋을 성싶습니다.”라고 한다.

한편 대사간 이행진은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라.’고 하였으니 지금 난리를 겪은 백성들을 가지고서는 새로운 법을 창립하는 것이 부당합니다. 그런데 심총이 도리어 감히 세상에 아부하여 스스로 재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됨이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행동하기를 좋아하니, 체차하소서.”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이행진이 이른바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행동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바로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심총 자신이 간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다만 생각한 바를 개진하였을 뿐인데 체차를 청함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와 같고서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 마땅히 물러나겠습니다.” 했다. 이행진은 대신이 불안해 한다는 이유로 인혐하고서 물러났다.

하나는 심총이 관물을 남용했다는 고소다. 효종 6년(1655년) 12월조 사관의 기록이다.

“처음에 광주 부윤(廣州府尹) 심총(沈棇)이 관미(官米) 1천 8백 석을 남용했는데,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심총이 체포되어 청나라 사신을 역참에서 대접하는 비용으로 썼다고 대답하는 한편 또 계원을 무함하였다. 상이 심총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금부에 조사할 것을 명하니 금부가 그의 법을 지키지 아니한 상황을 조사해내어 아뢰자, 하교하였다. ‘간교한 관원의 교활한 수단이 이와 같이 낭자하니, 엄하게 국문하여 밝히라.’ 했다.”

현종 2년 11월조 사관의 기록은 이렇다. “금부가 장리(贓吏) 심총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처음에 심총이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으면서 불법으로 재물을 탐한 사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자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조사하여 치계하였다. 이에 심총이 몇 년 동안 갇혀 있다가 변읍(邊邑)에 유배되었는데 그 뒤에는 중도(中道)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원자(元子)가 탄생한 경사를 맞이하여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오니, 물정이 불쾌하게 여겼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면 심총이 장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연려실기술>은 <실록>과 대비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심총이 광주 부윤에 어떻게 임명되었던가? “갑오년(1654) 5월에 대신이 심총의 뛰어난 재주는 장수의 직분을 맡길 만하니, 우선 한번 맡겨 보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발탁하여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임명하였다.”

대신이 심총을 두고 장수의 재주가 있다는 말은 병자호란에서 보인 그의 무용담과 관련이 있다.

“지난번 병자호란 때 심총이 자여 찰방으로서 감사 심연의 군사를 따라 여주에 이르렀다. 심연이 쌍령에서 패전하여 여러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려 했다.”

“심총이 말하기를, ‘인근 여러 진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남한산성이 한 시각에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었으니 지금이 바로 신하가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원컨대 남은 군사를 인솔하여 오랑캐 군사에게 달려가게 해 주시오.’ 했으나 심연이 허락하지 않았다. 심총이 울면서 6일이나 청하자 비로소 군사 수백 명을 주었다. 심총이 따로 모집했던 군사 백여 명과 아울러 남한산성을 향하여 전진해서 누차 접전하여 적을 섬멸하고 포로가 된 수천 명을 탈환하고서 납서로 급히 임금에게 아뢰었다. 심연이 여러 번 돌아오라고 재촉하였으나, 심총이 장수와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지금 장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 전사한다면 누구에게 죄를 줄 것인가.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공을 이룰 것이니, 또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든 살든 오직 공만 따르겠습니다.’ 했다. 강화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심총은 의병과 함께 통곡하고 헤어졌다.”

“인조가 가상히 여겨 불러서 공로를 칭찬하고 벼슬을 높여 주었으며 조정에서는 그를 중용하기를 의논하여 여러 차례 큰 진영의 장수로 천거하였으나, 세력 있는 재상 한 사람이 심총의 글재주를 아깝게 여겨 과거를 보아 출세시키려고 극력 막았다.”

심총이 애국충정이 남다르고 장수의 기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간원으로 있다가 광주 부윤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심총이 관미를 남용했다니 무슨 말인가?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연려실기술>의 변호를 들어보자.

“신묘년 겨울에 경산 현령으로서 문과에 올라 병랑과 장령을 역임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전적으로 광주 부윤에 발탁되었다. 그때 변방의 보고가 불안스러웠으므로 임금이 그에게 밀지를 내려서 ‘군사 준비를 조석으로 변란을 기다리는 것같이 하라.’ 하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수비할 준비를 하였다. 군량이 전부터 축난 것이 수만 석인데 조정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군량을 갖다 먹고 갚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심총이 모두 징수를 독촉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조계원이 경기 감사가 되자 심총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수어사 임금에게 아뢰어 다시 임용시켰으나 조계원이 또 아뢰어 파면되었다. 마침 신의화가 심계원에게 말하기를, ‘심총이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어 항상 남에게 말한다.’ 하였으므로, 심계원이 노하여 새로 부임한 광주 부윤 정지화를 시켜 심총을 탄핵하게 하였으나, 정지화가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조계원이 광주 서리를 체포하고 심총의 장죄(贓罪)를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을미년 8월에 심총을 체포하여 가두었다. 의금부 당상관 허적이 조사를 맡았는데 관물남용죄(官物濫用罪)를 적용시켰다. 이때는 임금이 한창 장죄를 엄히 다스리던 때였는데 판의금부사 원두표가 극력으로 구원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사간 조한영이 심총의 죄를 탄핵하자 임금이 이를 믿었다. 그 후 심총의 억울함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총의 세 아들이 그 원통한 사정을 써서 호소하였으나, 여러 재상과 신하들이 모두 임금의 진노가 한창 대단하다고 하며 내쫓았다.”

“정축년에 심총의 부하 황사성과 이득배 등이 소를 올려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 않았으며, 장남 약하가 세 번이나 징을 치고 호소하므로 의금부에서 다시 조사하기를 누차 청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이에 허적이 후회하고 일찍이 경연에서의 자기의 조사가 잘못되었음을 아뢰었더니 임금이 노한 안색으로 이르기를 ‘경은 말하지 말라. 그는 정지화를 은인이라 한다니 나는 어떤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니, 허적이 두려워하며 물러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 심총에 대한 어떤 유언비어가 임금에게 전하여졌기 때문이었다.”

“정유년 여름에 심한 가뭄이 들자 영의정 정태화가 임금에게 아뢰어 심총이 옥에서 나와 웅천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가 옥문을 나오자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으므로 신민들이 모두 말하기를, ‘심 영감이 석방되었으니 하늘이 어찌 모르리오.’ 하였다. 무술년 9월에 참작하여 청도(淸道)로 옮기게 하였다.”

“기해년에 경연에서 임금의 말이 심총의 일에 미치자, 홍명하가 ‘심총과 조계원은 서로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계원의 말을 공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수어사 이시방이 ‘국고의 곡식은 한 되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심총은 비록 죄가 있지만 병자년의 난을 구한 충의는 자랑할 만하오니, 마땅히 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으나, 조한영은 ‘공과 죄는 상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신축년 여름에 가뭄이 들자 참작하여 충주로 옮겼다가 10월에 용서받고 돌아왔다. 경연에 있는 신하가 죄를 얽어서 다시 귀양 갔다가 임인년 봄에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왔다.”

<연려실기술>의 변호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처럼 심총이 강직한 성품 때문에 모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심총의 <행장> 한 대목이다.

“심총의 자는 자첨(子瞻)이요, 호는 무기자(戊己子)라 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장래가 기대되었다.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보면 외고 산천의 길에 대한 거리와 과세액, 군사와 백성의 수효 등 두루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처음 광주 부윤에 임명되자 특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정성껏 보답하고자 하여 부족한 군량을 독촉하고 징수하는 동시에 도망가고 죽은 군사를 보충하였으며, 기구를 수리하고 정비하여 시설한 것이 매우 많았다. 청탁하는 이가 있어도 일체 들어주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원망을 들을 각오로 자못 위엄과 형벌을 썼으므로 원망하는 비방이 많이 일어나더니 마침내 화를 입었다. 사람들이 매우 애석히 여겼다.”

심총은 병으로 62세로 죽었는데, 그가 지은 절명시가 이렇다.

평생에 스스로 기특한 남아로 자처하였으나 / 平生自許奇男子
늙어지니 마침내 비루한 장부가 되었구나 / 投老終成陋丈夫
깊은 수치를 씻지 못한 채 헛되이 땅 속에 묻히니 / 未雪深羞空入地
응당 원통한 기운이 하늘 가운데에 뻗치리라 / 寃氣應射半天墟

심총은 장리(贓吏, 탐관오리)인가, 기남자(奇男子, 기특한 남자)인가?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의 진실과 왜곡은 비단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반복된다.

김징, 어머니 회갑 잔치로 몰락하다

김징, 어머니 회갑 잔치로 몰락하다 .

 

선시대는 효를 가장 중시한 사회다. 그런데 지나친 효도가 문제가 된 사건이 있다. 김징이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해서 귀양을 갔다.

현종11년 2월에 사간 이단석과 헌납 김석주가 모친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한 김징을 논죄하였다.

“작년 가을에 전라 감사 김징이 그의 모친을 위해 회갑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 도의 재력을 고갈시켜 풍성하게 준비했고 두루 영남의 수령들에게까지 구걸하였으니 지위를 빙자하여 탐욕을 부린 짓을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잔치하는 날의 행사가 지극히 사치스러웠는데 또한 도내 수십 명의 수령들로 하여금 주렴을 향해 뜰에서 절하게 하였으니 관리들에게 치욕을 심하게 준 것입니다. 이처럼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된 때를 만나 진상하는 풍정(豊呈)도 없앤 터에 지방 장관이 감히 방종하고 탐욕을 부려 무엄한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어버이 때문에 오명을 받았던 일과는 달라 조정에서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은전을 크게 저버린 것입니다. 그의 죄는 실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두 번째 아뢰니, 현종이 따랐다.

그해 3월에 좌참찬 송준길이 들어왔는데, 임금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송준길이 임금의 안부를 묻고 이어서 김징을 신구했다.

“신이 사는 곳이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어 그 곳의 여론을 모두 들어 알고 있는데, 김징의 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이 듣는 풍문은 으레 대부분 사실과 다른데, 이번 대간의 계사는 사실이 8, 9할이나 틀린 것입니다. 자고로 어미를 위해 수연을 베푼 일을 장률(贓律)로 처리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 같은 처리는 실로 효도에 손상되므로 식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김징이 베푼 잔치는 원두표, 이경여, 이태연 등에게 비교할 것 같으면 훨씬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받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공평한 자는 모두 한심하게 여깁니다. 지금의 의논하는 자들이 야박하니 지금 만약 상께서 먼저 마음을 결정하시기를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이 어째서 장죄가 되는가?’ 하신다면, 경박한 의논들이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매우 시끄러운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징(金澄, 1623-1676)은 아버지가 공조정랑 김극형이다. 어릴 때 이식에게 글을 배웠고 그 뒤 송준길의 문인이 되었다. 김징이 모친의 수연을 베푼 것으로 탄핵을 받았을 때 송준길이 적극적으로 변론한 데에는 사제의 정분이 있었다.

28세(1650, 효종 1년)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30세(165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 주서,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과감하게 언론을 행사하여 높은 관리들에게 미움을 받아 어천찰방으로 전임되었다. 34세(1656)때 홍관(虹貫)의 변으로 만언의 봉사책(封事策)을 상소하였고, 관서지방의 적폐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38세(1660, 현종 1년)때 강진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향리를 단속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힘썼으며, 1661년 병조에서 황해도사, 1666년 정언·장령(掌令)·헌납(獻納) 등 언관을 다시 역임하였다. 45세(1667)때 정월 헌납에 있으면서 장령 신명규 등 여섯 명과 함께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의 죄를 논핵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벽동에 유배되었다.

46세(1668)때 직강(直講)이 되고, 시강원문학, 사간·동부승지를 거쳐 48세(1670)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베풀면서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배천에 유배되었다. 그뒤 50세(1672)때 유배에서 풀려나 강음(江陰)·광주(廣州) 등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징이 대각에 있을 적에 과감하게 언론을 행사했다는 일화다. <인계록(因繼錄)>에 실려 있다.

“김징이 대각에 오래 있었는데 홍중보(洪重普, 1612-1671)는 정승이 되기 전에 여러 번 김징의 탄핵을 받았었다. 송준길이 이들을 조정하려고 두 사람을 청했다. 김징이 홍중보에게 말하기를, ‘공이 벗을 취하는 데 나 같은 자를 몇 사람 추린다면 공은 완벽한 사람이 될 것이로다.’ 하니, 공이 크게 웃으면서, ‘그대가 나를 옥처럼 만들어 줌이 많으니 진실로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로다. 그러나 속담에 말하기를, 비록 좋은 노래라도 늘 부르면 듣기 싫다 하니, 그대가 나를 탄핵하는 것도 역시 그만하고 끝낼 일이로다.’ 하니, 김징도 크게 웃었다.”

김징의 언론이 확실히 준엄한 바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홍중보가 말하듯 좋은 노래라도 늘 부르면 듣기 싫다 한 말은 인지상정이다. 김징이 모친을 위한 회갑 잔치가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은 데에는 필시 김징의 준엄한 언론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내용이다.

“김징이 일찍이 대각에 있으면서 부정한 일을 들추어 낼 때 권세 있고 귀한 사람들도 사정보지 않았는데 전후에 50여 명이나 논핵하였다. 이에 감정을 품은 여러 사람이 이 연회 베푼 일을 기회로 보복을 취하려고 김징을 잡아서 국문하면서 그 연회에 쓴 음식과 돈 비단을 받은 일을 조사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작 조사한 장계를 보니 사치가 분수에 넘쳐서 큰 죄를 받을 만한 것은 없었지만 논하는 자들이 김징을 공격하여 익겸(益兼)이 “전의 조사는 잘못된 것이 많다.” 하면서 다시 조사하기를 청하는 한편 관리들을 잡아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추궁 힐문하면서 한 푼의 은이나 한 자의 천을 가지고서도 죄목을 만들어서 장물죄로 처리하려 하였다.”

그중에는 일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효심이 발동한 일이니 그 모친이 생존한 바를 참작하여 특별히 감해 줄 것을 논한 이들이 많았다. 이경석의 변론이다.

“이경석이 김징이 어머니를 위하여 헌수하는 술자리를 베풀었으니 죄가 용서받을 만하다 하였는데, 형장으로 심문하라는 임금의 명이 내리자 다시 글을 올려서 말했다. ‘김징의 소행은 참으로 분수에 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 처음에 중죄로 다스리지 않은 것은 그의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당초에 사실을 바른대로 고하지 않고, 또 재차 심문할 때에는 말을 조심하지 않았으니 역시 심히 망령된 일입니다만 전하께서 넓으신 도량으로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그 죄를 감하여 주신다면 김징이 어찌 형벌을 받은 후에라야만 그 죄를 알겠습니까? 했다.”

<청야만집>에 지금 우리가 새겨들을 말이 실려 있다.

“김징이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함릉 이해(李澥, 김징은 해의 종손서)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이해가 말하기를 ‘너의 집이 사천에 있으면서 나무를 팔아 생계를 삼을 때 너의 모친이 지내던 형편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네가 지금 벼슬을 하여 전라 감영으로 모시고 가면 날마다 수연(壽宴)아닌 날이 없을 것이니, 아예 수연을 차릴 생각을 말라.’ 하면서 재삼 주의시켰었는데, 그 후에 김징이 그 말을 좇지 못하고 마침내 수연을 벌인 일로 실패하여 거의 죽을 뻔했으며, 그 후에 한평생을 불우하게 마쳤다. 최석정이 항상 이 사실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함릉의 이 말은 뒷날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말한 것 같다. 예전 사람들은 비록 점치는 술법은 없어도 선견지명이 이 같음이 있었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했다.”

효심의 발로라 할지라도 지나치면 결국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준다.

김징이 어머니 수연 때문에 몰락하기는 했지만 효심의 발로였던 것을 하늘이 가상히 여겼을 터인가? 김징은 현달한(세상에 나아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높인) 아들을 두었다. <숙종실록> 30년 12월조에 김징의 아들 김구의 졸기가 실려 있다.

“전 우의정 김구(金構)가 졸하였다. 김구는 관찰사 김징의 아들로 젊을 때부터 문한이 넉넉하고 민첩하였으며,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자질과 성품이 명철하고, 재지가 더욱 뛰어나 누차 바쁘고 번거로운 직임을 맡았으나 재결에 지체함이 없었으며, 임관(任官)이 직무에 적합함이 많았다. 또 말주변이 능숙하여 임금과 면대해 아뢸 때에는 간곡하고 자상하니 임금이 경청하였다. 상신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내간상(內艱喪)을 당해서는 상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병세의 위독함을 듣고 심지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으니, 융숭한 총권(寵眷)이 이와 같았다. 졸할 때 56세요 뒤에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송시열과 이경석2

송시열과 이경석2.

 

경석을 송시열과 그 문하의 인사들이 비판한 명목은 삼전도 비문을 작성한 일이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어쩔 수 없어서 작성했다고는 하지만 글을 보면 실상 결코 손발이 묶여서 어쩔 수 없이 쓴 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삼전도 비문 작성 후에 송시열이 이경석과 연분을 끊고 내왕하지 않는 것이 상황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공격한 것은 다른 상황이 개입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송시열이 이경석을 공격한 의도가 불순해질 수도 있다.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李厦成)이 그 조부를 위하여 무함임을 변명하는 소를 숙종에게 올렸다. 먼저 이경석이 신도비를 작성하게 된 연유를 밝힌다.

“아아, 정축년의 일이야 무엇이라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 인조대왕께서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들 청인이 의심하고 성냄이 점점 심했기 때문에 먼저 기회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편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비(碑)를 세우게 하고 비문을 지어 바치라는 독촉이 심하니 이것이 그해 12월이었습니다. 인조께서 처음에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ㆍ전 부사 조희일(趙希逸) 및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하여 하룻밤 사이에 지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대제학은 결원이었으며 신의 조부가 마침 예문관 제학의 직위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서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서 바쳤던 것입니다.”

“세 사람의 글을 청국으로 들여보냈더니 마침 명나라 학사로서 청국에 항복한 자가 있다가 글을 보고서 신풍의 글에서 인용한, ‘정백이 양을 이끌었다.’는 말은 원래가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서 이 비문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며, 또 신의 조부가 지은 것은 매우 소략하고 전혀 포장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청인들이 더욱 의심하고 노하여 고쳐 짓기를 독촉하였으며 으르렁거림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걱정하고 무서워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때에 신풍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전하께서 신의 조부만을 불러다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입장을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하여 판가름 나는 것이다.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신첩(臣妾) 노릇을 하다가도 끝내는 오나라를 멸하는 공을 이루었다. 후일에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으며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에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도록 하여 사세가 더욱 격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했다. 신의 조부가 생각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 몸을 돌아볼 수 없다 하여 꾹 참고 명을 받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축년에 신의 조부가 비문을 짓게 된 실상입니다.”

신도비를 작성한 일이 인조의 극진한 부탁에 의한 애국충정의 발로임을 변론했다.
이어서 그는 송시열과의 인연을 이렇게 적는다.

“신의 조부가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항상 산림에 숨어 있는 어진 선비를 끌어서 등용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송시열은 이때 전 참봉으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추천하여 좋은 벼슬을 시켰습니다. 그 후로 글을 올리거나 경연에 나오면 항상 송시열을 불러 올려 예로써 대우하시라는 뜻으로 아뢰었습니다. 효종대왕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신의 조부가 영상이 되었을 때도 송시열과 당시의 명사들을 등용하여 새 정치를 힘을 모아 돕도록 하였습니다. 송시열 역시 신의 조부를 주인으로 섬겨 서울에 들어오면 예고 없이 베옷과 짚신으로 신의 집을 찾았습니다. 신의 조부 역시 대등하게 대우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그 후 신의 조부는 청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떠났기 때문에 조정에서 같이 일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두터운 정의는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송시열이 사퇴한다는 말을 들으면 신의 조부는 곧 전하께 글을 올려서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며 반드시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정에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며 선대왕의 은혜를 갚기를 의리로써 책망하였습니다. 송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도 신의 조부에 대하여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음을 평소의 말이나 기색과 서신 속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주공 구역이란 말을 인용하여 칭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경석이 환로에 영달하여 고관대작에 있으면서 송시열을 후진으로 적극 추천하였다는 내용이다. 이경석이 송시열의 학문과 도덕을 높이 샀고 송시열 또한 이경석이 후진들에게 겸허하게 대하는 정성에 감복을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그러면 언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는가? 이하성은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기해년에 상례를 의논할 때에 신의 조부는 시왕의 제도를 주장하고 송시열은 <의례>에 있는 네 가지의 설을 주장하여 비로소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축년 여름에 억울한 죄인들을 심리할 때에 선정신 송준길이 윤선도의 위리안치를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신의 조부가 아뢰기를, ‘봄 하늘의 우로는 초목의 아름답고 악함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위에서는 마땅히 유신(송준길)의 말을 들어서 죽을 나이가 다 된 사람을 먼 곳의 귀신이 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송시열이 이 소식을 듣고서 분하게 여겼습니다.”

“또 그 아들을 보내어 혼인하기를 청하였으나 일이 성취되지 않으니 송시열은 그것이 신의 조부가 자기에게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인 줄 잘못 알고 편지에까지 그런 말을 나타내고 또한 편지를 친한 사람에게 보내어서 뚜렷이 유감과 원망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조부는 송시열을 대접하기를 처음과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기해예송에서 윤선도를 풀어주는 것과 관련한 것이오, 하나는 사돈을 맺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된 일이다. 송시열이 이경석과 사돈의 연을 맺고자 했다는 내용은 흥미롭다. 이 두 가지 일은 공적인 의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로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감정을 갖게 되었다면 송시열의 처사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제 소는 본격적인 변론으로 접어든다. 과연 송시열이 이경석이 쓴 삼전도 비문만을 문제 삼아서 그렇게 한 것인지 말이다.

“무신년에 선대왕(현종)께서 신의 조부를 원로라고 하여 궤장을 내려 주실 때에 신의 조부가 전하의 은혜를 빛내게 하는 글을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요청하였는데 송시열에게도 청했습니다. 송시열이 사양하지 않고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공이 조정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임금의 교서 중에서 모두 말하였지만 경인년 2월의 일만은 은미하게 하여 드러내지 않으셨다. 이때는 나라의 존망이 당장에 결정지어지게 되었지만 이해 판단이 빠른 자들이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 듯했다. 오직 공이 홀로 사생을 돌보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동요하지도 않아 청인들과 담판하여 국가가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임금의 알아주심이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따랐다.’ 했습니다. 또 이어서 ‘하늘의 보우를 받아서 수하고 강녕하여 끝내 임금의 은혜로 대우하심을 받았으니 어찌 다만 우연한 일이리오. 아아, 여기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깊은 정리를 볼 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송시열의 글에서 말한 경인년의 일이란 곧 신의 조부가 청인들에게 항쟁하여 담판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 그 글을 보면 신의 조부의 충절을 칭송한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그 편말(篇末)의 한 구절, ‘수하고 강녕하여……’라는 말을 인용하여 견준 것이 애매하여 자못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뒤 기유년 봄에 선대왕께서는 온천에 행차하시고 신의 조부가 명을 받아 서울을 지키고 있던 중에 차자를 행재소에 올려서 먼저 군왕으로서 재화를 만나 수신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말하고 뒤이어서 말하기를, ‘평소 조정에서는 납리(納履, 신을 신음)하는 기색이 서로 잇달았는데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안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불행하게도 병환이 있어 멀리 임시 처소에 나가 계시는데 만일 늙고 병들고 사고가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과 의리상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매우 염려하는 일입니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스스로 잘난 척하는 기색은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역시 그것에 가까운 듯합니다. 따라서 이 일은 전하께서 깊이 깨쳐 생각하고 처리하여야 할 일인가 하옵니다.’ 했습니다.”

“이때 송시열이 마침 병이 나서 시골집에 있으면서 미처 행재소에 나아가서 문후하지 못하였다가 신의 조부의 차자를 보고서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오인하고 곧 한 장의 소를 올렸습니다. 그 첫머리에는 공손히 사죄하는 말을 하고 나중에는 ‘옛날 손종신(孫從臣)과 같이 수하고 강녕하여 비록 크게 당대의 높이는 바가 되었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고 일컬어지지 않아서 혹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그 처신이 보잘것없는데 도리어 그 사람에게서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이 낮춰 보고 비웃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신이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와 비슷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조부는 다시 짧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말씀드린 차자로써 송시열이 자기를 논란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이지만 신의 본심은 결코 그렇게 할 의사가 없었음을 천지신명에게 증명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인 것은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보통 처지도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마음으로 매우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설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義)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찌 차마 전일에 좋아하던 사이를 배반하고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아아, 여기서 송시열이 신의 조부를 공격한 것과 신의 조부가 송시열을 대우한 것만 보아도 또한 송시열의 분노하는 기색과 신의 조부의 화평스러운 말을 한번에 환하게 분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조부와 시열이 교제한 모든 내막입니다.”

이하성의 글은 삼전도 비문은 설령 송시열이 유감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이경석을 비판할 논란거리로는 애초에 삼지 않았는데, 행재소 차자 건으로 송시열이 터트렸다는 논조다.

이하성이 본 소를 올린 계기가 되는 홍계적 등이 올린 소를 조목으로 변론하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홍계적 등은 또 말하기를, ‘송시열이 손적의 일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고 비방한 것은 송시열의 사사로운 뜻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자의 끼친 뜻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송시열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지은 그때에 벌써 비평과 논란을 하고 서로 사귀어 놀지 않았다면 비록 신의 조부를 비방한 그것이 정확한 의논은 못 되더라도 산림처사로서의 고결한 의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수년 후에 신의 조부의 천거를 받고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였으며 더구나 그가 자기의 몸을 얼마나 신중히 하였으면서도 몸소 베옷 입은 선비의 차림으로 대신의 집을 찾아 왕래가 잦은 것이 어떻게 도를 즐겨하여 남의 세력을 잊고 선배를 스스로 따른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이때 송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높여서 예의로 대우하는 의사와 칭찬하는 말이 또 저러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본래 심복되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의 명망과 지위가 신의 조부와 서로 같게 되고 기세가 더욱 성하여지게 되니 서로 논란할 때에 감정이 생기고 서로 알력 하는 곳에서 틈이 일어나 점점 의심하고 갈려지게 되었으며 투기하고 미워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신의 조부의 한평생 명예와 절조는 한 점의 더러움도 들어서 말할 것이 없었는데 흠을 30년 전에서 찾으려 하여 처음에는 가만히 옛말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칭송하고 찬미하는 글에서 비추었다가 나중에는 드러내 놓고 욕설과 비방을 하며 위에 올리는 소장(疏章)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이 신의 조부를 높여서 사모한 것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짓기 전이 아니었습니다. 또 송시열이 신의 조부를 욕하고 비방한 것이 역시 그 글을 지은 사실을 들은 날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한 사람인데 전에는 존모하고 경복하여 주공(周公)에 비하기까지 하였으며 나중에는 업신여기고 꾸짖고 욕하여 그만 손적에게 비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이하성의 변론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송시열과 이경석1

송시열과 이경석1.

 

시열(宋時烈, 1607-1689)과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모진 인연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명유요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이들이지만 종국에는 각자 용납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이경석은 송시열보다 12살 연장으로 왕실의 종친이다.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6대손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유간(李惟侃)이다. 어려서부터 형 이경직에게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경석이 먼저 환로에 나가 영달하고서 포의였던 송시열을 유학으로 우대했다. 이는 그가 김장생 문하의 동문이라는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경석은 19세(1613, 광해군 5년) 진사시에 23세(1617)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당시 과거에 합격하는 평균 연령에 비해 상당히 젊은 나이에 문과 급제를 했다. 29세(1623)때,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30세(1624)때에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고, 33세(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다. 38세(1632)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42세(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주화파(主和波) 대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섬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여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이일로 글을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 삼전도비 작성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이경석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43세(1637)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47세(1641)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그뒤, 50세(1644)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56세(1650, 효종 1년)때,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반청정책(북벌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모든 일은 영의정의 책임이라고 자임하고 나섰다. 효종이 청나라 조사관에게 간청하여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59세(1653)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74세(1668, 현종 9년)때,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이경석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영수 송시열 등에 의해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받았다. 그는 조선의 난국을 극복한 탁월한 재상이었으며 일생동안 검소하고 소박한 청백리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연려실기술>에 송시열과 이경석이 틀어진 사건을 기록한다.

“기유년(1669, 현종 10년) 3월, 임금이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에, 영부사 이경석이 차자(짧은 상소문)를 행재(行在)에 올려 빨리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차자에서 말하길, ‘신이 깊이 염려한 것은 평소에 조정에서 걸핏하면 신을 들메고[納覆] 가는 것이 서로 연달았지만, 오늘의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안하는 이가 있다는 기별은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도 신이 듣지 못한 것인지요? 전하께서 병환으로 멀리 임시 처소에 가 계시니 사고가 있다든가 늙고 병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이나 의리로 보아서 이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매우 걱정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옛말에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지금 그와 근사한 것인지요. 이 점이 전하께서 조심하고 염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현종이 요양을 위해 온천에 왔는데 그에게 문안하지 않는 신하가 있다. 혹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서 찾아뵙지는 않은지 의심스럽다. 이경석은 그 신하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마침 혐의되는 일이 있어서 감히 행재소에 나아가 뵈지 못하고, 다만 전의(全義)에 나가서 머물러 있다가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차자를 올려서 대죄하였다.”

이경석이 직접 인물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당시 송시열이 전의에 있다가 현종을 찾아뵙지 않은 바가 있어 차자를 올리고 대죄하였다. 현종조에 송시열은 산림의 영수로 사림의 중망을 받아 국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니 이경석이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는 말에 혐의를 두었을 것이다.

“송시열이 올린 상소 말미에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 손종신(孫從臣)같이 오래 살고 편안하여[壽而康] 크게 한 세상의 존중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하였다고 일컬음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너무도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어서 처신하는 것이 보잘것없었으므로 도리어 손종신 같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낮춰 보고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의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이 자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요, 나를 비난한 사람은 손종신이다. 손종신은 손적(孫覿, 1081-1169)을 일컫는다. 손적은 송나라 휘종 대관 3년 진사에 올라 한림학사가 되었는데 정강의 변으로 흠종이 금나라에 항복하는 표를 작성했던 인물이다. 오래 살고 편안하여 크게 한 세상의 존중을 받았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한 손종신은 누구인가? 바로 이경석이다. 송시열은 삼전도비문을 지은 이경석을 손적에 비유하여 경멸의 심사를 보여주었다.

앞서 1637년(인조 15년) 11월에 청나라가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에 ‘청태종 승첩비’를 세우라는 칙서를 보내 조선을 핍박하였다. 다급해진 인조는 글 잘 짓는 신하들을 불러 비문 쓰라고 청했다. 그러나 누가 기꺼이 나서겠는가? 병을 핑계대거나 일부러 거친 글로 피해 나갔다.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 등 두 사람의 글을 택해 청나라로 보냈다. 청나라는 ‘황제의 공덕을 더 서술하는’ 조건으로 이경석의 글을 낙점했다. 인조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좀 고쳐 쓰라고 이경석을 다독거렸다. 이로써 삼전도비문이 완성됐다.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이경석에게 “공(이경석)은 ‘수이강(壽而康: 오래 살고 편안히 지냄)’했다”는 축하글을 전했다.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수이강’, 이 세 단어는 가시를 품고 있었다. 송시열이 자신을 변호한 차자에 적은 것처럼 금나라에 멸망당한 뒤 과도한 내용의 항복문서를 지어 바친 북송의 손적이 ‘오래 편히 살았다[壽而康]’는 비아냥을 들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에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

“신이 망령되이 올린 차자를 가지고 송시열이 자기를 논란하고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송시열과는 전부터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지목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차자의 사연이 명백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이 차자 중에서 말한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의 직분과 의리로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 송 판부사를 지목 배척한 말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그가 슬픔을 당하고 또 병환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혹시 곧 달려가 뵈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였고, 또 어떻게 그가 끝내 오지 않을 것으로 단정하고, 먼저 가서 배척하였겠습니까. 설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떻게 차마 전일에 서로 좋아하던 정의를 배반하고서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야말로 불행이 심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경석의 차자는 자신이 송시열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변론한다. 이 차자를 쓸 무렵에는 손종신이 자신을 지적한 내용인지를 숙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 차자에서 이경석은 송시열을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차자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취지의 변론에 멈추었다.

그런데 후에 송시열이 손종신을 거론한 바가 이경석 자신을 지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노하게 된다. 훗날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그의 제자들과 당론에 대해 문답한 것을 제자 한홍조가 기록한 <강상문답>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옛날 백헌 정승(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말한 것은 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끄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또 경인년에 한 일의 한 가지가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당시에 청음(김상헌) 등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그와 더불어 벗하고 잘 지냈다. 그런데 이때 우암의 상소 끝에, ‘손종신……’이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백헌 정승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의 말인지를 몰랐다가 나중에 허적이 그것은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을 옛날 손적의 사실에 비유한 것임을 알고서 백헌 정승에게 일러 주니 백헌 정승이 크게 노하여 이 우암의 소를 동춘(송준길)에게 보였다. 동춘이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이제 송시열과 이경석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또 숙종조에 지은 <현종실록> 9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옛 사례를 물으니 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

“임금이 또 대신에게 물으니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자기 나름대로 옛날 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곤란하나 성인도 때에 따라 변통하여 바꾸었습니다. 옥당의 관원이 선대의 고사를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경석에 대한 전하의 관계가 원익에 대한 인조의 관계나 상헌에 대한 효종의 관계와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 헤아려서 처리하시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했다.”

“임금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원익, 김상헌 양공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이경석이 이 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이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송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송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히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송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이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임금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이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송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송시열은 참으로 이경석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 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이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 씀이겠는가.”

<현종실록>에서 사관은 이경석을 높이지 않으면서 송시열의 처신이 좋지 않았다고 평한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정감의 건의로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고 개수에 착수한다. 3년 전에 편찬된 <현종실록>이 왕의 독촉으로 불과 서너 달 만에 급급히 편찬되어 기사에 착란과 소략한 부분이 많고 또 남인 주도로 편찬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개수현종실록>이 세상에 나온 이유다. 앞서 인용한 사관의 기록도 서인의 눈에는 거슬리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삼전도비의 굴욕사(2014.11.04.)
<두산백과: 이경석(李景奭)>
<연려실기술>

관운을 누린 정태화

관운을 누린 정태화.

 

벼슬살이를 환해(宦海)라고 한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빗댄 말이다. 바다는 파도가 늘 일렁인다. 바람이 잔잔하면 배는 미풍을 받으며 쏜살처럼 미끄러져 흐른다. 그러다 바람이 거세지면 파도는 배를 삼킬 듯 달려든다. 잘못하면 난파한다.

임금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군사부일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량없는 성은에 신하는 감복하여 눈물을 뚝, 뚝, 흘린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가사를 보면 정말 그렇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차디찬 벽지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고, 심지어는 멸문지화를 당한다.

정태화( 鄭太和, 1602-1673)는 관운이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났다.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의 5대 손이며,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이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와 예조참판 정만화(鄭萬和)의 형이다. 그의 아들 정재승도 우의정을 지냈다. 조선왕조 500년간 관운이 가장 좋았던 집안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다.

23세(1624, 인조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27세(16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36세(1637)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교리·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헌납·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사서·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의 좌랑, 이조의 좌랑·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30세(1631)때,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를 보였다. 35세(1636)때에는 사간으로 있다가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휘하에서 군무에 힘썼다.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36세(1637) 말 그는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48세(1649)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참판, 한성부우윤·대사간, 평안도·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 문제로 조정에서 심한 충돌이 일었다.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가 사사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정태화는 김육과 함께 봉림대군 책봉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로서 적통을 계승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진 관료로서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조·형조·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뒷날 중국 사신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했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갔고, 그 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50세(1651, 효종 2년)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58세(1659)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처리하였다. 기해예송이 발생하자 송시열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이를 시행토록 하였다. 72세(1673, 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을 기피했고 또한 정치화·정만화·정지화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요직에 많이 올라 있었다.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는 비평을 듣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의 예송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 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했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다. 그가 노구를 무릅쓰고 61세(1662)에 진하 겸 진주사로 연경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기해예송에서 정태화는 기년설을 찬동했다. <기재잡기>에 보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심지원, 영돈녕 이경석, 연양부원군 이시백, 완남부원군 이후원, 영중추 원두표 등이 헌의하기를, ‘신 등이 옛 예법에 능통하지는 못하나, 시왕(時王)의 제도로 상고하면 대왕대비께서 마땅히 기년의 복제를 입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송시열과 우참찬 송준길은 헌의하기를, ‘고금의 예법이 이미 같고 다른 것이 있으며 제왕가의 제도는 더욱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데 여러 대신이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로 하기로 의논하였으니 신 등은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니, 명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당시 기년설을 주장한 근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여러 의견이 있었는데, 정태화는 시왕의 제도임을 근거로 내세웠다. 후일 송시열이 현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처음 네 가지의 설을 말하니 정태화가 듣고 크게 놀라면서 그 설은 인용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 사람이 반대당의 모함이 있을 줄 미리 알았던 선견(先見)이었습니다.”

효종이 서거한 이후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서인들은 계모후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복으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는 효종이 인조의 중자(둘째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인 학자였던 윤휴는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족이 참최복(3년복)을 입는다는 <주례> 규정을 들어 참최복을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3월에 기년복의 기한이 다가오자 남인 허목은 ‘왕위를 계승한 아들은 장자로 간주한다’는 <의례> 주소를 근거로 자의대비의 복제 개정을 주장하였다. 이에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은 <의례> 주소에서 대통을 계승해도 참최를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 규정[사종설(四種說)] 중에서 세 번째에 있는 ‘체이부정(體而不正: 서자가 계승한 경우)’을 들어 기년복을 주장했다.

서인과 남인들의 논쟁이 격화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화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는 두 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어머니는 장자와 중자에게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을 들어 기년복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국왕은 몇 번의 의견 수렴을 거쳐 기년복으로 확정했다.

효종 초년에 정태화가 모친상으로 향리에 있을 적 일이다.

“이때 임금(효종)은 새로 즉위해서 분발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은밀한 계책이 있었는데, 혹 그 일이 누설되어 그들이 의심하고 노할까 염려하여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였는데, 사신이 온다는 소문이 있자 또 무슨 일로 사문할 것인지 몰라서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튿날 이경석이 입대하여 자기가 용만으로 달려가서 일의 기미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몸에 병이 있는데 어떻게 먼 길을 갈 수 있는가. 경이 멀리 나가면 여기서는 누가 대응하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좌의정 조익(趙翼)이 청한 대로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빨리 부르시고, 정태화는 계책이 있으니, 비록 상중(喪中)에 있으나 비변사로 하여금 가서 묻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이경석이 위급한 상황에서 정태화는 계책이 있으니 비록 상중에 있지만 비변사로 가서 묻게 하라는 말은 당시 정태화에 대한 대신들의 평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사헌이 아뢰기를 ‘통제사 유정익의 서매(庶妹)가 자점의 첩이 되어 김자점과 가장 친밀하였으니 통제사의 중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정익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지 않았는데 만약 의심스럽다 하여 유정익을 체직하면 장차 사람마다 스스로 의심할 것입니다.’ 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도다. 옛사람이 나의 진심을 남의 뱃속에 넣어 주라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김자점이 오랫동안 정승의 직에 있었으니 한때 문무관 중에 누가 그 집에 출입하지 아니하였으리까. 만약 평소에 서로 잘 아는 것으로써 모두 억지로 죄를 씌우면 아마 조정에 한 사람도 완전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인심을 진정시키는 계책은 전부 대신에게 있으며 나와 경이 벌써 굳게 정한 바가 있으니 비록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감히 제 뜻대로 할 수 있으리오.’ 하였다.”

정태화가 관운을 누린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이와 같은 면모를 들 수 있을 듯하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해예송(己亥禮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태화(鄭太和)>
<연려실기술>

현종의 덕

현종의 덕.

 

종조는 예송의 시대였다. 예송이 치열해지면서 당쟁도 치열해졌다. 현종조는 예송으로 시작해서 예송으로 마쳤다는 말은 당쟁의 그늘 아래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무능한 왕 현종 이미지를 만들었다.

현종이 혁혁한 공을 세우지 못한 왕이라는 박한 평가를 피하기는 어렵다. 역대 왕들의 재위 기간에 비하면 15년 재위 기간은 결코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짧지만도 않다. 업적을 이룰 시간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34세 세상을 떠난 왕이라고 한다면 큰일을 해내기에는 역시 명운이 박하다.

현종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 <연려실기술>에 실린 현종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를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공사기문>과 현종의 <행장>과 <지문誌文>에 실린 이야기다.

“(현종이) 어렸을 때에 대궐 문 밖에 나갔다가 한 군졸의 모양이 여위고 검은 것을 보고 내시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아뢰기를, ‘병들고 춥고 주린 사람입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가엾게 여겨서 옷을 주고 또 밥도 주게 하였다.”

“(현종이) 원손(元孫)이 되었을 때에 항상 여염집에 나가 있었다. 이웃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자가 있어 시종하는 자가 쉬쉬하면서 금지시키면 현종이 말리며 말하기를, ‘사람이 제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안 낼 수 있느냐. 마음대로 하게하고 괴롭히지 말라.’ 하였다. 한 번은 표범의 가죽을 바친 사람이 있었는데 품질이 좋지 못하여 인조가 물리치려 하였다. 이때 현종이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을 잡느라고 많은 사람이 상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인조가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면서 물리치지 말라고 하였다.”

“효종조에 새끼 곰을 바친 사람이 있었다. 기른 지 1년이 지나자 사람이 다루기에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았다. 내시가 아뢰기를, ‘오래되면 반드시 우환이 되겠습니다.’ 하고, 죽이기를 청하자 효종이 허락하려 했다. 현종이 세자로서 나아가 아뢰기를,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인애하는 마음이 아닐 줄 아옵니다. 마땅히 깊은 산에 놓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효종이 듣고서 크게 기뻐하며,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였다.”

효종이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 말처럼 현종이 그러한 정사를 펼쳤는지는 따져봐야겠지만 현종이 보여준 인애의 마음은 틀림없다.

현종과 그 보모 이야기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조(曺)씨 성을 가진 상궁은 광해군의 후궁 허씨의 시비였다. 계해년에 인조가 불러다 궁중에 두었는데 항상 마음에 불평을 품었다.”

조씨 성의 상궁은 왜 마음에 불평을 품었는가? 당연히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몰락했으니 후궁 허씨의 처지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조가 그 시비를 궁중에 두었으니 그 상궁이 마음에 불평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현종이 탄생하자 보모의 소임을 맡았다. 현종이 5, 6세 때에 불을 가지고 장난을 치자 그가 홀로 곁에 있다가 ‘저의 조부가 불로써 나라를 얻었으니 저도 배우려 하는 것인가.’ 하였다.”

조씨가 불평을 가진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현종이 아무 말도 없이 기억해 두고 일찍 그런 낌새를 말이나 안색에 보이지 않고 있다가 왕위에 오른 다음 조를 불러 뜰아래 엎드리게 하고 ‘네가 아무 해의 일을 기억하느냐. 그때에 내가 위에 사뢸 줄을 모른 것이 아니지만, 네가 나를 보호 양육한 공이 있기 때문에 차마 중한 형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고 여관(女官)의 고신을 빼앗고 사가에 내쫓았다.”

5-6세 때에 들은 말을 기억해 두었다는 것은 현종이 상궁의 말을 범용치 않게 들었기 때문이다. ‘저의 조부가 불로써 나라를 얻었으니 저도 배우려 하는 것인가.’ 짧지만 대역죄에 해당할 수 있는 말이다. 5-6세라면 아주 어린 나이임에 틀림없다. 상궁이 이 말을 할 때 필시 무심결에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십여 년이 지난 후 어제 일처럼 말하는 것을 보면 현종의 지엄한 성격이 보인다.

“임금은 그래도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을 내려주었다. 허씨는 곧 유수(留守) 허잠(許潛)의 손녀이다. 허씨는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에 궁중에서 나가 사가에 있었는데, 옛 정의를 잊지 아니하고 때 따라서 의복과 음식을 보내어,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무심결에 실언한 말 한마디를 용납하지 않고 엄히 다스렸지만 내쫓긴 상궁이 보모의 직임을 맡았음을 생각하여 먹을 것을 죽을 때까지 내렸다. 현종의 인후한 성품을 또한 살필 수 있다.

인후한 성품을 드러내는 일화가 <공사견문>에 나온다.

“임금(현종)이 일찍이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인들이 떠난 뒤에 말을 전갈하는 군졸이 빨리 걷다가 미처 살펴보지 못하고 임금의 몸에 부딪쳐서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 이에 좌우가 질겁하여 법관에 넘겨 처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웃으며 이르기를,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 소속된 병영을 시켜 곤장 5, 6대를 치고 놓아 보내게 하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실수로 임금과 부딪쳤다는 사실이 특별할 것 같지는 않다. 법관에 넘겨 처벌하자는 좌우 신료들의 주청을 웃음으로 막으면서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곤장 5, 6대를 치고 놓아주게 했다니 역시 요즘 상식으로는 용납이 안 된다. 그러나 시대가 조선시대임을 상기하자. 현종의 인후한 풍모로 보는 것도 이런 연유다. 이긍익이 <연려실기술>에 현종의 슬기로운 덕으로 소개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중국 역대 왕조를 통틀어 명대에 유독 혼군(昏君,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 많았다고 한다. 환관들이 세력을 잡고 국정을 좌우하여 신하들의 올바른 주장이 정사에 반영되지 못한 점을 그 이유로 든다. 환관이 세력을 잡는 데에는 왕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환관은 왕과 사적이 유대감이 강하다. 많은 경우 국정을 농단한 환관들이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한 데에는 즉위하기 전에 맺은 각별한 정분이 주효했다.

현종이 세자일 때 총애한 내시에 관한 이야기가 <공사견문>에 실려 있다.

“현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어떤 내시가 새와 짐승 잡는 틀을 만들어 드리는 등 온갖 짓으로 잘 보여 현종이 그를 극히 사랑하여 다른 관속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즉위함에 미쳐서는 그는 간사하고 아첨함으로 배척당하고 끝내 다시 용상에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세자일 때는 극진히 사랑하더니 재위에 올라서는 용상에 가까이하지 않았다니 국가의 대사를 도모하는 것으로 보면 다행이지만 내시로서는 세자의 행동이 몹시 이중적이었을 것이다. 재위에 오르기 전에는 현종이 그 내시를 사랑하여 다른 관속들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였다니 말이다.

현종이 아마도 부왕인 효종이 자신이 세자였을 적에 해준 말을 마음 깊이 새겨두었을지도 모른다.

“임금(효종)이 일찍이 현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신하와 백성들이 나에게 어진 덕이 있다고 잘못 알고 마음으로 따랐다. 내가 보니 여러 신하 가운데는 혹 마음속으로 (나를 친히 대하면 소현세자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여 스스로 나를 소원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나에게 간곡히 하여 뒷날의 복을 기대하는 자도 있었다. 내가 그때는 비록 아부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했지만 임금 자리에 오른 뒤로는 늘 그때 아부하지 않고 바르게 몸을 가지던 자들이 관직에 추천되는 것을 보면 번번이 가상히 여겨 낙점을 찍었다. 만일 오늘날 종실 중에 전날 나처럼 인망을 얻는 자가 있다면 지난날 나에게 아첨하던 자가 반드시 지난날 나에게 남몰래 후하게 했던 그 행동을 그 사람에게도 할 것이니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 몸가짐을 바르게 하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고 아첨으로 나의 환심을 사려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뜻을 알아두라 했다”

유학의 정치론은 현인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는 것이다.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현인을 등용하는 일이다. 아첨꾼, 모리배,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 권력욕에 빠진 자,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자 등을 내쳐야 현인들을 많이 불러올 수 있다.

현인은 몸가짐이 바르고 국사를 운영할 경륜을 갖추어야 한다. 율곡이 선조의 조정에 선 신하들이 몸가짐은 바르게 하나 국사를 경륜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취지로 쓴 글이 있다. 현인이 되려면 몸가짐만으로는 안 된다. 국사를 경륜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도 기본은 몸가짐이다.

효종의 덕2: 경세의 역량

효종의 덕2: 경세의 역량 .

 

종의 재위 기간은 길지 않다. 딱 10년이다. 십 년의 재위 기간 효종조 국시가 북벌이었다. 송시열이 <지문>에 쓴 것처럼, “임금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성품으로써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할 뜻이 있어 왕위에 있은 지 10년 동안에 하루도 게으르게 지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나라 백성들이 바야흐로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는 날을 발돋움하고 목을 빼고서 기다렸으나 갑자기 승하하셨다. 아! 천명이로다. 참으로 그야말로 ‘왕업을 창시하여 절반도 못 이루고 중도에서 돌아가다’는 옛말과도 같으니 천명이로다.”

효종이 정사를 어떻게 했는지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내용을 토대로 소개한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성품을 지닌 효종이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하기 위해 재위 10년 동안 하루도 게으르지 않고 국정을 행한 기록의 대강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효종조의 국시는 북벌이다. 강한 군대는 필수다. 강한 군대를 지향한 효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글이 <조야첨재>에 나온다.

“임금(효종)이 경연에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대체로 겁이 많다고 말한다. 정축년의 일을 볼 것 같으면, 패인은 정예의 군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훌륭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옛날 이광(李廣)은 군중(軍中)에서는 조두(刁斗, 시간을 알리는 꽹과리)를 치지 않고 척후병을 멀리 보내 적의 정세를 정탐했다 한다. 병자년의 난리에 장수된 자가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여 신경원(申景瑗)은 싸우지도 못하고 또한 달아나지도 못했으니 우리나라 장수로서 이웃 나라 사람에게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문관은 문(文)을 숭상하여야 하고, 무관은 무(武)를 숭상하여야 국가가 취하는 바가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긴 사람은 으레 경멸함을 받고 무관은 서생처럼 되어야 세상에 용납을 받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광망하고 패악하다고 지목하니 이와 같은 습관은 참으로 부끄럽다. 옛날 양호와 두예 같은 사람처럼 가벼운 갖옷과 느슨한 띠를 다시 볼 수 없고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찌 싸움터에서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장수가 출중해야 한다. 효종은 용명한 장수가 나오지 못하는 당시 조선의 문화를 한탄했다.

유학에서 말하는 훌륭한 정치는 현인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는 것이다. 효종이 대신을 우대하려고 노력했다는 일화들이 있다.

“임금(효종)이 즉위할 때,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 전 참의 권시(權諰)ㆍ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蘊) 등이 맨 먼저 부름을 받고 왔다. 그들의 객지 생활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주었다.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머니가 늙고 병이 있음을 듣고 감사를 시켜 쌀과 반찬과 약을 주게 하고, 그들을 불러올릴 적에 가마를 타고 오게 하였다. 장령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때에는 털옷을 주어 덮게 하였고 그가 죽자 호조 낭관에게 명하여 그 상을 보살피게 하고 날마다 내시를 보내어 상을 감독하였다. 모든 이름이 있는 선비는 찾아서 등용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정성을 다해 높임이 시종 한결같았다.”

대신을 우대한 모습이 보인다. 물론 효종만이 이렇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의 왕들은 늘 어진 신하를 우대하려고 했다. 물론 어제의 어진 신하가 오늘은 무엄한 신하로 전락해서 종종 그 사랑이 채 식기도 전에 싸늘한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지만 말이다.

효종이 어진 신하를 우대하고 그들에게 정사를 물으려고 했던 효종 스스로의 깨달음을 토로한 말이 <조야첨재>에 전한다.

“을미년(1655) 봄에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말이 미치니 임금(효종)이 말했다. ‘숭정황제가 망할 적에 조정의 신하 중에 하나도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자가 없었고 따라 죽은 자는 단지 한 내관(內官)뿐이었으니 진실로 부끄럽도다. 내가 명나라의 제도를 보건대 사람들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모시게 하고, 여러 신하가 일을 아뢸 때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아니하면 쳐 죽였고, 또 동서창(東西廠)을 설치하고 환관들을 시켜 다스리게 하여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 한 짓을 본다면 나라가 망한 것이 너무 늦었다.’ 했다.”

신하를 무시한 종국이 어떻다는 것을 효종이 잘 알고 있다는 예화다. 현종이 김수항에게 내린 비답에서 효종이 송시열을 대접하기를 ‘마치 은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대접하고, 주나라 문왕(文王)이 여상(呂尙, 이른바 강태공)을 대접하고, 한나라 소열(昭烈, 이른바 유비)이 공명(孔明, 제갈공명)을 대접하고, 당나라 태종이 위징(魏徵)을 대접한 것과 같다’ 한 연유가 될 것이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다. 백성은 의식주를 하늘로 삼는다. 바른 정치는 의식주를 해결한 후에 나온다. 맹자가 왕도정치를 말하면서 의식주를 말한 후에 교화를 논한 것이 이런 이치다. 공자가 부유하게 한 후에 가르쳐야 한다고 한 이치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유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심양으로 가는 길에 농사일을 자세히 보니 관개하는 일은 수차만한 것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전혀 알지 못하니 빨리 조정에 이것을 의논하게 하여 그것이 편리한지 아닌지를 살펴서 지방에 전파하여 농사를 권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했다. 이는 한인(漢人)의 제도이다. 그때 공주 목사 신속(申洬)이 <농서(農書)>를 편찬 인쇄하여 올리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칭찬하고 예조에 명하여 많이 인쇄하고 널리 반포하여 민폐를 덜게 하였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 벼농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조선에서 수확 증대를 위한 다양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효종의 지시대로 수차를 제대로 보급했는지 모르겠지만 효종이 농사법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직접 제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도 일종의 선진 기술 도입 측면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굳이 ‘한인의 제도’라고 밝히는 데에서 또한 당시 시대상을 읽어낼 수도 있어서 흥미롭다.

다음의 기록은 효종의 세심한 마음이 드러난다. 이 또한 인정을 베푸는 근간이 되는 마음자세다.

“형조에서 삼복(三覆)을 거쳐 확정된 죄인들을 법에 의하여 처단하려고 할 때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겨울인데 따뜻한 일기가 봄날과 같고, 장맛비가 그치지 않으며, 짙은 안개가 사방을 막았으니 내 마음이 두렵고 놀랍도다. 10여 명의 사형수를 모두 오늘 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삼복을 거쳤으나 아직도 미진할까 염려되니, 다시 여러 경들에게 묻는다.’ 하고, 다시 판결하여 특별히 2명의 사형수는 감형했다.”

조선시대는 지속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량의 증대를 달성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백성들이 매일 두 끼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한정된 재화를 아껴 쓰는 검소함은 당시의 중요한 미덕이었다. 오늘날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조선의 왕들은 내핍을 강조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두 말이 필요 없고 효종도 검소한 생활을 늘 강조했다. <공사경문>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동평위(東平尉)가 일찍이 모시고 점심을 먹는데 밥을 물에 말았으나 다 먹지 못했다. 임금(효종)이 이를 꾸짖기를, ‘먼저 다 먹을 수 있는 양을 헤아려 보고 물에 말아서 남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물에 말아 남긴 밥을 혹 새나 짐승에게 먹이면 아주 버리는 것은 아니지마는 무지한 천인들이 곡식을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전혀 모르게 된다. 땅에 음식을 버리면 하늘이 주신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다. 이는 밥을 먹는 사람의 잘못이니 복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다.’ 했다.

물에 말은 밥을 남긴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반인도 아니고 왕과 부마의 점심에서 나온 대화다. 근검의 정신을 새삼 느낀다. 당시의 경제 사정이 어떠했는지도 덤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숙휘공주(淑徽公主)가 일찍이 수놓은 치마 한 벌을 해달라고 청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검소함을 솔선하고자 하는데 어찌 너로 하여금 수놓은 치마를 입게 하겠느냐. 내가 죽은 후 너의 모친이 대비가 된 뒤에는 네가 그것을 입더라도 사람들이 심히 허물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다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다. 왕이 이 모든 조직의 정점에 위치한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왕이라는 꼭지점을 향해 피라미드처럼 위계를 이룬다. 마치 여왕벌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꿀벌사회다.

정점에 있는 왕의 리더십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말한 철인이 왕이 되는 정치가 필요하다. 리더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리더의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리더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생사가 달렸다는 말이다.

정치는 시세를 읽는 눈이 필요하다. 법가에서 말하는 세(勢)에 해당한다. 효종이 시세를 읽어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임진년(1652) 겨울 10월 주강(晝講)에서 임금(효종)이 말했다. ‘옛사람의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가지 길이 아니다.’ 이 말은 참으로 이치가 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을 볼 것 같으면 숭정황제(崇禎皇帝)가 밖으로는 사냥하고 놀러 다니는 오락이 없없다. 안으로는 정원이나 화초나 동물 등의 즐김도 없었다. 나라를 망하게 할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은 ‘명찰(明察)’ 두 글자의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다른 나라의 흥망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 오늘날에 와서 나라 일이 이와 같아서 끝내는 어찌 될지 알지 못하겠으니 내 마음이 타는 것 같도다.’ 했다.”

‘명찰’ 두 글자가 시세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효종이 갑작스레 승하하기 몇 해 전에 군비와 관련하여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가 <공사견문>에 있다.

“병신년(1656)에 임금이 장렬(莊烈) 조대비(趙大妃)를 위하여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도제조 정태화(鄭太和)와 제조 원두표(元斗杓), 정유성(鄭維城), 허적(許積) 등이 전(殿)의 터를 살펴보러 들어가면서 후원을 경유했다. 임금이 지나는 길의 별당에서 기다렸는데 공들이 사관과 같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서서 재촉하여 들어가 뵈었다. 임금이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며 국가 대사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수명이 촉박한 것을 알고 슬픈 말씀이 많은지라 공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 군비(軍備)에 유의하여 조치하는 일이 많으나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제작하는 것은 나라에 나이 든 임금이 있을 때에 할 일이고 나이 어린 임금을 받든 이들은 할 일이 못된다.’ 했다. 갑인년 이후로 신하들 가운데 병사(兵事)로 화를 당한 이가 대단히 많았으니, 임금의 말씀이 과연 맞았다.”

본 기록에는 여러 복선이 깔려 있는 것으로 사료되지만, 효종이 대신들과 나눈 대화는 날조가 아닐 것이다. 효종의 이 말은 또한 효종이 시세를 살핀 결과다.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국시로 내세우며 10년 재위 기간 하루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효종이지만 이 대목은 시세의 엄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효종의 심정이 손에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