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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주(任聖周, 1711-17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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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주는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녹문(鹿門)이다. 충북 청풍(淸風)에서 태어나고 만년에는 공주의 녹문에서 살았다. 조부 임의백(任義伯)은 송시열과 동문이다. 부친은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지낸 임적(任適)이며 모친은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아우인 임정주(任靖周), 임경주(任敬周)와 함께 낙론의 대표자인 이재(李縡)에게 배웠다. 누이 윤지당(允摯堂) 임씨도 여류학자로 유명하다.

3세(1712) 사랑채 벽에다 “임사동임사동(任獅同: 사동은 임성주의 아명이다) 뱃속에 글자 오백 자가 들어있다.[任獅同腹中書五百字入]” 썼다.

16세(1726) 이율곡의 글을 읽고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어 〈자서(自序)〉를 썼다. “열여섯 살 때 율곡의 글을 보고 깨달음이 있었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치하는 묘리를 알았으며 큰 뜻을 세웠다.”

17세(1727) 이재의 문하에 나가 수학했다. 임성주가 이재와 20세부터 24세까지 약 5년 동안 함께 질문하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 <한천어록(寒泉語錄)>이다. 학문의 자세와 사서삼경에 대한 부분적 토론과 <심경(心經)>의 칠정(七情)에 관한 견해 등이 실려 있다.

18세(1728) 봄에 부친상을 당하고 19세에 백씨와 함께 모친을 모시고 청주(淸州) 옥화대(玉華臺)로 들어가 학업에 힘썼다.

22세(1733) 모친의 뜻에 따라 형 임명주(任命周)와 함께 사마시에 응시하여, 〈대귀신문(對鬼神問)〉으로 입격하였다. 당시 고관(考官) 조명리(趙明履)가 “큰 선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칭찬했다.

25세(1736) 겨울에 회덕(懷德)의 옥류각(玉溜閣)에서 송문흠(宋文欽) 등과 <대학>을 강했다. 이때의 논의를 〈玉溜講錄〉으로 남겼다.

26세(1737) 겨울에 모친을 모시고 여강(驪江)으로 거처를 옮기고, 여주에 살던 민우수(閔遇洙), 김원행(金元行) 등과 강학하며 도의를 연마했다.

32세(1743) 여강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39세(1750) 처음으로 세자익위사세마를 제수 받고, 41세에는 익위사 시직(侍直)에 올랐고 이듬해 종부시로 자리를 옮겨 종 6품의 주부를 맡았다.

44세(1754) 임실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46세 동생, 47세 형을 잇달아 여의자 사직하고, 48세에 공주 근방의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 이 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다.

49세(1759) 김원행에게 편지하여 이제까지 주장해 오던 낙론의 인물성변이 잘못되었음을 설파하고, 〈녹려잡지(鹿廬雜識)〉를 지어 자신의 바뀐 생각을 기술했다.

58세(1768)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행하여 임성주 외대(外臺: 도사(都事)의 별칭으로, 도사는 외관직(外官職)으로서 경관직(京官職) 대관(臺官)인 사헌부(司憲府)의 직임을 수행한다는 뜻으로 이 말이 생겼다.)로 추천하였다.

63세(1773) 전주 판관이 되었으나 정사에 서툴다는 이유로 체임(遞任)되어 영천 군수로 옮기고, 이듬해 사도시 첨정과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64세(1774) 성천 부사가 되었을 때 문장은 잘하지만 사무에 서툴고 병치레만 한다는 무소(誣疏)로 체직되었다.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임성주(任聖周)는 경학은 참으로 잘하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본래부터 잘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지난번 전주로 제수되어서도 대신이 체직을 청하기에 이른 적이 있으니, 그가 사무에 서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지에 간 뒤부터는 관아를 닫아걸고 병치레만하여 고을의 일이 쌓였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일 후에 대사간 이석재(李碩載)가 아뢰기를, “며칠 전 장령 경재관(慶再觀)이 임성주를 논하면서 경학은 잘한다고 하면서 수령의 직책은 맡길 수 없다고 하니, 그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또 성천은 본래 사무가 많은 고을이 아닌데도 부임한 지 10여 일도 지나지 아니하여 공무를 폐지하는 폐단이 있다는 따위의 말은 모두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나온 것이니, 경재관을 파직하시기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2세(1782) 봄에 온 집안이 여동생 임윤지당(任允摯堂)이 있는 원주(原州)의 산호(山湖)로 이사했다.

78세(1788) 녹문동에서 졸했다.

사후 1845년(헌종 11년) 좌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주청에 따라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大司憲兼成均館祭酒)를 추증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녹문집>은 동생 임정주(任靖周)가 주도하여 녹문 사후 6년인 1794년(정조 18년에 간행하였다. 위의 저작들 가운데 <서연강의(書筵講義)>는 녹문이 경연관의 임무를 수행할 때 강연한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한 책이고, <녹려잡지(鹿廬雜識)>는 녹문이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서 상이론(相異論)으로 관점을 바꾼 뒤 저술한 책이다. 여기에는 성리학의 중심 이기심성론이 들어있다.

<소학>의 본주(本註)는 하씨(何氏)의 집성(集成)으로 나타나 있는데도 읽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여 주자가 쓴 것임을 모르고 있었는데, 임성주가 송문흠과 더불어 고증하고 점검하여 그것을 새롭게 정리하여 세상에 유포시켰다. 주자의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소학>의 본주를 여씨본(呂氏本)에 따라, 고경(古經)의 12편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런데 <영락대전(永樂大全)>에는 왕필본(王弼本)과 합쳐서 전의(傳義)를 하나로 묶어 놓았다. 임성주는 후학들이 주자의 참뜻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주자의 여러 학설을 고증하여 다시 이를 바로잡았다.
<주서차의(朱書箚疑)>는 송시열의 저작이나 그 초고가 아직 손질되지 않았는데, 권상하 등이 미처 수정하여 완성하지 못한 것을 녹문이 손수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본차(本箚)를 베껴 미비한 내용을 보충하고 미진한 것을 바로잡아 10여 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제목을 <차의보(箚疑補)>라고 했다.

참고자료

<녹문집(鹿門集)>
<임성주의 생의 철학>(한길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해제 고전번역서: 녹문집>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최석정(崔錫鼎, 1646-1715)- 2

최석정(崔錫鼎)-2                                                  PDF Download

최석정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석만(錫萬)이며 자는 여시(汝時), 여화(汝和)이고 호는 존와(存窩), 명곡(明谷)이다. 병자호란 때 주화론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 최후량(崔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1654)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다.

12세(1657)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 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1662)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21세(1666)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26세(167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30세(1675, 숙종 1년) 의정부에서 홍문록(弘文錄)을 선발한 17인 중에 최석정이 뽑혔다.

31세(1676) 응지소에서 윤휴를 비난하고 송시열, 김수항을 옹호하는 소를 올렸다. 양사와 옥당이 일제히 최석정을 멀리 귀양을 보내야 한다고 하자, 숙종이 허락하지 않다가 열여섯 차례나 아뢰어서 관직을 박탈하고 ‘문외 출송(門外出送, 문밖, 즉 한양바깥으로 쫓아 내보내라)’하라는 명을 내렸다.

34세(1680)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 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39세(1685)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明齋疑書)>가 이이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최석정이 대제학으로서 윤증을 신구하는 소를 올렸다. “김성대(金盛大) 등이 윤증의 서찰 한 구절의 말을 따가지고 선현을 무욕하였다고 일러서 죄를 성토하는 글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윤증은 문간공 성혼의 외손자이고, 문성공 이이는 실로 성혼과는 덕을 이웃하여서 외롭지 아니합니다. 윤증이 두 분의 선현을 높여 사모한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이제 이이를 모욕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편지는 선현을 끌어다가 그의 아비의 일을 인증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일분인들 날조한 것에 근사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했다.

41세(1687) 부제학으로서 나양좌(羅良佐)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로(大老: 송시열)의 상소의 말이 절박하게 윤선거(尹宣擧)를 몰아세웠으니, 문생들의 마음에 몹시 박절하게 여겨 한 번 변명해 보려고 함은 천리와 인정에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말을 해가는 사이에 실로 화평한 면은 없고 거의 과격한 말이 많았으니 진실로 잘못한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서서히 따져보지 않고 무거운 율을 내리어 위엄과 노여움의 진동이 겹치게 되면 몰골이 수참하게 됩니다. 오도일(吳道一)에게 있어서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주달하는 일을 한 것인데 죄를 주었으니, 이 이후로는 비록 지나친 일이 있으시더라도 다시는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 듯합니다.” 했다. 앞서 송시열이 윤선거를 책망하는 상소로 인한 파장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였는데, 우의정 이단하(李端夏)가 윤선거의 문생들의 상소를 받지 말도록 하면 좋겠다는 안을 내놓자, 최석정이 “대신이 진달한 말은 비록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바치지도 않은 상소를 앞질러 받지 말라는 영을 내림은 과연 일의 대체에 합당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42세(1688) 상소하여 진계(陳戒)하고 짤막한 잠언(箴言) 6편을 올렸다. “군주의 마음은 온갖 변화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먼저 단정한 것으로 근본을 삼고, 다스리는 도는 공평한 것보다 큰 것이 없기 때문에 극을 세우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군주의 덕은 마음을 비워 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간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다음이 되고, 진덕수업(進德修業)은 반드시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의뢰하기 때문에 학문에 항상 종사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안일한 것은 군주의 큰 경계가 되기 때문에 정사에 부지런히 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고, 백성은 나라를 보유하는 근본이 되므로 나라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매였기 때문에 백성을 무휼하는 것으로 끝을 삼는 것입니다. 했다. 숙종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호피를 하사했다.

42세(1688) 5월에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완성했다. 현종(顯宗) 때에 이민철(李敏哲)로 하여금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게 하였으나 중간에 폐지하여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최석정이 수리할 것을 건의해서 숙종이 이민철에게 명하여 다시 수리하게 하고 최석정으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완성된 선기옥형을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있는 제정각(齊政閣)에 두었다.

50세(1696) 이조판서로 관제를 논하는 차자를 올렸다. 그중 인재를 구하는 것으로 서얼의 폐해를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데에는, 오로지 문벌을 숭상하여 서울 사람을 앞세우고 시골 사람을 뒤로 미루니, 이미 어진 사람을 세우는 데에는 일정한 방도가 없다는 의리에 어그러지며, 서류(庶流)를 막는 데 이르러서는 진실로 옛 제도가 아닙니다. ……이를테면 송익필(宋翼弼)의 학술로도 포의로 마치고, 신희계(申喜季)의 문장과 우경석(禹敬錫), 유시번(柳時蕃)의 재지가 모두 그 뛰어난 재능을 펴지 못하였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했다.

52세(1698) 숙종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을 적에 최석정이 우의정으로 중국에서 보낸 쌀[호미胡米]로 서울의 위급함을 먼저 구제할 것을 청하자, 예조판서 신완(申琓)이 “금번에 곡식을 청한 것은 오로지 관서 지방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만약 서울 백성들을 먼저 구제한다면 관서 지방의 백성들이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자, 숙종이 “이는 까닭 없이 공연히 빼앗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마땅히 대체하여 지급할 것이다.” 하고, 본도(本道)에 다시 물어본 뒤에 그 수량(數量)을 의논하여 확정하자는 최석정의 말을 옳게 여겼다.

59세(1705) 왜인이 공작미(公作米): 공무(公貿)하는 면포의 대가로 대마도에다 바꾸어 지급하던 쌀)를 허락받는 일 때문에 떠나지 않으므로 동래 부사가 계문했는데, 최석정은 말하길, “왜인에게 공급하는 면포를 쌀로 대신 주는 것은 왜인의 간청에서 나온 것이고 당초에 약조한 것이 아니니 구습대로 번번이 주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교린(交隣)하는 도리는 처치를 마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마도의 살길은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미곡에 의지하므로 전에 와서 청하였을 때에 사리에 의거하여 엄준하게 막을 줄 몰랐던 것은 아니나 허락했습니다. 그 뒤 다시 청하였을 때에도 막지 않았던 것은 실로 후의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굳게 지키고 허락하지 않는다면 왜인이 절망하여 유감을 품는 것은 형세상 반드시 그럴 것입니다. 특별히 헤아려 허락하되 수년이 넘지 않게 연한을 작정하고 그 뒤에는 다시 청하지 말도록 엄하게 약속하여 한편으로는 먼 곳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장래의 폐단을 막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했다.

60세(1706) 영의정으로 조부(祖父) 최명길(崔鳴吉)의 일을 신원했다. “신의 조부가 화친을 주장한 의논은 스스로 본말이 있어, 정묘년의 일은 뜻이 싸움을 그치게 하는 데 있고, 병자년 봄의 일은 근심이 흔단(釁端)을 도발하는 데 있었으니, 남한산성의 일에 이르러서 어찌 그만두어도 될 일을 하였겠습니까? 그 때의 청론(淸論)이 혹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로만 주장을 하였으나 신의 조부는 ‘명나라에 진실로 망극한 은혜가 있으나 이미 사직과 백성이 있는데 어떻게 필부의 양지(諒知)만을 변통성 없이 굳게 지키겠는가?’ 하고 명나라가 거의 망하게 된 것을 민망히 여겨 일신의 이해를 돌아보는 데 겨를이 없었으며 황폐한 땅에 조정을 세우고 잿더미에서 국력을 수습하여 안으로는 여러 가지 일을 종합하고 밖으로는 대의를 신장시키며 굴절주선하는 데 마음이 피로하고 힘이 다하였으니 인인군자(仁人君子)는 마땅히 측연(惻然)한 마음으로 그 뜻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번 징병(徵兵)을 거절하고 자문(咨文)을 갖추어 중[僧]을 보내다가 북옥(北獄)에 잡혀 들어간 일 등을 나열했다.

62세(1708) 영의정으로 시무4조의 책자를 올렸다. “첫째 인족(隣族: 인징(隣徵)과 족징(族徵)으로 지방의 백성이 공금(公金)과 관곡(官穀)을 갚지 못하거나 군정(軍丁)이 도망 사망하여 군포세(軍布稅)를 내지 못할 때 이를 억지로 그 인인(隣人)에게나 일족(一族)에게 대신 징수하는 일이다.)을 혁파하여 민원(民怨)을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 전폐(錢弊)를 교정(矯正)하여 민곤(民困)을 풀어주는 것이고, 셋째 교포(校布: 향교(鄕校)의 교생(校生)이 내는 군포(軍布)다.) 를 거두어 들여서 한민(閑民)을 처치(處置)하는 것이고, 넷째 보미(保米: 군보(軍保)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쌀이다.)를 제정하여서 속오군(束伍軍)을 너그럽게 하는 것이었다.”

1715년 기사(耆社: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숙종실록> 41년 11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최석정은 성품이 바르지 못하고 공교하며 경솔하고 천박하였으나, 젊어서부터 문명이 있어 여러 서책을 널리 섭렵했는데, 스스로 경술에 가장 깊다고 하면서 주자가 편집한 <경서(經書)>를 취하여 변란(變亂)시켜 삭제하였으니, 이로써 더욱 사론에 죄를 짓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번 태사(台司) 에 올랐으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전도되고 망령된 일이 많았다. 남구만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그의 언론을 조술하여 명분과 의리를 함부로 전도시켰다. 경인년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않았다 하여 엄지(嚴旨)를 받았는데, 임금의 권애(眷愛)가 갑자기 쇠미해져서 그 뒤부터는 교외(郊外)에 물러가 살다가 졸하니, 나이는 70세이다. 뒤에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사관의 평이 박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明谷集)> 36권이 전한다.

참고자료

<국역조선왕조실록>
<명곡집(明谷集)>

최징후(崔徵厚, 미상-1715)

최징후(崔徵厚)                                                       PDF Download

최징후는 자가 성중(成仲)이고 호는 매봉(梅峯)으로 권상하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전거마다 명단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현상벽, 성만징, 한홍조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1705년 한원진과 함께 오서산(烏棲山) 정암사(淨巖寺)에서 독서하고 강학했다.

1709년 3월, 호락논쟁의 발단에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한원진이 1705년에 <동지에게 알리는 글示同志說>을 썼고, 이후 <율곡 선생 별집에 의견을 덧붙임栗谷別集付籖>,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논설本然之性氣質之性說>, 〈인심도심에 대한 논설人心道心說>, 퇴계 선생 문집의 의문점에 대한 해설退溪集箚疑>을 잇달아 내놓는다. 이를 통해 최징후와 한원진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졌다.

1707년 권상하의 제자가 된 이간은 한원진의 견해를 접하고 자신과 절친했던 최징후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덕소(한원진)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친구들에게 듣자니 대개 우리 문하에서 의지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소 그를 흠모하여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그가 논설한 것을 보니 제 생각과 잘 맞는 부분이 없지 않아 아주 다행입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설에 대한 제 견해는 주제넘지나 않았는지 생각되니, 직접 찾아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이 이 뜻을 전하여 주선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709년 4월에 이간, 한원진, 한홍조, 윤혼, 현상벽 등과 함께 홍주(洪州) 한산사(寒山寺)에서 회강했다. 앞서 이간이 보낸 편지를 받아본 한원진이 회신하길, “공거(이간) 형의 편지를 보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학식이 얕아 아는 바가 없는데도 여러 학형들께서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매양 의리로 판별하여 혼매한 저를 깨우쳐 주시고 또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니 정말로 큰 우정입니다. 지금 공거 형의 편지가 저의 잘못을 정밀하게 증명하셨는데 그분과 더불어 마땅한 결론에 이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한산사 회합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1711년 한원진과 함께 홍주(洪州) 벽제산(碧蹄山)에서 회강했다.

1715년 최징후가 졸했다. 한원진이 최성중이 지은 <가례의소>에 해설을 달아 〈崔成仲家禮疏義付籖〉을 지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에게 보낸 편지에 “성중(최징후)은 사우들의 기대가 매우 중하였는데 뜻밖에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모두 우리들 운기(運氣)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슬프기 그지없네.” 했다.

참고자료

<남당집(南塘集)>
<한수재집(寒水齋집)>
<관봉유고(冠峯遺稿)>

이이근(李頤根, 1668-1730)

이이근(李頤根)                                                         PDF Download

이이근은 본관은 전주이며, 자가 가구(可久)이고 호는 화암(華巖)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고, 이성진(李聖眞)의 아들이다. 권상하의 문인이다.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39세(1706, 숙종 32년) 학문이 뛰어나다는 명목으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천거를 받았다. 당시 비국(備局)에서 학술(學術)이 정심(精深)하고 행의(行誼)가 순고(純固)하며 재식(才識)이 통련(通練)한 세 조항으로 명목(名目)을 삼아서 대신(大臣), 육경(六卿), 삼사장관(三司長官)으로 하여금 각각 두 사람을 천거하고, 방백(方伯)도 또한 도내(道內)의 사람을 천거할 것을 청하였다. 최석정(崔錫鼎)이 학술(學術)로 윤동수(尹東洙)를 천거하고, 재식(才識)으로 남학명(南鶴鳴)을 천거하였으며, 또 차자(箚子)로써 학술로는 윤명좌(尹明佐), 한영기(韓永箕), 박필창(朴弼昌), 이이근(李頤根), 이만부(李萬敷)를 천거했다.

50세(1717) 숙종이 “지난번에 승지의 말을 듣건대, 호중(湖中)에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많이 있다 하므로 드러난 사람을 찬선(贊善)에게 물으려 하였으나 행궁(行宮)에서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갑자기 잊어서 아직도 묻지 못하였으니, 따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찬선에게 묻도록 하라.” 했다. 권상하가 이이근이 도신(道臣)의 천거에서 빠졌다고 대답하였는데, 임금이 이이근에게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했다.

54세(1721, 경종 1년)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8세(1725, 영조 1년) 세자시강원자의를 제수했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길, “이간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도목정(都目政: 관원의 치적을 종합 심사하여 그 결과에 따라 영전·좌천 또는 파면을 시키는 일이다. 해마다 음력 6월과 12월에 실시했으며 앞의 것을 권무정(權務政), 뒤의 것을 대정(大政)이라 한다.)을 행하여 박필주(朴弼周), 이간, 윤봉구, 한원진, 채지홍, 이이근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초계(抄啓)했다.

왕자 사부(王子師傅) 이이근(李頤根)을 징소(徵召)하였으나, 이이근이 상소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60세(1727) 이이근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불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인신(人臣)의 진퇴는 양재(量材), 양분(量分), 양의(量義)하는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의 미숙한 학문이 얕음은 본시 재주가 없어서이고, 보통 백성으로서 어리석음은 신분이 본래 미천해서이며, 스승에 대한 모함을 아직도 통쾌하게 씻지 못했으니 의리에 있어 조정에 나아가 항안(抗顔)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옛적에 법진(法眞)이 소지(素志)를 지키기 원했음은 자신의 재주를 헤아려 본 것이요, 정경(程瓊)이 당시의 세상에 바라는 바가 없었음은 자신의 분수를 헤아려 본 것이고, 연원(淵源)이 같은 사람을 물리치다가 오히려 당시의 임금에게 용납되어 걸신(乞身)하여 한가한 몸이 되었음은 주자가 의리를 헤아려 보고 한 일이었습니다. 옛사람들은 이 중에 한 가지만 있게 되어도 오히려 모진(冒進)하지 않았었는데, 하물며 신(臣)은 이 세 가지에 있어 어느 하나도 자신을 안정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했다.

산림으로서의 중망이 있어 누차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성만징(成晩徵, 1659-1711)2

성만징(成晩徵)-2                                                  PDF Download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달경(達卿)이고 호는 추담(秋潭), 환성당(喚醒堂)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문경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성호영(成虎英)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통덕랑(通德郎) 이동야(李東野)의 딸이다. 권상하의 문인이다.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로 불린다.

8세(1666)에 시재를 보였다. 계단에 백일화가 핀 것을 보고 “백일화라 백일 동안 붉나니, 십일 동안 붉은 꽃이 없다더니 여기 백일 동안 붉게 피었네. [百日花, 百日紅。花無十日紅, 今有百日紅。]

16세(1672) 큰형에게 <대학>을 배울 적에 거경공부를 배우고 몸소 실천하여 수개월 후에 깨달은 바가 있어 시로 지었다.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이것이 무엇인고 물으면 만 가지 달라도 이원으로 통한다네.[無上亦無下, 無始亦無終。若人問此物, 萬殊一源通。] 큰형이 체용일원의 묘리를 대체로 알았다고 칭찬했다.

24세(1680) 화양동의 송시열을 찾아뵙고 큰 감화를 받아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병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35세(1691) 황강으로 권상하를 찾아뵙고 사제의 연을 맺다.

40세(1696)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합향하는 것으로 이제억(李濟億), 정시한(丁時翰) 등이 반대의 소를 올렸는데, 성만징이 주장하여 변무의 소를 올렸다. 그 안이 대체로 성만징의 손에서 나왔다.

45세(1703)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과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시 숙종이 왕자(王子)가 스승에게 글을 배울 때가 되었다고 하여 사부(師傅)를 아주 잘 고르라고 명한 뒤 성만징(成晩徵)을 왕자 사부(王子師傅)로 삼았다. 사관이 성만징은 영남의 명망 있는 선비라고 기록했다.

1704년 만동묘(萬東廟)의 향사(享祀)를 둘러싼 논쟁 때 「만동사시비변(萬東祠是非辨)」을 지어 송시열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성만징은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친명배청사상(親明排淸思想)이 남달리 강하였다.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성은 곧 이이다(性卽理).”라는 설과 “이기가 혼융(混融)하다.”는 설을 지지하여, 낙론(洛論)에 접근한 경향을 보였다.

예설(禮說)에 밝아 권상하, 이세필(李世弼) 등과는 상당히 깊이 있는 이론적 문답을 주고받았다. 또한 <학성도(學聖圖)>를 만들어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문경의 한천사(寒泉祠)에 봉향되었다. 시문집인 <추담문집>이 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추담문집(秋潭文集)>

윤혼(尹焜, 1676-1725)

윤혼(尹焜 )                                                                 PDF Download

윤혼은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회이(晦爾), 호는 천서(泉西)이다. 관찰사 윤희길(尹希吉)의 5대손이며, 윤헌징(尹獻徵)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침(尹琛)이고, 아버지는 윤동명(尹東鳴)이다. 어머니는 한성(韓宬)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에 이미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다.

32세(1707)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 <대학>의 의의(疑義)를 논하니 권상하로부터 학문이 높음을 인정받았다. 신경(申敬), 한원진, 현상벽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강문팔학사의 한 명이다. 전거마다 명단이 조금씩 다른데, 한원진, 이간, 윤봉구, 채지홍, 한홍조, 현상벽, 윤혼 등을 칭한다. 책에 따라서는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 매봉(梅峰) 최징후(崔徵厚)를 넣고, 윤봉구와 한홍조, 윤혼을 빼기도 한다.

34세(1709) 권상하를 따라 신경, 한원진, 현상벽 등과 함께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萬東廟) 건립에 참여하였다.

39세(1714) 사마시에 합격했다.

44세(1719) 학행(學行, 학문과 행실)으로 천거를 받아 명릉참봉(明陵參奉)이 되었다. 이 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정언·지평에 이르렀다.

50세(1725, 영조 1년) 스승 권상하를 배척한 신치운(申致雲)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신의 스승인 선정신 권상하가 을미년에 올린 상소는 사도를 천명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친 그런 내용이었는데, 저 윤증(尹拯)의 무리들이 원한을 깊이 품고 막된 소리로 욕설을 한 것이 한이 없었습니다. 신치운(申致雲)이 무고한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아주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났으므로 곧 하나의 고변서였습니다만, 다행히도 성명(聖明)께서 맨 처음에 누명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의 스승을 추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신치운을 극진히 용호(容護)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한 아룀을 여러 달이 되도록 윤허하지 않고 계시니 전하께서 신의 스승을 추숭하여 주신 보답이 끝내 성실하지 않은 것이 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좌의정 민진원이(閔鎭遠)이 삼사의 합계로 공박을 받은 사헌부 지평 윤혼을 두둔하는 글을 올렸다. “근래 윤혼(尹焜)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군부(君父)를 경시한다는 분부가 계셨는데, 이는 이미 실언(失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윤혼은 엄중한 분부를 받으면서도 끝내 좌절하고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정직한 기개는 칭찬해야 할 만한데, 성상께서는 의심하여 승부를 다투는 것으로 여기시니, 이런 등류의 하교는 참으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이로부터 강직한 선비가 조정에 서기를 원치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깊이 헤아려 생각하시어 언로를 열게 하소서.” 하니, 영조가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현상벽(玄尙璧, 1673-1731)

현상벽(玄尙璧)                                                       PDF Download

본관은 연주(延州)이고 자는 언명(彦明)이며 호는 관봉(冠峯)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38세(1710) 스승 권상하에게 편지하여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반박했다.

39세(1711) 권상하에게 편지하여 권상하와 이간의 오상(五常) 문답에 대한 의문을 밝혔다. 〈오상변(五常辨)〉을 지어 권상하, 한원진 등에게 보냈다.

42세(1714) 봄, 윤봉구에게 편지하여 호락논쟁의 논점들을 논했다.

49세(1721) 10월, 권상하의 장례에 참석하러 충주에 다녀온 후 〈소양대질록(昭陽戴絰錄)〉을 지어 장례 과정을 정리했다.

53세(1725, 영조 1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5세(1727) 유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이 되었다. 당시 함께 채지홍은 빙고별제로 천거되었는데, 사관이 채지홍과 현상벽은 모두 권상하의 문인이라고 밝혀두었다.

이간과 함께 낙론에 속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간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면서도 세부 이론에 있어서는 자신만의 의견을 개진하고 양론의 절충과 화합을 지향하였다.

시에 뛰어났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문집에 <관봉문답(冠峯問答)>, <관봉유집(冠峯遺集)>이 있다.

<관봉유집> 2~6은 書(114)이다. 권상하, 정호, 권상유, 김간, 최징후, 윤혼, 한원진, 윤봉구, 채지홍, 등 스승과 사우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1709년 이후 본격화된 인물성동이론의 논쟁과 관련된 내용,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을 환영하는 내용, 1723년의 스승 권상하를 위한 변무소(辨誣疏) 문제, 영조 초 저자와 사우들의 관직 진출 문제, 기타 상례 문답 등을 주제로 지은 편지들이다.

특히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인물성이론을 찬동하는 권상하의 입장을 반박하고, 이간의 오상문목에 대한 권상하의 가르침을 논란하는 내용이 있다. 이간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중용> 주 ‘불편불의(不偏不倚)’의 편의(偏倚)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하고, <맹자>의 ‘생지위성(生之謂性)’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인지,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인물본연지성(人物本然之性)인지, ‘천명(天命)’의 천 자가 이기를 뜻인지 등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세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한원진에게 보낸 편지는 ‘생지위성(生之謂性)’의 해석에 관한 의문을 적은 별지 1편이 실려 있다. 한원진의 <남당집(南塘集)>」에 현상벽 편지에 대한 답장, 〈오상변〉을 읽고 보낸 답장 등이 실려 있다. 가장 절친하였던 윤봉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인물성동이론 논점들을 논한 내용이 주로 실려 있다.

권7~9는 잡저 23편으로 대부분 인물성론(人物性論)과 예학(禮學)에 대한 내용이다. 권7은 오상(五常), 심(心)과 기질(氣質), 미발설(未發說) 등 주요 논쟁거리들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글이다. 특히 〈오상변(五常辨)〉은 1711년에 지은 저자의 대표작으로 한원진 중심의 인물성이론을 반박하고 여러 문인들이 서로 논의한 결말로써 화합하기를 바란다는 취지로 지어 권상하와 한원진 등에게 보인 글이다. 이에 대한 한원진의 답장이 <남당집>에 실려 있다. 〈심여기질변(心與氣質辨)〉과 〈심여기질동이문답(心與氣質同異問答)〉 또한 한원진의 이론을 비판하며 심과 기질을 분별하여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참고문헌

<병계집(屛溪集)>
<연주현시대동보(延州玄氏大同譜)>
<한국문집총간해제: 관봉유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한홍조(韓弘祚, 1681~1712)

한홍조(韓弘祚)                                                       PDF Download

한홍조의 본관은 상당(上黨)이며 자는 영숙(永叔)이고 호는 암촌(岩村), 손재(損齋)이다. 아버지 한윤원(韓崙源)과 어머니 전의이씨(全義李氏)의 2남 1녀 중 장남이다. 고향인 예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기호학파인 권상하의 문인으로 입문하여 수학하였다. 송시열의 수제자였던 권상하는 충청도 청풍의 황강 옆 한수재(寒水齋)에서 살았다. 권상하의 문하생들을 ‘강문(江門) 제자’라고 하였고 그중에서 특히 저명한 여덟 명의 제자들을 가리켜 ‘강문팔학사’ 또는 ‘호중팔학사(湖中八學士)’라고 했다. 한홍조도 강문팔학사 중 한 사람이다.

한홍조는 관직에 나가 활동하지 않았고 예산에서 학문을 갈고 닦으며 일생을 보내다 32세(1712)로 사망하였다.

한홍조의 저서로는 권상하가 제자들과 당론에 대해 문답한 것을 기록한 <강상문답(江上問答)>을 비롯하여 <동유록(東遊錄)>, <구봉선생래파변(九峰先生來派辯)> 등이 있다. <동유록>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구봉선생래파변>은 기호학파를 연 구봉(九峰) 송익필(宋翼弼)에 관한 세간의 여론에 대한 변론을 서술한 책이다.

<강상문답(江上問答)>은 일명 황강문답(黃江問答)이라고도 한다. 강상문답과 후동문답(後洞問答)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뒤에 여러 가지의 서간이 있다. <강상문답>에서는 권상하에게 회니시말(懷尼始末 : 송시열과 윤증이 노소분당에 이른 자초지종)에 관하여 질문하여 권상하가 이에 대답한 글이 실려 있다.

이유태(李惟泰)에 관한 것, 기해예송(己亥禮訟)에 관한 것, 김익훈(金益勳)에 관한 것, 정몽주에 대한 이이(李珥)의 평과 송시열이 신도비에서 평한 내용이 다른 것에 대한 질문, 이황(李滉)과 이이의 윤임(尹任)에 대한 평이 다른 점에 대한 질문 등에 관하여 권상하가 대답한 글이 차례로 실려 있다.

<후동문답>에서는 손님이 주인에게 이사(尼事)에 관한 질문을 하고 주인이 대답한 글로, 송시열과 윤증의 노소분당에 관한 전말을 싣고 있다.

이성입설(尼城立說)과 윤증여나양좌서(尹拯與羅良佐書), 윤증여이완령서(尹拯與李完寧書), 윤증여박현석서(尹拯與朴玄石書), 윤증상우암제일서(尹拯上尤庵第一書), 우암답서(尤庵答書), 상우암제이서(上尤庵第二書), 윤증상우암서(尹拯上尤庵書), 이타우답윤증서(李打愚答尹拯書) 등의 서간과 여호집잡저(黎湖集雜著)가 있다. 이 책은 노론과 송시열을 두둔하기 위하여 엮은 것으로 공평하지 못한 내용들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채지홍(蔡之洪, 1683-1741)-2

채지홍(蔡之洪)-2                                                  PDF Download

채지홍은 본관은 인천(仁川)이고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자는 군범(君範)이고 호는 봉암(鳳巖), 삼환재(三患齋), 봉계(鳳溪), 사장와(舍藏窩) 등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채영용(蔡領用)이다.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동문인 한원진, 윤봉구, 이간, 윤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였다.

8세(1690) “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니 그 모습이 태극과 같구나[月出東山上 形如太極初]”라는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1692) 『주역(周易)』의 뜻을 이해하였고, 『서전(書傳)』의 ‘기삼백(碁三百)’까지 물었다고 한다.

16세(1698)부터 권상하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권상하의 문인인 한원진, 윤봉구, 이간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강문팔학사란 차이는 있지만 권상하 문하의 채지홍, 한원진, 윤봉구, 이간, 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 관봉(冠峰) 현상벽(玄尙璧) 매봉(梅峰) 최징후(崔徵厚),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등 학문적 명성을 얻은 여덟 제자를 가리킨다. 강문팔학사는 권상하가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서 이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36세(1718) 암행어사 황구하(黃龜河)와 관찰사 등이 학행으로 추천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39세(1721, 경종 1년)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少論)의 죄를 논척(論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화가 권상하·송시열 등에게까지 미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구운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43세(1725, 영조 1년) 노론이 다시 기용되고 권상하의 관작이 회복되면서 채지홍도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 경연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상소를 올려 송시열의 무옥(誣獄) 사건을 통렬하게 논했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마지못해 빙고별제에 취임하였다가, 수개월 후 부여현감으로 나아갔다.

45세(1727) 영조가 희정당에서 채지홍과 나눈 대화다. 영조가 “성인이 ‘어려서 학문하는 것은 장성하여 뜻를 펴고자 함이다.’라고 하였으니, 산림의 처사 역시 세상을 저버릴 수 없다. 내가 경연관을 불러서 오게 할 수 없었던 것은 실로 성의가 얕은 데 연유한 것이지만, 지금 (부모를) 봉양하기에 유리하여 부임한다고 하니 지방이 비록 좋으나 서울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장차 아버지를 서울에 모셔두고 경연을 출입하는 것이 바로 나의 소망이다.” 하니, 채지홍이 사양하면서 아뢰기를, “과거에 한원진이 경연을 출입하여 보익함이 매우 많더니 지금은 이미 내려가 버렸습니다. 지난 신임사화 때 신의 스승이 무고를 당하였는데 우리 성상께서 특별히 복관(復官)과 증시(贈諡)를 명하셨으니 누가 흠앙(존경하여 우러러 사모함)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참소하는 사람이 여태껏 집안에 있는 까닭에 한원진 같이 임금의 덕을 보필할 수 있는 사람도 역시 서울의 집이 불안하여 끝내 내려가기에 이르렀으니, 하물며 신과 같은 자가 어찌 감히 서울에 머물어 감당할 수 없는 소임을 맡겠습니까?”
채지홍이 또 말하길, “신이 선사에게 듣건대, 임금으로서 학문의 요체와 치국평천하의 길은 ‘성의정심(誠意正心)’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면 이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을 반드시 모름지기 좋은 색을 좋아 하는 것처럼 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하는 것처럼 한다면 성학은 밝고 환하게 되기를 기약하지 아니하더라도 자연히 밝고 환해질 수 있습니다.” 하니 영조가 “말한 것이 간략하면서도 곡진하니 각별히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했다.

46세(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을 써 붙여 도적들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유하였고, 의병을 모집하던 중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그 해 가을 청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58세(1740) 형조좌랑,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 등을 잠시 지내다가 사퇴하고 귀향했다. 59세(1741) 세상을 떠났다. <영조실록> 17년 기사에 채지홍의 졸기가 있다. “전 경연관 채지홍이 졸하였다. 채지홍은 선정신 권상하를 사사하였는데, 추천에 의해서 왕자사부와 시강원 자의에 임명되었으나 다 나아가지 않았다. 금상이 즉위하자 경연관에 선발되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와서 벼슬하지 않았다. 부여 현감에 제수됨에 어버이가 늙은 관계로 관직에 부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경서를 궁구하고 책을 저술하며 후생을 훈회가르치니 원근의 학자들이 종유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59세였다.”

사후 1825년(순조 25년) 지역 유림들이 문백면 봉죽리 봉암마을에 사우인 봉암 향현사(鳳巌鄕賢祠)를 세워 제향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저서로는 『봉암집(鳳巖集)』·『성리관규(性理管窺)』·『세심요결(洗心要訣)』·『독서전보(讀書塡補)』·『천문집(天文集)』 등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여 당대 성리학 대가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고, 친소귀천(親疎貴賤)의 구별이 없이 가르쳐 따르는 제자가 매우 많았다. 당대 성리학의 일대 논쟁이었던 인물성동이론과 관련해서는 스승인 권상하와 한원진의 의견을 좇아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즉 호론(湖論)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채지홍은 성(性)은 이와 기의 합성이라는 원칙 아래 천명(天命)의 성 역시 기를 떠날 수 없다고 보는 한편, 인간과 물은 타고난 기에 따라 각각 이를 받아 성을 형성하게 되므로 인간만이 오행의 기 중에서 정통(正統)한 것을 얻었으므로 인성과 물성은 다른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또한 리는 기 중에 있게 되므로 기를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음양오행의 정기(精氣)인 기의 정통과 편색의 차이로 인성과 물성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다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현상 중에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기질 중에 타재(墮在)한 것이므로 기질지성을 극복함으로써 본연지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