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바라는 통치자


율곡이 바라는 통치자

 

소라이: 그러신가요? 선생님은 나라 안 정치의 모든 문제가 임금의 실천의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시지요? 백성들을 어떻게 통제하느냐는 문제보다.

율곡: 그렇습니다. 도덕적인 마음의 자세도 중요하고요. 제가 임금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한 것은 선생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옛날 고대 성왕(聖王)들은 마음 쓰는 것이나 행동이 아주 투명하여 만물이 모두 볼 수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임금의 뜻을 분명히 보고,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여도 원망하지 않았고, 이롭게 해주어도 은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는 가까운 신하들까지도 임금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어떻겠습니까? 한 나라의 최고 어른인 임금이 말씀과 행동을 너무 가볍게 하면, 아래 있는 신하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소라이: 그렇기는 하지요. 그래도 최고 통치자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지 않는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율곡: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그런 글을 써 올리기 며칠 전, 우리 임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신하들이 큰 제안을 다투어 말하고 이전에 없었던 일을 하기 좋아하니, 앞으로 우리나라 풍속이 당연히 순박해지고 정치가 참 잘 되겠구나.”

그런데 이러한 임금의 말씀이 나오자 밑에 있는 많은 신하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혹을 가지고 임금의 눈치를 보는 일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옛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착한 일은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

옛날, 중국의 사상가 소옹(邵雍)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덕을 높이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을 높인다.” 정치가 잘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덕이 중시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말이 중시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하지 않고 말로만 앞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나라는 어지럽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우리 임금께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에 큰 소리만 다투어 말한다고, 어찌 풍속이 순박해지고 정치가 제대로 된 일이 있었습니까? 또한 전하께서는 큰 제안을 옳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그르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그 큰 제안이란 것도 실은 임금을 인도하여 올바른 도리를 행하게 하고 좋은 정치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마땅히 그 의견을 지체 없이 채택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요. 혹시라도 임금이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큰 제안을 다투어 말한다.”하시면서 사실은 신하들의 그런 제안을 비꼬거나 풍자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의 간격이 더 커집니다. 신하들이 제안을 올렸더라도 그것을 임금이 쓰지 않으면 그 제안이 비록 아무리 좋아도 무익합니다. 좋은 제안을 채택하여 쓰지 않으며 그런 제안들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면한 현안들이 제대로 바로 잡히지 않습니다.

소라이: 임금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임금이 좋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소라이: 말씀을 들으니 일리가 있습니다만, 임금에 대한 기대가 저보다는 많으시군요. 저는 그렇게까지 군주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들은 그렇게, 그런 신분으로 태어났고, 우리는 이렇게 신하의 신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이 다르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사람이라는 점에서 최고 통치자와 우리는 같습니다. 신분만 다르지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처럼 도덕적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마음이 순수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의 시정잡배보다 그들은 더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이시군요. 그래서 선생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 즉 도덕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군주에게 다음과 같은 것도 요구하셨지요. ⌈만언봉사⌋에서 말씀하신, ‘임금에게 자기 몸을 닦는 요령’입니다.

“자기 몸을 닦는 요령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께서 삼대(三代)의 흥성했던 시대 상황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기약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성학(聖學), 즉 유학공부에 힘써서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도록 노력하는데 힘쓰는 일입니다.

셋째는 한쪽으로 치우친 사심(私心)을 버리고 지극히 공평한 도량을 넓히는 일입니다.

넷째는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하여 충성스런 조언이 가져올 이익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율곡 : 그렇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침체에 빠지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지요. 그리고 대개는 임금의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고, 그래서 임금을 향한 요구인 것이지요. 제가 우리 임금에게 그런 것을 요구한 것은, 첫째로 저는 우리 임금의 자질이 매우 훌륭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자하심은 백성을 보호하기에 충분하고, 총명하심은 간사한 자를 분별하기에 충분하며, 용맹은 결단을 내리시기에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임금은 성왕(聖王)이 되겠다는 의지가 없고, 좋은 다스림을 추구하는 정성이 독실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의 성왕과 같은 임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 스스로 과소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떨치고 일어나 분발하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임금이 자기 몸을 닦는 일에 노력을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진실로 마음을 쏟는다면, 현인을 찾아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고 그들과 함께 폐단을 개혁하여 어려운 시국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소라이: 혹시 그러시면 임금이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면, 사치 풍조를 개혁할 수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율곡: 그 점은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조선의 백성들은 지금 궁핍해 있습니다. 그들의 재물이 바닥난 것이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걷어가는 공물(貢物)을 경감해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그리고 궁궐에 있는 임금이 비용지출을 줄인다면, 적은 수입으로도 충분히 지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라이: 그렇기는 하지요. 저는 우리 쇼군에게 감히 그런 말을 못했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율곡: 제가 조정에 있을 때 궁중의 사치가 매우 심했습니다. 사치하고 문란한 풍속이 당시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음식은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놓고 서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었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서로 경쟁하기 위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궁중의 일입니다.

소라이: 일본에서 쇼군은 그 정도까지 사치스럽지는 못했습니다. 물가가 너무 비쌌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가 천하의 물건은 원래 쇼군 것이다. 쇼군이 물건을 사서 먹을 것이 아니라 징발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하면 그런 주장을 하였겠습니까? 그 정도로 일본 에도시대의 물가는 쇼군의 밥상을 걱정할 정도로 심했습니다.

율곡: 저는 임금에게 이렇게 직언했습니다. 궁정에서 음식 한 상 차리는 비용으로 굶주린 사람의 몇 개월 양식을 마련할 수 있고, 옷 한 벌의 비용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사람 열 명의 옷을 장만할 수 있습니다. 열 사람이 농사를 지어도 한 사람을 따로 먹여 살리기가 부족한데, 농사짓는 사람은 적고 먹는 사람은 많습니다. 열 사람이 길쌈을 해도 한 사람의 옷을 따로 마련하기가 부족한데, 길쌈하는 사람은 적고 옷을 입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우리 백성이 굶주리고 헐벗어 추위에 떨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사치의 피해는 천재지변보다도 심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만약 궁중에 있는 임금부터 먼저 절약과 검소에 힘써 이 병폐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리 형법이 엄하고 명령을 부지런히 내린다 하더라도 밑에 신하들과 백성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선대 임금들이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서 한 노력을 살펴보고, 훌륭한 선대 임금들의 비용지출 규모와 사례를 검토하도록 명령을 내려, 궁중의 비용지출을 줄이면 나라 안의 백성들이 모두 그런 정신을 본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정 안팎에 모범을 보여 민간의 사치 풍습을 고쳐서, 사람들이 성대한 음식상을 차리거나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늘이 내려 준 재물을 아끼고 백성들이 힘을 펴게 될 것입니다.

소라이: 선생님의 그런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을 군주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율곡: 예, 오늘 감사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으며 다시 만나 좋은 이야기를 나누지요.

소라이: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소라이가 구상하는 사회


소라이가 구상하는 사회

 

소라이: 저는 에도 시가지를 평화로운 시가지로 만들기 위해서 방법을 조금 달리 했습니다. 들어보시지요. 에도에는 원래 거리의 안전을 담당하는 책임 공무원도 있습니다. 그런데 에도 시가지 전체를, 그렇게 넓은 지역 전체에 걸쳐있는 도로를 겨우 한 두 사람의 담당자가 두루두루 통제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도둑을 담당하는 공무원도 있지요. 즉 방화나 도둑을 조사하는 공무원이 에도 시가지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에도 거리를 한 두 조직의 공무원으로 구석구석 통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율곡: 그렇지요. 에도와 같이 큰 도시는 향촌의 시골마을과는 다르지요.

소라이: 옛날에 도둑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있었습니다. 나카야마 카게유(中山勘解由, 1633∼1687)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엄격한 사나이였습니다. 그는 도둑을 체포하면 곧바로 사형시켜버렸지요. 그래서 도둑들이 무서워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에도에 막부를 설치한 초기의 지배 방법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무력과 권위를 보여줌으로써 나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조심하도록 한 조치였지요.

율곡: 법가주의이군요. 무사의 나라답습니다. 비웃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그렇습니다. 교육이 아니라 엄격한 법에 의해서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모든 도둑을 전부 소탕해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시의 엄격한 유풍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그런 제도가 남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때와 비교해보면 막부의 정치 방침도 변했습니다. 요즘 담당자들도 나카야마 카게유와 같은 사람은 아주 드물게 되었습니다. 또 시대가 평화롭게 되면서 무슨 일이든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이 숫자가 적은 인원으로는 에도 전체에 손길이 다 미치지 못합니다.

율곡: 그렇지요. 많은 관료와 담당자들이 필요하겠지요.

소라이: 일본이나 중국 고대의 법제를 생각해보면 도둑이나 범죄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궁성 수비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에서 현재 경찰업무를 담당하는 요리키(與力)나 도신(同心)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수비대에서 형벌을 집행하는 일은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선례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어떤 공무원이 형벌을 집행하는 권한을 쥐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서라도 죄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 서민의 당연한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비대는 체포하는 일만을 임무로 하고, 체포한 자는 형벌을 관장하는 다른 공무원에게 넘겨주어 그 공무원이 죄를 조사하여 살리든지 죽이든지 조치를 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도둑 담당 공무원이 형벌을 집행하고 있기 때문에 요리키나 도신이 죄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서 자기 멋대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래 옛날의 법제와 다릅니다.

율곡: 소라이 선생님은 그런 문제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셨군요. 행정의 달인이십니다.

소라이: 과찬이십니다. 계속 말씀드리면, 넓은 에도 시가지에서 무가(武家, 무사들)의 거주지나 일반 시민의 거주지에 숨어 있는 범죄자를 찾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죄인의 체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관리들을 양성해두고 그들이 범죄자를 찾는 전담 공무원으로서 직책을 수행해나가도록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범죄자를 적발하는 담당자가 사실은 원래 범죄자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이용해서 범죄자를 적발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결국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래의 제도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그런 직책에 임명된 것이기 때문에 임명된 자는 하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곡: 결국 도둑에게 도둑을 잡게 하는 것이군요. 그러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지요. 도둑을 잡는 사람들이 도둑들과 결탁하면 근본적으로 도둑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요리키나 도신의 급료가 아주 적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편하게 생활할 수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세상의 물가가 모두 크게 올랐기 때문에 누구나 생활이 곤란합니다. 특히 도신과 같은 낮은 신분의 관리는 급료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 부업으로 여러 가지 세공물을 만들어 팔아 그 수입과 급료를 합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부양하며 집을 보유하고 자기가 맡은 당번 근무를 수행합니다.

당번 근무라는 것은 한 달에 3일 정도인데, 이렇게 가벼운 근무를 수행하는 것조차도 위와 같은 실정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요리키나 도신과 달리 도둑 담당 조직에 소속된 경우라면, 겨우 한 조직이나 두 조직으로 도둑을 체포하기 때문에 매우 바쁩니다. 매일 밤이나 낮이나 요리키나 도신이 여기저기를 순회하면서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지요. 외출하려면 의복도 집에 있을 때와 다른 것을 입게 되고, 짚신이나 도시락 등에 들어가는 경비도 필요합니다. 너무 가혹한 업무지요.

율곡: 그것은 조선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지방 관리에게 충분한 급료를 못주니 지방 관리들이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먹을 것을 빼앗게 되는 것이지요.

소라이: 예, 관리들이 매일 나가서 돌아다닌다면 안에서 근무할 틈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놔두고라도, 급료가 부족하니 무엇으로 부모와 처자를 부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신분의 관리에게 형벌의 권한을 맡기기 때문에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 임명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언제까지나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곤란합니다.

율곡: 그렇지요.

소라이: 이런 사태가 된 것은 막부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이묘(大名)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귀하기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나 지혜가 있더라도 민간의 실정을 잘 모르고 아랫사람들의 생활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학문을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나 중국에서 시행한 옛 시대의 법제와 비교 고찰하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옛날부터 전해지는 관례의 형식만을 지키고 정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결국에 이치를 앞세워 살펴본다면 무리한 추진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곡: 결국, 고위 관료들의 문제이고 군주를 둘러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요.

소라이: 저는 그래서 바둑판에 질서 정연하게 선을 긋는 것처럼, 에도 전체를 잘 계획해서 확실하게 장악, 관리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핵심적인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무가(武家) 거주지가 있는 지역도 일반 시민의 거주지처럼 거리마다 나무로 만든 출입구, 즉 기도(木戶)를 설치하여 출입구마다 지키는 사람, 즉 ‘기도 담당(木戶番)’을 두는 것입니다. 지금은 일반 시민들만 그렇게 통제가 되어 있는데, 관료들인 무사들의 거주지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지요.

율곡: 역시 제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시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거리마다 담당자를 임명하여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각 거리에서 상담을 하도록 하고, 도둑이나 혹은 사체를 유기하는 자가 있다면 출입구를 닫도록 합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야간에 일어나면 각목을 부딪쳐 소리를 내거나 대나무 피리를 불어 인접한 거리 거리에 알리도록 합니다. 사전에 규칙을 정하는 것이지요. 또 무사들의 거주지마다 출입문을 설치하여 야간의 통행을 금지합니다. 영주(大名)가 아니거나 혹은 하인에게 창이라도 쥐어줄 수 있는 정도의 신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특히 엄중하게 통과를 금지해야 합니다.

율곡: 흥미로운 발상입니다.

소라이: 에도 시가지 전체를 이와 같이 합니다. 그래서 공무로 통행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고 개인적 일이라도 임신부나 급한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러 가는 산파, 즉 조산부(助産婦)나 혹은 의사 등을 보내고 맞이하는 경우에는 각 문마다 차례차례 확인하면서 통과시킵니다. 순차적으로 거리에서 거리로 통과시키거나 금지한다면 위에 소개한 여러 가지 나쁜 일들은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율곡: 하하, 백성들을 철저하게 시가지 내에 가두어서 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 같으면 바로 반란이 일어날 겁니다. 답답하다고.

소라이: 에도에서 모든 무가의 거주지는 원래 직무상 하나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의 거주지에 모아서 거주시키려고 계획을 했습니다. 대번(大番 오반, 에도성의 경비대)이 원래 12조직으로 나뉘어 있는 것에 대응하여, 거리도 1번(一番) 거리에서 6번 거리까지 각각 바깥과 안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2조직에 상응하는 12곳의 거리가 거주 구역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는 그 때는 대번팀(大番組)의 멤버인 번사들(番士, 당번이 된 무사)뿐만 아니라 그 아래에 소속되어 있는 요리키나 도신 등 하급 신분의 관리들도 함께 조직별로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직책으로 전근을 가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다시 새롭게 조직에 들어오는 경우, 그리고 직무에 과실이 있어 면직된 경우도 생기면서 그러한 질서가 흐트러지고 혼란스럽게 된 것입니다.

율곡: 신기한 제도가 있었군요. 하나의 마을이 정부의 한 조직에 대응하도록 짜여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흐트러진 것이지요. 특히 권위가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에 맞는 거주지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이 제도가 혼란스럽게 되어 지금은 같은 직책이나 같은 조직에 속한 관리들이 서로 다른 곳으로 나뉘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결과 지금은 다른 직책이나 다른 조직의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조직의 무사가 무사(武士)로서의 인품이 갖추어져 있는지, 그 집안의 살림살이가 어떤지 서로 살펴볼 도리가 없게 되었지요.

율곡: 당연하게 그렇겠지요.

소라이: 같은 거리 안에서 살고 있다면 자기 집안의 상세한 일까지 무엇이든지 이웃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사이에 서로가 상세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직장에 출근하면 서로 다른 직책과 다른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상호간에 간섭하지 않고, 한집 한집이 모두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무사들은 매우 버릇없고 이기적이 되었으며 무슨 일이나 속박을 받지 않고 방탕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그러면 선생님의 제안은 무엇인지요?

소라이: 저는 그래서 어떻게든지 옛날의 법과 제도처럼, 번사들이나 요리키, 도신들도 모두 같은 조직에 속한 자들은 한 곳에 함께 거주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대표자도 같은 곳에 거주를 시켜 다른 직책을 맡아 전근을 하거나, 신규로 자기 조직에 들어오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거주지를 바꾸어 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직의 대표자는 자기 조직에 속한 자의 사람 됨됨이라든지 뭐든지 상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도둑 담당 관리 등이 자기 부하의 나쁜 일을 모르는 경우는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율곡: 다소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통제방법입니다.

소라이: 만약에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였는데도, 자기 조직에 소속한 사람들을 잘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조직을 맡은 책임자가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지 않으면 조직의 책임자로 누구를 임명한다 하더라도 훌륭하게 조직을 통솔해나갈 수는 결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위와 같이 거주지를 바꿔가면서, 그리고 조직의 책임자까지 한 곳에 거주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로 금방 실행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거리마다 담당자를 정해두고 각거리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을 조직이나 직책과는 상관없이 정해둔 담당자가 모두 관리를 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율곡: 마치 현대 일본의 고반(交番)과 비슷하군요. 물론 기능은 많이 다르지만.

소라이: 그리고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로 친하게 교류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재의 풍속처럼 서로 허세를 부리고 집집마다 자기 멋대로 생활해서는 노름이나 시문(詩文)을 이용한 도박 등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상속이나 양자에 관해서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도 조사할 수가 없으며, 개인의 행실이나 살림살이가 엉망이라고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직급이 낮은 무사이면서 집을 지키는 가족이나 하인이 많지 않을 경우, 만일 화재가 발생하거나 도둑이 들었을 때에 혹은 부하들이 서로 싸움을 할 때에는 그런 사태를 장악하고 처리할 사람이 없어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위와 같은 제도를 만들어 둔다면, 바둑판에 미리 줄을 그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바둑을 둘 수가 있는 것처럼 조직적으로 일을 처리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이 한다면 처음에는 그것이 부자유스럽게 생각되어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사회 풍속으로 자기들 멋대로 하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지장이 생기는 일도 있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에도 시가지는 결국 평온하게 되고 치안이 잘 유지될 것입니다.

율곡: 전부 듣고 보니 매우 이상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농공상을 말씀하시면서 사회전체가 군사조직에 가깝다는 말씀을 하셔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으로는 이상한 제도인 것 같습니다.

소라이: 그렇게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러나 아마도 많은 일본사람들은 선생님처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닙니다. 이미 일부는 에도시대 초기에 시도했던 제도이기 때문이지요.

율곡: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제도와 법률에 의해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뜻을 잘 알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생각과는 반대 지점에 서 있는 것 같군요.

대동사회와 향약


대동사회와 향약

 

율곡: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나 건물에 방화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 심성의 문제가 크지요. 사람들이 드믄 길에서 강도짓을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나이 어린 부랑자들도 그렇고 사람 시체를 몰래 버리는 문제도 그렇고 도덕과 교육의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역시 정통 유학자이시며, 정통 성리학자이시군요.

율곡: 저는 1571년에 청주목사로 임명된 적이 있었지요. 그곳에서 향약(鄕約)이라는 것을 만들어 실시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향약이란, 소위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조선 중기에 지방의 사림이 농민이나 노비 등 하층민을 강력하게 지배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농촌의 공동체를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사회로 이끌어가는 수단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대동사회란 무엇인지요.

율곡: 제가 생각하는 대동사회는 ⌈예기⌋ 예운편에 나오는 대동사회와 같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큰 도가 행하여지자, 사람들은 천하를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생각했다.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택하여 정치를 맡겼고, 서로 믿고 화목하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지 자기의 어버이만을 친애하지 않았으며 단지 자기 자식들만을 사랑하지 않았다. 늙은이들이 그 생을 편안히 마칠 수 있게 되고, 장년들은 항상 쓰일 곳이 있게 되었으며, 어린아이들은 의지하여 성장할 곳이 있게 되었다. 홀아비나, 과부, 고아 그리고 자식이 없는 사람들, 폐질에 걸린 사람은 모두 다 부양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남자는 자기 직업이 있고, 여자는 모두 돌아갈 남편의 집이 있었다. 재화가 헛되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꺼려하였지만 반드시 자기만 사사로이 감추어 두지 않았으며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간사한 꾀가 막혀서 일어나지 못했고, 도둑이 훔치거나 도적들이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바깥문을 여닫지 않았으니 이것을 대동의 세상이라고 한다.

소라이: 제가 생각하는 사회도 결국은 그런 것이지요. 다만 그 과정이 조금 다르지만요.

율곡: 저는 그 다음해 청주에서의 일을 사양하고 해주로 내려갔다가 고향인 파주 율곡 촌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썼습니다. 청주목사 때, 서원향약을 만들어 실시하면서 다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임금 앞에서 향약을 반대하기도 했지요. 예를 들면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지요.

“요사이 신하들이 급히 향약을 행하고자 청하므로 주상(임금)께서도 행하도록 명령하셨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향약을 행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백성이 잘 살도록 하는 일을 먼저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일은 나중에 해야 합니다. 백성들의 삶의 고통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으니, 시급히 모든 폐단을 빨리 없애서 거꾸로 매달린 듯한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준 다음에야 향약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 교육은 쌀밥과 고기반찬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건강이 아주 나빠서 죽도 잘 소화가 안 된다면 쌀밥과 고기반찬이 아무리 좋은들 먹을 수 있겠습니까?”

소라이: 그렇지요. 배가 부른 뒤에 예의가 있는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야지요.

율곡: 당시 궁정에서 제 의견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어떤 사람은 제 면전에 대고 비난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 사람에게 저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에는 민생의 곤란이 아무리 심하여도 향약만 행하면 과연 백성을 교화시켜 좋은 풍속을 이루어 정치가 태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되오?”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렇소.”하고 대답하기에, 제가 그럼 “당신은 능히 향약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있소?”라고 물었지요. 저는 또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부터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도 예속(禮俗: 예의 풍속)을 이루는 일이 있소? 지금 부자간이 비록 지극히 친한 사이라고 하지만 만일 아들의 기한을 생각해 주지 않고 날마다 매질이나 하며 학문을 권한다면 반드시 서로 헤어지고 말 것인데 하물며 백성들은 어떻겠소?”

제가 당시 그렇게 향약을 반대한 것은, 지방에 가보니 지방에서 큰소리치는 관리나 유지들이 향약을 핑계로 백성들을 매우 괴롭혔기 때문이요. 그것을 걱정한 것이지요. 그런 나쁜 사람들을 누가 단속할 것인가? 만약 향약을 행하게 되면 백성들은 더욱 곤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반대한 것이지요. 하지만 향약 자체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향약은 필요하지요. 그래서 나중에 다시 향약을 시도해서 나중에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향약의 체제와 내용이 잘 짜여 있어서 조선 향약 중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소라이: 해주 향약은 어떤 내용인지요?

율곡: 예, 농촌의 같은 마을 사람들, 즉 향약 구성원들 가운데 수재나 화재를 만나면 서로 돕게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이 들었을 때나 질병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 그리고 어린 자녀를 두고 어른이 죽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그 남은 자식들을 돌보도록 했지요. 너무 가난한 사람이 있을 때도 주위 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정신으로 그들을 돕게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농촌 사회가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지요.

개혁방법의 차이


개혁방법의 차이

 

소라이: 그런데 선생님의 개혁안을 보고 제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율곡: 무엇인지요?

소라이: 임금에 대한 건의가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율곡: 어떻게 많다는 것인지요?

소라이: 예를 들면 ⌈만언봉사⌋(1. 상하가 서로 믿는 실질적인 노력이 없음을 논함)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건의합니다.

“임금께서는 밝은 지혜가 넉넉하시지만 덕이 넓지 못하시고, 착한 것을 좋아하하기는 하시나 의심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견을 올리려고 힘쓰면 지나친 월권이라고 의심하시고, 기개와 절개를 높이는 자를 보면 과격하다고 의심하십니다. 신하 가운데 어떤 자가 여러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면 당파가 있어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의심하시고, 신하 중에 어떤 사람이 죄가 있을 경우, 그를 공격하면 삐딱하게 모함한다고 의심하십니다.”(원문을 현대어 문장으로 의역함, 이하 같음)

저는 우선 이렇게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직언을 한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습니다.

율곡: 허허,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요?

소라이: 저는 제가 제시하는 개혁안(⌈정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최고 직위에 있는 군주에게는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도는 성인이 창조한 것입니다. 또 거꾸로 말한다면 성인이란 도를 창조한 사람이지요. …… 옛날에 도를 예악형정(禮樂刑政)의 제도로 체계화한 사람은 요․순․우․탕 그리 문왕과 무왕 등 이른바 삼대의 군주들입니다. 그들이 성인 중에도 성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이 성인인 까닭은 어디까지나 예와 악을 만든 사람들이라는 점에 있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도덕을 완전무결하게 모두 갖춘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인도 어디까지나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도덕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규 소라이, ⌈일본정치사상사연구⌋, 211-212참조)

선생님은 임금에게 덕이 넓지 못하고 의심이 많다고 지적하시지만 사람의 덕은 그 사람의 성(性)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덕이 어찌 하나같이 다 같겠습니까?

율곡: 제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시군요.

소라이: 예, 그렇지요. 선생님이 위에 제시한 내용 외에도 ⌈만언봉사⌋를 보면 군주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보필하는 신하들이 맡은 일에 실질적 노력이 없다(臣隣無任事之實)’, ‘경연(經筵)을 해도 성취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經筵無成就之實)’, ‘현인을 등용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招賢無收用之實)’,
‘재이(災異)에 대응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遇災無應天之實)’,
‘여러 정책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실질적 노력이 없다(群策無救民之實)’
등도 거의 모두 임금을 향한 요구가 아닙니까?

율곡: 구체적으로 어떤 점인지요?

소라이: 예를 들면 경연과 관련하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요즘에는 경연을 자주 열지 않아 신하들이 임금을 접견하는 일도 드물지만, 경연을 열어도 전하께서 예를 차리는 모습이 엄숙하여 참석자들이 말을 자연스럽게 하지도 못합니다. 게다가 문답이 매우 드물지만 전하께서 따져서 묻는 것도 자세하지 못할뿐더러, 정치의 요체와 시대의 당면한 폐단을 물어보신 적이 없습니다.

간혹 한두 명의 강관(講官)이 성학(聖學)에 힘쓸 것을 권하면, 전하께서는 대수롭지 않게 들으시기만 할 뿐, 달리 체험해 보고 실천해 보시려는 실질적 노력이 없습니다. 경연을 마친 뒤에는 대전(大殿) 안이 깊어서 전하를 모시는 신하들은 바라보고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옆에는 단지 내시와 궁녀들만이 있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무슨 책을 보시고 무슨 일을 하시고 무슨 말을 듣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하들도 그것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밖에 있는 신하들은 어떻겠습니까?

율곡: 이런 제안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한 나라를 개혁하는데 임금의 의지와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보시는 것이지요? 위에 열거한 문제들도 임금이 도두가 임금의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의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시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그럼 어떻게 정치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지요?

소라이: 저는 우선 정치는 최고 통치자와는 그렇게 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제도를 만들면 될 뿐입니다. 말하자면 법과 룰을 만드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그것을 잘 만들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정담의 맨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예를 들면 바둑판에서 치수를 정확히 재서 종횡으로 선을 긋는 일과 같습니다. 바둑판에 선을 그어 넣는 것이지요. 그렇게 전체를 조망한 계획에 따라 모든 일을 추진해나가는 것입니다. 선이 그려져 있지 않은 바둑판에서는 아무리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라도 바둑을 제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획이 없이 정치는 불가능합니다. 또 하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서는 지형을 고려하여 물이 잘 흘러가도록 우선 강의 물줄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줄기를 만들지 않고 단지 홍수를 막으려고만 해서는 설사 우왕(禹王)과 같은 치수(治水)의 달인이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율곡: 정치하는 과정을 중시하시는 군요. 그러니까 단계를 거쳐서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지요?

소라이: 구체적인 제도와 법률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에도에 있었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에도에서 시행한 화재 예방 조치이지요. 막부가 에도 시가지에 있는 건축물에 대해서 4면의 벽에 흙을 칠하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의 모든 벽을 흙벽으로 칠하라고 지도를 하여 사람들이 자기 집을 모두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에도에서 일어난 화재가 그 이전과 비교해서 많이 줄었습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행정지도와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곡: 그러한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요. 그것이 말하자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화재 예방 이외에 막부의 정치에 관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옛 시대에 행해진 정치의 방법에 근거하여 상세하게 제 생각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정담⌋이라고 하는 개혁론입니다.

율곡: 그래서 결국, 선생님의 개혁 구상에는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 점은 저의 개혁론과 너무 다릅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최고 통치자의 의지와 마음이 중요하지 않는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는 최고 통치자보다는 그 최고 통치자가 만들어내는 법률과 제도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군주의 마음 수양이 아니라, 군주가 만든 제도와 법규가 세상을 바로 잡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율곡: 저와는 생각이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그런 방향이 제가 주장하는 고문사학, 즉 소라이학의 큰 지향점이지요.

율곡: 그럼 바둑판 이야기를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그런 제안이 있는지요? 한 가지만 소개해주시면 어떨까요? 정치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소라이: 예, 우리 에도에서 요즘 문제가 되는 일을 한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요즘 에도에 도둑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훔치고 있지요. 아니면 건물에 불을 지르거나 야간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서 숨어 있다가 강도짓을 합니다. 또 나이어린 부랑자들이 칼을 빼 들고 사람을 위협하여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즐기기도 합니다.

율곡: 한양에도 그런 일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만.

소라이: 심한 경우에는 아이를 길에 버리거나 사람의 시체를 몰래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제지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누가 “사체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면, 그 주변 사람들은 야단법석을 피우면서 서로 자기 집 앞에는 못 버리게 할뿐입니다. 버리는 행위 자체를 제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집의 담장 바깥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이기 때문에 그곳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니 에도 전체가 무질서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에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문제를 보면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율곡학


율곡학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의 소개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율곡학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습니다. 상세히 소개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율곡: 몇 가지 후인들이 평가한 내용을 중심으로 저의 학문을 소개하기로 하지요. 먼저 제 학문은 나중에 한국에서 김장생, 김집, 송시열, 권상하, 한원진 등 서인과 노론 혹은 소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들과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일시적이나마 승려였기 때문에 성리학자가 아니라고 논박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계속 성균관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고 또 그 사람들이 집권을 하면서 문묘에 종사되고, 조선에서 퇴계 이황의 위상에 대응할 수 있는 존재로 추앙을 받게 됩니다. 사실상 임진왜란 뒤 조선이 끝날 때까지 저를 지지하는 학자들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저의 위상은 퇴계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했지요.

소라이: 그렇군요.

율곡: 저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에 근거합니다. 선생님은 성리학을 비판하시지만 조선에서는, 적어도 주류 학자라면 성리학을 벗어나 다른 학문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일본 에도시대보다 학문적인 폭이 좁았지요. 저는 비교적 논리적으로 성리학 이론을 따지는 편이고, 그런 학문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지요. 공리공담은 싫어했습니다. 실지로 관료생활을 하면서 그런 쓸모없는 토론보다는 실용적인 토론에 더 관심이 많았지요. 나중에 조선에 등장하는 실학은 저의 영향이 큰 것으로 평가됩니다. 말하자면 저의 그런 관점을 실학의 효시로 보기도 하지요.

소라이: 조선에서 실학의 원조이시군요.

율곡: 그런 셈입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저를 추종하는 학자들이 모두 그런 방향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념적, 교조적인 이론으로 빠진 경우도 많습니다.

소라이: 실학과는 반대되는 경향이군요.

율곡: 저는 조선의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가 살던 시대는 조선이 건국한 뒤에 시간이 흘러 사회가 쇠퇴해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기존에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가고 사치가 만연하며 나라의 쇠락이 경각에 달려있다고 보았지요.

소라이: 그래서 제시한 것들이 ⌈동호문답⌋, ⌈만언봉사⌋ 등 개혁안이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저는 성리학자로 주자의 이기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리는 형이상자이며 존재의 근원이자 원리이며, 기는 형이하자로 물질적 존재자이지요. 주자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리와 기가 서로 발동한다는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했습니다.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지요. 저는 리와 기가 사실은 하나나 마찬가지라고 보았습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선후가 없다고 본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일부 후인들은 퇴계의 주리설(主理說)과 대응시켜 주기설(主氣說)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제가 기의 뿌리인 리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또 저는 는 서로 떨어지지 않고(理氣不相離),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理氣不相雜). 그리고 이런 것을 합하여 리와 기의 오묘함(理氣之妙)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사실 이론에 치우친 이론일 뿐입니다.

소라이: 그 부분에 대해서, 저는 문외한입니다.

율곡: 문외한이시라기 보다는 비판자이시지요? 선생님은 이기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소라이: 사실 그렇지요. 그러한 논의에 대해서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율곡: 저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이 발동할 때 도의를 위해서 발동하면 도심이요, 육체를 위해서 발동하면 인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인심과 도심은 한 가지 마음이지만 발동하는 원인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마음은 하나인데, 성명(性命)에서 나오면 도심이요, 형기(形氣)에서 나오면 인심이지요.

소라이: 저는 그러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형기(形氣)를 중시하는 편에 속합니다. 인간에게 도심은 없다. 인심이 모든 것이다, 이렇게 보는 편입니다.

율곡: 그런가요? 더 설명을 드리자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마음은 도심이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먹고입고 싶은 마음은 인심이지요. 제 생각에 인심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고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도심은 마땅히 보호하고 양육하여 넓혀나가는 것이 좋다고 보고요.

소라이: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일본 사상에서는 깊게 논의하지 않은 부분입니다. 일부 유학자들은 그 점에 대해서 논의도 하지만 저는 역시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입니다.

소라이학


소라이학

 

소라이 :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율곡: 어떤 것인지요?

소라이: 고향이 경기도 파주인지요, 강원도 강릉인지요. 태어나신 곳이 강릉이라고 하셔서요.

율곡: 강릉은 외가입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집이지요. 지금은 오죽헌이 자리 잡고 있는 곳입니다. 그 오죽헌 별채에서 태어났지요. 본가, 즉 아버님 고향은 파주입니다. 지금의 경기도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한참동안 성장을 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게 된 것인지요? 본가에 가지 않으시고.

율곡: 조선시대에 유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는 조선도 독자적인 풍속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외가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어머니 신사임당의 집안은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고 어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저희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유학에 조예가 깊은 분이셨습니다.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는데 딸들에게도 유학을 적극적으로 가르치셨지요. 제가 말씀드린 유학은 성리학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도 공자, 맹자, 주자를 어려서부터 배우신 분입니다. 저는 사실 그런 어머니에게 글과 유학을 배웠습니다.

소라이: 아, 어머님에게 글과 유학 경전을 배우셨다니 역시 한국에서 신사임당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율곡 : 어머님은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고향이?

소라이: 저는 도쿄, 그러니까 에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아버지가 에도 막부에 출근하는 의사였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들 중 한사람이셨지요. 그래서 어려서는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였습니다. 14세 때 까지는요. 그때 저는 하야시 라잔(林羅山) 가문에서 가르치는 정통 성리학을 배우기도 하였지요.

율곡: 그러다가 부친과 함께 유배를 가신 것이 군요.

소라이: 아니요, 엄밀히 말씀드리면 부친과 함께 유배를 당한 것은 아니고요. 부친이 쇼군의 미움을 받아서 부친만 유배를 당한 것이지요. 그런데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유배를 가신 것이지요. 다행히 유배지가 어머니 고향이어서 생각보다는 자유스럽고 편하게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유학에 심취해서 좀 더 깊이 유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요.

율곡: 선생님은 일본유학사에서 고문사학파라고 하는 아주 독특하고 독창적인 학파를 세우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상세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고문사학파는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도 매우 주목할 만한 학파입니다.

소라이: 독특하다는 점은 인정을 합니다만, 중국과 조선에서 깊이 연구한 성리학에 대한 깊이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철학적, 추상적인 이론에는 깊이가 없는 것이 제 학문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율곡: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조선에서 최고의 학자그룹에 속한 제 후배학자 다산 정약용도 선생님의 고문사학을 받아들이고 선생님의 학문에 감탄을 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고문사학을 일본의 사상사에서, 즉 일본의 어떤 학문적인 맥락에서 제시하신 것인지요?

소라이: 먼저 고문사학이라는 이름부터 소개를 하겠습니다. 고문사학(古文辭學)이란 말 그대로 옛 글(文)과 단어(辭)를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그러한 옛글과 단어를 잘 연구해서 공자, 맹자를 연구하고 고대의 유학을 연구하자는 학문입니다. 성리학, 그러니까 주자가 만든 학문인 신유학은 비판하지요. 가짜 학문이라고.

율곡: 아, 그런 입장이군요. 그럼 그러한 주장은 갑자기, 하루아침에 선생님이 독자적으로 주장하게 된 것인지요?

소라이: 아닙니다. 에도시대에 그런 주장을 편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있었습니다. 거의 동시대에 그런 주장을 하게 되었지요. 이토 진사이(伊藤仁斎, 1627-1705)라고 하는 학자, 야마가 소코(山鹿素行, 1622-1685), 그리고 제가 그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우리 3사람을 묶어서 고학파(古學派)라고 하고 고학파 3걸이라고도 부릅니다.

율곡: 고학파란 ‘옛날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옛날 학문을 중시하는 사람들이지요. 고학파가 말하는 옛날이란 바로 공맹시대, 즉 한나라 이전의 옛날을 말합니다. 그 이후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유학사상은 부정합니다. 주로 주자학을 부정하지요.

율곡: 계속 설명해보시지요.

소라이: 고학파들이 서로 만나서 그런 학문을 하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저는 사실 선배 학자인 이토 진사이하고 사이가 썩 좋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저 혼자 그분을 좋아하고, 싫어한 것이지만요.

율곡: 어떤 일이 있었는가요?

소라이: 1704년, 제가 39세 되던 해였습니다. 혼자 공부를 하다가 의심난 곳이 생겨서 이토 진사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대선배님이지요. 당시 진사이는 78세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써 보내놓고 줄곧 그 분의 답장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결국 끝내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사이 선생’이 편지를 받고도 자신을 무시하여 답장을 해주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로서는 몹시 큰 상처였지요. 물론 진사이의 책임은 없습니다.

율곡: 왜요?

소라이: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사이 선생은 제가 편지를 보낸 그 다음해에 사망했습니다. 제가 편지를 보낼 당시 이미 그분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진사이가 사망한 후에 그의 아들 이토 토가이가 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 편지를 자기 아버지 유고집에 실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몹시 분개했습니다. 답장도 안 해주고, 무시했으면서도 유고집에는 실었으니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 저는 진사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사이를 비판하는 제 문장에 뭔가 진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하

율곡: 진사이의 학문하고 선생님의 고문사학은 학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요?

소라이: 예, 같은 고학파라도 진사이의 학문은 고의학(古義學)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그런 고의학을 고대 문장인 ‘육경(六經)’에 대한 무지와 중국 고대사회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학문이라고 비판합니다. 진사이는 ⌈논어⌋ ⌈맹자⌋에 의존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저의 고학(古學), 즉 고문사학은 ‘육경’을 중시하고 그 ‘육경’에 근거하여 학문을 합니다. 육경이란 고대 선왕(先王)의 사적을 옛날의 말, 즉 고문사(古文辭)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 기록으로 공자의 ⌈논어⌋와 ⌈맹자⌋를 읽는 것이지요.

율곡: 명나라에도 고문사학파가 있었지요? 방법이나 지향은 다소 다른 것 같습니다만.

소라이: 그렇습니다. 사실 저의 고문사학은 명나라 고문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특히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의 영향이 컸습니다. 이들 두 사람은 명나라 때 고문사를 주창하고, 진한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문장을 연구하여 시와 문장을 썼습니다. 이들은 당나라 이전의 서적만을 읽고, 그 언어 그대로 모방하여 시문을 쓰자고 했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데 나중에 조선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조선의 유학자들은 선생님이 왜 그런 사람들의 방법을 배웠는지 궁금하다고 했지요. 왕세정과 이반룡은 일류급의 문장가가 아닌데, 그들에게 선생님이 방법을 배웠다고 하니 결국 선생님도 별로 훌륭한 인물은 못될 것이라고 하였지요. 하하.

소라이: 하지만 저는 그런 왕세정과 이반룡에게 몹시 감동을 느껴,

“나는 하늘의 은총을 입어 이반룡과 왕세정의 책을 읽고 비로소 고문사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하늘의 계시와도 같이 매우 중시하였지요. 저는 그들에게서 문장 연습의 방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대 문장을 연구하여 고전 해석을 하는 방법까지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 고대의 정치와 제도, 나아가 사상을 연구하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지요. 옛글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옛 도를 규명해야한다는 것이 제가 제창한 고문사학의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율곡: 흥미로운 방법이군요. 우리 조선에서는 그런 분야의 학문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인 이론과 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일변도였지요.

소라이: 제 생각으로 고대 성인의 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의 말(古文辭)을 아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의 말로 고전을 이해한다면 고전의 참된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율곡: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소라이: 그런 입장에서 육경을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옛 제도와 문물을 서술하는 문장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육경을 세밀하게 읽어 거기에 쓰인 말들의 용법에 대해 익히고 또 고대의 구체적인 제도에 관한 지식을 얻은 후에 논어에 나아가야 비로소 공자의 참된 뜻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율곡: 그러면 그러한 방법론으로 유학을 연구하시고, 그것으로 성리학을 비판하시는 것이군요.

소라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학문은 오늘날 학문 기준에서 본다면 정치학에 가깝지요. 주자는 도덕을 잘 닦으면 정치가 잘 다스려진다고 주장합니다. 성리학자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주자학에서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면 천하국가도 잘 다스려진다고 하는데, 저는 위정자가 가지고 있는 주관적, 심정적인 도덕보다도 그의 정치적인 능력과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율곡: 지금 말씀하시는 부분은 우리 조선의 학자들과 많이 다르군요.

소라이: 저는 위정자가 도덕적으로 탁월한 행위에 마음을 쓰는 것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더 잘 복종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위정자가 정말 도덕적으로 훌륭할 필요는 없습니다.

율곡: 나중에 마루야마 마사오라고 하는 일본의 학자는 선생님의 그 주장을 매우 극찬하여 정치와 도덕이 완전히 분리되어, 도덕의 세계로부터 독립된 정치의 세계가 발견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면서 저는 일본 에도시대 의 유학자들을 대거 저의 편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진사이학의 몰락을 유도한 것이지요.

율곡: 일본 에도시대 중엽에 일본 사상계의 주류로 떠오르신 것이지요. 그러나 그 때문에 막부에서는 선생님의 학문을 경계하고, 결국 이단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게 되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막부의 ‘관정이학(寬政異學)의 금(禁)’ 정책에 따라 급격히 저의 고문사학파는 세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율곡: 어떻게 갑자기 그런 일이 발생했지요?

소라이: 사실 1790년에 단행된 이단(異端) 금지의 정책은 전국적인 것이 아니고 당시 하야시 라잔의 집안에서 운영하고 있던 학당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라고 하지만 그 집안의 위상이 막부에서 유학과 교육을 담당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율곡: 하야시 집안의 학당이 당시 공립이었는지요?

소라이: 거의 공립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막부에서 세운. 그 집안사람들은 모두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막부에서 급료를 주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막부와 함께 연합하여, 지방의 각 번에 학당을 설치하게 하여 여 정통 성리학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막부에서 우리 고문사학파를 이단으로 판단하고, 선포한 순간 우리 학파는 순식간에 세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학당의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서는 정통 주자학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막부 내의 관료들도 정통 주자학을 배우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우리 학파는 그 기운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일본의 유학사상사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참고로 저희 학파가 몰락한 뒤에 국학파가 등장했습니다. 저희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요. 국학파는 제가 주장한 고문사학의 방법론을 중시했습니다. 즉 고대 문장에 나온 단어나 문장의 참뜻을 중시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그 후대에 집필된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을 중시한 것이지요. 단지 저는 중국의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국학파들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고대 문장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다릅니다.

율곡: 아,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고문사학과 국학은 일맥상통한 점이 있군요.

소라이의 무사 개혁안


소라이의 무사 개혁안

소라이: 선생님이 조선의 군대 상황과 개선책을 자세히 소개를 해주셨으니 저도 제가 ⌈정담⌋에서 제시한 군대 개선안을 조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율곡: 예, 참 궁금한 부분입니다.

소라이: 사실, 저의 개혁안에는 군대의 이야기를 모아서 해둔 것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처럼 ‘군정의 개혁’을 별도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일본은 사회전체가 군대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율곡: 사회 전체가 군대조직이라니요?

소라이: 예, 일본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무사, 농민, 기술자, 상인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사는 바로 군인입니다. 사회 전체 구조가 이렇기 때문에 별도의 군대가 없다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곡: 우리 조선에서 사농공상은 글 읽는 선비, 농민, 기술자, 그리고 상인인데 많이 다르군요. 그리고 조선에서 군대는 별도로 존재하지요.

소라이: 제가 제출한 ⌈정담⌋은 모두 4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제1권은 다음과 같습니다.

1-1.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방법
1-2. 에도 시가지와 무사 거주지에 대한 관리
1-3. 계약직 하인의 관리
1-4. 여행자의 체류에 대한 관리
1-5. 호적
1-6. 여행증명서
1-7. 실직한 무사와 수도승의 관리
1-8. 기녀, 배우, 그리고 거지의 관리
1-9. 세습 하인
1-10. 무사들의 생활방식을 바꿔야한다
1-11. 해상 교통의 관리

여기에서 구태여 군정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은 무사를 언급한 1-2와 1-7, 1-10입니다. 사실은 다른 부분도 무사와 관련된 것들이 많습니다만. 참고로 제2권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2-1. 경제 정책의 중요성
2-2. 조급한 풍습을 바꿔야 한다
2-3. 예법의 제도가 없다
2-4. 막부의 재정
2-5. 영주들의 빈곤을 구제하는 방법
2-6. 무사들의 빈곤을 구제하는 방법
2-7. 물가 문제
2-8. 금은 수량의 감소
2-9. 금전의 대차 거래
2-10. 예법 제도
2-11. 무가의 미곡 저장

이중에서 2-6, 2-11이 무사들과 관련이 있지만 다른 부분 예를 들면 2-2, 2-7, 2-10 등도 무사와 관련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결국 일본 사회는 무사를 빼고는 성립이 안 되는 것이지요. 모든 사회가 말하자면, 좀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으나 ‘군대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곡: 구체적으로 한 부분을 들어서 소개를 해주시면 선생님의 설명을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소라이: 그렇게 하지요. 차분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10의 ‘무사들의 생활방식을 바꿔야한다’는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율곡: 알겠습니다.

소라이: 에도시대는 1603년에 성립이 되어 당시 제가 정담을 정리하던 1727년경에는 사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건국의 기상은 사라지고 나태해지고, 사회가 평화로워지면서 사치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지요. 즉 무사들의 기백도 사라지고, 그들의 생활이 궁핍하게 되었지요. 원래 무사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르던 병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사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고 막부에서 녹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각종 군사와 관련된 일을 맡았지요. 그리고 관리의 일을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무사들은 농민과 상인들, 그리고 기술자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지요. 조선에서 관리들 그리고 의사, 학자들의 일을 무사들이 했습니다.

율곡: 무사들의 역할이 의외로 컸군요.

소라이: 그런 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궁핍해져 갔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급료는 정해져 있는데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은 자꾸 비싸진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거의가 에도에 집중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그들을 해산시키 않고 에도의 성 주변에 머물면서 에도 성을 지키고, 에도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있는 영지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영지에서 나는 산물이 그들의 월급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영지를 에도에서 살면서 운영을 했지요. 말하자면 그들은 봉건영주이기도 했습니다. 제 개혁안은 그들의 생활을 개선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율곡: 아, 그렇군요.

소라이: 저는 근본적으로 그들 무사들을 지방의 영지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무사들을 영지에 속박해 두지 않고서는 완전한 관리가 불가능하다고 보았지요. 그리고 무사의 도(道)를 다시 일으키고 세상의 허황된 사치를 억누르며 무가의 빈궁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 외에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곡: 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요?

소라이: 우선 그들의 생활방식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에도 시가지에 모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여행자와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지요. 왜냐하면 의식주를 비롯하여 젓가락 하나라도 필요한 물건은 모두 사두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무사들이 에도에서 살고 있다면, 그들은 일 년 간의 급료로 영지에서 받은 쌀을 전부 팔아서 그 대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사두고 일 년 동안 그것들을 다 사용해버립니다.

율곡: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소라이: 그렇기 때문에 무사가 정성을 다해서 에도에서 막부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결국 모두 상인들의 이익이 되어 버릴 뿐입니다. 그 때문에 에도 상인들은 더욱더 번창하고 무사들은 더욱 궁핍하게 된 것입니다. 또 많은 무사들이 에도의 성 아래에 모여살고 있었기 때문에 화재도 빈번하게 일어났지요. 에도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경우는 부인이나 아이들이 부담이 되고, 가재도구나 귀중품에 마음을 빼앗겨 불을 끄는데 전념할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에도 시민들의 나쁜 풍습이나 유흥가의 풍습이 무사들에게 전염되어 여러모로 에도는 무사들에게 나빴습니다. 오락이 많아 무예나 학문을 가까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율곡: 조선의 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과 상황이 비슷했군요.

소라이: 무사들이 에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영지인 농촌 지방에 대한 관리도 나쁘게 되어 그 정도가 매우 심해졌습니다. 옛날에는 농촌의 여기저기에 무사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이 자기들 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백년 이래 영주가 영지에서 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관리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없어져 농민들이 모두 자기 멋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조선에서는 지방에 관리들을 조정에서 직접 파견했는데 일본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군요. 말하자면 영지의 관리 책임이 영주들에게 있었군요.

소라이: 처음에는 그렇게 했지요. 하지만 막부 직속의 무사(旗本)가 신분이 낮을 경우에는 자기가 살고 있지 않은 영지를 에도에 있으면서 다스린다고 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대리인들(代官)을 파견하더라도 신분이 낮은 젊은 가신(家來)들이기 때문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지요. 그 결과 나중에는 무사들의 개인 영지까지를 막부가 직접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농민들이 영주를 가볍게 여기게 되어버렸습니다.

율곡: 조선의 상황과 비슷하게 되었군요.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하는 체제이지요.

소라이: 무사들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지자 지방의 관리가 문란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중앙에서 지방에 도박 등에 대한 금지령을 내려도 지방 농민들은 모른 척합니다.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지방에 가서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하는데도 농민들은 그들을 고발하지 않습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나면 막부의 행정이나 통치력은 에도만으로 한정되게 되어 농촌까지는 미치지 않습니다. 지방 농촌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무사들이 현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율곡: 그래서 선생님은 그 개선책으로 무사들이 지방에 거주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시는 것이군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무사들이 농촌에 거주한다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습니다. 맨 첫 번째로 의식주 생활에 경비가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사들의 살림살이가 다시 회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치는 가정 내부로부터 시작되는 법입니다. 무사의 부인이 에도에 살고 있으면 차츰차츰 사치에 물들게 되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병이 들기 때문에 그들의 배에서 나온 아이들은 나약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율곡: 선생님은 사회 현상에 대해서 분석하는 방법이 저와는 많이 다르군요. 저보다 치밀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둘러싼 환경을 예민하게 파악하는 점이 뛰어납니다.

소라이: 무사들 가족이 만약에 농촌에 거주한다면 자기가 옷을 짠다든지 노동을 한다든지 하여 사치도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도 신체가 건강하게 되고 무사의 부인에 어울리는 여성이 될 것 입니다. 남자들도 넓은 들을 여기저기 말을 타고 뛰어다녀서 손과 발이 튼튼하게 될 것이고, 친척들이나 지인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용무가 있을 때도 5리든지, 10리든지 그런 거리를 항상 왕래하기 때문에 말타는 일도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될 것입니다.

율곡: 그렇지요. 농촌에 살면 사람들이 그렇게 부지런하게 되기 쉽지요. 몸을 많이 움직이니까요.

소라이: 말의 사료도 입수하기 쉽기 때문에 200석이나 300석의 신분이라도 말을 5필이든지, 10필이든지 마음먹기에 따라 잘 키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도 농촌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평소는 여가 시간이 많고 에도와 달리 다른 즐길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무예나 학문을 공부하기에도 정말 좋은 환경입니다.

율곡: 무사들은 결국 군인들이니 영지에서 살게 되면 군인으로서 많은 이점이 있게 되겠군요. 자연스럽게 훈련을 할 수 있고.

소라이: 예, 그렇습니다. 무사가 지방의 자기 영지에 살고 있으면 백성들도 어려서부터 무사들을 윗사람으로 존경하는 습관이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지도 잘 다스려지고, 만약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영지의 농민들을 동원할 때 매우 편합니다. 같이 전쟁터에 나가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자기들 영주가 공을 세우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율곡: 그것은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요.

소라이: 현재는 농촌에 영주들이 거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하급 무사가 농촌에 가게 되면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할 위험이 있습니다. 누가 관리감독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곳이 무사들 거주지가 아니니까 무책임해지기도 하지요.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무사는 에도에서 5리 이상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막부에서는 규정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촌에 영주가 거주하고 있다면 영주가 있는 곳에 가기 때문에 하급 무사들이 자기들 멋대로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울러, 무사들이 농촌에 거주하면 강에서 물고기를 잡고 야산에서 사슴을 사냥하거나 산천을 여기저기 달리고 걷고 하면서, 자기 영지 내의 지리도 잘 알게 됩니다. 험난한 산길도 익숙하게 되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유능한 무사가 될 것입니다.

율곡: 생활 자체가 군대 훈련이 되는 것이지요.

소라이: 제가 조사한 바로는 당시 일본 전체의 무사들 총 숫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가(武家) 정치로서는 무엇보다도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시마바라(島原)・아마쿠사(天草)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아주 조그마한 성에 농민들이 모여서 농성한 것을 숫자가 많은 서쪽 지방의 영주들이 전부 힘을 합해 전력을 다해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무사들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율곡: 병사들의 수가 감소한 것은 조선과 같군요.

소라이: 에도 막부에서는 처음에 막부가 시작할 때, 무사들과 지방의 영주들을 통제하고 일정 기간을 두고 심사를 하여 영지를 이동시키거나 폐지해버리는 정책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무사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관리를 했지요. 지금은 그런 제도가 오히려 독이 되어서 무사들의 숫자를 줄어 들고 있는 것이지요. 영주들의 힘도 약화되어 있고요.

율곡: 이미 중앙의 힘이 강력해졌으면 거기에 합당한 정책을 펴야겠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지금은 감히 막부에 대항할 영주들이 없습니다. 무사들도 자기 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지 이전 제도를 폐지하고 영주의 밑에 있는 무사들에게도 모두 영지를 주어서 그 영지에 거주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병사들의 숫자도 옛날처럼 많아지게 되고, 일본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무사들의 용맹스러운 기풍이 재현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저는 ⌈정담⌋에서 주장했습니다.

율곡: 결국에는 에도 막부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방안이군요. 영지에 무사들을 거주시키는 방법이.

소라이: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이지요.

율곡: 선생님의 개혁안을 듣고 보니 선생님은 행정가라기보다는 전략가적인 개혁자이시군요. 저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셔서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제가 제시한 군역의 개혁안은 선생님의 개혁안에 비추어 보면 매우 지엽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군적을 정확히 정리한다든지 군역을 공평하게 하자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주장은 사회 조직 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니 매우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고대 유가의 이상사회를 염두에 두고 그런 발상을 하고 계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소라이: 예, 근본적으로는 도시화되고 상업화되고 있는 에도사회를 거부하고 그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주장이기도 하지요. 농업을 중시하고 농민을 사회의 기초로 삼는 그런 고대의 사회로 되돌아가자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율곡: 일본사회의 모범으로, 선생님은 중국 고대를 염두에 두고 계시군요.

소라이: 정확합니다. 하하.

일본 사회


일본 사회

 

율곡: 제가 조선 군대의 문제점을 너무 소상히 지적을 했군요. 왜놈 앞에서요.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소라이 선생님이 태어나셨는데, 선생님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이란 무엇인가요?

소라이: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저는 일본에 태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에도시대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율곡: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라이: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전쟁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해서 일본을 평정하고 휘하의 장수들을 달래서 대륙침략의 야욕을 불태웠지요. 결국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으로 침략한 결과, 자신의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율곡: 그렇군요.

소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몰락하면서 그와 대립하면서도 협조자의 위치에 서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이 일본 전국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고 에도막부가 성립된 것이지요. 만약에 임진왜란이 없었으면 에도막부가 성립하지 못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이 계속 일본을 호령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저의 부친이 에도막부에 봉사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혹시 제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하.

율곡: 재미있는 상상이군요.

소라이: 혹시 제가 태어났더라도 학문적으로 이 소라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율곡: 왜 그런지요?

소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조선처럼 유학으로 일본을 통치하고자 하였습니다. 무사들의 시대를 끝내고 학문과 도덕으로 정치를 하고자 하였지요. 그래서 후지와라 세이카나 하야시 라잔과 함께 유학의 도입을 적극 검토했습니다. 그 결과 하야시 라잔이 막부에 들어와 정치적 학문적인 자문을 하면서 일본 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일본에서 유학, 즉 신유학인 성리학은 하야시 라잔이 막부의 지원을 받아 발전시킨 공로가 큽니다.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있었더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율곡: 오호, 그렇군요.

소라이: 그 외에도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지요. 도자기 기술자들이 임진왜란을 통해서 대거 일본에 들어왔고, 일본은 그 뒤에 도자기 생산국으로 크게 발전했기 때문이지요.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성리학입니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다수의 성리학 서적들이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강항과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포로로 들어와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했습니다. 그런 사정이 없었다면 일본 땅에 성리학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곡: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성리학이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소라이: 일부 승려들을 통해서 성리학 서적들이 들어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는 몰랐지요. 단지 지적 호기심으로 관심을 조금 두는 정도뿐이었습니다. 성리학이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그것이 현실의 생활에 유용한 것이라는 점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통해서 일본 사람들이 알게 된 사실입니다.

율곡: 참 신기한 일이군요. 성리학의 의미를 몰랐다니.

소라이: 조선의 정치 체제를 잘 알게 되고 성리학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일본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본은 주자학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이지요.

율곡: 그런 주자를 선생님은 비판을 했지요?

소라이: 그렇습니다. 주자학이 들어오고 나서 주자학은 막부와 하야시 라잔 집안에서 적극 연구하는 관변학문이 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이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자유스럽게 주자학 관련 서적을 읽었습니다.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요.

율곡: 조선과는 다른 상황이군요.

소라이: 일본 지식인들은 주자학을 알고 나서, 그 뒤에 등장하는 양명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양명학은 상대적으로 일본 지식인들에게 적극 수용되었습니다. 너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보다는 일본의 상황에 더 어울리는 학문이 양명학이었지요. 일본인들의 심성에 양명학이 더 와 닿았지요. 무사들이 주류인 일본에서 단순한 주장을 펼치는 양명학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양명학에 심취한 대표적인 학자가 나카에 도쥬(中江藤樹, 1608년∼1648년)이지요.

율곡: 조선에서 양명학은 많은 배척을 받았습니다. 퇴계 선생도 적극 비판을 하고 많은 유학자들이 배척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와 달리, 양명학이 점점 더 세력을 떨쳐 명치유신 시기에는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들었습니다.

소라이: 그렇습니다. 만약 양명학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명치유신이 그렇게 빨리 성공했을지도 의문입니다. 양명학도 그렇지만 고학, 그리고 제가 주창한 고문사학도 일본에 전해진 주자학, 양명학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앞서 그런 학문들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학문입니다. 그리고 국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국학은 주자학이 변형된 것이라고 할 정도로, 주자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형성된 학문입니다. 그러니 사실 근대 일본의 형성은 멀리는 조선에서 들어온 성리학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선에서 그런 학문을 들여오지 못했다면 근대 일본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곡: 대단한 사건이었군요. 임진왜란은.

소라이: 그러므로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저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고 전제 조건입니다. 없었으면 모든 것이 설명이 안 되지요.

율곡: 아하, 그렇군요.

율곡의 군정 개혁


율곡의 군정 개혁

 

소라이: 그럼 군대와 관련된 선생님의 개혁안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아무래도 군대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사, 즉 사무라이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지요. 선생님의 군정개혁안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율곡: ⌈만언봉사(萬言封事)⌋는 1574년에 지어 올렸지요. 상소문입니다. 만자정도 되는 글이기에 그렇게 불립니다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의 일이지요. 당시 저는 우부승지(右副承旨)였습니다.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承政院) 소속이었지요. 만약 우리 임금 선조가 이때부터 저의 제안에 따라 군정(軍政)을 개혁했더라면 임진왜란과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발생하였더라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압록강 부근까지 도망가는 사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조선의 군대에 다음과 같은 4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

소라이: 선생님 개혁안을 보니 역시 선생님은 행정가이십니다. 군사 행정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군인들을 관리하는 장부라든지 군역과 관련된 세금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율곡: 아 그런가요?

소라이: 위에 제시한 4가지 것은 혹시 선생님이 제시하였을 수도 있는 10만 양병설과는 다소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위에 제시한 방안은 소극적인 군사개혁안이라고 한다면 10만 양병설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몇 년 뒤에 쳐들어오게 되는 일본군에 맞서려면 역시 10만 양병설과 같은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지요.

율곡: 그렇습니다만, 만언봉사를 올릴 때는 그런 문제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소라이: 첫 번째 ‘장수들이 군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율곡: 조선의 법에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벼슬을 설치해 놓고 그들이 먹고살 녹봉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밑에 있는 군인들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였습니다. 변방의 장수들이 사병들을 착취하는 폐단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국법이 느슨해지자 그런 폐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탐욕하고 포악한 짓이 점점 더 성행했습니다.

소라이: 구체적으로 그런 폐단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요?

율곡: 사병들 가운데 누가 근무가 힘들다고 생각하여 군복무 대신에 면포(綿布)를 바치고 싶다고 하면 그 위의 장수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위의 사병들도 서로 나서서 면포로 군복무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소라이: 그럼 실지로 근무할 수 있는 군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율곡: 그렇지요. 병역 근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정작 수비를 해야 할 진지에 군인들이 비게 됩니다.

소라이: 그럼 위에서는 그것을 모릅니까?

율곡: 상부에서 조사 나오면 장수들은 다 대처방법이 있습니다.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들여서 가짜로 점호(點呼)를 대신 받게 합니다. 지역을 순시하며 검열하러 나오는 관리는 그 숫자만을 조사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따지지 않습니다.

소라이: 그래서 맨 첫 번째로 장수들이 사병들을 착취한다고 하셨군요.

율곡: 그렇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다음과 같이 건의를 했지요.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장부에 올라 있는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방 장수의 양식으로 넉넉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만약 그 고을의 곡식만으로 부족하면 이웃 고을의 곡식을 거두어서라도 반드시 변방의 장수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소라이: 장수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니 사병을 착취하고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해서 생계가 가능하게 한 뒤에는, 아무래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겠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 다음에 조정에서 법을 엄격하게 정하여, 장수들이 병사들로부터 한 톨의 쌀이라도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변방 군대의 검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검열할 때는 단지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무기 상태를 검열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시험해서, 군사들이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못한지를 가지고 지휘관의 성적을 매겨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전처럼 재물을 받고 병사를 풀어놓아 보냈다가 발각되면 뇌물죄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소라이: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명목상으로만 일시적으로 군인인체 하는 사람들을 잡아낼 수 있겠지요. 그러면 두 번째 제안 즉,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율곡: 그 점은 조선의 군대에서 정말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조정에서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병사들을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근무하게 하지 않습니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리 밖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야 군대 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문에 그곳의 풍토에 익숙지 않아 병에 걸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현지에 있는 장수의 학대에 떨고, 또 그 지방 토박이 병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는 일이 많지요.

또 객지에서 추위와 고통을 겪고 굶주리는 것과 배를 채우는 것도 일정치 않는데, 남쪽지방 출신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서 근무를 서야 하는 경우는 현지의 기후에 적응을 못해 고생이 더욱 심합니다.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빛은 제 색깔이 아닌 경우가 많고, 만약 이들이 적군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북쪽 국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군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온 부산 쪽이나 남해 쪽은 관심을 두지 않으셨는지요?

율곡: 아무래도 조선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병보다는 북쪽 국경지대에서 들어오는 오랑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도 은연중에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소라이: 일본에서 침략해 들어오는 경우는 생각을 못하셨군요. 선생님 글을 읽어보면 황해도 기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곡: 그렇지요, 황해도 기병으로 평안도에 가서 경비 근무를 서는 사람의 경우를 소개했지요. 그런 군역을 대신할 사람 한 명을 보내는 비용이 면포 30필∼40필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면포라면 시골에 사는 백성 몇 가구가 생산해야 하는 양이지요.

소라이: 황해도 기병이 평안도로 가서 근무하는 경우를 설명하셨습니다.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쳐들어 왔을 때, 황해도 기병이 남쪽으로 가서 일본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때 조선의 기병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지요.

율곡: 그렇지요. 저는 실지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상상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기병이 말을 끌고 너무 멀리까지 가서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불합리하다고만 판단을 했지요. 그리고 조선은 인구 분포상 인구가 남쪽이 많고 북쪽이 적어서 군인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라이: 그럼 그 점에 대한 선생님의 개선안은 무엇이었는지요?

율곡: 저는 전략상 요충지에서 경비근무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고을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배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에 그 고을 출신의 병졸이 부족할 경우에는 인근 마을에 배정해서 차출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전략상 요충지에서 복역할 때는 그에게 부과되는 여러 종류의 부역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요충지에서 방비하는 군역만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먼 곳에 와서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순번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하자, 이렇게 제안을 했지요.

소라이: 그럼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셨던 조선의 인구분포하고는 모순되는 이야기인데요.

율곡: 아, 그것은 전체적인 흐름이나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고 세부적으로는 북쪽이라도 각 지역에 자기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구는 있지요. 그 인구를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인구가 적은 곳은 그 지역의 대부분의 인구가 국방에 전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소라이: 선생님의 제안 중에는 역시 활쏘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곡: 예 그렇지요. 국경의 경비를 건의하면서 그런 건의를 했지요.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된다면, 국경의 수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자,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아 화살을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자, 만약에 다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군졸의 경우는 군관(軍官)으로 특별히 임명하자, 그런 제안을 했지요.

소라이: 일본에서 전투에 많이 등장하는 소총, 즉 임진왜란 때 많이 사용했던 조총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셨는지요?

율곡: 조선에도 화승총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활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라…. 일본의 사정은 잘 몰랐습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군사 전략가가 아니고 행정가이시기 때문에 전투에 대해서 그렇게 소상히 아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그리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으셨고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군사 관련 제안을 보고 느낀 점은 선생님이 전쟁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국방의 최고 책임자가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직책에 오래 계시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율곡: 그 때는 제가 이미 몸이 쇠약해져서…

소라이: 조선에서는 관리를 임명할 때 전문성을 중요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전쟁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기술을 배우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다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생각하지요?

율곡: 그렇지요.

소라이: 기술은 배우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전쟁은 전문가들이 하지 않으면 적을 이기기가 어려운 큰 사업이며, 매우 기술적인 사업입니다만.

율곡: 그 점은 동감을 합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건국 이래 기술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또 무인들의 무술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영향을 주어 제가 병조판서에 까지 올라간 것이겠지요.

소라이: 세 번째로 선생님이 제시한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는 점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율곡: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평민 성인 남자, 즉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良人)은 두 가지 부역의 의무를 지니고 지닙니다. 하나는 병역의무인 군역(軍役)이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으로 토목공사나 물자 수송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입니다. 그 중에서 군역과 관련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동호문답⌋(1569년)에서도 지적을 하시고 ⌈만언봉사⌋에서도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 그 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율곡: 그렇지요.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군(正軍, 정병正兵이라 칭하기도 함)·보솔(保率, 정병이 거느리던 병사)·나장(羅將)·조례(皀隸) 등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정식 군인이나 관리가 아닌데 말입니다. 단지 백성일 뿐인데 어떤 자는 1년에 한 번의 당번을 맡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몇 차례나 당번을 맡습니다. 규칙이 없는 것이지요.

소라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군역이군요.

율곡: 그래서 저는 ‘해당 관청이 잘 판단해서 규칙을 정하여 순번이 많은 자는 횟수를 줄이고 적은 자는 늘여야 한다. 모든 부역을 순번대로 번갈아 쉬게 하고 골고루 근무하게 하여 누구는 너무 괴롭고, 누구는 너무 편안한 폐단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도망한 백성들이 다시 모이고, 권세 있는 집안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가, 부역을 피하는 잔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의 양역(良役, 양인들의 부역, 즉 요역과 군역)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례(皁隷)와 나장(羅將)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큰 고역을 치르고 있지요. 사실 관청의 경호나 경비 등 잡일을 하는 조례(皁隷)나 죄인의 압송이나 매질을 담당하는 나장(羅將)은 천인에 속한 사람들이 담당합니다. 일반 평민이 조례나 나장이라는 군역을 맡게 되면 실지로 그 일은 하지 않고 면포만 대신 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향리가 그 일을 주선하면서, 그러니까 다른 천인에게 그 일을 맡기면서 대신 세 사람분의 면포를 받아갑니다.

소라이: 참으로 부조리하군요.

율곡: 그래서 저는 이른바 조례(皁隷)나 나장(羅將) 등은 제각기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이름을 다 폐지하여 모두 보병으로 바꾸라, 그리고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납부하는 면포는 병조(兵曹)에 직접 납부하게 하고, 병조에서는 각 관청에서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지급하게 하라, 그러면 폐단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국가에서 직접 행정관청의 말단 요원을 관리하는 것이지요.

소라이: 그런 부조리는 일본에서도 조금은 존재합니다. 아무래도 근대식의 관료시스템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곡: 마지막으로 네 번째,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라는 항목을 소개하지요.

소라이: 예, 군인들의 관리와 관련된 사항이군요.

율곡: 1573년경에 조정에서 20여년 만에 다시 군적(軍籍)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의 숫자가 20년 전보다 적고, 병역 의무자(閒丁)의 숫자 또한 매우 적었습니다. 실지로 군인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소라이: 왜 군졸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었을까요?

율곡: 결국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이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그만큼 조선의 경제적인 상황이 위급해진 것이지요. 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텅 빌 형세였습니다. 그런데 관청에서 군적을 만들 때 군인의 숫자를 줄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그만큼의 군인이 있어야하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외부에서 적군이 침략해 들어온다면 반드시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숫자에 현실의 장정이 부족한 것이지요.

소라이: 그럼 인구가 줄어든 것인가요?

율곡: 그렇습니다. 연좌제라는 나쁜 제도 때문에 농촌 마을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일족절린(一族切鄰)의 폐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여기에 세금 때문에 도망친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럼 그 사람 때문에 관리들은 그 친척과 이웃에게 그의 세금을 거둡니다. 그럼 그 친척과 이웃이 감당할 수 없게 되지요. 그럼 그들이 또 도망칩니다. 그러면 관리들은 다시 그 친척의 친척과 이웃의 이웃에게 도망친 사람들의 세금을 부담시킵니다.

소라이: 이른바 연좌제라는 것이지요. 일본에도 그런 제도가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염려하여 반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율곡: 그렇게 한 사람이 도망치면 재앙이 천 가구에까지 파급되어 그 형세는 갈수록 심해져 종국에는 백성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10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10가구도 없고, 작년에는 1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게 됩니다. 마을이 쓸쓸해지고 민가의 밥 짓는 연기가 아득히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을이 하나둘 사라진 것이지요.

소라이: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선생님의 해법은 무엇인지요?

율곡: 백성들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모두가 절박하여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간사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생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기꺼이 선택하겠습니까? 만약 일족절린(一族切鄰)의 관습으로 피해를 당할 근심이 없고 자신이 자신의 군역만 책임지게 된다면, 백성들이 삶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신의 생업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동호문답⌋)

그래서 저는 정확한 군적(軍籍)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소라이: 그것은 당연한 논리이지요.

율곡: 예, 군적을 만드는 일을 실제의 군인 수를 확보하는데 힘써야지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병역 의무자라고 해도 15세가 안된 소년들은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해당하는 나이가 되면 군적에 편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품팔이나 거지는 군적에서 삭제하라고 제안했습니다.(⌈만언봉사⌋)

소라이: ⌈동호문답⌋에서도 그러한 주장을 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율곡: 예, 그렇습니다. 관청에서 가끔 인구조사를 하여 군적을 만드는데 그 군적을 허위로 사병수를 부풀려 만든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지요. 백성들이 너무 곤궁하여 각 지방의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군적에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관청에서는 허위로 사병을 늘린 뒤에, 그런 가짜 사병들의 몫에 해당하는 면포를 그 주변 친척들에게 부과하여 재물을 착취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실지로 전쟁이 나서 급하게 군대라도 출동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누가 전쟁에 나서겠습니까? 사람이 없는데. 그동안 대신 면포를 내주던 친척들이 창을 메고 나서지 못할 것이고, 군포로 받은 면포를 가지고도 결국은 사람이 없어 사병을 모집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허위 장부를 만들어 백성들이 피해를 받게 합니까?

소라이: 그럼 선생님이 ⌈동호문답⌋에서 제시한 개혁안은 무엇인지요?

율곡: 예, 각 고을에 명령을 내려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군사에 충당하고, 장부에 올라있는데도 입대하지 않은 인원을 모두 차출해 정규군에 입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담당한 관리가 그 사무를 총괄하여 실제의 수효를 파악하게 되면, 군적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지 않더라도 군적은 이미 완성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실제 숫자만 기록하게 하고 허위 명단은 다 지워버려야 한다고 했지요.

소라이: 만약 그렇게 해서도 실지로 필요한 병사들이 부족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율곡: 만약 병사들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자신의 차례가 되어 교대 근무를 하러 들어가는 병사들의 수를 줄여야 하지요.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큰 지장이 없는 곳의 군인들 수를 줄이면 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경우에는 남쪽 지방에서 겨울철에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들의 수를 적절히 줄이자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래도 부족할 경우에는 면포를 바쳐 병역을 면제받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군사적 요충지를 방비하는 곳의 군인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라이: 그렇지요. 적은 수의 장정에 맞추어 변방의 수비를 조정해 나가야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역시 남쪽에서 들어오는 적, 즉 일본 쪽의 침략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병사들이 부족하면 남쪽 지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수를 줄일 생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비록 겨울철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하셨지만 선생님의 머릿속에는 북쪽 변경의 수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하.

조선 사회


조선 사회

 

율곡: 그렇기는 하지요. 그것 말고도 당시는 소위 동인들이 임금 곁에 있어서 저에 대한 시기와 모함이 심했지요. 제 말년이 순탄치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 있었더라면 저에게 글을 배운 정여립이 난을 일으킬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가 난을 일으켰을 리가 없고 저를 따르던 서인들이 그렇게 몰고 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소라이: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인, 동인이라는 말도 생소합니다.

율곡: 제가 조정에서 활동하던 때에 붕당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서인, 동인 이렇게요. 서인이란 1575년경 일겁니다. 그동안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와 낙향하여 지방에서 유지가 되거나 글을 읽는 선비들을 지칭하는 사림파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제외한 젊은 관료들이 두 파로 나뉘어 경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쪽은 동인이라 하고 다른 한 쪽은 서인이라 칭했지요. 동인은 비교적 강하게 훈구파나 사림파를 비판하고 서인은 비교적 온건했습니다. 서인파에 속한 사람들은 기존의 권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요.

소라이: 아 그렇습니까?

율곡: 서인들의 중심에 심의겸이라는 인물이 있었으며 저와 제 친구, 그리고 정철도 서인들의 주동자라는 의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들과 가까이하기는 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을 후회하고 붕당 자체를 비판했습니다. 임금에게는 붕당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시라고 건의도 많이 했습니다.

소라이: 그런 배경으로 정여립의 사건이 발생했군요.

율곡: 1582년에 저는 병조판서로 임명된 직후에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직을 물러나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동인들은 저를 계속 비난하고 공격을 했지요. 하지만 저는 서인의 대표로 있는 심의겸을 비판하고 당쟁의 갈등을 없애려고 노력을 했지요. 친한 서인 쪽 지인들에게 여러 모로 호소도 하고 부탁도 하였지만, 이미 동인들과 서인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습니다. 동인들은 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이 더욱 심해졌고요.

소라이: 동인과 서인 사이에 끼여서 곤욕을 치루셨군요.

율곡: 정여립은 그 미묘한 시기인 1583년에 이조전랑 후보가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이조판서였습니다. 그리고 정여립은 저의 제자이기도 했으니 저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저는 그의 임명을 반대했습니다. 그 사람은 좀 과격한 면이 있었지요.

소라이: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은 병세가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셨지요.

율곡: 그렇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정여립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死, 1589년)라고 부릅니다. 정여립은 다소 과격한 성격이라 저는 그가 큰 직책을 맡는 일을 반대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원한을 산 것 같습니다. 그는 원래 저와 가깝게 지내다 나중에 멀어졌습니다. 그는 제가 가깝게 지낸 사람들 중에 서인당 사람들이 많다고 비판을 하기도 했지요. 제가 죽은 뒤에는 더욱 저를 비판하고 서인 쪽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동인 편에 섰지요. 이러한 사실을 선조 임금이 알고 싫어했습니다. 특히 경연의 자리에서 저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사실이 임금의 마음을 거슬려 그가 곤욕을 치뤘습니다.

소라이: 그랬군요. 그래서 그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당시 동인들 중에는 호남 사람들도 많았는데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가 거기에서 지냈습니다. 나중(1587년)에 그는 호남에 나타난 왜구를 소탕하고 무술을 연마하며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난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지요. 서인들은 또 그것을 계기로 그를 반란자로 낙인찍고 관련자들을 대거 죽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정여립 사건입니다. 관련자들이라고 해도 거의가 다 동인들입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아마도 제가 살아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소라이: 그렇더라도 동인과 서인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편하게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노후를 편안하게 즐길 상황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점점 더 동인, 서인의 경쟁이 치열했을 테니까요.

율곡: 그렇겠지요. 그리고 차츰 일본의 침략 움직임도 심해져서 조정의 생활이 많이 바빴겠지요. 저는 말년에 병조판서를 맡았습니다. 전쟁 준비도 저의 책임이 되었겠지요. 제가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더라도 저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제일 전방에 서야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10년쯤 더 살았더라면, 선생님 말씀대로 예측할 수 없는 재난에 처해 말년에 고생만 하다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소라이: 선생님 연표를 보니 저와 선생님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율곡: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라이: 저는 소위 임진왜란 이후 사람이고, 선생님은 임진왜란 이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분로쿠 전쟁(文禄の役, 1592-1593)이라고 부르고 정유재란을 게이초 전쟁(慶長の役, 1597-1598)이라고 부릅니다만. 선생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사망했고 저는 임진왜란이 모두 끝나고 68년이 지난 뒤에 태어났습니다.

율곡: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올 것이라는 예측은 조정에서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을 파견하여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지요.

소라이: 그랬는데 동인의 보고와 서인의 보고가 달랐다고 들었습니다. 한쪽은 일본이 침략을 해올 것이라고 보고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지요. 1589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조선통신사를 보내기로 조정에서는 결정했지요. 그런데 정여립 사건이 일어난 그 다음해 1590년에야 통신사들을 파견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2년 전입니다. 그리고 1년 뒤에 통신사들이 돌아왔습니다. 통신사 대표로 간 사람은 황윤길로 서인쪽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서 반드시 침략을 해올 것이라고 보고를 하였지요. 그러나 부대표로 간 통신사는 일본이 침략을 해오지 않을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렇게 똑똑한 인물이 못되고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렇게 보고한 부대표는 김성일로 동인 쪽 사람입니다. 이렇게 의견이 나뉘면서 조정은 동인쪽 말만을 믿고 전쟁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지요.

소라이: 일본은 사실 오랫동안 조선 침략을 준비했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활동한 전국시대(1467-1603) 전체가 사실은 전쟁 준비 시기나 마찬가지였지요. 일본 전체가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전쟁 연습을 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미리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시고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10만양병설 말씀이지요? 요즘은 그것이 제 주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의 일이라 잘 모르겠고요. 하하. 어쨌거나 저는 말년에 국방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조정에 군정의 개혁과 혹시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