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의 군정 개혁


율곡의 군정 개혁

 

소라이: 그럼 군대와 관련된 선생님의 개혁안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아무래도 군대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사, 즉 사무라이를 선망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지요. 선생님의 군정개혁안이 가장 흥미롭습니다.

율곡: ⌈만언봉사(萬言封事)⌋는 1574년에 지어 올렸지요. 상소문입니다. 만자정도 되는 글이기에 그렇게 불립니다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의 일이지요. 당시 저는 우부승지(右副承旨)였습니다.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承政院) 소속이었지요. 만약 우리 임금 선조가 이때부터 저의 제안에 따라 군정(軍政)을 개혁했더라면 임진왜란과 같은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사 발생하였더라도 경복궁이 불타고 임금이 압록강 부근까지 도망가는 사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조선의 군대에 다음과 같은 4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1) 장수들이 병사들을 착취한다.
2)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
3)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
4)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

소라이: 선생님 개혁안을 보니 역시 선생님은 행정가이십니다. 군사 행정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군인들을 관리하는 장부라든지 군역과 관련된 세금에 관심이 있으셨군요.

율곡: 아 그런가요?

소라이: 위에 제시한 4가지 것은 혹시 선생님이 제시하였을 수도 있는 10만 양병설과는 다소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위에 제시한 방안은 소극적인 군사개혁안이라고 한다면 10만 양병설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몇 년 뒤에 쳐들어오게 되는 일본군에 맞서려면 역시 10만 양병설과 같은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지요.

율곡: 그렇습니다만, 만언봉사를 올릴 때는 그런 문제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소라이: 첫 번째 ‘장수들이 군인들을 착취한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율곡: 조선의 법에는 병사(兵使)·수사(水使)·첨사(僉使)·만호(萬戶)·권관(權管) 등의 벼슬을 설치해 놓고 그들이 먹고살 녹봉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밑에 있는 군인들을 통하여 생계를 해결하였습니다. 변방의 장수들이 사병들을 착취하는 폐단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지요. 그리고 국법이 느슨해지자 그런 폐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탐욕하고 포악한 짓이 점점 더 성행했습니다.

소라이: 구체적으로 그런 폐단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요?

율곡: 사병들 가운데 누가 근무가 힘들다고 생각하여 군복무 대신에 면포(綿布)를 바치고 싶다고 하면 그 위의 장수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허락합니다. 그것을 보고 주위의 사병들도 서로 나서서 면포로 군복무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소라이: 그럼 실지로 근무할 수 있는 군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데…

율곡: 그렇지요. 병역 근무를 면제받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정작 수비를 해야 할 진지에 군인들이 비게 됩니다.

소라이: 그럼 위에서는 그것을 모릅니까?

율곡: 상부에서 조사 나오면 장수들은 다 대처방법이 있습니다. 근처에 사는 백성들을 불러들여서 가짜로 점호(點呼)를 대신 받게 합니다. 지역을 순시하며 검열하러 나오는 관리는 그 숫자만을 조사합니다. 진짜와 가짜를 따지지 않습니다.

소라이: 그래서 맨 첫 번째로 장수들이 사병들을 착취한다고 하셨군요.

율곡: 그렇지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다음과 같이 건의를 했지요.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옛 제도를 개혁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모든 병영(兵營)·수영(水營)·진(鎭)·보(堡)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고을의 장부에 올라 있는 것 이외의 곡식을 적절히 헤아려 변방 장수의 양식으로 넉넉하게 제공해야 합니다. 만약 그 고을의 곡식만으로 부족하면 이웃 고을의 곡식을 거두어서라도 반드시 변방의 장수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소라이: 장수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니 사병을 착취하고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해서 생계가 가능하게 한 뒤에는, 아무래도 그런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겠지요.

율곡: 그렇지요. 그런 다음에 조정에서 법을 엄격하게 정하여, 장수들이 병사들로부터 한 톨의 쌀이라도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변방 군대의 검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개선책을 제시했다.

“검열할 때는 단지 군사들을 호명하여 부재자의 유무를 조사하는 일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무기 상태를 검열하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의 무예를 시험해서, 군사들이 훈련이 잘되어 있는지 못한지를 가지고 지휘관의 성적을 매겨 보고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전처럼 재물을 받고 병사를 풀어놓아 보냈다가 발각되면 뇌물죄로 다스리게 하십시오.”

소라이: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명목상으로만 일시적으로 군인인체 하는 사람들을 잡아낼 수 있겠지요. 그러면 두 번째 제안 즉, ‘병사를 먼 곳으로 보내 근무시킨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율곡: 그 점은 조선의 군대에서 정말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조정에서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의 병사들을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 근무하게 하지 않습니다. 가는 데 며칠이 걸리는 곳에 보내기도 하고, 혹은 천리 밖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야 군대 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때문에 그곳의 풍토에 익숙지 않아 병에 걸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현지에 있는 장수의 학대에 떨고, 또 그 지방 토박이 병사들의 횡포에 곤욕을 치르는 일이 많지요.

또 객지에서 추위와 고통을 겪고 굶주리는 것과 배를 채우는 것도 일정치 않는데, 남쪽지방 출신 군인으로서 북쪽 국경에서 근무를 서야 하는 경우는 현지의 기후에 적응을 못해 고생이 더욱 심합니다. 여위고 병들어 몸도 가누지 못하여 얼굴빛은 제 색깔이 아닌 경우가 많고, 만약 이들이 적군을 만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북쪽 국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군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쳐들어온 부산 쪽이나 남해 쪽은 관심을 두지 않으셨는지요?

율곡: 아무래도 조선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병보다는 북쪽 국경지대에서 들어오는 오랑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저도 은연중에 그런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소라이: 일본에서 침략해 들어오는 경우는 생각을 못하셨군요. 선생님 글을 읽어보면 황해도 기병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곡: 그렇지요, 황해도 기병으로 평안도에 가서 경비 근무를 서는 사람의 경우를 소개했지요. 그런 군역을 대신할 사람 한 명을 보내는 비용이 면포 30필∼40필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면포라면 시골에 사는 백성 몇 가구가 생산해야 하는 양이지요.

소라이: 황해도 기병이 평안도로 가서 근무하는 경우를 설명하셨습니다. 일본군이 임진왜란 때, 쳐들어 왔을 때, 황해도 기병이 남쪽으로 가서 일본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 때 조선의 기병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지요.

율곡: 그렇지요. 저는 실지 전쟁을 해보지 않아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를 상상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기병이 말을 끌고 너무 멀리까지 가서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불합리하다고만 판단을 했지요. 그리고 조선은 인구 분포상 인구가 남쪽이 많고 북쪽이 적어서 군인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라이: 그럼 그 점에 대한 선생님의 개선안은 무엇이었는지요?

율곡: 저는 전략상 요충지에서 경비근무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 고을 출신의 병사들을 모아서 배치를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만약에 그 고을 출신의 병졸이 부족할 경우에는 인근 마을에 배정해서 차출해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전략상 요충지에서 복역할 때는 그에게 부과되는 여러 종류의 부역을 모두 폐지하고, 오직 요충지에서 방비하는 군역만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먼 곳에 와서 부역하는 수고로움이 없도록 하는 한편, 순번을 나누어 번갈아 가면서 쉬도록 하자, 이렇게 제안을 했지요.

소라이: 그럼 선생님이 아까 말씀하셨던 조선의 인구분포하고는 모순되는 이야기인데요.

율곡: 아, 그것은 전체적인 흐름이나 경향이 그렇다는 것이고 세부적으로는 북쪽이라도 각 지역에 자기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구는 있지요. 그 인구를 활용하자는 것이지요. 물론 인구가 적은 곳은 그 지역의 대부분의 인구가 국방에 전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소라이: 선생님의 제안 중에는 역시 활쏘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곡: 예 그렇지요. 국경의 경비를 건의하면서 그런 건의를 했지요. 만약 국경의 경비가 허술해질까 걱정된다면, 국경의 수령들에게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활쏘기를 익히게 하자, 그리고 3개월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아 화살을 많이 적중시키는 자는 상을 후하게 주고, 두 번 일등을 차지한 자는 그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 주자, 만약에 다섯 번이나 일등을 차지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군졸의 경우는 군관(軍官)으로 특별히 임명하자, 그런 제안을 했지요.

소라이: 일본에서 전투에 많이 등장하는 소총, 즉 임진왜란 때 많이 사용했던 조총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셨는지요?

율곡: 조선에도 화승총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활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라…. 일본의 사정은 잘 몰랐습니다.

소라이: 선생님은 군사 전략가가 아니고 행정가이시기 때문에 전투에 대해서 그렇게 소상히 아실 필요는 없었겠지요. 그리고 알아야 할 필요도 없으셨고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생님의 군사 관련 제안을 보고 느낀 점은 선생님이 전쟁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점이 크게 느껴집니다. 선생님이 국방의 최고 책임자가 되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직책에 오래 계시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율곡: 그 때는 제가 이미 몸이 쇠약해져서…

소라이: 조선에서는 관리를 임명할 때 전문성을 중요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리학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전쟁의 전문가가 될 수 있고, 기술을 배우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다고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생각하지요?

율곡: 그렇지요.

소라이: 기술은 배우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전쟁은 전문가들이 하지 않으면 적을 이기기가 어려운 큰 사업이며, 매우 기술적인 사업입니다만.

율곡: 그 점은 동감을 합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건국 이래 기술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또 무인들의 무술을 크게 중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영향을 주어 제가 병조판서에 까지 올라간 것이겠지요.

소라이: 세 번째로 선생님이 제시한 ‘군역과 관련된 착취가 심하다’는 점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율곡: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평민 성인 남자, 즉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良人)은 두 가지 부역의 의무를 지니고 지닙니다. 하나는 병역의무인 군역(軍役)이고 다른 하나는 일시적으로 토목공사나 물자 수송 등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입니다. 그 중에서 군역과 관련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소라이: 선생님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이전에 ⌈동호문답⌋(1569년)에서도 지적을 하시고 ⌈만언봉사⌋에서도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 그 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율곡: 그렇지요. 조선에서는 이른바 정군(正軍, 정병正兵이라 칭하기도 함)·보솔(保率, 정병이 거느리던 병사)·나장(羅將)·조례(皀隸) 등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정식 군인이나 관리가 아닌데 말입니다. 단지 백성일 뿐인데 어떤 자는 1년에 한 번의 당번을 맡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몇 차례나 당번을 맡습니다. 규칙이 없는 것이지요.

소라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군역이군요.

율곡: 그래서 저는 ‘해당 관청이 잘 판단해서 규칙을 정하여 순번이 많은 자는 횟수를 줄이고 적은 자는 늘여야 한다. 모든 부역을 순번대로 번갈아 쉬게 하고 골고루 근무하게 하여 누구는 너무 괴롭고, 누구는 너무 편안한 폐단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면 도망한 백성들이 다시 모이고, 권세 있는 집안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들어가, 부역을 피하는 잔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서울과 지방의 양역(良役, 양인들의 부역, 즉 요역과 군역)은 그 명목이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례(皁隷)와 나장(羅將)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큰 고역을 치르고 있지요. 사실 관청의 경호나 경비 등 잡일을 하는 조례(皁隷)나 죄인의 압송이나 매질을 담당하는 나장(羅將)은 천인에 속한 사람들이 담당합니다. 일반 평민이 조례나 나장이라는 군역을 맡게 되면 실지로 그 일은 하지 않고 면포만 대신 냅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향리가 그 일을 주선하면서, 그러니까 다른 천인에게 그 일을 맡기면서 대신 세 사람분의 면포를 받아갑니다.

소라이: 참으로 부조리하군요.

율곡: 그래서 저는 이른바 조례(皁隷)나 나장(羅將) 등은 제각기 소속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러한 이름을 다 폐지하여 모두 보병으로 바꾸라, 그리고 군역을 면제받는 대신 납부하는 면포는 병조(兵曹)에 직접 납부하게 하고, 병조에서는 각 관청에서 부역을 치르는 사람의 수를 헤아려 면포를 지급하게 하라, 그러면 폐단이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국가에서 직접 행정관청의 말단 요원을 관리하는 것이지요.

소라이: 그런 부조리는 일본에서도 조금은 존재합니다. 아무래도 근대식의 관료시스템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율곡: 마지막으로 네 번째, ‘병사를 관리하는 장부가 엉망이다’라는 항목을 소개하지요.

소라이: 예, 군인들의 관리와 관련된 사항이군요.

율곡: 1573년경에 조정에서 20여년 만에 다시 군적(軍籍)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의 숫자가 20년 전보다 적고, 병역 의무자(閒丁)의 숫자 또한 매우 적었습니다. 실지로 군인들의 숫자가 많이 줄어든 것입니다.

소라이: 왜 군졸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었을까요?

율곡: 결국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이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그만큼 조선의 경제적인 상황이 위급해진 것이지요. 급히 구제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텅 빌 형세였습니다. 그런데 관청에서 군적을 만들 때 군인의 숫자를 줄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그만큼의 군인이 있어야하기 때문이지요. 만약에 외부에서 적군이 침략해 들어온다면 반드시 그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숫자에 현실의 장정이 부족한 것이지요.

소라이: 그럼 인구가 줄어든 것인가요?

율곡: 그렇습니다. 연좌제라는 나쁜 제도 때문에 농촌 마을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일족절린(一族切鄰)의 폐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여기에 세금 때문에 도망친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럼 그 사람 때문에 관리들은 그 친척과 이웃에게 그의 세금을 거둡니다. 그럼 그 친척과 이웃이 감당할 수 없게 되지요. 그럼 그들이 또 도망칩니다. 그러면 관리들은 다시 그 친척의 친척과 이웃의 이웃에게 도망친 사람들의 세금을 부담시킵니다.

소라이: 이른바 연좌제라는 것이지요. 일본에도 그런 제도가 있습니다. 저도 그것을 염려하여 반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율곡: 그렇게 한 사람이 도망치면 재앙이 천 가구에까지 파급되어 그 형세는 갈수록 심해져 종국에는 백성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10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10가구도 없고, 작년에는 10가구가 되던 마을이 지금은 한 집도 없게 됩니다. 마을이 쓸쓸해지고 민가의 밥 짓는 연기가 아득히 끊어져 그렇지 않은 곳이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마을이 하나둘 사라진 것이지요.

소라이: 그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선생님의 해법은 무엇인지요?

율곡: 백성들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은 모두가 절박하여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간사하다고 할지라도 만약 생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기꺼이 선택하겠습니까? 만약 일족절린(一族切鄰)의 관습으로 피해를 당할 근심이 없고 자신이 자신의 군역만 책임지게 된다면, 백성들이 삶을 편안하게 여기고 자신의 생업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동호문답⌋)

그래서 저는 정확한 군적(軍籍)을 만들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소라이: 그것은 당연한 논리이지요.

율곡: 예, 군적을 만드는 일을 실제의 군인 수를 확보하는데 힘써야지 억지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병역 의무자라고 해도 15세가 안된 소년들은 이름과 나이만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해당하는 나이가 되면 군적에 편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품팔이나 거지는 군적에서 삭제하라고 제안했습니다.(⌈만언봉사⌋)

소라이: ⌈동호문답⌋에서도 그러한 주장을 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율곡: 예, 그렇습니다. 관청에서 가끔 인구조사를 하여 군적을 만드는데 그 군적을 허위로 사병수를 부풀려 만든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지요. 백성들이 너무 곤궁하여 각 지방의 마을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군적에 반영하고 있지 않다고 본 것입니다. 관청에서는 허위로 사병을 늘린 뒤에, 그런 가짜 사병들의 몫에 해당하는 면포를 그 주변 친척들에게 부과하여 재물을 착취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실지로 전쟁이 나서 급하게 군대라도 출동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 누가 전쟁에 나서겠습니까? 사람이 없는데. 그동안 대신 면포를 내주던 친척들이 창을 메고 나서지 못할 것이고, 군포로 받은 면포를 가지고도 결국은 사람이 없어 사병을 모집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허위 장부를 만들어 백성들이 피해를 받게 합니까?

소라이: 그럼 선생님이 ⌈동호문답⌋에서 제시한 개혁안은 무엇인지요?

율곡: 예, 각 고을에 명령을 내려 장부에 올라 있지 않은 장정을 찾아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자라는 군사에 충당하고, 장부에 올라있는데도 입대하지 않은 인원을 모두 차출해 정규군에 입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담당한 관리가 그 사무를 총괄하여 실제의 수효를 파악하게 되면, 군적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지 않더라도 군적은 이미 완성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실제 숫자만 기록하게 하고 허위 명단은 다 지워버려야 한다고 했지요.

소라이: 만약 그렇게 해서도 실지로 필요한 병사들이 부족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율곡: 만약 병사들이 부족하여 여러 곳의 군역에 대응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현재 자신의 차례가 되어 교대 근무를 하러 들어가는 병사들의 수를 줄여야 하지요. 그래도 부족할 때는 방비가 허술해도 큰 지장이 없는 곳의 군인들 수를 줄이면 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경우에는 남쪽 지방에서 겨울철에 요충지를 방비하는 병사들의 수를 적절히 줄이자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래도 부족할 경우에는 면포를 바쳐 병역을 면제받는 보병(步兵)의 수를 반으로 줄여서 군사적 요충지를 방비하는 곳의 군인으로 보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라이: 그렇지요. 적은 수의 장정에 맞추어 변방의 수비를 조정해 나가야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역시 남쪽에서 들어오는 적, 즉 일본 쪽의 침략을 크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은 분명합니다. 병사들이 부족하면 남쪽 지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수를 줄일 생각을 하셨으니 말입니다. 비록 겨울철이라는 조건을 달기는 하셨지만 선생님의 머릿속에는 북쪽 변경의 수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하하.